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투 2014.10.10
다른 복음에 해당되는 십일조 폐지
개혁과진보
십일조 찬성론자들 중의 일부는 반대론자들에게 서슴지 않고 마귀라고 정죄한다. 문맥과 정황을 무시하고서는 성경에 십일조 하라고 되어 있고 예수님이 십일조 하라고 하셨는데 반대하기에 마귀라는 것이다.
교회의 선한 사업을 위해 교회 재정을 확보하려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을 가로막기에 마귀라는 것이다. 잘못된 관점에 기초한 잘못된 열성이 빚어내는 참극이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참극이다.
십일조에는 모든 소득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담겨있다. 십일조의 정신이라고 이야기된다. 그 정신 자체는 귀하고 아름답다. 그렇다고 십일조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실 율법의 십일조에도 그 정신이 담겨있다.
그러한 정신이 담긴 십일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셨다.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셔서 교회에게 주셨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인 씨다.
율법의 십일조와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신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인 씨. 율법의 십일조는 아무리 좋은 설명을 갖다 붙인다고 하더라도 다른 복음이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약화시키거나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옮기시고 새 언약만으로 살아가도록 하신 그분의 뜻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에 대해 천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말한다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다(갈 1:9). 십일조 요구는 다른 복음인데, 십일조를 강조함에 대해 하나님께서 저주하실 지에 대해서는 뭐라 말을 못하겠다. 나의 영역 밖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성경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다른 복음의 의미에 십일조가 해당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말할 뿐이다. 그 이후의 선택은 각자 자신들의 몫이다.
율법에는 안식년과 희년 규례가 있다. 안식년에는 땅을 경작하지 않고 그 이전의 소출로 한 해를 살아야 한다. 희년에는 땅을 경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안식년과 이어지는 희년, 두 해를 경작하지 않고 안식년 이전의 소출로 살아가야 한다.
많은 소출을 얻은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양식을 나누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성경학자들은 이스라엘에서 희년 규례가 지켜지지 않았다고 본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부자라면 부자라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 것이고 가난한 자는 가난해서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호주머니를 열어서 그 안의 재물을 내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만큼 호주머니 안의 재물을 받아내기가 어렵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복음 전파에 힘을 쏟는다. 이 사회에서 복음을 드러내며 복음의 정신을 실천하여야 한다. 저절로 되지 않는 일이다. 많은 재정을 필요로 한다. 신자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하여야 하고 그 안의 물질을 내놓게 만들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십일조는 최상이다. 교회 재정 확보에 너무나도 유익하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재정을 확보해서 나쁜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여러 방면의 신앙적인 일에 사용하려는 것이다. 더욱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에서 벗어난 잘못이다.
하나님 신뢰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을 따르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각각의 시대에 교회에게 원하시는 방식을 파악하고 따르는 것이 그분을 신뢰하는 모습이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재정 확보의 방식이 십일조가 아니다.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인 씨다. 성도들이 그 원리를 깊이 숙지하고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기꺼이 씨(연보)를 심도록 하는 방식이다.
십일조에 비하여 훨씬 복잡하고 너무나 어렵다. 이스라엘이 십일조는 그래도 했지만 안식년이나 희년 규례는 전혀 지키지 않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강제성이 아닌 자발성에 의존하는 것은 언제나 큰 위험 부담을 가진다.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제성을 통하여 필요한 것을 확보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 유혹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다. 현실이다. 얼마든지 공감이 된다.
그러나, 유혹은 어디까지나 유혹이다. 악한 자가 하나님의 자녀를 넘어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술수이다.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비록 그 과정이 쉽지 않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씨에 해당하는 부분을 잘 분별하고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심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포로 회복 언약인 새 언약,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완성된 새 언약. 사람의 일생으로 생각하면 탄생기, 유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연결시킬 수 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완성된 새 언약의 시대이다. 사람의 생애와 연관시키면 자신의 생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장년이다.
물질 사용에 있어서 강제성을 완전히 없애시고 자발성을 부여하심은 장년에게 주신 복이다. 십일조는 편리성을 앞세워 그 복을 발로 걷어차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겸손하게 받아야 한다. 철저하게 자발성에 의존하는 씨(연보)를 통한 재정 확보라는 복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십일조는 하루 속히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율법 준수 요구를 종의 멍에를 메는 것으로 규정하였다(갈 5:1). 그렇게 가르친 유대인 교사들에 대해 갈라디아 교회를 이간 붙여 저희에 대해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갈 4:17)고 경계하였다. 십일조도 종의 멍에이다. 또한 그것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열심 내게 하려는 것이다. 십일조를 하면 물질적인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이들에게 온갖 좋은 것을 바치는 모습에서 확인된다. 목사를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교회 재정 확보에 있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역사하시기에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된다. 오히려 교회 재정이 더욱 풍성해질 수도 있다. 성도들이 성경적인 재정 사용에 대해 공감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고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재정을 성경적인 원리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다.
십일조를 폐지한다고 교회가 허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온전히 의지한다면 교회는 아름답게 세워질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성경적인 모습으로 아름답게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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