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한복음 3:1~6)
개신교, 초교파, 성경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개신교 목사가 많다, 영적으로 무지몽매한 장로 집사가 많다
참예수교회는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1917년 중국의 북경에 처음으로 설립되었고, 후에 전세계로 전파되어 현재 60여 나라에 분포되어 있다. 한국에는 30여 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다. 참예수교회는 다른 기독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 우리는 예수가 천지의 창조자이시고, 또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육으로 세상에 오신 참 하나님이시며, 끝날에 모든 이를 심판하실 자이심을 믿는다. (딤전 3:16, 고전 15:3·4, 행 4:12) 아울러,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으로 진리를 전하는 유일한 경전임을 믿는다. (딤후 3:16) 그러나, 참예수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분명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
본교회는
사도교회를 모델로 삼고 있으며,
사람들에 의하여
왜곡되지 않은
사도교회의 정확한 재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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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예수교회는 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나요?
1)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세 위격,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시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신관(神觀)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신관과 충돌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신 6: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 (막 12:29)
삼위일체 사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세 분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어떤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지 본질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유일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속사(救贖史) 안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형태로 구속의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구속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 아들, 성령의 형태로 계시다가 그 사역을 마치셨을 때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2-28)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행 2:35)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21)
즉,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는 반면, 삼위일체 사상은 하나님께서 항상 세 위격의 형태로 계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한 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이 구절에서 “이름”은 헬라어 원어(원어 기호와 발음 추가)로 보면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한 분이심을 의미하고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세례를 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음을 보게 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행 2:2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행 10:48)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행 19:5)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거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이것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 즉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5)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사 9:6)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는데,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알려 주며 이전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겠느냐? 그들이 그들의 증인을 세워서 자기들의 옳음을 나타내고 듣는 자들이 옳다고 말하게 하여 보라." (사 43:9)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요 8:25-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행 22:14)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3) 삼위일체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바로 니케아 공의회(주전 325년)에 기원을 둡니다. 이 회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 본질이라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니케아 신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니케아 신조는 사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함께 오늘날 카톨릭의 주요 신조 중 하나입니다.) 삼위일체 사상은 바로 이 니케아 신조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케아 신조에 보면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다,” 라는 부분이 나오게 되는데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로부터 나셨다는 이 부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영원하다는 부분과 모순이 됩니다.
또한, 삼위일체 사상을 가장 잘 정리한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26항을 보면 삼위가 함께 영원하며 동등하다고 되어 있는데, 33항에서는 성자에 대해서 신성으로는 성부와 동등 되나 그의 인성으로는 성부보다 낮으신 분이라 말하는 모순된 이론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는 모순된 신학 사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삼위일체는 인간의 사상에서 나온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마지막 항에는 이 신앙이 참되며, 이 신앙을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개신교에서는 이 부분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가 아닌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사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본회는 삼위일체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을 가집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예배에서 무엇을 하는가?”라는 주제로 지금 우리 예배 가운데 중요한 네 가지 순서인 봉헌, 기도, 찬양, 말씀선포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봉헌, 곧 헌금에 대해서 얘기할 텐데 오늘 마무리하지는 못하고 다음 주일까지 이어가겠습니다.
요즘 교회에 다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교회에 가면 돈 얘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게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비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안 다니는 가장 큰 이유도 같습니다. 이상하죠?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교회 리더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얘기입니다.
온갖 명분을 내세워서 헌금을 거둬들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기회만 나면 돈 얘기를 해대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면 질색을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왜 고쳐지지 않을까요? 그것은, 돈 얘기를 하는 게 싫은 사람은 교회를 떠나도 좋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돈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뭐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이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걸 여러분은 다 알 겁니다. 그렇지요? 제가 헌금에 대해 언제 마지막으로 설교했는지 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제가 목회한 20여 년 동안 한두 번 했을 겁니다. 헌금에 대해서 너무 많이 얘기하는 것은 분명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헌금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하면 얘기해야겠지요.
제가 얼마 전에 제자회 교단에 가입하기 위한 절차로 두 번째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때 인터뷰하는 목사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회도 하나의 조직이므로 교회가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재정적인 기반을 갖춰야 하는데 작은 교회의 목사인 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 대답은 다음 주일 헌금에 대한 설교를 마무리할 때 얘기하겠습니다.
헌금은 제물이 아니다
헌금에 대한 올바른 정의와 어떤 태도로 헌금해야 하는지를 말하기 전에 먼저 헌금은 무엇이 아닌지, 헌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첫째, 헌금은 구약성서 시대에 제사 때 바쳐진 ‘제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삶과 문화의 모든 면에서 당시 최고 문명권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종교와 두 문명권의 종교에는 다른 점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이스라엘은 일신교였고 두 문명권은 다신교였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 문명도 그랬기에 이스라엘은 두 문명권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문명권에서 종교의 중심은 제사였습니다. 제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궁극적 원인인 신들의 호의를 얻어서 재난과 화(禍)는 피하고 복은 더 많이 받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아침저녁으로 신상에게 제물로 음식을 바쳤고, 화려한 옷을 입혔으며, 미사여구를 동원한 기도와 찬양을 바쳤습니다. 제사에 정성을 쏟았고 행여 제사를 잘못 드려서 신들의 분노를 살까 봐, 전전긍긍했습니다. 제물은 화를 피하고 복을 받는 수단이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의 야훼 종교와 두 문명권의 종교 사이에는 작지 않은 차이가 있었지만, 제사를 행하는 목적 만큼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도 화를 피하고 복을 받기 위해 야훼에게 제사를 드렸던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히 파고들어가서 얘기해야 오해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여유가 없습니다. 다만 제사를 하고 제물을 바치는 기본 목적은 이스라엘과 두 문명권이 다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헌금이 이런 겁니까? 여러분이 하는 헌금이 제사에서 바쳤던 제물과 같습니까? 하느님에게 잘 보여서 화를 피하고 복을 받으려고 헌금하는 것인가 말입니다.
이렇게 물으면, 다들 아니라고 대답할 겁니다. 심지어,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도 대부분은 아니라고 대답하겠지요. 복 받으려고 헌금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해서 헌금한다고 말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 감사의 표시를 왜 꼭 돈으로 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감사의 표시를 꼭 헌금이라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도 설교 마지막에 하겠습니다.
십일조는 헌금이 아니었다
헌금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십일조헌금’에 대한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은 반드시 해야 하는 하느님의 명령이다, 그걸 안 하면 하느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들어왔습니다. 그렇지요? 이 얘기는 말라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말라기서 전체의 내용은 모르지만 거기 십일조헌금에 대한 얘기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말라기서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라기서를 구약성서 맨 앞에서부터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말라기서는 구약성서의 맨 끝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십일조 안 하면 하느님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이고 온전하게 십일조를 하면 하느님이 하늘 문을 열어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쏟아부어주겠다는 말이 쓰여 있다는 사실은 압니다. 목사들이 하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얘기해서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십일조를 충실히 하면 복이 쏟아지고 안 하면 벼락 맞습니까? 저는 안 그런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여러분 중에도 십일조를 해서 복 받았다고 믿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은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복을 받았다면 그 이유가 십일조 때문인지 잘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십일조 헌금 한 것 말고는 하느님에게 복 받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전혀 없습니까?
하나의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그 원인이 뭔지를 파악하는 일은 그리 쉬운 게 아닙니다. 대개는 여러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하나의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십일조해서 복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십일조는 요즘 말로 하면 ‘헌금’이 아니라 ‘세금’이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해서 열두 지파가 공평하게 땅을 분배했는데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않고 열한 지파 속에 섞여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야훼의 계명을 가르치고 제사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땅과 농사가 최대의 산업이던 시대에 땅이 없다는 것은 곧 생존수단이 없음을 뜻합니다. 십일조는 이렇듯 땅을 분배받지 않은 레위지파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제도였습니다. 곧 십일조는 레위지파를 위해 열한 지파가 공평하게 낸 복지세금이었던 겁니다. 이는 넓게 보면 하느님께 바쳐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하느님의 호의를 얻어 복을 받아내려는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의 제물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헌금이 됐고 하느님이 복을 내려주는지 안 내려주는지 시험하는 수단이 됐을까요? 거기에는 역사적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기원전 586년에 유다왕국이 바빌론에 멸망당했고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됐습니다. 성전 파괴는 곧 야훼 종교의 중심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는데 그들 중에는 바빌론의 종교와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 고유의 전통적인 야훼 종교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종교의 중심인 성전이 없어졌으니 그들은 다른 데서 그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성전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율법을 글자 그대로 준수하는 일, 안식일을 지키는 일, 할례를 시행하는 것 등이었는데 여기에 세금이던 십일조를 제물로 달리 이해하게 된 것도 포함됩니다. 성전이 없어졌으니 더 이상 제물을 드릴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이 변화를 초래했지요.
본래, 세금이던 십일조를 야훼께 바치는 제물로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서 딱 한 번 말씀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그대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대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습니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습니다.”라고 한 마태복음 23장 23절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어로 바꿔서 읽는데 이렇게 율법학자들을 비난하고 꾸중하는 말씀을 경어로 읽으려니 좀 어색하긴 하네요. 좌우간 무슨 해설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박하, 회향, 근채 같은 물질과 정의, 자비, 신의 같은 비물질적 가치를 대립시킵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바치는 것과 사람을 향해 실천하는 것도 대조합니다. 왜 하필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예로 들었을까요?
그것들은 사람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 아닙니다. 하느님에게 바쳤던 제물들 중에서 비싸고 귀중한 것들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사소한 것들이었지요. 율법학자들은 그런 것들까지 십일조를 바쳤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것들보다는 생존에 필요한 밀가루와 올리브와 무화과가 더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