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누가 소개

조누가 (본명 조성기)
1951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장로회 신학대학원 졸업.
1971년 단편소설 <만화경>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1985년 <라하트하헤렙>(민음사)으로 제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1986년 장편 <야훼의 밤>(전4권, 고려원)으로 기독교 문화상 수상.
1987년 장편 <가시둥지>(민음사), 장편 <슬픈 듯이 조금 빠르게>(문학사상사) 출간.
1988년 장편 <베데스다>(고려원) 출간.
1991년 중편 <우리시대의 소설가>로 제15회 이상문학상 수상.
장편 <우리 시대의 사랑>(세계사) 출간
1992년 창작집 <통도사 가는 길>(민음사) 출간.
그동안 출간된 종교적인 장편들을 연작 형태로 모아 <에덴의 불칼>(전7권, 민음사) 출간.
1993년 장편 <욕망의 오감도>(전5권, 세계사) 출간.
1995년 창작집 <우리는 완전히 만나지 않았다>(세계사)출간.
1998년 창작집 <실직자 욥의 묵시록>
소설시 <내 영혼의 백야>(민음사) 출간.
1999년 현재, 산울교회 담임

 

출처: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조 누가   2012.11.21 14:35

서성필  조회 수:3716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모든' 소득의 십일조로 인한 웃지 못할 사례들

 

성경 어디에도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은 없다.

 

민수기 31:25-47을 보면 어떤 소득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500분의 1을 요구하시고 어떤 소득에 대해서는 50분의 1을 요구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곱이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렇게 서원을 한 것이다. 그런 조건부 십일조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는 본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 근거로 삼을 만한 구절이 히스기야 왕의 종교 개혁을 언급한 역대하 31장에 나오고 있으나, 문맥을 살펴보면 그 구절의 '모든 것' '모든 소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려고,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에게 명령을 내려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몫을 가져 오게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리니, 유다에 와서 사는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각종 농산물의 첫 수확을 넉넉히 가져 왔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 왔다. (역대하 31:4,5)

 

여기서 뒤에 나오는 '모든 것'은 앞에 열거되어 있는 여러 품목들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특히 십일조의 대상이 되는 모든 품목들이라는 의미이다. 십일조의 대상 품목들은 토지 소산과 관련해서는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주로 곡식과 포도주, 기름 들이다.

 

그리고,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히브리 문장 구조를 살펴보면 31:5 하반절에서 '처음 것'에 해당하는 '레아시트'라는 단어가 맨 앞에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곡식, 포도주, 기름, , 밭의 모든 소산들이 다 '처음 것'에 걸린다는 말이다. 즉 곡식의 처음 것, 포도주의 처음 것, 기름의 처음 것, 무엇무엇의 처음 것 등으로 풀어서 쓸 수 있는 문장인 셈이다.

 

이스라엘은 토지 소산의 처음 것, 혹은 첫 열매를 먼저 제사장의 몫으로 하나님께 바치고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의 10 1을 십일조로 바쳤다. 이런 '처음 것'들은 토지 소산의 60분의 1 정도였다. 십일조는 정확하게 말해 60분의 59 곱하기 10분의 1, 그러니까 토지 소산의 600분의 59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하지만 원래 십일조라는 것이 소산물의 특성상 정확하게 분량을 잴 수는 없고 10분의 1 안팎으로 계산하면 되었다.

 

첫 열매를 먼저 떼고 그 다음 십일조를 계산하는 이스라엘의 풍습은, 다른 어떤 것보다 십일조부터 떼어 놓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한국 교회의 권면과 비교가 된다.

 

또한 '모든 것'의 십일조가 돈(화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더미'로 쌓아두었다는 역대하 31:6 이하의 말씀을 볼 때 더욱 확실해진다. 그 모든 것은 '양식(음식)'이었기 때문에 더미로 쌓는 데 몇 달이 걸렸던 것이다(역대하 31:7).

 

재미있는 것은 이 본문을 해설해놓은 《컬러 큰 성경》(성서간행사) 699쪽에 보면 '십일조에 관한 말씀들' 항목에 십일조의 원칙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 여섯 번째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쳐야 함'이라는 원칙이 나와 있다. 그 원칙에 대한 참조 성경 구절로 레위기 27:30-33을 들고 있다. 이 성경 구절은 세 번째 원칙인 '소산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임'의 참조 구절로도 소개되고 있다.

 

레위기 27:30-33은 토지 소산과 가축의 10 1을 십일조로 바치라고 하였지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한 구절이 아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가축의 십일조는 언급되지 않고 토지 소산의 십일조만 언급되고 있다.

 

농경 목축 사회에서 토지 소산과 가축이 '모든' 소득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이미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고 다른 일거리나 매매 행위 등을 통해 여러 형태의 소득들이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왕정시대로 넘어갈수록 다른 종류의 소득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성전세나 헌금, 다른 세금들은 돈으로 냈으나 십일조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돈으로 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양식의 형태로 성전 곳간에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가나안 땅에서 토지 분배가 있은 연후의 토지 소산과 가축의 개념은 소득이나 부의 축적 수단이라기보다 양식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레위인, 또는 가난한 자들과 양식을 나눠 먹는 구제의 정신 가운데서 행해졌다. 한 가족이 1년 동안 먹는 양식의 10 1을 내어놓아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양식의 10 1은 될지언정, '모든' 소득의 10 1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말라기와 느헤미야 시대까지는 십일조가 토지 소산의 10 1로 양식에 국한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러다가,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더 많은 성전 수입을 위해 제사장들과 함께 십일조의 대상을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토지 소산 이외에 박하, 회향 같은 특수 작물들도 십일조의 대상이 되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십일조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화폐 소득을 십일조에 포함시키고부터였다. 화폐 소득을 포함시키자 자연히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으로 확장되었다.

 

화폐와 박하와 및 향료의 십일조는 탈무드의 랍비들이 주문하는 내용이었으나 이는 성경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성서 대백과》 제4, p.752, 기독지혜사)

 

중세 교회에서도 4세기 무렵 십일조를 채택하고 나서 근 1000년 가까이 지난 13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거의 독점 체제에 가까웠던 중세 교회가 왜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장시키는 데 1000년이나 걸렸을까. 그것은 중세 교회에서도 전통적인 십일조의 대상은 '모든' 소득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화폐 소득을 중심한 '모든' 소득이 십일조의 대상이 됨으로써 십일조가 변질되고, 그것이 전통적인 십일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십일조가 나눔의 양식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의 치부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윌리엄 버클리 박사가 쓴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참조해 보면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이 얼마나 치부하였는가를 잘 알 수 있다.

 

팔레스틴의 일반 노동자가 한 주일에 한 번이라도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라지도 않던 행운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 제사장들은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데서 오는 직업병 때문에 고생을 했다. ……

 

제사장의 특권과 급료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제사장들은 일곱 가지 종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 23:19). 그것은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꿀이었다. 이 제물은 본래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바쳤던 것을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다.

 

제사장들은 개인적으로 돕는 사람들이 농산물의 가장 좋은 것을 성전에 바치는 제물로 가져왔다( 18:12). 수확의 50분의 1이 제사장에게 분배된 평균량이었다. 여기에 십일조가 더 첨가되었다( 18:20-22). 음식으로 쓰이는 모든 것의 10분의 1이었다.

 

이것은 레위 지파의 생계를 위해서 정해진 것인데 제사장들은 자기들이 받을 분량을 받았다. 거기다가 할라(challah)라는 과자, 또는 빵 반죽의 제물이 있었다. 어떤 빵을 굽든지 제사장들은 그 빵의 24분의 1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제사장들은 비교적 빈곤한 편에 속하는 나라에서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희생으로 전례 없는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같은 책, p.230-231)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주장하였고, 13세기 무렵에 중세 교회가 채택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현재 한국 교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엄밀히 말해 전통적인 십일조는 우리가 먹는 양식의 10 1 정도만 내면 되는 것으로, 굳이 돈으로 계산한다면 1년 식비의 10 1 정도 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고 한 그 말 속에 십일조 정신이 녹아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 교회 교인들은 십일조와 관련하여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1년 식비의 10 1 정도가 아니라 그 수십 배를 각종 명목의 헌금으로 내는 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십일조의 몇 배, 아니 수십 배를 이미 하고 있으니 십일조를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따위의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 걱정을 하기 보다, 정말 내가 도와야 할 이웃을 외면하고 방관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과 회개를 먼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식비는커녕 생활비의 10 1을 십일조로 내겠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듯이 야단이다. 무조건 돈으로 들어오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전혀 성경의 뒷받침을 받을 수 없는 억지인 셈이다.

 

다시 말하건대, 십일조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나눔의 양식이다. 양식이라는 차원을 벗어나면 그 순간 십일조 정신이 흐려지고 만다.

 

한국 교회에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계산하느라고 얼마나 웃지 못할 사례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월급을 받으면 세금을 공제하기 전 명목상의 임금으로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세금을 공제하고 난 후에 실제 수입으로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은 십일조와 관련하여 가장 기초적인 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금 이외에 다른 것들도 공제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빚 문제까지 겹친다면 혼돈은 더욱 심해진다.

 

목회자 모임에서 빚을 먼저 갚아야 하는가, 십일조를 먼저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갑론을박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목회자들은 빚을 먼저 갚는 것이 이웃을 위하는 일이므로 십일조 내는 것보다 빚을 먼저 갚는 것이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얼마 후에 교단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목회자들은 자기들이 의논하고 토의하여 내렸던 결론을 철회해야만 하였다. 빚을 갚고 나면 소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십일조를 하라는 것인지, 빚을 끝까지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지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월급을 타서 십일조를 하고 나머지 돈을 쪼개어 정기적금에 들었는데 적금 만료가 되어 목돈을 가지게 되었다. 이럴 때 이미 십일조를 뗀 돈으로 적금을 들었는데도 새로 목돈이 생겼다고 거기에 대한 십일조를 또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나오자, 옆의 교우가 원금에서는 십일조를 안 해도 되고 이자에 한해서만 십일조를 하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왜냐하면 이자는 새로 생긴 소득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각종 소득을 일일이 점검해보아야 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어쩌면 수학 계산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십일조를 제대로 하기가 힘들 것이다.

 

켄덜 목사는 '주의 깊은' 사람이면 충분히 십일조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런 이자 액수에까지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이미 십일조를 떼고 국민연금을 내고 나서 노후에 연금을 타게 될 때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어떤 교수가 특강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먼 지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가는 동안에 밥도 사 먹고 커피도 마시고 간식도 사 먹었다. 구두 밑창이 떨어져 구둣방에 가서 수리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강의를 하러 가기 위해 치러진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강의를 마치고 강의료 50만원을 받았다. , 이제 강의료에 대한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단 비행기 삯을 강의료에서 빼는 것은 기본일 것이다.

 

그 다음 들어간 경비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어쩌면 그 모든 비용들이 50만원을 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 50만원에 대한 십일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가 이미 십일조를 뗀 돈에서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었다. 아이들도 그 용돈에서 십일조를 떼어야 하는가? 물론 떼어야 한다는 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돈이 돌아다니는 곳이면 십일조를 계속 떼어야 하는 길고 긴 순환 고리가 이어질 것이다.

 

가령, 111만 원을 벌게 된 아버지가 십일조 11만 원을 떼고 나머지 100만 원을 아들 10명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자. 아들 10명은 각각 십일조 만 원씩을 떼게 되어 도합 10만 원의 십일조를 떼는 셈이 된다.

 

그리고, 아들 10명이 각각 나머지 9만 원을 또 자기 아들 9명에게 만 원씩 나누어주었다고 하자. 아들의 아들들은 각각 십일조 1,000원을 떼게 되어 한 가정당 9,000원씩 도합 9만 원의 십일조를 떼게 된다.

 

손자대 까지 내려오는 동안 원래 111만 원이었던 수입에 대한 십일조가 벌써 30만 원이 되는 셈이다. 그런 일이 용돈이 오가는 추석 명절 같은 날 방안에서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돈이 돌다 보면 십일조로만 나가는 금액이 50만 원, 60만 원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만 원짜리 한 장이 물건을 산다든지 하여 소비되거나 축이 나지 않고 용돈처럼 1,000명의 사람들을 거쳤다고 하자. 만 원짜리 한 장이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십일조로 거둔 돈이 자그마치 100만 원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만 명이 모인 자리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가지고 이런 수법을 쓴다면(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만약에 말이다) 순식간에 1,000만 원의 십일조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만 원에 대한 십일조는 그 만 원에서가 아니라 다른 돈으로 낸다는 조건하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런 노동도 없는 가운데 만 원짜리 한 장이 돌아다니기만 해도 이렇게 엄청난 십일조가 거두어지니 이보다 더 기이한 산술(算術)이 어디 있는가!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먹어 치울 수 있는 양식의 십일조를 요구하셨는지도 모른다.

 

어느 미션 계통의 대학에서 교수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미리 십일조를 떼고 지급했다. 교수들이 항의를 하자 학교 당국에서 대답하기를, 교수들은 교내에 있는 대학 교회 소속으로 볼 수 있으므로 대학 교회에 내야 하는 십일조를 미리 떼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물론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학교 재정난 때문에 그런 편법을 썼음에 틀림없다. 이런 편법이 가능한 것이 바로 '모든' 소득에 대한 십일조의 허점이기도 하다.

 

자유 직업가로서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어느 성도가 오랜만에 1,000만 원의 수입이 생겨 100만 원의 십일조를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달부터 수입이 일체 없는 기간이 반년이나 이어졌다.

 

그 성도는 십일조 헌금자 명단이 적힌 주보를 볼 적마다 교회의 목사나 다른 신자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염려가 되었다. 한 달에 100만 원의 십일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십일조 액수가 많으니까 떼어먹고 있지 않나 하고 오해를 할 것 같아서였다.

 

전통적인 십일조는 1년에 한 번 하면 되는 것인데 '모든' 소득의 십일조는 대개 달마다 하는 것으로 관례화되어 있다. 달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참여할 수 없는 특수직 종사자들은 소외감을 느낄 만도 하다.

 

남편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데 전업 주부인 아내가 남편의 월급에서 십일조를 떼어 자기 이름으로 헌금을 하면서 남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화가 나서 교회를 찾아가 자기 월급에서 바쳐진 십일조를 돌려달라고 하였다.

 

아내의 소득에서 십일조가 나간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아내는 남의 소득을 가지고 자기 소득인 것처럼 꾸며 거짓으로 십일조를 했다는 말이었다. 구약 시대로 따지면 남의 밭 소산을 가지고 십일조를 바친 꼴이었다. 전업 주부로서의 노동의 대가를 감안하더라도 남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때 교회에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고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되겠는가? 한번 바쳐진 것은 절대 돌려줄 수 없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일종의 행정 착오와 같으므로 일정 분량은 돌려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중고 컴퓨터를 팔아 돈을 보태어 최신식 컴퓨터를 구입하려고 하는데 중고 컴퓨터를 팔아서 생긴 돈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중고 컴퓨터를 파는 목적은 그 돈으로 소득을 삼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최신식 컴퓨터 구입 자금으로 투입하려고 그러는 것인데 잠시 머물렀다 가는 그 돈에까지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돈이 머물러 있는 기간이 길면 십일조를 해야 하고, 머물러 있는 기간이 짧으면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작은 집을 팔아 큰 집으로 옮기려고 할 때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물론 국가에서는 거래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양도 소득세도 물리고 취득세도 물린다.

 

2억 정도의 돈을 굴려 집을 옮기는 과정에서 나라에 바친 세금만 3,000만 원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십일조도 나라의 세금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모든' 소득의 십일조가 봉착하고 있는 딜레마이다.

 

나라 세법에 정통한 세무 공무원이 있는 것처럼 교회마다 십일조 내는 법에 정통한 신자들이 있다. 십일조와 관련된 갖가지 경우를 쾌도난마식으로 척척 잘 해결한다. 하지만 그러한 해결책은 믿음의 차원과는 상관없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런 신자들이나 교회가 제시하는 해결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율법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점들은 전통적인 십일조와는 달리 '모든' 소득에 대하여 십일조를 부과하려는 지나친 종교적인 열심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모세 오경에서 규정하고 있는 십일조보다 한국 교회의 십일조가 더 율법적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가치 있는 고귀한 일들을 만나게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 신장을 하나 떼어내어 생면부지의 환자에게 이식하도록 했다고 하자. 그 신장 값을 얼마나 매겨야 할 것인가?

 

이때에도 십일조의 원칙을 적용하려고 할 것인가. 좋다. 정 그렇다면 여기에 십일조의 원칙을 한번 적용해보자.우선 신장 값을 2억 원 정도로 잡기로 하자. 신장을 값없이 기증한 사람은 2억 원을 그냥 내어준 셈이 된다.

 

그 사람이 신자라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는 마태복음 25:40에 입각하여 그 2억 원을 예수님에게 바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20억 원에 대한 십일조라 할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을 바친 것이다.이 사람이 일생 동안 벌어도 20억 원을 벌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평생 벌 수 있는 돈의 십일조를 이미 넘치게 바친 셈이 된다.

 

이런 사람에게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강요할 수 있겠는가?기증을 받은 사람의 입장은 어떠한가? 2억 원에 해당하는 신장을 기증받았으니 그 십일조인 2,000만 원을 교회에 바쳐야 할 것인가? 아무리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라 하더라도 이런 사람에게까지 십일조를 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가치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소득의 십일조라는 것은 이런 가치들 앞에서는 빛을 바래게 된다. 다시 말해 십일조로 따질 수 없는, 십일조를 훨씬 초월한 차원이 있다는 말이다.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원래 소제목을 '십일조 시대는 지났다'로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는 십일조 시대가 지났다느니 아직 계속되고 있다느니 하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와 같이 유대인이 아닌 소위 이방인들에게는 할례 시대가 지났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듯이 십일조도 그러하다.

 

초대 교회에서도 할례나 십일조가 문제되었던 사람들은 유대인으로 있다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이스라엘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할례를 받고 십일조를 내야만 하였다. 그것은 이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기보다 국민으로서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할례는 일종의 출생 신고와 같은 것이었으며 십일조는 종교세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죄를 속하는 성전 제사 행위는 할 필요가 없었고 또 하지 않았다. 성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무효화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거부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은 스데반과 야고보를 비롯하여 순교당하는 자들이 속출하였고 유대 당국의 핍박을 받아 흩어져야만 하였다.

 

A.D. 70년에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지 않았다면 성전 제사를 거부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가 되어 각지에서 예수를 전하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아직 유대교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하면서도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대인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발상인지도 모른다.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바울 서신 곳곳에 그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 율법과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정립하는 회의가 예루살렘에서 열렸을 때, 특히 바리새인으로 있다가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이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이방인)들도 할례를 받도록 하고 모세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도행전 15:5)

 

그 회의에서 많은 변론과 논쟁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 많은 변론과 논쟁 중에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들도 분명히 오고갔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누구인가. 철저한 십일조주의자들이 아닌가. 그런 바리새인으로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십일조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까지 권유하고 있는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겠는가.

 

많은 논란이 있은 연후에 드디어 베드로가 일어나 입을 열었다.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의 목에 두려느냐. (사도행전 15:10)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들'의 목록 중에 십일조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모든 논의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으로서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사도행전 15:20)

 

이 예루살렘 회의와 관련하여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탈무드 시대의 유대인은 비유대 민족과도 곧잘 어울려서 함께 일을 하고 생활을 같이했다. 유대인에게는 천사가 지키라고 일러준 613가지 계율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는 비유대인을 굳이 유대화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선교사를 보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상호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비유대인에게 그 중에서 꼭 지켜야 할 다음과 같은 계율 일곱 가지만을 주었다.

       

산짐승을 잡아 그 자리에서 날고기로 먹지 말라

② 남을 욕하지 말라

③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④ 법을 어기지 말라

⑤ 살인하지 말라

⑥ 근친상간하지 말라

⑦ 불륜을 저지르지 말라

(《탈무드》, p. 113, 마빈 토케이어, 우상호 옮김, 두풍)

 

탈무드에서 비유대 민족에게 준 일곱 가지 계율과,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한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을 위한 네 가지 권면 사항이 비슷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렇게 탈무드에서조차 비유대 민족을 율법과 계율에 묶어두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초대 교회 예루살렘 회의에서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할례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십일조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지 몰라도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원래부터 할례니 십일조니 하는 모세 율법의 규정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을 지키다가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아니다. 모세 율법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다시 모세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유대교인으로 만들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 회의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던 것이다.

 

우리가 저희(비유대계 그리스도인)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사도행전 15:11)

 

지금, 한국 교회들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십일조(그것도 전통적인 십일조가 아닌 변질된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의 할례 강요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에 넘어가고 있는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외친 적이 있다. 이 바울의 외침은 십일조와 관련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라디아서 5:1-6)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는 말씀은 '십일조나 무십일조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는 구절로 고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쯤되면, 십일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십일조와 할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지키는 십일조는 유대인들이 율법적으로 지키던 그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율적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할례에 대하여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물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한 자들도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몸의 일부를 조금 자르라는 것인데, 그것도 못하겠다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배은망덕이 아니냐.'

 

하지만, 바울의 입장은 단호하다. 율법과 유대교의 잔재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조금도 끼여들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런 잔재들이 결국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흐리게 하고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 교회 형편도 그러하다. 십일조 문제로 인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고민들을 하고 있고, 십자가 복음의 은혜로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고 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다. 이제 예수를 믿은 우리는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친자의 관계로 들어선 것이다.

 

여기에 관한 말씀으로는 갈라디아서 4:1-7보다 더 나은 말씀이 없을 것이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4:1-7)

 

십일조를 내면 축복을 해주는 그런 계약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 나의 것이요 나의 것이 아버지의 것인 놀라운 친자 관계로 들어섰다는 말이다.

 

계약 관계에 있을 때는 계약 상대방의 수입이 얼마고 그 수입의 십일조를 나에게 바치나 안 바치나 따지고 그러겠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로 말미암아 친자 관계로 들어선 마당에는 그런 차원을 뛰어넘게 된다.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얼마나 벌어오나 일일이 따지고 그 수입의 10 1이 얼마나 되는지 전자 계산기를 들고 꼼꼼이 계산하고 있겠는가.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전자 계산기를 들고 우리의 십일조를 계산하시면서 십일조를 바치나 안 바치나 눈을 부릅뜨고 계시겠는가?

 

절대 그럴 리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마태복음 17:26)

 

또한, 로마서 8:21에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놀라운 자유인지 '영광의 자유'라고 표현하였다. 한국 교회가 그 동안 십일조의 멍에를 신자들에게 씌움으로써 얼마나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훼손해왔는가.

 

처음에는 좋은 의미로 출발했던 십일조라 하더라도 이제 그것이 교회 운영을 위한 편리한 헌금의 방편 정도로 전락하고 율법화되고 있다면 유대교의 잔재를 없애는 의미에서도 십일조라는 용어를 교회에서 사라지게 해야 할 것이다. 얼마든지 다른 이름으로 대체할 수도 있는 십일조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십일조가 어떻게 쓰여져야 한다는 규정들은 시효가 지난 옛 언약으로 여기고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규정들만 아직도 시효가 지나지 않은 것처럼 내세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십일조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십일조가 십일조 정신에 따라 쓰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유대교의 십일조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우리하고는 원래부터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히 궤도 수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도 아니요 유대교도 아닌 이상한 방향으로 흐러가면서, '에클레시아(교회 또는 회당)'가 아니라 사이비 '히에론(성전)'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지금도 유대교인들은 모세 율법에 따라 철저히 십일조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십일조를 바칠 성전이 무너졌기 때문에 십일조를 아예 공동체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한다. 유대교인들은 십일조를 바칠 곳이 없게 되는 바람에 오히려 십일조를 십일조 정신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셈이다.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회당 정도에 불과한 각 지역의 개교회(個敎會)들이 도리어 성전 노릇을 하며 십일조를 모아 십일조 정신과는 상관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고 유대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말라기 3:8 말씀을 상기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십일조가 폐지된 또 다른 신약의 증거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십일조를 비롯한 율법의 멍에들을 지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도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신약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살펴보기로 한다.

 

요한복음 2:19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을 가리키면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따지고 들었다.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사도 요한은 이 사건에 대해 해설을 달아놓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 “(요한복음 2:21-22)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에는 성전 제사가 폐하여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단 한번 완전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더 이상 성전 제사가 필요 없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복음 4장에서도 그림심산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인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인지 의문이 많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요한복음 4:21-23)

 

이 말씀도 얼마 있지 아니하여 성전 제사가 폐하여지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새로운 예배가 이루어질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바로 이러한 진리를 밝히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성전 제사 폐지에 관한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한 표현은 히브리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브리서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편지로서 전체 주제가 성전 제사 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장막 제의를 따라서 예물과 제사를 드리지만, 그것이 의식 집례자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이런 것은 다만,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예식과 관련된 것이고, 개혁의 때까지 육체를 위하여 부과된 규칙들입니다.” (히브리서 9:9-10)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바칩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8-9)

 

예물과 제사가 '개혁할 때까지'만 시행되어 오다가 이제 폐하여졌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제사만 폐하여졌다고 하지 않고 '제사와 예물'이 함께 폐하여졌다고 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전에서 짐승을 잡아 피흘려 드리는 제사가 폐하여진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예물까지 폐하여진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 주목을 하지 않는 편이다. 예물은 다시 말해 성전 제사와 관련하여 드리는 갖가지 헌물들이다. 각 경우에 따라 드려야 하는 예물의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우선 죄를 속하는 제사와 관련된 갖가지 예물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소와 양을 비롯한 짐승들이 있다. 이런 짐승들을 가져올 만한 경제력이 없으면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들을 가지고 와도 좋다고 하였다.

 

또한 소제의 예물이라 하여 죄를 속하는 제사와 직접 관계가 없는 예물들도 있었다. 고운 기름과 고운 가루, 유황 들이 그것이었다. 단 위에 불살라서 향기로운 냄새가 피어나도록 하였다.

 

성전에서는 짐승을 잡으므로 피 냄새와 오장육부의 비린내가 진동하게 마련이다. 이런 역겨운 냄새를 중화시키기 위해서도 소제의 예물과 같은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예물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제의 예물도 죄를 속하는 제사와 직접 연관은 없다 하더라도 그 제사를 간접적으로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외 다른 예물들도 직간접적으로 죄를 속하는 제사와 관련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물의 종류와 죄를 속하는 제사와 관련이 있는 것과 관련이 없는 것 등으로 구분하여, 히브리서의 예물은 죄를 속하는 제사와 관련이 있는 것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인 셈이다.

 

그럼 십일조가 성전 예물에 포함되는 것인가? 십일조가 성전 예물에 포함되는 것이라면 십일조가 이제는 제사와 함께 폐하여진 것이 분명하다.

 

예물을 드리는 방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요제물과 거제물이 그것이다. 요제물은 흔들어서 드리는 것이요, 거제물은 두 손으로 들어올려 드리는 것이다. 어떤 것을 요제물로 드리고 어떤 것을 거제물로 드려야 하는지 율법에 세세하게 규정해놓고 있다.십일조는 거제물에 속하는 예물이었음을 다음 말씀들을 통하여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나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 곧 열의 하나를 그들의 유산으로 준다”(민수기 18:24)

 

너희는 열의 하나 받은 것에서 열째 몫을, 주께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로 드려라..” (민수기 18:26)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떼어, 주께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로 드리고, 주께 드린 그 제물은 제사장 아론의 몫으로 돌려라.” (민수기 18:28)

 

그리고 십일조는 항상 여러 예물들과 함께 열거되는 경우가 많다. 죄를 속하는 제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예물들과도 나란히 열거되어 있다.

 

너희는, 번제물과 화목제물과 십일조와 높이 들어 바치는 곡식제물과 서원제물과 자원제물과 소나 양의 처음 난 것을, 그 곳으로 가져다가 바쳐야 한다. “(신명기 12:6)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 곧 번제물과 화목제물과 십일조와 높이 들어 바치는 곡식제물과 주께 바치기로 서원한 모든 서원제물을, 주 너희의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선택하신 그 곳으로 가지고 가서 바쳐야 한다.” (신명기 12:11)

 

너희가 십일조로 바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과 서원하고 드린 갖가지 서원제물과 자원제물과 높이 들어 바치는 곡식제물은, 성 안에서는 먹을 수 없다 “(신명기 12:17)

 

이 모든 것은 십일조가 분명히 성전 예물들 중 하나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십일조는 죄를 속하는 제사와도 분명히 관련이 있는 예물이었다.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돕는 십일조 예물이 어찌하여 죄를 속하는 제사와 관련이 없다는 것인가.

 

죄를 속하는 제사가 폐하여졌으면 그 제사를 돕는 예물들도 폐하여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제사와 예물이 폐지된 지금 십일조만이 살아 남아 있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다만 십일조 정신을 따라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목회에 힘쓰는 분들을 지원하기 위해 힘을 모아 연보를 하면 되는 것이다.

 

구태여, 성경에서 폐지되었다고 하는 십일조를 끌어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국 교회가 십일조를 고집하는 지경으로 떨어졌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런 규정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감이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신자들의 자율성을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사고 방식이 확산되어 건축 헌금 같은 것을 할 때도 신자들의 자율적인 믿음에 맡기기보다 반강제로 정기적금에 들게 하거나 미리 은행 대출을 받아 달마다 갚아 나가라는 식으로 몰아붙인다.

 

또한, 권사나 장로로 세움을 받을 때도 수백만 원씩 수천만 원씩 액수를 정하여 헌금을 하도록 한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로까지 불리는 신자들에게 그런 강요는 치욕적인 것이다. 신자들이 얼마나 자율적인 존재이어야 하는지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러분으로 말하면, 그가 기름부어 주신 것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으니, 여러분은 아무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기름부어 주신 것이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참이요, 거짓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요한12:27)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신자들이 이만큼 자율적인 믿음의 소유자로 성숙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같다. 언제까지나 말 잘 듣는 초등학생 정도로 머물러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이상한 형태의 헌금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이 십일조 발상에서 비롯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발상의 싹을 애초부터 자르기 위해서도 십일조라는 이름을 교회에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

 

또한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성경에 십일조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야말로 십일조라는 말이 신약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십일조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10 1을 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설명하기 위해 잠시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 많은 바울 서신에서도 십일조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믿음장으로 유명한 히브리서 11장에서도 그 많은 믿음들 중에 십일조를 드린 믿음은 언급되지 않는다. 일곱 교회를 격려하고 꾸짖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도 십일조를 내지 않았다고 꾸지람을 받은 교회가 없고 십일조 생활을 잘 했다고 칭찬받은 교회가 없다.

 

요즈음, 한국 교회 설교 분위기로는 그 일곱 교회 책망 부분에서 십일조를 도적질했다는 책망이 나올 법도 한데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는 십일조라는 말이 지상에서 깨끗이 사라져버린 이 현상이 이상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신약에 언급될 필요조차 없었다고 억지를 부린다. 그러면서 성경에 십일조를 내지 말라고 씌어 있는 구절이 있으면 대보라고 큰소리를 친다.

 

십일조를 내는 것이 그렇게 엄청난 축복을 받는 비결이라면 신앙 생활의 지침에 대하여 구석구석까지 세세하게 밝히고 있는 바울이 왜 십일조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가?

 

십일조를 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신약에 언급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십일조가 폐지된 것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신약에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고 보는 편이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성전이 아직 건재하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을 섬기고 있는 그 시대에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 수단인 십일조를 초대 교회가 빼앗아왔을 리가 있겠는가. 그것이 신약에 십일조라는 말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십일조 논의를 할 때는 모든 신약이 성전이 파괴되기 전, A.D. 70년 이전에 씌어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바울이 스스로 천막을 치며 생활비를 벌어가면서 복음을 전한 것을 볼 때 바울이 개척한 그 수많은 초대 교회들은 십일조를 거두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9:18)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9)

 

우리는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은 일이 없고, 도리어 여러분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8)

 

그리고 흉년이 들어 형편이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을 돕기 위해 여러 교회로부터 연보를 거둘 때도 바울이 십일조 개념을 끌어들였으면 그렇게 간곡한 말로 연보에 대하여 길고 긴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더욱 효과적으로 헌금을 모았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8:19:15 참조)

 

십일조 정신에도 합치되고 얼마든지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거둘 수도 있는 그 구제 연보를 바울은 십일조 제도에 의지하지 않고 신자들의 자율적인 믿음에 의지하여 모은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신 성도들의 목에 종의 멍에를 메우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이다. (갈라디아서 5:1)

 

그런데 《십일조》의 저자 켄덜 목사는 초대 교회 때도 성도들이 십일조를 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성경 말씀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다.

 

고린도전서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헌금)를 하지 않게 하라' 중에서 '이를 얻은 대로'라는 구절로써 바울이 의미하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 그의 독자들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역시 추측된다. '이를 얻은 대로'라는 구절은 실제로 십일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어도 십일조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같은 책, p.36)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두어'(고전 16:2)야 한다고 한 것은 십일조가 새 언약에 의하여 폐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 p.77)

 

과연 그러한가? '이를 얻은 대로'가 십일조를 내라는 말이었겠는가?

 

켄덜 목사는 바울 서신을 받는 독자들이 '이를 얻는 대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 바울 서신을 받는 독자들이 누군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고린도의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몰라도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암호'를 십일조라고 풀었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앞서도 말했지만, 성전이 건재하고 있는 그 당시에 바울이 십일조 운운하며 레위인들의 십일조 양식을 빼앗아올 리가 없고, 특히 고린도의 이방인 신도들에게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ㅇ르 따라 십일조의 멍에를 지워서는 안되기 때문에 십일조를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리고 바울은 비록 바리새인이긴 하였지만 전통적인 십일조가 돈과는 관련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돈으로 연보를 거두어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고자 하는 마당에 토지 소산을 의미하는 십일조를 들먹거렸을 리 없다.

 

또한 '모든' 소득을 대상으로 하는 변질된 십일조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했을 가능성은 더더구나 없다. 그러면 '이를 얻는 대로'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고린도후서 8:11-12에 나오는 '있는 대로'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이다.

 

십일조를 말한 것이라면 바울이 고린도후서 8:7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연보라는 말이 헬라어로 다양하게 쓰인 사실을 근거로 내세우며 연보에 십일조가 포함되어 있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연보와 관련된 헬라어들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미국의 어느 목사는 십일조를 강조하는 책에서 히브리서 7장을 해석하면서 참으로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였다.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10분의 1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으니라. (히브리서 7:8)

 

그는 '여기'라는 말을 헬라어까지 동원하여 해석하면서 히브리서를 쓴 저자가 다니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였다. '여기' 교회에서 죽을 자들이 10분의 1을 받는다고 했으니 초대 교회 때도 십일조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7장은 레위인의 제사장직과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비교하고 있는 부분으로 초등학생 정도의 언어 능력만 있다 해도 '여기'는 레위인을, '저기'는 멜기세덱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지각이 있는 목사가 이런 식으로까지 성경을 해석하면서 십일조를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십일조 광신자라는 혐의를 두지 않을 수 없다. 광신자가 아닌 다음에야 너무도 분명한 성경 구절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십일조주의자들이 바울 서신이나 히브리서에서 아무리 십일조에 관한 근거를 찾으려고 해도 실패하고 말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왜냐하면 십일조 시대는 이미 지났고 그리스도인은 십일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연보의 원칙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헌금'이라는 단어는 단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도 구약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신약 누가복음에서만 나오고 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누가복음 21:1)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4)

 

이 두 구절에서만 헌금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헌금'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다니!

 

구약에서는 왜 헌금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있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돈으로 드리는 헌물에는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으신 것을 알 수 있다. 십일조도 그렇고 다른 예물들도 돈으로가 아니라 물품으로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가령, 죄를 속하는 희생 제물을 돈으로 대신해서 드릴 수 있다고 한다면 제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을 돈으로가 아니라 소와 양으로 드리도록 한 데는 '죄는 피로써만 씻을 수 있다'는 구속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 외 다른 뜻들도 있을 것이다.

 

십일조도 돈으로 내지 않고 토지 소산의 물품으로 내도록 한 데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본 그런 이유들 이외에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돈으로 헌금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저희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나아가 전에 하나님의 전에 연보한 돈을 저에게 붙이니 이 돈은 문을 지키는 레위 사람이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온 유다와 베냐민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서 거둔 것이라. (역대하 34:9)

 

헌금이라는 단어 대신에 연보라고 되어 있다. 그 돈을 대제사장은 여호와의 전 역사를 감독하는 자에게 주고, 그 사람은 그 돈을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성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게 하였다.

 

이 돈은 십일조와 전혀 관계가 없는 그야말로 헌금에 해당하는데, 어떤 목회자들은 이 구절을 들어 십일조가 성전 수리비로도 쓰였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십일조는 양식이기 때문에 성전 수리비 같은 것으로 쓰일 수가 없다.

 

사실, 성전의 주수입원은 역사적으로 볼 때 십일조가 아니라 성전세였다. 십일조는 창고에 얼마간 쌓아두었다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양식으로 나눠주고 나면 없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성전세는 20세 이상 된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로부터 각각 은전(銀錢) 반 세겔을 받았기 때문에 그 돈이 전국에서 모아지면 엄청난 액수가 되었다. 그 돈으로 성전 건물이 관리되고 유지되었다. 다른 헌금들보다 십일조가 한국 교회의 주수입원이 되고 있는 사실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역대하 34:14)

 

힐기야 제사장이 연보궤를 기울여 그 안에 있는 돈들을 쏟을 때에 율법책도 함께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요시야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율법책을 읽고 회개하였다.

 

이렇게 헌금과 관련된 구절이 구약에서는 역대하 34장에서 두 번 나올 뿐이다. 그 동안 헌금이 계속 들어와 성전 금고에 쌓였지만 성경이 그런 것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스라엘에서 헌금을 하는 것은 세금을 내는 것과도 같아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그리 강조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헌금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모양이다.

 

앞에서 보듯이, 역대하 34장에 헌금이라는 말 대신에 연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연보라는 단어가 열두 번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구약의 두 번하고 합하여 성경 전체에서 연보라는 말이 열네 번 나오는 셈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 성경 번역자들이 그렇게 번역을 해 놓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개역 개정판에서는 연보궤를 헌금함이라고 바꾸어놓긴 했지만 연보라는 말을 헌금으로 바꾸어놓지는 않았다.

 

여기서 '연보(捐補)'라는 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연보의 연()은 원래는 '버린다'의 뜻으로 쓰인 말인데 '주다, 바치다, 내놓다, 기부하다'라는 뜻으로 발전하였다. 하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줄 수도 있고 바칠 수도 있는 법이다. 연보의 보()는 원래는 '깁다'라는 뜻을 지닌 말인데 '고치다, 보태다, 돕다'라는 뜻으로 발전하였다.

 

연보를 원래의 단어 뜻대로 해석하면 자기 것을 버려서 해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 된다. 돈과 관련해서는 돈을 기부하여 돕는다는 뜻이 된다. 이런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성경 번역자들이 이 단어를 자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보라고 번역을 해놓은 헬라어 원어들은 각 경우에 따라 다른 단어가 쓰이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로기아'로 쓰는 경우

 

성도들을 도우려고 모으는 헌금을 두고 말합니다. 내가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지시한 것과 같이, 여러분도 그대로 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6:1)

 

매주 첫날에, 여러분은 저마다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따로 저축해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갈 때에, 그제야 헌금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6:2)

 

위 두 구절에서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는 '로기아'이다. '로기아'는 영어로 컬렉션(collection), 즉 모금이라는 뜻이다. 사실 고린도전후서의 연보는 성전이나 교회에 바치는 헌금이라기보다 흉년을 만나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라 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들이 바울이 권면을 따라 힘을 다하여 모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린도전서 16:2에 의지하여 현재 거의 모든 교회들이 매주일 첫날(주일날) 헌금 시간을 가지고 헌금을 하고 있다. 켄덜 목사 같은 십일조주의자는 '이를 얻은 대로'라는 말이 바로 십일조를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매주일 첫날에 '이를 얻은 대로'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 연보를 준비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십일조주의자들의 습관을 말씀에 투사(投射)해 넣은 억지 해석에 불과하다.

 

공동번역은 '자기 형편을 따라 얼마씩을 미리 저축해두십시오'라고 풀어서 번역해놓음으로써 십일조가 끼여들 여지를 미리 차단하고 있다.

 

그런데 개역성경이든 공동번역이든 중요한 구절을 빼놓고 번역을 하고 있다. 그것은 '파르 헤아우토'라는 헬라어 문구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자기 곁에'라는 뜻이 된다. 《뉴 킹 제임스 버전》영어성경에서는 'by himself'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영어로는 '자기 스스로, 혼자서'라는 뜻이 된다.

 

각각 자기 곁에 저축을 해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공적인 헌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준비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매주일 공적인 헌금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각 사람은 자기가 번 것 중에서 얼마를 주를 위해 사적으로 저축을 해두었다. (《주석서》제3, p.334, Eerdmans)

 

매주일 첫날 각 가정에서 가정 헌금 형식으로 연보를 모아 두었다가 바울이 올 때에 그 동안 모아진 것을 가지고 연보를 하라는 말이었다. 요즘 같으면 바울 같은 지도자가 왔을 때 큰 부흥회를 개최하여 넘치게 헌금을 거두었을 텐데, 바울은 성도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오히려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16:2이 이런 뜻일진대 매주일 교회에서 헌금 시간을 가지는 근거를 이 말씀에서 찾는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여기서 '로기아', 즉 모금은 즉흥적으로 하는 것보다 각각 준비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각각, 혹은 각 가정에서 매주일 첫날에 연보를 모아두었다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연보일을 정하여 그 동안 모아진 것을 가지고 연보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2) '하플로테스'로 쓰는 경우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2)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서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11)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또 그들과 모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도움을 보낸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9:13)

 

이상 세 구절에서 나오는 연보가 '하플로테스'이다. '하플로테스'는 영어로 '리버럴리티(liberality)'로 번역될 수 있는 말로 관용, 관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연보'를 꾸미는 말들이 '풍성한', '너그럽게', '후한' 등으로 관용과 마음을 나타내는 문구들로 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후한 연보'인 경우는 헬라어 원문에는 '후한'이라는 형용사가 없다. '하플로테스'를 성경 번역자가 '후한 연보'라고 풀어서 번역을 해놓은 것이다.

 

사실 너그러운 마음 없이 인색한 마음으로는 연보를 하기가 쉽지 않다. 이 너그러운 마음만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이웃을 위해 물질을 내어놓을 수 있는 법이다.

 

3) '하드로테스'로 쓰는 경우

 

우리가 맡아서 봉사하고 있는 이 많은 헌금을 두고,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조심합니다. (고린도후서 8:20)

 

여기서 연보는 '하드로테스'이다. '하드로테스' '풍성, 성숙'이라는 뜻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거액의'라는 형용구가 없고, '하드로테스' '거액의 연보'라고 풀어서 번역을 해놓은 것이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얼마나 풍성하게 연보를 했던지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오해를 받지 않도록 바울이 극히 조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너그러운 마음('하플로테스')으로 모금('로기아')을 하면 거액의 연보('하드로테스')가 되어 큰일에 보람되게 쓰일 수 있는 법이다.

 

4) '유로기아'로 쓰는 경우

 

그러므로 나는 그 형제들에게 권면하여, 나보다 먼저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이 전에 약속한 선물을 준비해 놓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이 선물을,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선물로 마련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5)

 

이 구절에 두 번 나오는 연보가 '유로기아'이다. 헬라어에서 ''라는 접두어는 '좋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핵심 단어인 복음, 즉 좋은 소식도 ''라는 접두어를 지니고 있다. ''에다가 소식이라는 '앙겔리온'이라는 말이 붙어 좋은 소식, 복음이라는 뜻이 된 것이다.

 

''는 영어로 넘어가서도 여전히 '좋은'이라는 뜻의 접두어로 쓰이고 있다. '유포니(euphony)'라고 하면 '듣기 좋은 소리'라는 뜻이 되고, '유제닉(eugenic)'이라고 하면 '우생학적인, 즉 우수한 성질을 이어받은'이라는 뜻이 된다. 유럽(Europe) '좋은 단결, 좋은 연합'이라는 뜻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유로기아'는 좋은 모금이라는 뜻이 된다. 본문에서는 '참 연보'라고 번역을 해놓았다.

 

바울은 믿음의 형제를 보내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전에 약속한 연보를 준비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준비를 해야 '유로기아', 즉 좋은 모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좋은 모금이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좋다고 인정하실 만한 모금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금의 액수나 모금을 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시지 않고 모금을 준비하는 그 마음 중심을 보신다. 아무리 거액의 연보가 모였다 하더라도 '유로기아'가 아니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이상에서 고린도전후서에 나오는 연보라는 단어들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다양한 의미들이 합해진 것이 연보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헌금이라는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누가복음 21:1-4에 나오는 헌금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도론'이라고 하는데, 그 말 뜻은 원래 '선물, 예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서의 돈이기 때문에 헌금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도론'을 드렸다는 말이 일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제사와 예물이 폐지된 사실을 선포하는 히브리서에서 '도론'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히브리서 9:9에서는 '도론'을 예물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히브리서 10:5, 8 등에서는 헬라어 '프로스포라'를 예물이라고 번역을 해놓았다.

 

헌금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도론'이 제사와 함께 폐지되었다고 히브리서는 증거하고 있다. 물론 히브리서의 '도론'이 헌금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헌금을 포함한 모든 예물이라는 의미인 것만은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는 십일조 예물만 폐지된 것이 아니라 헌금 예물도 폐지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십자가 상에서 대신 치러주실 때 우리가 일생 동안 바쳐야 할 십일조와 헌금까지도 다 바치심으로써 십일조 예물과 헌금 예물을 폐지하셨다. 그냥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심으로 폐지하셨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돈을 일체 바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가? 구약에서도 그렇지만 신약에서는 더더구나 하나님께 돈(화폐)을 바친다는 관념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돈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예수님의 줄기찬 메시지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알고 있는가?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변화되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이웃과 나누는 공동 생활로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사도행전 2:44-45)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사도행전 4:32-35)

 

신자들이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내어놓았지만 그 어디에도 헌금이라는 개념은 찾아볼 수가 없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할 때의 '두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티데미'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단순히 '놓다, 두다, 차려놓다, 저축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헌금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기부 행위는 헌금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연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가운데 생활이 어려워 굶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하기 위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풍성하게 내어놓아 좋은 모금('유로기아')이 되게 한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으로 주시는 물질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만이 남게 되었다. 인색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바로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위로부터 성령을 부어주신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야만이 그 일이 가능한 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다. 우리가 돈을 들고 와서 바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더군다나 돈을 바치면서 그 대가로 복을 기대하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신다.

 

그런 하나님을 자꾸만 신자들에게 소개하는 자들은 기독교 무당들에 불과하고, 거룩한 하나님을 복채를 챙기는 우상신으로 전락시키는 발람의 후예들이다. 하나님께 돈을 바친다는 샤머니즘적인 관념부터 우리 머리 속에서 뽑아내야 한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태복음 25:45)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하나님 자신에게 한 것으로 여기신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 돈을 바친다는 샤머니즘적인 관념을 버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즈음 컴퓨터 통신에서 기독 청년들이 한국 교회는 이단인가 아닌가 하는 토론들을 벌이고 있다. 하나님을 물신(物神)으로 섬기고 있는 한국 교회는 매머니즘(mammonism), 즉 배금주의 혹은 물신숭배주의에 빠져 있으므로 정통 기독교가 아니라 이단이라는 것이다.

 

어쩌다가 한국 교회가, 기독 청년들이 이런 토론을 벌이는 지경까지 되었는가? 헌금 예물이 폐지되었으면 십일조 예물이 폐지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헌금과 십일조는 '연보'라는 개념으로 변역(變易) 내지는 개혁되어야 마땅하다. 아니, 이미 사도행전 2장에서 개혁되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도론')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9:9)

 

헌금 예물이 폐지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로서는 너무도 충격적이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사안이기 때문에 나중에 좀더 논의하기로 하고, 다시 십일조 문제로 돌아와보자.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 십일조 시대가 지났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은 원래부터 십일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한다면 중세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출교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많은 신학자들도 성경 연구를 통하여 십일조 시대가 지났음을 확신하면서도 교단의 눈치를 보며 양심적으로 학설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레니우스와 오리겐, 에피파니우스 같은 초대 교부들에 의해 십일조가 폐지된 것으로 결론난 지도 이미 1800여 년이나 지났는데 지금까지도 한국 교회는 그런 논의조차 기피하고 있는 형편이다.

 

보수적인 기독교 백과사전을 들쳐보아도 십일조는 폐지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들을 내리고 있는데 언제까지 한국 교회는 신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을 것인가?

 

화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누가복음 11:52)

 

목회자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헌금과 십일조에 관한 진리들을 풀어 허심탄회하게 신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연보의 패러다임(paradigm)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 교회가 헌금과 십일조라는 장애물 때문에 전도의 문이 닫혀 수많은 영혼들을 잃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연보의 패러다임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제시한 연보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일을 완성하십시오. 여러분이, 자원하여 시작할 때에 보인 그 열성에 어울리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지어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고린도후서 8:11-12)

 

그러므로 나는 그 형제들에게 권면하여, 나보다 먼저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이 전에 약속한 선물을 준비해 놓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이 선물을,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선물로 마련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5)

 

각자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고린도후서 9:7)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는,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8:14-15)

 

앞의 말씀들을 기초로 연보 원칙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있는 대로 하라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라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

즐거운 뜻으로 하라

평균하게 나누는 뜻으로 하라

 

이 다섯 가지 원칙 이외에 다른 원칙이 있겠는가. 이것은 철저히 신자들의 자율적인 믿음을 존중하는 연보 원칙인 셈이다.

 

특히 '평균하게 나누는 뜻으로 하라'는 원칙은 깊이 새겨야 할 사항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많은 물질을 맡기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맡기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서로 평균하게 나누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많은 물질을 맡은 자는 그 물질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말고 나누는 일에 기꺼이 내어놓아야 한다.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하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또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디모데전서 6:17-19)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웃을 돌아보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면서 잘못 이해한 말라기 3:10 같은 말씀들을 기초로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하는 것은 이기적인 신앙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십일조 간증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이런 이기적인 동기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주실 적에는 나누어야 하는 책임도 동시에 안겨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되어 자기 중심적인 십일조 간증 같은 것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연보 원칙은 요즈음의 십일조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 십일조 이외의 헌금을 할 때는 이 자율적인 원칙을 적용시키고 십일조를 할 때는 율법적인 원칙을 적용시키는 것은 상호모순이며, 신자들을 계속해서 혼란스럽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런 바울의 원칙대로 하면 신자들이 방자해져서 제대로 연보를 하지 않을 것이므로 십일조가 폐지되었건 어찌 되었건 반드시 십일조라는 명목의 헌금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신자들을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갈라디아서 4:2) 있는 어린아이들로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의 관점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헌금을 거두어온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며,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이때껏 헌금을 내어온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목회자들은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 십일조 시대가 2000년 전에 골고다를 기점으로 이미 지났으며 그리스도인은 십일조와 아무 상관이 없음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성전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도록, 할례나 십일조의 멍에를 메지 않아도 되도록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음을 선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속죄의 제사를 다 드리셨으며, 우리 대신 예물까지도 이미 다 바치신 사실을 선포해야 한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의 사업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더욱 기꺼이 연보를 하게 될 것이다. 새삼 초대 교회 이레니우스 교부의 권면이 생각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자들로서 이제 주님을 위하여 (십일조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유를 구별하여 떼어놓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분량을 기쁜 마음으로 자유롭게 연보로 드립니다.

 

예수의 피로 사신 바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일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소식은 십일조 노이로제에 걸린 이 땅의 수많은 신자들을 자유케 하고 멍에를 꺾는 그야말로 '복음'이 될 것이다. 그러면 신자들은 수십 년 동안 무의식 속에 쌓였던 십일조에 대한 죄의식(도둑 의식)을 떨쳐버리고 생기에 넘쳐 헌신에 헌신을 더할 것이다.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으면 두려움의 영에 눌려 지낼 것이라고 한 켄덜 목사 같은 십일조주의자들의 말이 얼마나 거짓말인가 하는 것을 산 체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선포는 예수를 믿고는 싶으나 교회 나가면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소식이 될 것이다.

 

한국 교회는 더 넘치는 영적 물질적 축복 속에서 활짝 열린 전도의 문을 통하여 수많은 젊은이와 불신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임금님께서 거룩한 산에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시는 날에, 임금님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고, 아침 동이 틀 때에 새벽 이슬이 맺히듯이, 젊은이들이 임금님께로 모여들 것입니다.. (시편 110:3)

 

하지만, 목회자들은 수많은 이해 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굳어진 사고 방식을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십일조가 이미 폐지되었음을 확신하게 된 신자가 십일조를 고집하는 목회자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그 교회에서 자신의 확신한 바를 다른 신자들과 나누어야 하는가? 그러면 그 교회의 영적 질서를 깨뜨리게 되어 덕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교회에 있는 동안에는 목회자의 방향을 따라주어야 하나 정말 견딜 수 없을 때는 그 교회를 떠나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수밖에 없다. 참으로 많은 기도와 영적 투쟁이 기다리고 있는 험한 도전이다.

 

목회자들의 고집으로 인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진리 아닌 것으로 쓸데없이 계속 갈등하게 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한국 개신교에서도 십일조 시대가 이미 지났음을 선포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일어서고 있다.

 

왜 이런 시점에 그런 교회와 목회자들이 하나 둘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은 상태가 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 (이사야 1:11-15)

 

바울이 제시한 연보의 원칙으로 돌아가 새로운 연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교회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는 누가복음 6:38 상반절 말씀이 한국 교회에서 널리 선포되어, 신자들이 실생활 속에서 이웃에게 주는 희생과 기쁨과 축복을 체험하는 가운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자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1-2)

 

목차


1. 십일조의 유래와 거기에 관련된 문제점들

2. 토지 소산과 가축의 10분의 1을 십일조로 바치도록 한 이유

3. 십일조가 음식에 국한된 이유

4. 십일조에 관한 말라기 선지자의 책망

5. 말라기 3:10에 대한 해석과 누가복음 6:38 상반절과의 관계

6. 십일조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지나친 열심

7. 바리새인의 십일조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8. 변질된 십일조의 역사

9. '모든' 소득의 십일조로 인한 웃지 못할 사례들

10.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11. 십일조가 폐지된 또 다른 신약의 증거들

12. 연보의 원칙

 

<십일조를 넘어서 - 기독교인가, 매머니즘인가>(베틀·)


- 조누가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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