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투     2014.09.08 20:02

 

교회의 악(惡) 십일조

 

 

십일조 바른이해

 

십일조는 분명히 성경적이 아니다.  개혁가들은 말한다. "성경이 앞으로 나간 만큼나가고 성경이 발걸음을 멈추면 같이 멈추라" 고 말이다.

 

[말라기 3장 10절]"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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הביאו את־כל־המעשר אל־בית

뻬이트 엘 함마셀 콜 에트 하비우

 

house-of into the-tithe whole-of *** bring

나의집 십일조 온전한 들여

 

האוצר ויהי טרף בביתי ובחנוני

우베하누니 베비티 쎄레프 웨이히 하오찰

 

indeed-test-me in-house-of-me food that-he-may-be the storage

나를 시험하여 나의집에 양식 있게할지니 창고에

 

נא בזאת אמר יהוה צבאות אם־לא

로 임 치바오트 야웨 오말 바오트 나

 

not if Hosts Yahweh he-says in-this now -

만일 그렇지 아니한--만군의-여호와가 -말한다-그것으로


אפתח לכם את ארבות השמים

하사마임 오레보트 에트 라켐 에페타

 

heavens floodgates ** for-you I-throw-open

하늘들 문 너희를 위해 붓다.

 

והריקתי לכם ברכה עד־בלי־די׃

디 베리 아드 보라카 라켐 와하리코티

 

room-enough not until blessing upon-you and-I-pour-out

풍족히 아니하나 까지 복을 너희위에 내가 부은다

 

성경에서 시험 이란 용어 "test"는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peirasmoV , (페이라조)peirazo) 인데, 여기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1. 시련을 통한 연단이라는 의미의 trial 은 히브리어로 (차라프 צרפ ,헬라어로 (귐나시아gumnasia 히 5:14, 12:1 ) 이고,

 

2.시험하여 미혹에 빠뜨린다는 의미의 temptation 은(히브리어로 나싸 נסה, 헬라어로는 (아파테스)apathV, 아파타오, (엡 4:22, 히 3:13) 이며,

 

3.분변하다, 증명하다라는 의미의 prove 은 히브리어 (빠한) בחנ ,

헬라어로는 (도키마조)dokimazw , (눅 12:56, 고후 8:8, 13:5 ) 이다.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시험은 בחנ'빠한'- "증명하다"이다. 십일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공동체 자체를 유지시켜주는 그들의 신앙행위 표현이다.

 

이 십일조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의 많은 나라 즉 로마,그리이스, 시리아, 카르타고 등에서 행해졌다. 십일조는 종교적 뿐만 아니라 세속적 통치자가 십일조를 받기도 했다.


아마도 본래 신에게 드렸던 십일조를 신격화된 통치자에게 드리게 됨으로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삼상 8:15-17)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궁정관리와 신하들에게줄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의 일을 가져 갈 것이며 너희는 그 종이 될 것이라"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 "왕을 세우면 너희들이 왕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될 것이다."라고 하므로서 십일조가 하나님께가 아니고 왕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됨을 지적하고 있다.

 

(창 14:18-20) 십일조가 성경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으로서, 살렘왕 멜기세댁이 빵과 포도주를가지고 나와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람을 맞아 그에게 축복하니 이에 대해 아브람은전리품중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드리는 장면이다.

 

특히 멜기세덱이 지니고 있는 제사장 직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형으로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에 십일조가 맞춰져 있다.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교적인 의무가 아니라 당대의문화 또는 풍습에 따라 드린 행위이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율법의 명시된 십일조는 땅의 소출과 가축에 한정 되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십일조가 될 수 없다.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후에 십분의 일을 반복해서 드렸다는 언급이 없다.

 

(창 28:20-22) 은 야곱이 하란으로 피난도중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주시고 지켜 주시고 양식과 옷을주시고 나중에 아버지집에 돌아오게하시면 제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그후 야곱이 전에 맹세한 대로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 야곱의 십일조를 바치기를 요구하였다는 것도 전혀 찾을 수 없다.


그 후, 400년이 지나서야 십일조 제도가 모세 율법에 등장하고, 많은 지파들이 땅의 소산을 얻을 수 없는 레위 지파의 생활을 보호하기위해 다른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함께 주어지기 시작하였던것이다.

 

(레위기 27:30-33) 여기엔 곡식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따로 떼어 놓았는데 바치는 사람이 자기 임의대로 선발하지 못하도록 막대기 밑을 통과하는 가축의 열 번째를 바치게 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금으로 20%까지 바치도록 하였다.-땅의 소산과 가축이다.

 

(민수기 18:21-32) 이스라엘 백성이 낸 십일조의 십일조이다.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도 다시 돌려드린다는 표로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아론 제사장에게 돌려 드려야 했다.-농산물에만 한정한다(18:27, 30).

 

(신명기 12:4-19) 백성들은 자신의 이름을 두고 거처를 삼으려고 택하신 그곳으로 찾아가서 거기서 십일조 음식을 먹어야 했다.-본문에서도 십일조는 농산물과 가축에 한정하고,사회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어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신명기 14:22-29, 26:12-15) 십일조를 택하신 그곳에 가서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했다. 3년 차 십일조는 사회보장 복지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로서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들이 해당되었다. 이런 십일조는 성소로 가져가지 않고 자기 마을에서 소비하였다(14:28).-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모든일에 복을 주신다고 했다.

 

레위기에서는 십일조가 곡식과 가축이었다면 민수기와 신명기에서는 밭에서 생산되는 것에 국한했다.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사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의 대체적인 십일조는 레위인만이 찾지하는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성전아닌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각 성읍에 십일조를직접 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였던 것이다.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레위의 제사장들이 독점하는 십일조로 변해갔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배역 행위를 열거하면서 그들이 벧엘에서 제사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기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아모스 4:4)"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그러면서 아모스는 십일조와 관련된 그들의 잘못된 생각과 기복신앙을 꼬집는다.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려보라" 너희가 율법 의식법인 십일조를 통해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 "매 3년마다 드렸던 십일조를 3일에 한 번씩으로 앞당겨 시행 해보라 그러면 더 많은 복을 쌓을곳이 없이 돈 뭉치를 내려 줄 것 아니냐?", 하면서 사람들의 기복적인 신앙을 비웃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제사의식에 참예하는 사람들들은 각자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각자가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본래 구약에서는 말하는 십일조는, 성전 제사를 맡은 레위인, 과부들,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눠먹는 것이었으므로 반듯이 밭의 소출과 가축에서만 드려야 하는 것이었다(레27:30, 신12:17, 14:23, 느13:5, 12). 성전이 너무 먼 경우에는 일단 돈으로 바꾸어 가지고 성전에 와서 그것을 다시 음식물로 바꾸어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다

(신14:24-26).

 

따라서 십일조는 당연히 "먹는것"을 생산해 내는 농민과 목축업자만 낼수있고, 그 외의 다른 직업인들은 십일조를 아예 낼 의무가 없었다.


당연히 목수였던 예수님도, 어부였던 제자들도, 세리마태도 십일조를 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성전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그때는 그 당시 통용하는 돈으로서 "성전세"를 냈다. 이 성전세는 십일조와는 달리 모든 백성이 납부 의무가 있었다(출30:12-15).

 

그래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이 성전세 많큼은 납부하셨던 것이다(마17:27).다시 말하자면 십일조는 구약시대에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족 제사장의 먹거리로서 일종의 음식물에 의한 사회보장제도 의 성격이었기 때문에 따라서 초대교회도 역시 십일조를 전혀 시행하지 않다가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야 교회가 구체적으로 조직화 되면서부터 십일조는 다시 시행하게 됐다.

 

주목할 점은 어둠의 중세 교회조차도 4세기가 돼서야 십일조 제도를 도입했고, 그 후 거의 1000년동안 토지 소출과 가축 에서만 십일조를 거둬들였다.십일조는 분명히 먹거리로만 한정했기 때문에 돈까지 포함시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13세기에 이르러 교회의 극심한 타락과 함께 비로소 십일조 대상이 "먹는것" 을 포함해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 되면서부터 십일조가 엄청난 변질을 가져 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변질된 십일조는 결국 교회의 깊은 수렁의 타락으로 이어졌고(현재 한국교회 타락의 주범과도 같이) 교회 부패의 한계상황으로 이어지면서 세계의 모든 기독교 국가의 교회는 결국에 이 십일조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기에 이르렀다.오로지 십일조 왕국인 한국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래서 세계 교회가 점차 십일조 배척하는 운동이 일어나더니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1789), 세계 교회가 공식적으로 이 십일조제도를 철폐하고 잠시 머뭇거렸던 나머지 교회들도 1848년 이후에는 모두 철폐했다. 더 이상 그 십일조를 가지고 교회가 교인들에 대해 사기 칠수 없다는 것이다.

 

*홀랜드 ............십일조 및 각종 헌금을 일절 철폐하고 교인들의 생활수준의 각자 각출로서 교회를 운영해 갔고.

 

*스웨덴 ............세금형태(교회세)였으나 2000년에 공식적으로 폐지 하였고

 

*스코틀랜드.......2000년 폐지.

 

*스페인 .............1841년 폐지.

 

*이탈리아 ..........세금형태로 0.8% 받아 그것을 교회크기의 비율대로 나누고

 

*핀란드 .............시에 따라 다르지만. 세금형태(교회세)로 1%~2.25% 내고

 

*스위스 .............공식적으로 십일조를 걷는 곳은 없고, 일부 주에서 2.3%까지 세금 형태로 거두고

 

*아일랜드 ..........1869년 폐지.

 

*오스트리아 .......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교회세)로 자기 수입의 1%만 내고

 

*덴마크 .............시에 따라 차이가 조금 있지만, 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교회세)로 1%만 내고

 

*프랑스..............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서 1789∼1790년 폐지되었고, 

 

*영국.................1648년과 1688년에 폐지,

 

*미국 ................종교와 정치의 분리원칙하에 결코 교회세와 강제적인 십일조를 걷지 않고.

 

*독일.................1807년에 폐지 하였고.

 

*멕시코.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들 모두 폐지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는 "이 십일조에 대해" 이들 나라들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분명 십일조가 성경적인 기반위에 있지 않다는 교리적인 합의까지 이뤄냈던 것이다.


이들 나라들의 교단과 신학들이 한국교단과 신학보다 그리고 교리와 학문에서 뒤떨어져서 이렇게 합의에 도달 했겠느냐는 것이다. 세계 기독교 인구 20억명 가운데 한국 기독교인은 불과 860만명으로서 233분의1 뿐이 되질 않는다(정부통계청 발표).

 

특히 한국의 신학자 및 신학교 교수들이나 또는 적지않은 목사들은 대부분 서구나 미국 등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 그 나라들의 교회예배 참석을 통해서 ‘십일조 제도’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  


‘성경 진리보다는 밥 줄이 걸려 있있기 때문에 출회(요12장42절-aposunagwgoV <아포순나가고스>) 당할까봐’ 해당 교단의 하수인 노릇 하며 지내고 있다는 것이 매우 한심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 많큼은 "십일조 왕국" 이라 불릴정도로 십일조 제도가 초교파적으로 정착 되어 있다는게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이 아닐수 없다. 교단과 교단, 교파와 교파 사이에는 교리적으로 조금만 차이가 있어도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싸워대도 어찌 된일인지 이 십일조 많큼은 모두가 한 목소리가 되어 있어 누이좋고 매부좋고 아무런 차이를 보이질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성경말씀이 바로 구약의 말라기 3장8절-10절 말씀이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은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과, 그 말씀 전후의 유기적인 문맥관계를 고려해서 해석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특정 귀절들만을 떼어서 자신의 신앙을 애써 합리화 하는것은 참으로 가소롭다.

 

이곳의 말3:8-10 절의 해석은 느혜미아서 13장 에 자세히 설명해 놨는데 말라기와 느혜미아는 동시대 인물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십일조 도둑은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도둑으로 몰린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빼돌렸기 때문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느헤미야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명령했다.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가져오면 제사장들은 그것들을 받아서 성전옆에 있는 성전 창고에 거둬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 라는 사람이 서로 공모해서 그 성전 창고 바로 옆에, 자기 개인 창고를 만들어 놓고 십일조 및 백성들이 바친 각종 식량과 예물들을 자기가 만들어 놓은 개인 창고로 빼 돌림으로서 결국 그 성전에는 식량이 바닥이 났다.
  
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 할 수 없게 되자 성전 일을 버리고 자기들의 생계를 찾아 도망가는 일이발생하였다. 최초로 제사장에 의한 십일조 도둑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이 내용이 바로 십일조 도둑 사건이다. 내어야 할 십일조를 떼어 먹어서 도둑이 아니라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훔쳐서 도둑사건이 된 것이다.


말 3:8, 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이같이 성경을 바로 해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많은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십일조를 하지 않은 교인들에게 도둑으로 몰아가고 있으니 목회자들의 무지소치의 성경지식 한계점이다.

 

따라서 이제 교회는 목회자 사례비를 비롯한 교회 일절 재정지출문제를 이렇게 비성경적인 십일조를 강조 함으로서 해결 할게 아니라, 구체적인 재정필요 사항들을 교인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동참 할 수 있도록 "연보" 개념을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된다고 본다.

 

바로 바울 사도가 말한 (고후 9장5절)"연보"로서-"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복)을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 하여야 참 연보(복)답고 억지(탐심)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0장8절) "제사와 예물과 전제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십일조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교파들을 보다면 "미국 남부의 오순절", "여호와 증인", "몰몬교", "안식일교", "북미의 worldwide church of god(WCG)" 등이 십일조 매우 열성적인 교파로 속하고 있는데 한번 유심히 살펴 보면 뭔가 공통점(흔히들 보통교회에서 이들을 비정통성 교파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십일조 폐지한 나라들의 교회들도 재정적 어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십일조가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폐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대신 이런 나라들에서는 대부분 기부문화, parachurch운 동이 크게 발달 되어 있어 현실적인 어려움을 대부분 해결한다.

 

다시 말하지만 십일조 교회의 재정적, 현실적인 문제이기전에 성경적 근거 문제인 것이다.성경적으로도 근거가 없고(가장 중요한 이유) 세계 기독교 추세와도 역행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아니 확실한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처음부터 이런 폐지론이 나올 수도 없었고 전 세계 국가들 역시 아직도 십일조를 시행하고 있을었것이다.

 

말라기 3:7-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본문은 십일조 지지자들에 의해 특히 한국교회를 주름잡는 부흥사들에 인용되며 백배,천배,만배 복의 근거까지 제시 한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이 구절이 얼마나 최상의 투자처가 아닌가? 그 누가 골치 아픈 사업을 하겠는가? 자기 재산 십분의 일만 교회에 갖다 바치면 얼마있으면 돈 주체 못할정도로 돈 방석에 앉을텐데. 바보 멍텅구리가 아닌이상 이같은 매력에 그 누가 눈을 감고 만 있겠는가? 돈 벌기 가장 쉬운곳이 교회인데...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얼마나 허풍이었는가를 성경을 좀더 자세히 연구하면 금방 알수가 있다.

 

처음에도 "주"를 달았다시피'시험' 단어를 잘못 이해에서 비롯된다. "시험하다" 원어에는 다음과 같이 몇가지가 있는데, 히브리어 (차라프)צרפ, (나싸)נסה 와  (빠한)בחנ 이다. (차라프)צרפ는 시련을 통한 연단이고 (나싸)נסה는 헬라어 peirazo(페이라조)로서 이는 글자 그대로 '시험하다(test, tempt)' 뜻이고 (빠한)בחנ 은 '마음의 상태를 증명하다'라는 뜻으로 헬라어로는 dokimazo'도키마조'(prove)이다.

 

성경의 다른 모든 여러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할 때 '시험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נסה(나싸)이지만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시험은 בחנ'(빠한)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증명해 보라"는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헬라어 성경은 모두 이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며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말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라고만 번역함으로써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신양성경에서 이 같은 예로 사용된 경우는 고후 13:5인데,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이 말씀에서 '페이라조'와 '도미카조'가 모두 사용되고 있으며 뒤에 나오는 '확증하라' 가 바로 '도미카조', 즉 마음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시험할 수 있으되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다.말라기 3:10의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의 십일조는 많이 바치라는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더러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면 절대로 안된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10절에서도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도 물론 확증하라는 뜻의 '도미카조'가 사용되었으며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나타나는 빛의 열매이다.

 

결국 성경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모두가 마음과 삶으로 입증하고 확증하라는 뜻의 말씀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흥정하고 시험하라고 부추김으로 사용된 경우는 한번도 없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특히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한다면 복은 고사하고 화를 자초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말라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던 백성이 이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관계회복과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흠이 있고 의롭지 못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왔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받지 않으셨지만,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 의로운 제물을 드리실 것이기때문이다(3:3).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열국의 제물도 받으시게 될 것이다.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가 바로 곧 바른 헌물과 제물을 드리는 온전한 제사가 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 본문이 몇구절 있다.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18:12 그리고 히브리서 7:1-10이 유일한 본문들이다.

 

(마 23:23; 눅 11:42; 18:12) "너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러나 이것들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말씀하셨다(23:23).

 

이 말씀은 십일조 지지자들에 의해서 신약 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구약에서와 같이 십일조 실행을 정확하게 말씀심은 찾을수 없다. 마태복음 23장에 언급된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십일조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어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도 중요한 십일조를 했다거나 가르침이 없을까?

 

헬라어 원전을 살펴보면----

 

ouai umin, grammateiV kai farisaioi upokritai, oti

우아이 휘민 그람마테이스 카이 파리사이오이 휘포크리타 호티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because

화 있을찐저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여!외식하는 너희가 십일조를 드리기 때문이다

 

apodekatoute to hduosmon kai to anhqon kai to

아포데카투테 토 헤두스몬 카이 토 아네돈 카이 토

 

ye tithe the mint and the dill and the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kuminon, kai afh kate ta barutera tou nomou thn krisin kai ton

쿠미논 카이 아페 카테 타 바루테라 투 노몬 텐 크리신 카이 톤

 

cummin and ye{haev}left the heavier things of the law,-- j udgment and --

버렸도다 더 중요한바것들인 율법의 의와

 
eleon kai thn pistin tauta de edei poihsai kakeina mh afienai

에레오온 카이 텐 피스틴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아페이나이.

 

-- mercy and --faith but these things it behoved to do and those not to leave

긍휼과 신뢰는 그러나 이것들도 행해야 했으며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했다.

 

poihsai(포이에사이):행하다 . aorist(계속.완료.반복의 뜻을 갗지 않고 단순히 과거 동작을 나타내는시제) 능동부정시제 동사로서 원형 poiew (포이에오)에서 유래했다.

 

afienai(에피에나이): 버리다-현재능동 부정과거 시제로서 원형은 afihmi(에피에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것들 tauta (타우타) -(의와 긍휼과 신뢰)도 행했어야 했고, 저것들 kakeina (카케이나)-(박화와 회향과 근채) 도 행했어야 하는 즉 십일조를 포함하여 율법의 기본정신뿐만 아니라 세부지침에도 충실했어야 했었다는 당위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사가 Koine Greek 부정과거 시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14:22-23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까지 십일조"를 드리라는 장로들의 미쉬나를 정확히 지키기 위해 채소와 박하와 향료의 작은 식물까지 십일조를 엄격하게 지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가장 작은 식물에까지 십일조를 하기를 원한다면 기특한 일이지만 율법의 가장 중요한 즉 사랑, 자비, 정의, 신의 등은 언제나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십일조를 하지 않은 사람들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십일조 준수를 지나칠 정도로 철저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책망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물질에만 집중하고 의와 긍휼과 신뢰는 그들의 관심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의 한국교회에서의 인간의 생명과영혼은 보이지 않고 집회 참석인원 머리수에 비추어 돈만 보이는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운영에 대한 돈은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도 반대로 목적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 현재교회의 실정이다.그 수단을 정당화 해서 가르치는 목회자들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는 이유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먼저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시대가 어느 시점인가를 가장 중요하게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부활 할 때에 율법이 완성 되고 은혜 시대가 열린다고 보면,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때는 구약의 율법 시대 연속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은 아주 당연한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마23:23)본문은 구약시대 에서 말씀 하셨다. 예수님의 구속사역도 아직 완성 되지 않았고 그리고 또한 십일조는 율법의 의식법에 속하고, 성전 예배도 진행 중이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백성들의 십일조를 필요로 했다.

 

구약과 신약의 실제적인 전환점은 그분의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죽으심과,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 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에는 자신을 율법의 규정에 복종하셨으며(갈 4:4), 그분의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은 구약 시대의 문맥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부탁을 하신 것도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십일조 같은 의식법과 관련된 언급들은 신약에서는 확실히 적용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바른 것이다.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모든율법을 심지어 의식법인 십일조까지 다 이루셨기 때문에 바울도 자비량으로만 복음 전했고, 또한 그는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려고 돈을 모으기 위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특히 고린도)에 알리면서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도울 것을 호소하였지만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따를 것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롬 15:25-27).

 

단지 고린도 교회에게는 연보의 정신을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나,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고만 했다.

 

사도행전 당시나 교회발생 초기에는 십일조는 고사하고 아예 헌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연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후8;20). 이 같은 사실에 따라 한국교회도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연보라고만 했지 헌금이라는 용어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연보라는 말이 사라지고 한국교회에 헌금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교회안에 맘몬이라는 돈 우상이 자리를 잡게되고 교회의 본래적 사명은 사라지면서 한국 교회 모든 부패의 원인과 교회의 빈부격차 모든 성도들을 기복신앙으로 몰아가고야 말았다.

 

사람 머릿수가 많아야 십일조등 막대한 자금이 들어오니 대형버스를 이용해 이동네 저동네 골목까지 헤집고 다니면서 작은교회 성도들까지 착취해오고 있고 또 대형교회들은 지방곳곳에 지성전을 만들어 놓고 목사개인 목회성공의 자랑거리로 열을 올리고 있으니 순수한 윤리와 신앙적인 구령사업은 고사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죄의 극치를 달리고 있으니 참으로 재앙을 끌어 들이는 꼴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돈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고 바울도 돈은 "일만악의 뿌리'라고 말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깨끗해지려면 돈줄부터 끊어야 한다. 그래서 천주교는 지금도 연보라고 하고 있다.

 

연보는 자기 재물을 내어 남을 도와주는 돈으로 일종의 구제금에 더 가깝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연보를 거둬서 바울에게 내 놓았다.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교회 운영비나 교회일을 하는자들을 위해 내 놓는 것이 연보이다.

 

이것을 바울은 “연보” 즉 넉넉히 주는 선물(복) 이라고 규정하였다. 바울은 "사람이 드리는 연보를 하나님께서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 하시리라”고 말함으로써 현대 교회가 일괄적으로 “십분의 일”을 부과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연보 방법을 실시하였다(고후8;12).

 

고후8:13-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케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하려 함이라.

 

약성경에는 우리가 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구절이 한 구절도없다.그러나 한국교회는 수많은 헌금의 종류를 설정해 놓고 돈을 거둬 들이는데 혈안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한국교회의 다음과 같은 헌금의 85가지 종류를 봐도 알수가 있다.

 

성경전체의 해석방법은 오직 구속사적으로만이 바르다.하나님이 요구하는 율법의 더 중한 '의와 긍휼과 신뢰'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행할수 없다.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예수님만이 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완성하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인간들이 이것들을 이행할수 있다면 "너희는 계속 십일조 내고 복을 쌓을곳이 없도록 받아봐라" 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아모스4장4절).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진정 의와 인과 신을 하나님께 드려 십일조까지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새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모든율법 의식법인 십일조 포함해서 완성하셨다. 은혜 받은 자는 그 은혜를 나누는 차원에서의 사랑의 연보만 있을 뿐이다.그런데도 십일조를 강요하여 백배 천배 만백 복받자 한다거나 또 십일조 영웅 록펠러 거짓 이야기를 들려주며 십일조 했더니 복 받아 늘 돈방석에 앉아 누루고 눌러서 후대 자자손손 복받고 아주 잘산다고 하는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감이다. 록펠러 그 이면에 숨겨진 거짓악행에 대한 글 참조

(http://blog.naver.com/guesswhoim/70015568638)

 

십일조를 안하면 저주를 받는다며 겁을 주는 자들이나, 또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내의 봉사직인 직분을 제한하고 제외시키며 믿음없는자들이라고 낙인찍는 자들은 많은 성도들을 실족케 하는자들이다. 예수께서는 마11장29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했는데 교회의 목사들은 그걸 뒤 엎어서 오희려 십일조와 부담스런 헌금으로 무거운 멍에로 짐을 씌우고 있으니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배치하고 있다.

 

마치 교회의 은사적 직분인 "성직자와 평신도"를 사탄이 구분해서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교회에서 목사를 성직자 라 하고 일반성도를 평신도라 부르면 사탄 마귀가 제일 좋아한다는것이다--교문사 기독교 대백과사전 제6권 p275 제일 위에서 두 번째줄).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는 구원의 길로서 의식법인 십일조의 기능은 종결되었다. 왜냐하면 구약의 피제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제사에 비하면 그림자요, 예표였고 그리스도의 제사는 실체요,그 원형이기 때문이다(요19장30절-'다 이루었다').

 

또"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기 때문에 히브리에서는 모세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보면서 율법의 기능의 종결에 대하여 바울보다 더 과격하게 말했다(히7장19절).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이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완성했기 때문에(히7장27절), 또 옛 계명이 무익하므로 율법을 폐하셨다(히7장18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고(롬10장4절) 완성인데도 옛언약의 백성들은 제사제도를 (의식법인 십일조등을)계속할 것이 틀림 없으므로 이 제도를 하나님은 성전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고 자신의 심장을 내보이셔서 물리적 방법으로 폐지하셨다.

 

그래도 성전이 있는 한 레위제사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을 들어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시켜셨다. 그후 성전재건은 이뤄지지 못했고 또 시온주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2차대전후 팔레스틴에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세웠어도 아직도 성전을 세울수 없다.

 

성전만 아니라 제사장 가문을 완전히 허물어버리심으로 지금까지도 사독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후예를 확인해낼 길이 없다. 그들의 성씨가 כהן(코헨)이란 사람을 찾아 제사장으로 세울수도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כהן(코헨)은 제사장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כהן(코헨)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도 찾을길이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율법의 십일조등을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 하셨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중 유독 십일조만을 다시 끄집어 내어 지킨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다시 허물어 버리는 아주 무서운 저주 행위이다. 그래서 이 사실들을 깨달은 서구 모든 교회들은 십일조를 완전히 그리고 깨끗이 폐지하였다.


우리 한국교회도 이제라도 이 비성경적인 십일조를 하루속히 빨리 폐지한고, 교회 내의 맘몬 우상을 배격한다면, 그후 교회는 가장 바람직한 교회, 예수가 살아 역사하는 교회, 미래 지향적 하늘나라로 계속 이뤄 나갈것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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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대한 더 자세한 이해를 하려면 율법과 복음의 확실한 정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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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강요로 무너지는 한국교회 케이투 |2014.09.08 20:09

 

변질된 십일조에 관하여 케이투 |2014.09.08 20:05

 

십일조 헌금제도의 실체 케이투 |2014.09.0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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