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초교파, 하나님의 근심을 가집시다, 예수 복음은 들을귀로 들어야 합니다


 동영상이 안보일 때: https://youtu.be/kzoRNQ-J9C8

by 박한수 목사 (제자광성교회)

개신교, 초교파, 예수는 화목제물이 되셨다, 신약교회는 각자 연보 한가지 뿐이다


원제목: 예수님께서 요즘도 십일조를 내라는 말씀인가?


 동영상이 안보일 때: https://youtu.be/Gxzo_s5d-NA

by James Kim    (Pastor.James Kim)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중에서 제일 많은 것이 십일조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물을 거론하시면서 십일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전보다 금을 소중히 여기고, 제단보다 예물을 귀하게 생각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말하는 공의와 정의보다는 십일조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드린다면 율법의 정신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십일조는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오해해서 보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할 것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궁금한 것은 메일로 연락을 주세요!!

     : internetbiblechurch@gmail.com 

개신교, 초교파, 가톨릭은 이교다, 개신교는 성경의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 (천주교)는

개신교를 진정한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개신교회가 천주교회를

형제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가톨릭은 개신교를

종교다원주의및 가톨릭교리로 통합시키고 싶어한다. 


[1] 2분 https://youtu.be/j2IOv7MnkW0


 

[2] 4https://youtu.be/sEaJPmuv5g8

 

 

by BreadTV빵티비

개신교, 초교파, 육의 사람이 예수로 영의 사람되는 것이 거듭남이다, 천국지옥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한복음 3:1~6)


 동영상이 안보일 때: https://youtu.be/AAICDzBQHKE

by 그리스도편지 선교회

개신교, 초교파, 성경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개신교 목사가 많다, 영적으로 무지몽매한 장로 집사가 많다


참예수교회는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1917년 중국의 북경에 처음으로 설립되었고, 후에 전세계로 전파되어 현재 60여 나라에 분포되어 있다. 한국에는 30여 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다. 참예수교회는 다른 기독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 우리는 예수가 천지의 창조자이시고, 또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육으로 세상에 오신 참 하나님이시며, 끝날에 모든 이를 심판하실 자이심을 믿는다. (딤전 3:16, 고전 15:3·4, 행 4:12) 아울러,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으로 진리를 전하는 유일한 경전임을 믿는다. (딤후 3:16) 그러나, 참예수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분명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

 

본교회는

사도교회를 모델로 삼고 있으며,

사람들에 의하여

왜곡되지 않은

사도교회의 정확한 재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크랩]  


 참예수교회는 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나요? 


1)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세 위격,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시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신관(神觀)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신관과 충돌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신 6: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 (막 12:29)


삼위일체 사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세 분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어떤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지 본질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유일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속사(救贖史) 안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형태로 구속의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구속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 아들, 성령의 형태로 계시다가 그 사역을 마치셨을 때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 15:22-28)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5)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 3:21)

 

즉,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는 반면, 삼위일체 사상은 하나님께서 항상 세 위격의 형태로 계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한 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


이 구절에서 “이름”은 헬라어 원어(원어 기호와 발음 추가)로 보면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한 분이심을 의미하고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세례를 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음을 보게 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행 2:2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행 10:48)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 19:5)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거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일 5:20)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이것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 즉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5)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사 9:6)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는데,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알려 주며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겠느냐? 그들이 그들의 증인을 세워서 자기들의 옳음을 나타내고 듣는 자들이 옳다고 말하게 하여 보라." (사 43:9)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사 43:10)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2)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요 8:25-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9)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28)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행 22:14)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 3:16)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 22:13)


3) 삼위일체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바로 니케아 공의회(주전 325년)에 기원을 둡니다. 이 회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 본질이라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니케아 신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니케아 신조는 사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함께 오늘날 카톨릭의 주요 신조 중 하나입니다.) 삼위일체 사상은 바로 이 니케아 신조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케아 신조에 보면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다,” 라는 부분이 나오게 되는데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로부터 나셨다는 이 부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영원하다는 부분과 모순이 됩니다.


또한, 삼위일체 사상을 가장 잘 정리한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26항을 보면 삼위가 함께 영원하며 동등하다고 되어 있는데, 33항에서는 성자에 대해서 신성으로는 성부와 동등 되나 그의 인성으로는 성부보다 낮으신 분이라 말하는 모순된 이론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는 모순된 신학 사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삼위일체는 인간의 사상에서 나온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마지막 항에는 이 신앙이 참되며, 이 신앙을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개신교에서는 이 부분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가 아닌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사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본회는 삼위일체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을 가집니다.


펌출처: http://tjc.or.kr/faq-god-24-2/

개신교, 초교파, 구약을 도용한 십일조를 즉시 중단하라, 각자 연보만 실천하자


 동영상이 안보일 때: https://youtu.be/nyX8Df9uds0

재생 시작 후, 약 30초 정도 오디오가 안들립니다. 양해를 부탁합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설교문]


원제목: 하나님은 이 과부의 헌금을 좋아하셨을까? / 마가복음 12:38~44

설교자: 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수시로, 돈 얘기만 해서 교회 안 간다!

오늘부터 “우리는 예배에서 무엇을 하는가?”라는 주제로 지금 우리 예배 가운데 중요한 네 가지 순서인 봉헌, 기도, 찬양, 말씀선포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봉헌, 곧 헌금에 대해서 얘기할 텐데 오늘 마무리하지는 못하고 다음 주일까지 이어가겠습니다.

요즘 교회에 다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교회에 가면 돈 얘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게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비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안 다니는 가장 큰 이유도 같습니다. 이상하죠?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교회 리더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얘기입니다.


온갖 명분을 내세워서 헌금을 거둬들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기회만 나면 돈 얘기를 해대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면 질색을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왜 고쳐지지 않을까요? 그것은, 돈 얘기를 하는 게 싫은 사람은 교회를 떠나도 좋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돈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뭐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이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걸 여러분은 다 알 겁니다. 그렇지요? 제가 헌금에 대해 언제 마지막으로 설교했는지 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제가 목회한 20여 년 동안 한두 번 했을 겁니다. 헌금에 대해서 너무 많이 얘기하는 것은 분명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헌금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하면 얘기해야겠지요.


제가 얼마 전에 제자회 교단에 가입하기 위한 절차로 두 번째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때 인터뷰하는 목사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회도 하나의 조직이므로 교회가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재정적인 기반을 갖춰야 하는데 작은 교회의 목사인 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 대답은 다음 주일 헌금에 대한 설교를 마무리할 때 얘기하겠습니다.

헌금은 제물이 아니다

헌금에 대한 올바른 정의와 어떤 태도로 헌금해야 하는지를 말하기 전에 먼저 헌금은 무엇이 아닌지, 헌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첫째, 헌금은 구약성서 시대에 제사 때 바쳐진 ‘제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삶과 문화의 모든 면에서 당시 최고 문명권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종교와 두 문명권의 종교에는 다른 점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이스라엘은 일신교였고 두 문명권은 다신교였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 문명도 그랬기에 이스라엘은 두 문명권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문명권에서 종교의 중심은 제사였습니다. 제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궁극적 원인인 신들의 호의를 얻어서 재난과 화(禍)는 피하고 복은 더 많이 받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아침저녁으로 신상에게 제물로 음식을 바쳤고, 화려한 옷을 입혔으며, 미사여구를 동원한 기도와 찬양을 바쳤습니다. 제사에 정성을 쏟았고 행여 제사를 잘못 드려서 신들의 분노를 살까 봐, 전전긍긍했습니다. 제물은 화를 피하고 복을 받는 수단이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의 야훼 종교와 두 문명권의 종교 사이에는 작지 않은 차이가 있었지만, 제사를 행하는 목적 만큼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도 화를 피하고 복을 받기 위해 야훼에게 제사를 드렸던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히 파고들어가서 얘기해야 오해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여유가 없습니다. 다만 제사를 하고 제물을 바치는 기본 목적은 이스라엘과 두 문명권이 다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헌금이 이런 겁니까? 여러분이 하는 헌금이 제사에서 바쳤던 제물과 같습니까? 하느님에게 잘 보여서 화를 피하고 복을 받으려고 헌금하는 것인가 말입니다.


이렇게 물으면, 다들 아니라고 대답할 겁니다. 심지어,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도 대부분은 아니라고 대답하겠지요. 복 받으려고 헌금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해서 헌금한다고 말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 감사의 표시를 왜 꼭 돈으로 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감사의 표시를 꼭 헌금이라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도 설교 마지막에 하겠습니다.

십일조는 헌금이 아니었다

헌금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십일조헌금’에 대한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은 반드시 해야 하는 하느님의 명령이다, 그걸 안 하면 하느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들어왔습니다. 그렇지요? 이 얘기는 말라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말라기서 전체의 내용은 모르지만 거기 십일조헌금에 대한 얘기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말라기서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라기서를 구약성서 맨 앞에서부터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말라기서는 구약성서의 맨 끝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십일조 안 하면 하느님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이고 온전하게 십일조를 하면 하느님이 하늘 문을 열어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쏟아부어주겠다는 말이 쓰여 있다는 사실은 압니다. 목사들이 하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얘기해서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십일조를 충실히 하면 복이 쏟아지고 안 하면 벼락 맞습니까? 저는 안 그런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여러분 중에도 십일조를 해서 복 받았다고 믿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은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복을 받았다면 그 이유가 십일조 때문인지 잘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십일조 헌금 한 것 말고는 하느님에게 복 받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전혀 없습니까?


하나의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그 원인이 뭔지를 파악하는 일은 그리 쉬운 게 아닙니다. 대개는 여러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하나의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십일조해서 복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십일조는 요즘 말로 하면 ‘헌금’이 아니라 ‘세금’이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해서 열두 지파가 공평하게 땅을 분배했는데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않고 열한 지파 속에 섞여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야훼의 계명을 가르치고 제사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땅과 농사가 최대의 산업이던 시대에 땅이 없다는 것은 곧 생존수단이 없음을 뜻합니다. 십일조는 이렇듯 땅을 분배받지 않은 레위지파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제도였습니다. 곧 십일조는 레위지파를 위해 열한 지파가 공평하게 낸 복지세금이었던 겁니다. 이는 넓게 보면 하느님께 바쳐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하느님의 호의를 얻어 복을 받아내려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의 제물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헌금이 됐고 하느님이 복을 내려주는지 안 내려주는지 시험하는 수단이 됐을까요? 거기에는 역사적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기원전 586년에 유다왕국이 바빌론에 멸망당했고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됐습니다. 성전 파괴는 곧 야훼 종교의 중심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는데 그들 중에는 바빌론의 종교와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 고유의 전통적인 야훼 종교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종교의 중심인 성전이 없어졌으니 그들은 다른 데서 그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성전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율법을 글자 그대로 준수하는 일, 안식일을 지키는 일, 할례를 시행하는 것 등이었는데 여기에 세금이던 십일조를 제물로 달리 이해하게 된 것도 포함됩니다. 성전이 없어졌으니 더 이상 제물을 드릴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이 변화를 초래했지요.


본래, 세금이던 십일조를 야훼께 바치는 제물로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서 딱 한 번 말씀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그대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대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습니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습니다.”라고 한 마태복음 23장 23절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어로 바꿔서 읽는데 이렇게 율법학자들을 비난하고 꾸중하는 말씀을 경어로 읽으려니 좀 어색하긴 하네요. 좌우간 무슨 해설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박하, 회향, 근채 같은 물질과 정의, 자비, 신의 같은 비물질적 가치를 대립시킵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바치는 것과 사람을 향해 실천하는 것도 대조합니다. 왜 하필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예로 들었을까요?


그것들은 사람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 아닙니다. 하느님에게 바쳤던 제물들 중에서 비싸고 귀중한 것들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사소한 것들이었지요. 율법학자들은 그런 것들까지 십일조를 바쳤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것들보다는 생존에 필요한 밀가루와 올리브와 무화과가 더 소중합니다.


제물 중에서도 그것이 더 중요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소한 것까지 세심히 십일조로 바쳤던 그들이 정의. 자비. 신의와 같은, 사람 사는 사회에서 소중한 가치이고 계명이 강조하는 가치를 소홀히 한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는 하느님에게 직접 가는 게 아니라, 사람과 이웃이라는 우회로를 거쳐서 가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구약성서에서 십일조 성격이 변화한 것이나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근거해서 생각해 보면 십일조는 흔히 생각하듯이 철칙처럼 지켜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걸로 하느님을 시험해 볼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을 성실하게 한다고 해서 복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걸 안 한다고 해서 벌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제도와 계명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변했고, 적용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본래는 세금 성격이던 십일조가 제물로 성격이 달라진 것도 그 하나의 보기입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이 과부의 헌금을 좋아하셨을까?

헌금에 관한 마지막 오해는 오늘 읽은 마가복음 12장에 나오는 과부의 헌금에 관한 오해입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하는지를 보고 계셨답니다. 많은 돈을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는데 한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넣더라는 거죠. 예수님은 그걸 보시고는 제자들을 불러 놓고 가난한 과부가 그 누구보다 많이 헌금했다고, 다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떼어 넣었지만 가난한 과부는 가진 것 모두 곧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 과부의 행위를 칭찬합니다. 쩨쩨하게 계산하지 않고 과감하게 전 재산을 털어넣은 것은 큰 믿음의 행위라는 겁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과부의 행위는 하느님에게 크게 보상받았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옥합을 깨뜨려 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줬던 여인의 얘기처럼 이 얘기도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전해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 과부의 헌금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그렇게 못 하지만 그래도 칭찬받을 만한 믿음의 행위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무모한 만용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의 친구나 가족이 하나 밖에 없는 집을 팔아서 교회 건축헌금으로 내겠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를 칭찬하겠습니까, 아니면 말리겠습니까, 그도 아니면 내 일이 아니니까 개입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가 죽기 직전에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면 150% 하지 말라고 말릴 겁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립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가진 돈 다 헌금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좋은 일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당신이 뭔데 하느님의 일을 맘대로 이래라저래라 하느냐?”고 따지면 “그러는 당신은 뭔데 내가 하는 하느님의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느냐?”며 호통 치겠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본문에서 예수님이 과부의 행위를 칭찬하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게 무슨 턱없는 말이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녀가 누구보다 많이 헌금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왜 그런지도 설명하셨지요.


다른 사람은 가진 것 일부를 헌금했지만 과부는 전부를 털어 넣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칭찬이 아닙니다. 물론, 꾸중이나 비판으로 보기에도 좀 그렇습니다. 예수님 관심은 과부 헌금행위가 아니라, 헌금제도 그 자체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38절부터 읽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주관했고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그들의 위선과 겉치레를 예수님은 가차 없이 비판하셨습니다. 다른 데서는 이들을 가리켜 자기들도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 가로막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과부 가산을 삼킨다’고 말씀했습니다. 과부는 율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대표적인 약자들 중 하나입니다. 구약성서의 계명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언자들은 이들을 돌보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율법학자들이 과부들 가산을 삼켰다고 말씀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요?


그들은 어떤 수단으로 과부의 가산을 삼켰을까요? 사기를 쳐서? 강도짓을 해서? 강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바치는 제물(헌금)이란 명목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제도를 통해 ‘합법적으로’ 과부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는데 뭐 하러 불법을 저지르겠습니까?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헌금제도라는 합법적인 수단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겁니다.


과부로 하여금 전 재산을 털어넣고 그것을 믿음의 행위로 착각하도록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런 과부의 행위를 칭찬하셨을 리 없다고 믿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과부로 하여금 전 재산을 털어 넣게 만드는 제도를 비난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과부의 헌금행위를 가리켜서 훌륭한 믿음의 행위이니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펌출처: https://is.gd/HEslrS

 

개신교, 초교파,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신을 만들었다, 삼위일체는 바벨론교 삼신 일체 형상이다

 

 동영상이 안보일 때: https://youtu.be/hHeVQuj8DW4

by 정병진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동탄명성교회)


[설교문 스크랩]


원제목: 아들 혹은 그리스도는 만물이 있기 전에도 존재했을까? (잠 8:12~31)


아들 혹은 그리스도는 만물이 조성되기도 전부터 계셨을까? 삼위일체론자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심지어, 여호와의 증인들도 그렇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사실일까? 저마다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재하셨는지를 알아보고 성경적인 답변을 들어보기로 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이 있기 전에 선재하셨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은 선재하셨다. 하지만, 아들과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는 만물이 있기 전에는 선재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 밖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이미 아들과 그리스도는 선재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어떤 이는 이 대답을 좀 의아하게 생각할는지 모르나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답변이다. 이제는 이 답변이 왜 가장 성경적인 답변인지에 대해 삼위일체론자들의 주장과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을 가지고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삼위일체론자들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대해 살펴보자.


삼위일체론자들은 그리스도 곧 성자(아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따로 인격적으로 계셨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만세 전부터 성부 하나님께 함께 계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 견해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세 전에 성부와 성자 혹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한 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말씀의 근거를 잠깐 살펴 보자.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나는 처음으로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사 44: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나의 이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이후에도 없으리라." (사 43:10, 28)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고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6)


 설교문을 계속 보세요: http://m.blog.daum.net/alleteia/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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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senger 小考]


한국 개신교 삼위일체(성삼위일체=신약성경과 초대교회에 없던 삼위일체를 더 치장하여 호칭) 문제는 매우 심각하고 민감한 주제입니다. 그럼에도, 복음 전도자가 연재해야 하는 이유는? 삼위일체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리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로마 황제가 종교인들과 만든 것을 공의회 투표로 결정했으며,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몰아 종교재판에 세운 다음, 고문해서 죽였습니다. 개신교 장로-집사-목사 입에는 나와 조금만 다르면 이단이라는 습관적인 언어 구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를 철저한 이단으로 생각합니다. 교회로 생각하지 않아요.


평화의 표면적 가면을 쓰고 연대하는 것은 종교다원주의(가톨릭-교회 밖의 구원문제: https://is.gd/7hMZdq ) 를 목표로 접근하는 것뿐이지요. 결단코, 개신교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참고로, 가톨릭은 WCC 비회원 (WCC 감시자=WCC 옵저버) 입니다. 또, WCC는 교단의 교회수가 많은 것을 최우선 가입 조건으로 세웠습니다. 교회수가 많은 4개 교단의 WCC 가입은 교단총회에서 총대로 참석한 목사와 장로들이 서명해서 WCC에 제출한 것으로 압니다. WCC의 엄격한 심사를 통해서 승인을 받은 것이지요. 반대로, WCC 탈퇴는 가입보다 훨씬 쉽습니다. 즉시, WCC를 탈퇴하십시오!


종교다원주의-삼위일체-사도신경 연결고리는 가톨릭입니다. 가톨릭의 종교이념은 바벨론 태양신 숭배 사상인데, 여기에다 성경을 짜깁기한 이방종교라고 보면 됩니다. 현재, 개신교는 작은 가톨릭처럼 가톨릭 교리와 전통이 혼합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목사는 영적 소경으로 그것을 알든..모르든..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소수의 장로-집사-목사가 세례 요한처럼 외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음녀교회 가톨릭을 통한 사단의 독주(혼합주) 입니다. 이것을 마시는 교회와 영혼들은 그 구원에 위태로움이 따릅니다. 직분 외, 교단및 교회의 여러 직함을..바울처럼 배설물로 여기십시오!


끝까지, 1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님께서 영의 눈을 열어 깨닫게 하여 깨어난 설교자와 전도자는 선포하십시오!



개신교, 초교파, 삼위일체라는 가톨릭 용어를 폐기하자, 예수 하나님 한분 뿐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설교자: 정병진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동탄명성교회)


첫째,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가보면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 뿐입니다.


둘째, 그러나 그분이 사람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째, 또한 그분이 직접 인간의 죄를 사하고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다시 말해 피흘려 죽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셨는데, 그때에는 자신을 아들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바로 아들로 오신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넷째, 그분이 죽어 부활하신 다음에는 원래 있던 하늘(천국)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영을 보내주셨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믿고 있었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란 어떤 것일까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세 분으로 존재하셨다. 즉, 두 번째 위(位)를 취하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부터 이미 하늘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아들로 존재하셨다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만세 후로도 세 분으로 존재하신다. 즉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그분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 즉, 성부 하나님께서는 높이 들린 보좌에 영원 전부터 앉아 계셨고, 그 오른편 보좌에 예수께서 앉아 계신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교리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곁에 아들 신(하나님)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정말로 삼위일체로 존재하셨다면,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 중 누구도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었던 자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 전체가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한 분으로 알고 있었고, (신 6:4) 또한, 한 분 하나님을 믿으면서 오실 메시야를 믿었으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보면 한분 하나님을 믿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엘리야.. 모두 천국에 들어간 것으로 나옵니다. (마 8:11) 만약, 삼위일체 하나님 즉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각각 세 위(位) 혹은 세 분으로 계셨고, 만세 후까지 세 위 혹은 세 분으로 계시지만 한분이시라는 교리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고 한다면,


왜? 구약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하나같이 동일하게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하셨으며, 삼위일체를 몰랐던 구약 성도들을 어떻게 천국으로 데려가실 수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소위 삼위일체론자들이 말하는 세 분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은 단 한사람도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한다고 믿은 사람이 없었으며, 그들 모두는 한분 하나님만을 믿었고, 회개하면서 오실 메시야를 믿어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하생략) 


펌출처: http://blog.daum.net/alleteia/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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