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율법의 완성은 곧 십계명의 폐지이다 라는 말씀인가요?   

          
십계명이 없으면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정죄할 수가 없다. 십계명 율법을 완성을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해서 다시 계명이나 율법이나 안식일을 다시 지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헛되게 함이라 하였습니다.


나의 죄를 위함인가 십계명 폐지를 위함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어떤 분의 답변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곧 십계명의 폐지이다 라는 말씀인가요? 그럼, 이 세상에 멸망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겠습니다. 그래서 구원얻을 자와 멸망받을 자를 정하여 놓은 칼빈의 예정설이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으셨고 어떻게 이해를 하시나요?

                            

[답변]

아프리칸바이올렛      2014.07.23

                  

어떻게 똑 같은 성경을 보면서 저렇게 생각을 할수 있는지 아이러니 합니다.


1. 십자가에서 십계명이 폐지되었다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은 더 이상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된다. 빨간 불이 켜졌을 때 지나가는 차는 불법이다 라는 교통법규가 폐지되면, 빨간 불이 켜졌을 때에도 운전자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조심 없이 주행을 계속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명이 폐지되면 사람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부도덕한 삶을 살게 되며, 그러한 삶 속에서도 여전히 구원은 보장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러한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호소하는 음성을 들려주시기 어렵게 된다. 양심은 죄에 대하여 점점 더 무감각하게 된다.


2. 비록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았을지라도,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은 십계명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


사도 요한은 죄의 정의를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그런데,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도무지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비록 계명을 폐하지는 않을지라도, 계명의 존재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만다.


이런 교리는 죄를 도무지 승리할 수 없는 골리앗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명을 범하는 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각종 교통법규들을 준수할 수 없다고 믿는 운전자는 교통법규들을 범하는 운전을 하면서도 자신이 저지르는 불법에 대해 언제나 타당한 이유를 갖게 된다.


원하는 마음은 있지만 육신이 약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핑계가 항상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심각한 양심의 가책 없이 불법한 삶을 살게 된다. 자유주의적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계명을 범하는 죗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죄에 대한 신학적 핑계를 갖게 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나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며, 또한 죄를 범하면서도 여전히 구원에 대한 헛된 안전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물론,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계명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오직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바울 역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다.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계명을 매우 지키기 어렵고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의 육이 항상 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 문제를 분명하게 조명해 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3~4)


죄를 회개하고 버리는 대신에 양심의 가책과 성령의 음성을 잠재우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교리 중 어느 하나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바울의 경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처절하게 싸워보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인간의 행함과 노력으로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얼마나 깊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가 율법의 정죄를 받고 깊은 고통과 고뇌 속에서 진지하게 살아보지 않았다면, 과연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율법의 정죄로 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얼마나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자유주의적 복음을 믿고 살았다면, 과연 그가 로마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실패와 승리의 경험을 그토록 완전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바울처럼 고뇌하지 않았던 사람은 바울의 글을 오해하게 된다. 신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코 죄의 깊이와 사람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바울이 말하는 깊이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바울의 글을 핑계삼아 죄를 더욱 더 담대하게 범하도록 유도하는 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호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작게나 크게 바울의 경험과 같은 경로를 거치게 된다. 행함을 통하여 율법의 의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패배감.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원칙과 규칙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얻게 되는 좌절감. 이런 실패 때문에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계명과 원칙을 포기하는 쪽으로 신앙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를 피하는 길을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타협과 포기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진리 안에 존재하는 자유와 참된 평안과 행복의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에는 다른 복음을 찾아 먼 길을 떠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나는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는 모습을 보아 왔다. 또한 신신학과 자유주의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와 사랑을 말하면서 불법과 부도덕 속에서 원칙과 양심을 타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 왔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야 하고, 또한 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 시대 성도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2:14)


개신교 신앙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이 하나로 묶여져 있지 않는가?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알면 우리의 생애는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무섭고 엄격하며 냉정한 분으로 아는 사람은 그런 믿음을 갖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값싼 사랑의 소유자로 믿는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믿는 대로 우리의 성품과 생애가 결정지워질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알면, 죄를 범할 때마다 깊은 가책을 느끼게 될 것이다. 철이든 자식이 늙은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가족과 이웃과 교우에게 저지른 모든 악들을 기억할 때마다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면서 그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모든 높아지고자 하는 정신과 교만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는 돌아온 탕자처럼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육신적 성향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교정되지 않으면 그 속에 도덕적 죽음의 씨앗을 간직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면 우리는 방종과 자아 본위의 마음과 죄의 유혹과 같은 세력들을 저항할 수 없다.


계명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되,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 속에서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열매가 맺히게 된다. 그렇다면, 생명적인 관계란 어떤 것인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던 것이 바로 생명적인 관계였다. 바울은 이 생명적인 관계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느니라." (롬 8:14~15)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불신하면 사랑이라는 생명적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불신이나 의심이 있으면 아들은 아버지를 완전하게 신뢰할 수 없다. 이런 아들은 아버지를 가까이 하지 않은 채 아버지한테 혼나지 않기 위하여 아버지의 말을 듣는 척하며 살아가게 될 것인데 이런 관계는 생명적 관계가 아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생명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이다. 성경은 오직 한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바라 는 것" 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바라보면 생명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울의 경우 이 경험은 그의 생애에 놀라운 부흥과 개혁을 가져다 주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집 나간 탕자이고, 부모의 사랑을 저버린 불효 자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관계는 맺어질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른 채 구원을 위하여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노력하면서 보다 많은 공로와 선을 쌓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성패는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데에 달려 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도 전도를 잘하고, 설교를 잘 할 수 있지만, 내 가족과 이웃과 교우들, 그리고 하나님의 심금을 울릴 수는 없다. 바울이 걸었던 길을 걸으면, 바울이 만났던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Yacob130     2016.04.06.
 

 

헌법을 모법으로 하여, 나라의 여러 법을 만듭니다. 모든 분야의 법에 <헌법정신>이 다 들어있는 것과 같은 원리이지요.

그런데, 헌법을 기초로 하여 법을 만들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헌법재판소>의 합헌 또는 위헌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십계명을 모법으로 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의 복음적인 생활을 복음서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만약, 십계명이 폐지되었다면..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부탁 말씀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만 믿고 자유분망해도 되니까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 짐승제사에 해당하는 율법과 율례만 폐지됐는데도 십계명까지 폐지됐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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