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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인을 위한 설교문]
원제목: 하나님은 이 과부의 헌금을 좋아하셨을까? / 마가복음 12:38~44
설교자: 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수시로, 돈 얘기만 해서 교회 안 간다!
오늘부터 “우리는 예배에서 무엇을 하는가?”라는 주제로 지금 우리 예배 가운데 중요한 네 가지 순서인 봉헌, 기도, 찬양, 말씀선포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봉헌, 곧 헌금에 대해서 얘기할 텐데 오늘 마무리하지는 못하고 다음 주일까지 이어가겠습니다.
요즘 교회에 다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교회에 가면 돈 얘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게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비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안 다니는 가장 큰 이유도 같습니다. 이상하죠?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교회 리더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얘기입니다.
온갖 명분을 내세워서 헌금을 거둬들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기회만 나면 돈 얘기를 해대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면 질색을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왜 고쳐지지 않을까요? 그것은, 돈 얘기를 하는 게 싫은 사람은 교회를 떠나도 좋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돈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뭐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이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걸 여러분은 다 알 겁니다. 그렇지요? 제가 헌금에 대해 언제 마지막으로 설교했는지 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제가 목회한 20여 년 동안 한두 번 했을 겁니다. 헌금에 대해서 너무 많이 얘기하는 것은 분명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헌금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하면 얘기해야겠지요.
제가 얼마 전에 제자회 교단에 가입하기 위한 절차로 두 번째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때 인터뷰하는 목사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회도 하나의 조직이므로 교회가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재정적인 기반을 갖춰야 하는데 작은 교회의 목사인 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 대답은 다음 주일 헌금에 대한 설교를 마무리할 때 얘기하겠습니다.
헌금은 제물이 아니다
헌금에 대한 올바른 정의와 어떤 태도로 헌금해야 하는지를 말하기 전에 먼저 헌금은 무엇이 아닌지, 헌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첫째, 헌금은 구약성서 시대에 제사 때 바쳐진 ‘제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삶과 문화의 모든 면에서 당시 최고 문명권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종교와 두 문명권의 종교에는 다른 점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이스라엘은 일신교였고 두 문명권은 다신교였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 문명도 그랬기에 이스라엘은 두 문명권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문명권에서 종교의 중심은 제사였습니다. 제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궁극적 원인인 신들의 호의를 얻어서 재난과 화(禍)는 피하고 복은 더 많이 받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아침저녁으로 신상에게 제물로 음식을 바쳤고, 화려한 옷을 입혔으며, 미사여구를 동원한 기도와 찬양을 바쳤습니다. 제사에 정성을 쏟았고 행여 제사를 잘못 드려서 신들의 분노를 살까 봐, 전전긍긍했습니다. 제물은 화를 피하고 복을 받는 수단이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의 야훼 종교와 두 문명권의 종교 사이에는 작지 않은 차이가 있었지만, 제사를 행하는 목적 만큼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도 화를 피하고 복을 받기 위해 야훼에게 제사를 드렸던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히 파고들어가서 얘기해야 오해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여유가 없습니다. 다만 제사를 하고 제물을 바치는 기본 목적은 이스라엘과 두 문명권이 다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헌금이 이런 겁니까? 여러분이 하는 헌금이 제사에서 바쳤던 제물과 같습니까? 하느님에게 잘 보여서 화를 피하고 복을 받으려고 헌금하는 것인가 말입니다.
이렇게 물으면, 다들 아니라고 대답할 겁니다. 심지어,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도 대부분은 아니라고 대답하겠지요. 복 받으려고 헌금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해서 헌금한다고 말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 감사의 표시를 왜 꼭 돈으로 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감사의 표시를 꼭 헌금이라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도 설교 마지막에 하겠습니다.
십일조는 헌금이 아니었다
헌금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십일조헌금’에 대한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은 반드시 해야 하는 하느님의 명령이다, 그걸 안 하면 하느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들어왔습니다. 그렇지요? 이 얘기는 말라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말라기서 전체의 내용은 모르지만 거기 십일조헌금에 대한 얘기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말라기서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라기서를 구약성서 맨 앞에서부터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말라기서는 구약성서의 맨 끝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십일조 안 하면 하느님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이고 온전하게 십일조를 하면 하느님이 하늘 문을 열어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쏟아부어주겠다는 말이 쓰여 있다는 사실은 압니다. 목사들이 하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얘기해서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십일조를 충실히 하면 복이 쏟아지고 안 하면 벼락 맞습니까? 저는 안 그런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여러분 중에도 십일조를 해서 복 받았다고 믿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은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복을 받았다면 그 이유가 십일조 때문인지 잘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십일조 헌금 한 것 말고는 하느님에게 복 받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전혀 없습니까?
하나의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그 원인이 뭔지를 파악하는 일은 그리 쉬운 게 아닙니다. 대개는 여러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하나의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십일조해서 복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십일조는 요즘 말로 하면 ‘헌금’이 아니라 ‘세금’이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해서 열두 지파가 공평하게 땅을 분배했는데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않고 열한 지파 속에 섞여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야훼의 계명을 가르치고 제사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땅과 농사가 최대의 산업이던 시대에 땅이 없다는 것은 곧 생존수단이 없음을 뜻합니다. 십일조는 이렇듯 땅을 분배받지 않은 레위지파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제도였습니다. 곧 십일조는 레위지파를 위해 열한 지파가 공평하게 낸 복지세금이었던 겁니다. 이는 넓게 보면 하느님께 바쳐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하느님의 호의를 얻어 복을 받아내려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의 제물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헌금이 됐고 하느님이 복을 내려주는지 안 내려주는지 시험하는 수단이 됐을까요? 거기에는 역사적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기원전 586년에 유다왕국이 바빌론에 멸망당했고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됐습니다. 성전 파괴는 곧 야훼 종교의 중심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는데 그들 중에는 바빌론의 종교와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 고유의 전통적인 야훼 종교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종교의 중심인 성전이 없어졌으니 그들은 다른 데서 그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성전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율법을 글자 그대로 준수하는 일, 안식일을 지키는 일, 할례를 시행하는 것 등이었는데 여기에 세금이던 십일조를 제물로 달리 이해하게 된 것도 포함됩니다. 성전이 없어졌으니 더 이상 제물을 드릴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이 변화를 초래했지요.
본래, 세금이던 십일조를 야훼께 바치는 제물로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서 딱 한 번 말씀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그대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대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습니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습니다.”라고 한 마태복음 23장 23절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어로 바꿔서 읽는데 이렇게 율법학자들을 비난하고 꾸중하는 말씀을 경어로 읽으려니 좀 어색하긴 하네요. 좌우간 무슨 해설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박하, 회향, 근채 같은 물질과 정의, 자비, 신의 같은 비물질적 가치를 대립시킵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바치는 것과 사람을 향해 실천하는 것도 대조합니다. 왜 하필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예로 들었을까요?
그것들은 사람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 아닙니다. 하느님에게 바쳤던 제물들 중에서 비싸고 귀중한 것들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사소한 것들이었지요. 율법학자들은 그런 것들까지 십일조를 바쳤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것들보다는 생존에 필요한 밀가루와 올리브와 무화과가 더 소중합니다.
제물 중에서도 그것이 더 중요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