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와 현대교회의 차이점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힘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낙오자이고 소외 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세상은 지금이나 그때나 비슷했다. 권력과 돈을 지향하고 그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을 “세상의 율법”으로 정죄했을 것이 뻔하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정죄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죄인된 마음으로 자신들의 가난을 무능력자의 당연한 결과물로 여기며 살아갔을 지도 모른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 분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고, 상한 심령을 불쌍히 여기셨다.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과 사랑하면서 일체가 되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 세상의 가치관과 철학을 쫒다가 길을 잃고 버림 받아 상하고 애통한 심령으로 울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그를 안쓰럽게 여기시며 그 속박을 풀어주셨다. 그는 이미 세상에서 버림 받은 존재로서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죄를 사하셨다고 하신 것이다.
물론, 모든 가난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구성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가난하고 억압된 자들이 더 많이 그리스도를 받아 들였다. 물론,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진심으로 자각하거나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즉, 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세상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난 후 이 세상에 작은 천국을 만들어 갔다. 두렵도록 거룩하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를 통해 만나게 되고, 이제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후 거룩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의 사랑하시는 바 경건한 삶을 살아갔다. 경건한 삶은 곧 이웃 사랑의 삶이다. 그들은 서로 서로를 지극히 사랑했다. 이 작은 천국은 세상과 달랐다. 세상에서는 그들을 낙오자라 했지만, 이 작은 천국에서는 그들을 형제 자매라 불렀다.
세속의 삶 가운데 환란이 찾아오면 세상은 나몰라라 하지만, 이 작은 천국에서는 형제 자매가 그를 위로했고 그 환란을 같이 이겨 나가게 했다. 또, 이 형제 자매들은 자기들이 받은 사랑을 가지고 이 작은 천국 밖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나아가 그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중에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경건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믿지 않던 이웃마저도 그들을 칭찬했다.
현대의 교회는 이렇지 않다. 이제 교회도 작은 세상이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그런데, 교회가 변했다. 이제 교회는 자랑하러 오는 곳이다. 이 세상에서 성공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억울하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간다. 자기 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공담을 들려주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면 너무 행복해진다. 물론, 교회임을 완전히 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셨다고 꼭 첨부한다.
세상에서 버림 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2000년 전의 그리스도가 그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셨던 것처럼, 세워 주심을 바라고 교회를 찾아 오지만 이제 교회에는 그들을 일으켜 세울 그리스도가 없다.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려고 교회에 갔는데 더 큰 돌덩이만 덤으로 받고 완전히 무너진다. 이러한 세상적 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가 크고 화려하면 더 좋아한다. 자신들의 교회에 어떤 유명인사가 있는지 자랑한다. 자신들 교회의 심장인 담임 목사가 얼마나 세상적으로 유능한 사람인지 자랑한다.
담임 목사는 가난하고 비천한 신도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구제의 대상으로 약간 성가신 존재로 생각한다. 신앙 생활도 경제 수준에 맞추어 하기를 바란다. 풍요로운 삶을 나누며 같이 해외여행 가고, 같이 고급 콘도로 놀러가면서, 신앙생활하고 싶어한다. 그들 중 가난한 성도가 있으면 그를 어떻게 해야 하나? 눈치보게 된다. 그가 귀찮아 진다. 부자 교회와 서민 교회로 나누면 안될까? 생각한다. 이들은 그들의 정치가 친구들을 사랑한다. 눈치보게 되는 가난한 성도보다 유식한 부자 정치가 친구들이 더 편하다.
그들이 정권을 가지면 더 행복하다. 그들을 지지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별로 안중에 없다. 아니, 사실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의 부에 기생하는 기생충이다. 이들의 이웃은 이들을 개독교라 부른다. 만약, 우리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이 적은 수의 가난한 자들로 이루어졌다고 했을 때 그들을 양육할 목회자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 목회자가 자비량으로 일해서 그의 가난한 성도를 도와줬을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언제부터 변질되었을까?
교회에 돈이 유입되면서 부터 이런 변질들이 나타났다. 역시 콘스탄틴이다. 그 후 돈 맛을 본 교회는 권력과 동행했다. 유럽은 교회가 곧 권력이었다. 또한, 그 전통에서 개신교도 탄생했다. 그리고, 현재에도 우리가 그 모습을 유지해 가고 있다. 지금의 유급 목회자 제도는 적은 무리의 가난한 성도의 교회와 양립할 수 없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국가에 의해 공인된 돈이 있는 교회에서 기원한 제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은 무리 가난한 성도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세운 진정한 교회였다.
따라서, 현대 교회는 이 유급 목회자 제도를 놓지 않은 한,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와 양립할 수 없는 교회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도저히 변화로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다. 혹자는 이 당시 이들이 이렇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임박한 종말을 기대했기 때문이고,우리와는 다르다고 하겠지만 나는 그런 종말론적 삶의 태도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잠깐 유하는 나그네로서,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면서 이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다가 각자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에 그 분을 만나면 된다. 부하려 하지 말자. 남보다 더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지 말자. 섬기자.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웃을 섬기자.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사랑하자. 열심히 일해서 나보다 더 가난한 자들을 섬기자.
우리가 세상적 성공에 취해 목이 굳어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자들에게 교회를 사교 클럽으로 제시하고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데에 드는 시간과 돈과 노력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쏟는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대 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이런 삶을 원하지 않을 것이고, 성도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아마도 많은 신자가 교회를 떠나리라.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다.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할까?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펌출처: https://is.gd/AaeN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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