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문을 연다는 온전한 십일조는 돈이 아니라, 창조주 예수님 유일신 자신이십니다!
[원제목] 십일조와 예수 그리스도
몇년 전, 모 대형교회에서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교회 정관을 수정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로 인하여 십일조에 대하여 한국교회 내에서 쟁점화 되는 듯 했지만, 실제는 십일조가 교회 재정 충당에 가장 크게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교리가 다른 교회 또는 교단이라 할지라도 십일조 만큼은 결코 이견이 없이, 당연한 헌금이며 성도가 해야 할 의무로 굳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십일조는 돈(헌금)’ 이라는 명제를 당연한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이제는 '시간의 십일조'도 드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에게 있어 십일조에 대한 고민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 고민은 십일조가 성경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 십일조를 어디에 어떻게 내느냐? 라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했는데, 어떤 것이 온전한 것인가? 1원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정확한 액수의 십일조여야 하는가? 직장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은 자기 급여에서 십분의 일을 구분하면 된다지만, 사업자들은 수익의 세전 십일조인가? 세후 십일조인가? 하는 문제를 비롯해서 지금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 꼭 내야 하는지..
아니면, 떠나온 시골 교회가 어려운데 고향 교회에다 하면 안 되는지? 하는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을 한다. 심지어, 시골 교회 교인 중에서는 키우던 개를 팔았는데 개는 율법에 부정하다고 했으니, 개 판돈의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십일조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는 그 저변에는 율법적인 사고방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여러가지 부수적인 문제들을 유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계명으로 받아들이고 살려면
단순히 율법의 조항 뿐만 아니라 더 구체적인 조항들이 따로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율법의 근본적인 문제, 즉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을 통해 나타내신 본질적인 뜻을 생각하지 않고 계명이나 규례로 지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율법을 계속 더 구체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스스로 실족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가지 고민들을 왜 가지게 되었을까?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막무가내로 강조를 한 것이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십일조가 돈 문제로 인식되어 있고,
그것이 곧 복을 받는다는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십일조를 하면 물질의 복을 받고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보니 고민들이 따라 올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에만 머무르지 말고 성경 전체적인 면에서 십일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가장 나타내고 싶어하시고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십일조' 라는 말은 십분의 일. 열 곧 하나. 열번째 것의 하나라는 것이다.
우선, 십일조에 대한 오해는 “십일조”(十一條) )라고 번역된 우리 말 자체가 세금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더더욱 의무에 대한 생각을 더 크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십일조”란 히브리어 원어에서 “마아세르”(maaser)라고 하는데 ‘십분의 일’, 또는 ‘열 곧 하나’, ‘열 번째 것의 하나’라는 의미이다. ‘마’는 ‘그릇’, ‘용기’ 또는 ‘장소’를 의미하는 접두어이며 ‘아세르’는 열을 의미한다. 즉, “마아세르”라는 말의 언어적 의미는 ‘열이라는 온전함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마아세르’를 번역한 헬라어는 “아포데카토오”(apodekatoo) 라는 말인데 ‘아포’(온전한)와 ‘데카테’(십, 열 번째)라는 말이 합성된 단어이다. 즉, 마아세르나 아포데카토오나 단어 자체에서 열이나 열 번째의 의미가 성경에서는 완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완성된 혹은 온전한 열 번째 것이라는 말로 가장 좋은 것, 대표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 생명을 담고 있는 그릇 그것을 열 번째 것이라고 한다.
물론, 언어 자체에 성경적 의미를 다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어 ‘마아세르’와 그 헬라어 번역어인 ‘아포데카토오’라는 말에서 보듯이 조세, 즉 세금의 성격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말로 십일조(十一條)라는 말로 번역되어 마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기에 강제적인 의무가 된 십일조(什一租)라는 세금의 의미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중략)
신약에서의 십일조는 그리스도 예수님 자신이심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누가복음 11:42)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드리는 십일조 품목 중에 왜? 하필 박하와 운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예로 들고 있을까? 구약에서는 토지소산의 십일조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들고 있는데 이 품목에는 박하와 운향, 회향과 근채 같은 것들은 들어 있지 않다. 특히, 향신료로 쓰이는 운향은 자생식물에 속하는 것으로 십일조 대상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논란이 많았던 식물이다.
사실, 그 품목들은 드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그것 조차 십일조를 드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십일조에 집착하고 있는 외식에 대해 비판하신 것이지, 십일조를 권장하신 말씀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말씀은 “율법의 더 중한 바” 라는 말씀이다. 중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바뤼스’(barus)인데 ‘무거운’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무겁다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한다(마태복음 23:4). 즉, 십일조로 인하여 율법의 무거운 짐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상태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 정의, 그 긍휼, 그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말씀에서 문장의 시제이다. 과거완료형이다. 즉, ‘십일조를 행한다고 했었다면 의와 긍휼과 믿음도 버리지 말았어야지’ 라는 말씀이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야고보서 1:18)
실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한 십일조이시며, 그 온전한 십일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그 언약의 말씀으로 살아난 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한 십일조가 되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내고 있는 십일조이다. (http://cafe.daum.net/joosung )
* 본 강론은 2016년 주성가족 여름수련회에서 행하였던 강론를 재정리 한 것이다 *
2018. 10. 19 강론 / 김영대 / 펌출처: http://blog.daum.net/revealer/7699088
끝까지, 1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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