[태그] 개신교, 초교파, 회개와 개혁, 십일조와 각종 헌금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아니다!
* 원제목: 오늘날 교회의 최초 십일조는 8C초~9C말에 나타난다!
* 부제목: 십일조가 축복이나 저주의 효력을 나타내는 잣대가 되지 못한다!
* 수신자: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돈으로 가르치면서 구약시대를 재연하고
있는 수많은 교회들
♧ 24분 오디오 메시지 url, https://youtu.be/9cqC6dDAUxY
[청각장애우를 위한 한글 텍스트]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 개신교 예수복음 전도자입니다.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폐지하고 각자 자발적인 기부금 형태의 연보를 자신이 취사선택하고 무기명으로 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십일조와 각종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거두는 행위가 간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받으신다는 거짓말을 성경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둘째,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끌어 모아서 구제를 많이 안하기 때문이라든지, 투명하게 교회 재정을 공개하지 않아서 폐지운동을 벌이는 것이 궁극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단순히 돈의 문제. 구제 문제. 교회 재정관리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에서 10절 까지의 다른복음에 해당하는 영적 죄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회개와 개혁 메시지 오늘의 제목은 ‘십일조가 축복이나 저주의 효력을 나타내는 잣대가 되지 못한다!’입니다. 오늘은 신아무개 목사의 메시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서구 신학이 한국 신학보다 앞서 있슴은 누구도 부인 못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나라들의 십일조관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홀랜드 국가는 십일조및 각종 헌금을 일절 철폐하고 교인들의 각출로 교회를 운영해 갔고. 스웨덴은 교회세에 해당하는 세금형태였으나, 2000년도에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2000년도에 폐지했고, 스페인은 1841년에 폐지했지요. 이탈리아는 세금형태로 0.8%를 받아 그것을 일정 기준에 의한 비율대로 나누고,
핀란드는 시에 따라 다르지만 교회세라는 세금형태로 1%에서 2.25%까지 내게 했습니다.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들도 각각 폐지했으며, 스위스 는 공식적으로 십일조 걷는 곳은 없고, 일부 주에서만 2.3%까지 세금형태로 거두고 있습니다. 아일랜드는 1869년에 폐지했고, 오스트리아는 국가에서 걷는 교회세라는 세금형태로 자기 수입의 1%만 내고 있습니다. 덴마크는 시에 따라 차이가 조금 있지만, 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인 교회세로 1%만 내고 있고,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서 1789년과 1790년에 걸쳐 모두 폐지되었고, 영국에서는 1648년과 1688년에 모두 폐지했습니다. 미국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 원칙하에 입각하여 교회세와 강제적인 십일조를 걷지 않고 있고, 독일에서는 1807년에 폐지했습니다.
지금까지 열거한 나라들의 신학자들은 바보 멍청이여서 십일조를 폐지 했겠느냐? 라는 생각을 한국교회는 지금이라도 할 수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는 과거에 자기가 철저하게 믿어왔던 행위의 십일조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는 심정을 글로서 서술하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저는 과거에 전형적인 순종주의자이었습니다. 저도 천성이 순종적이어서 목회도 가능한 선배들이 하라는 대로 했고, 특히 군목으로 활동할 때는 독특한 군대문화에 맞게 교회를 운영해 나갔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군목 세미나에 초청되어 오는 강사들 대부분이 이른바 대교회의 ‘스타급’ 목회자들이었던 관계로, 저는 그 분들이 가르치고 조언하는 대로 목회를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느 강사가 새벽기도로 목회의 승부를 걸었다고 하면
저도 즉시 그 일을 실행했고, 주일 공예배 시간에 통성기도만 시켜도 교회가 부흥된다고 역설하는 어느 강사의 말에 감동을 받고는 즉시 순종하기도 했습니다. 심방이면 심방, 금식이면 금식, 성경공부면 성경공부, 기도면 기도.. 그렇게 했었지요.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분야는 다름아닌 “십일조”였습니다. 다른 목회자들도 다 그러하듯이 저도 월 20만원 사례비를 받던 전도사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빼먹은 적이 없었고, 군대에서 목회할 때는 십의 2내지 십의 3조뿐 아니라 매주 감사헌금도 작정하여 드리면서, 순종의 대명사가 된 것은 모두 강단에서 선포된 선배 목회자들의 말씀에 근거한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해였던 것쯤으로만 기억합니다만, 지금은 원로가 되신 어느 서울 강남지역 대교회 담임목회자께서 쓰신 설교집을 읽다가 저는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는 말라기 3장 8절로 12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도둑놈으로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욱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라고 역설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성공적인 목회의 푯대로 까지 여긴 적이 있었던, 그 분의 인상 깊은 설교에 도전을 받은 저는, 즉시 십일조를 주제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는 강단에서 ‘돈’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은 저였으나 우리 교인들을 도둑놈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나’ 싶어서 용기를 내어 입에 불을 뿜었던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실 것’이라는 말라기 말씀! 그리고, 십일조 한 번 떼어 먹었더니 네 배씩이나 손해를 봤다는 어느 목회자의 간증!
십일조로 사업이 번창해졌다는 어느 기업인의 간증! 오랫동안 자녀를 보지 못했는데 십일조를 하면서 작정 기도한 후에 쌍둥이를 얻었다는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고, ‘십일조 했는데 물질적으로 손해를 본 사람이 있다면 나중에 저한테 오세요. 제가 다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확신에 차서 설교하고 가르친 덕분인지, 저는 대체로 어려운 군대교회에서 11년간 목회하면서도 물질 때문에 그다지 어려움을 겪어본 기억이 없는 듯합니다. 오히려, 인근 학교에 교회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불한 적도 있고, 구제 사업에도 적잖은 일익을 감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넉넉한 교회 재정 탓에 ‘원 없이’ 활동해 본 기억도 많이 남아 있는 것같습니다. 두 번째, 런던에서의 충격입니다.
런던으로 건너 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퇴직금과 기타 수입으로 마련한 3백 만원의 십일조를 어느 지인께서 개척하신 교회에 기쁜 마음으로 드린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십일조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소신과 확신에 찼었고, 십 수년 동안 몸소 실천한 바 있는 신앙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셈이지요. 하지만, 영국교회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저는 뜻하지 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돈은 이미 개척교회에다 드린 십일조를 뺀 나머지였으므로 한동안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수입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에, 제가 재정을 담당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십일조 봉투를 달라고 요청하자, “십일조 봉투는 따로 없는 데요”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교회 성도들은 십일조 안합니까?” 라고 물으니까,
“몇몇 하는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하지 않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과 대화하면서 가졌던 저의 생각은 ‘도대체 십일조를 안 하다니! 무슨 신앙이 이 모양이야? 이러니, 영국 교회가 죽어간다는 말이 나오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십일조도 가르치지 않는 진보적인 ‘마틴’ 목사 밑에서 내가 무슨 신앙을 배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교회를 옮길까? 라는 고민을 심각하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영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학교 중의 하나인 런던 신학교에서 수학할 때였습니다. 그 신학교는 ‘마틴 로이드 존스’가 설교자 양성을 위해 설립한 2년 과정의 신학교인데, 영국에서는 어쩌면 가장 보수적인 분위기의 신학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날, 이 학교 학장이신 ‘필립 입슨’께서 강의하시는
구약학 시간에 뜻밖에도 십일조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지요. 장로교 합동측 소속의 어느 한국인 목사가 십일조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그처럼 보수적이고 평소에 자상하면서 친절하신 그 학장께서 다소 근엄한 얼굴로 ‘한국교회는 십일조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비성서적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인데, 십일조 보다 더한 것도 드릴 수 있어야 해요. 우리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이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한국교회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분이었습니다. 충격에 휩싸인 저는 수업이 끝나고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나이젤’ 이라는 매우 모범적인 영국인 학생에게 ‘왜 당신들은 십일조 안 합니까?‘라고 물으니, ’십일조는 율법 시대에 행해진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의무적으로 행할 이유가 없어진 때문이지요.‘ 라고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막 신학에 입문한 새내기 젊은이였는데 말입니다. 제가 14년간 목회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던 십일조! ‘하나님께 좀 더 드려야 하는데 하면서 언제나 올려서 넉넉히 드렸던 그 십일조! 하나님께는 헌 것이 아닌 새 것으로 드려야 한다는 어느 교수의 조언을 쫒아, 은행에 근무 중인 친구에게 부탁해서 신권으로 교환하기까지 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도대체 누구 말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교회들은 더 이상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까지 하며 시행하고 있지 않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까지 가르치고 있으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한단 말인가!’ 제가 그 때 겪었던 정신적 충격은 말로 설명하기가 곤란할 지경이었습니다. 내 신앙의 터전이 뿌리 채 뽑혀나갈 듯이 심하게 영적인 몸살을 앓았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세 번째, 십일조에 대한 사실을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고 여러 방면으로 자료를 찾으니 역시 한국과 영국 사이에는 논리에서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논문들은 여전히 십일조를 유지 보존하는 내용인 반면에 영국과 미국 학자들이 쓴 글들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쟁점을 다루어 보는 것이 유익할 듯싶습니다. 우선, 한국에서 제시하고 있는 십일조의 근거를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의 근거로는, 창세기 14장 18절 19절 20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에게 드린 십일조와, 창세기 28장 20절 21절 22절에 나오는 야곱의 서원과 십일조,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성구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언급이 없다가 아모스 4장 4절에 잠시 언급이 되는 구절과,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 느헤미야와 말라기 시대에 다시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가장 빈번히 가르치고 설교하는 본문은 "말라기" 입니다. 말라기는 부흥회. 각종 축복성회. 헌신예배. 간증 때에 가장 널리 인용되고 사랑받는 본문이기도 하며, 부흥사들의 부흥회 최대 메뉴가 되기도 합니다. 이 말라기를 들으면, 십일조하지 않는 교인들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고 믿음없는 신자가 되며, 교회 직분이나 각종 봉사활동 방면에서도 늘 찬밥 신세가 되고 말지요. 십일조 안하는 사람이 장로나 권사 혹은 기관장이 될 수 있습니까?
아니, 전혀 없습니다. 혹시 되었더라도, 큰 소리 칠 입장이 되지 못하는 게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말입니다. 저는 십일조에 대한 한국적 입장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 비교적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들 너무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 거의 언급이 안되거나 소개되고 있지 않은 부분들을 추가로 살펴보려 합니다. 더 이상, 십일조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기 어려운 것들만 핵심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렸다는 십일조는 그 이름만 관련이 있지, 실제로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른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에 의하면 십일조는 반드시 “땅”에서 난 것, 씨나 농작물,
나무에서 난 열매, 가축들 중에서 구별한 것으로 드려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7장 30절에서 33절까지, 민수기 18장 20절에서 32절까지, 신명기 14장 22절에서 29절까지를 참고해 주십시오! 하지만, 멜기세댁에게 드린 아브라함의 것은 자신의 소유에서 거둔 수확물이 아니라 전리품이며, 나머지 10분의 9도 아브라함이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 1회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매달 정기적으로 드리도록 요구되는 십일조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전리품은 율법시대에서 십일조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 창세기 본문의 핵심은 십일조에 있기 보다는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사장 되심에 있다고 봅니다. 제사장은 모두 아론의 반차를 쫒는 레위 족속 중에서 임명되지만 예수님은 레위 족속이 아닌 유다 족속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레위와 무관한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율법을 뛰어 넘어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쫒아 우리의 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을 히브리서 7장에서 확인할 수있습니다. 둘째, 창세기 28장 20절 21절 22절에 나오는 야곱의 십일조 서원 사례 또한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십일조의 근거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소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십일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이 기도를 드린 시점은 자신이 아직 아무런 소유를 가지지 않은 때였고, 그 후 실제로 십일조를 했는지에 대한 성경 기록의 정보도 없습니다. 핵심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한 그가 <만약>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만약> 내가 가는 길을 지키시고, <만약> 먹을 빵과 입을 옷을 주셔서 ‘내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그러면>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되시고,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의 기둥이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신 것 중에서 드리는 것이 십일조이지, 아직 소유하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까지 요구하는 것은 십일조의 원리가 아닌 것입니다. 셋째, 흔히 오해하고 있는 것들 중에는.. 교회가 성전으로, 목회자가 제사장으로, 십일조와 헌금이 제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교회는 율법에 의해서 제사가 행해졌던 구약 성전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사장과 제물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목회자들 중에 레위 지파 출신이 어디에 있기에 그를 제사장처럼 간주하는 것입니까? 더욱이, 가장 쉽게 간과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있는데, 구약시대 이스라엘 성도들은 결단코 ‘돈’을 십일조로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돈은 십일조 품목에 들지 않았던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오직 돈만을 십일조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마치 제물을 드리는 듯한 마음가짐으로 말입니다. 만약, 구약의 좋은 전통을 오늘날에도 계승해야 한다면 구약 성도들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할례’는 왜 시행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다른 수많은 구약적 요소들은 재해석을 통해서 시행하지 않으면서, 유독히 ‘돈’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석도 개입시키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기독교인 중에서 십일조를 한 사례를 신약 복음서에서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의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부단한 투쟁을 한 기록이 사도행전 15장에서 나오지만, 초대교회에서 십일조 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약시대에서 번제, 돌로 쳐죽임. 그리고, 회당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구약적인 십일조도 더이상 필요가 없어 그 근거가 희박합니다. 넷째,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제사가 있던 시절에 십일조는
누구나가 다 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수확을 위한 바구니를 만든 상인,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신는 신발을 만든 사람, 추수 수확을 위해 마차를 만든 목수,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물을 길어 나르도록 물통을 만든 도자기공, 들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외투를 만든 여인들, 임금을 받고 들에서 일한 종들은 십일조 의무에서 면제 받았습니다. 따라서, 목수였던 예수님은 십일조를 하지 않을 수 있었고, 심지어 성전세도 내지 않으셨습니다. 다섯째, 말라기 3장의 핵심은 십일조를 드렸는가? 또는 드리지 않았는가?의 말씀이 아니라,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드림’ 뒤에 있는 마음과 심령 상태인 영적인 태도에 대한 책망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에 해당하는, 위선적이며 형식적인 신앙상태를 꾸짖는 것이 핵심이었지, 십일조 자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말라기가 경고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영적 소경. 절름발이. 병자들이 된, 당시 유대 성도들의 신앙상태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제사인 시편 26편 6절의 기쁨의 제사, 시편 4편 5절의 의의 제사, 시편 107편 22절의 감사와 즐거움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촉구하고자 한 것이 ‘말라기’의 직접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여섯째,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오늘날의 교회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는 십일조는 8세기 말이나 9세기 초에 최초로 나타납니다. A.D. 742년에 출생해서 814년에 별세한 서로마 제국 황제 ‘샤를 마뉴 대제 재임기에 참사회에서 국가법으로 십일조가 제정되었는데, 주교. 성직자. 가난한 자.
건물 유지및 존속을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내용에 변화가 생겼는데, 농산물과 가축이 아닌 것으로 장사한 수입, 점유나 봉급 등에서 발생한 수입을 ‘돈’의 형태로 지불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모든 종류의 소득을 포함하여 십일조를 거두어 들이는 것으로 적용 범위가 확장 되었습니다. 네 번째, 즐겁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연보가 성경적입니다. 연보는 기부금을 말합니다. 저는 정말 오랫동안 십일조의 효력을 의심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일조가 축복이냐? 아니면 저주이냐?의 잣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잘 아는 어느 장로 가정은
자신의 돈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를 정도로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새벽기도, 십일조, 봉사, 충성, 헌신등을 했는데요. 십일조는 출석 교회 뿐만 아니라, 새벽마다 나가는 집 근처 교회에도 드리는 거부였다고 합니다. 그 부부가 물질로 보인 헌신은 한국교회 어디에 내어 놓아도 귀감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장로 부부는 최근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물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건강마저도 치유 불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들의 가정이 겪고 있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은 ‘욥’의 그것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인데, 저는 더이상 십일조의 신화를 의지할 자신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내와 함께 매주 일정한 액수의 연보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필요 때문이지,
저의 유익이나 기복적인 목적으로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구조적 특성상 앞으로 당분간은 십일조를 지속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풍토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럽교회가 걸어간 이 길을 한국 교회도 반드시 걷게 될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니까요. 제가 한동안 이 문제로 혼란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내리게 된 결론은 이러합니다. 첫째, 성서적인 근거가 미약한 십일조 제도를 주술화 혹은 미신화 시키려 하지 말고 교회 구성원들이 정직한 마음과 자세로 재정 문제에 접근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재정을 투명하게 사용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운영하면 굳이 부흥회니 뭐니
하지 않아도 신자들이 기꺼이 참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십일조를 신앙의 척도로 삼거나 직분및 직책 수여의 명목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더이상 십일조를 축복과 저주의 이분법으로 몰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않는다고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영국교회 신자들 중에 남아 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십일조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잘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각자 답변해 보시기 바랍니다. 넷째, 십일조 헌금에 대한 의무감과 사명감을 쇠뇌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영국교회는 재정을 목회자나 주요 직책자들이 임의로 사용할 수 없도록,
매우 엄격한 감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시급히 이런 제도를 도입하여 정착시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들이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 기복신앙이나 주술신앙 혹은 저주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십일조와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까지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범사에 감사하는 심정으로 또한 즐겁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분량을 따라 무기명 연보를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할 수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시각장애우를 위한 오디오는 맨 상단에 있고, 청각장애우를 위한 한글 텍스트는 맨 하단에 있으니, 주변에 가까이 계시는 분들의 친절한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끝까지,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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