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과 자유의지(1)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신학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예정'과 '자유의지'이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예정'이고, 어디까지가 '자유의지'인가 하는 것을 놓고 수 백년, 아니 수 천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둘 다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성경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지옥의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장로교 칼빈주의는 예정론을 수용하여 신학의 근간으로 삼았다.
때문에, 장로교 신학은 예정론과 하나님의 절대주권 위에 세워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반면, 알미니안주의나 웨슬레안주의를 지향하는 감리교나 성결교는 '인간의 자유의지'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알아내고, 진정 성경이 가는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증거는 선악과 나무를 두고 따먹지 말라고 하는데서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 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기 '임의'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뜻이다. 선악과는 먹지 말 것이며 먹는 날에는 죽을 것이라는 것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말이다.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지 않다면 이런 말씀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벽을 쌓아 놓든지, 아니면 아예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접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그 선악과를 따먹지 말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정론자들은 이렇게 주어진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가 들어옴으로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어떤 선을 행할 수도 없고 구원에 이를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 스스로는 어떤 선을 선택할 수도 없기 때문에 모든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 선택하는 일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어떤 의지도 없는 죽은 자와 같은 영혼을 살려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구원을 위해서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마치, 물에 빠진 자가 자기 스스로는 도무지 살 수 없는 지경에서 누군가가 들어가서 살려내 주어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해 주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입장에 구원을 받는데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요하다고 하는 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완전 타락이 되어 버렸고, 전적으로 무능해져 버렸는데 어떻게 인간 의지가 구원을 받는데,
어떤 효력을 발휘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계획을 하시고 어떤 자들은 구원을 받도록 작정하시고, 어떤 자들은 유기되어 지옥 가도록 계획을 해 놓았다는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그 주장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가?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는가? 선을 행할 의지가 완전히 소멸되고 만 것인가?
(창세기 4:6~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은 타락 후에 태어난 최초의 사람이다. 그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자 그는 안색이 변하고, 죄를 지으려고 하는 악한 마음이 생겼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죄의 소원을 다스리라고 하신다. 그것은 곧 가인에게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증거이다. 만약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무능력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다.
태어난 지 한 달이나 두 달쯤 된 아기에게 울고 싶어도 울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이 말이 통한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있는 자에게 '하라, 하지 말라' 할 수 있는 것이지, 자유의지가 없는 자에게 '하라, 하지 말라'라고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한 것은 가인에게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주의 예정론의 시각으로 볼 때는 이야기가 달라 진다. 아벨이 열납되는 제사를 드린 것도 가인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버림받는 것도 다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태어 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아벨은 구원받을 자로 택하고 가인은 버림받을 자로 택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아벨은 하나님께 무조건적 선택에 의해 은혜를 입었기에 구원에 이를 수 있었고, 가인은 무조건적으로 유기되었기에 그는 선을 행할 수 없는 비극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가? 이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아벨은 사랑하시고 가인은 미워하였기에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심판의 의미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심판이란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이나 의무를 감당하지 못했을 경우 그 책임을 묻는 것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놓은 상태에서 가인에겐 벌을 주고 아벨에겐 상을 준다는 것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판'의 의미는 없어지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고 프로그램화 한 것에 따라 움직인다는 결론밖에 나오질 않는다. 창세기 6장으로 넘어가 보자! 노아시대에 실상이 나온다.
(창세기 6:1~3)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말한다. '사람의 딸들'은 불신자를 지칭한다. 예정론자들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구원받도록 예정되었기 때문에 구원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좋아하는 의지'를 따라서 '사람의 딸들'을 선택한다.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그렇게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선택한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하도록 하나님의 예정한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경건하게 살다가 천국 들어오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미혹되어서 지옥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단의 미혹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결과 물심판이 왔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체가 된 것은 전혀 하나님의 계획이나 예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선택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때문에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의지'는 살아 있었던 것이고, 그 의지에 따라 천국의 길도, 지옥의 길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었기에 그래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기대를 걸었었다.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들로 세워지기를 말이다. 그렇지만 그 기대가 빗나가자 하나님은 사람 지었음을 후회하셨던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선을 행할 의지 자체가 죽었거나 상실되어 버렸다고 한다면 그런 기대 자체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칼빈주의 예정론자들은 인간에게 선을 행할 의지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는 어찌하여 당대에 의인이 될 수 있었는가? 노아 역시 선을 행할 의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 역시도 타락하여 멸망을 받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칼빈주의 예정론자들은 노아가 하나님의 예정과 택정함을 입었기에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상해져 버린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놀아나는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다. 과연 노아가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었기에 당대 의인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택하고 회개를 했기 때문에 당대 의인이 될 수 있었을까? 성경은 이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창세기 6:8~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노아가 당세에 완전한 자라 칭함을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그가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했기 때문이다.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기에 은혜를 입은 것이다.
(창세기 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보라! 하나님이 노아를 구원하신 것은 그에게서 의로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구원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노아가 의로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행했기에 때문에 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다. 칼빈주의 예정론과는 전혀 맞지가 않다. 노아 자신의 자유의지 결과였던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이 당시에도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어디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가?
120년간,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노아 가족만 구원하고 나머지는 죽이기로 작정했다면 120년간의 기회를 줄 필요가 없다. 그냥 심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 가족만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자들을 사랑하셨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구원받아 천국 오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이다.
노아 당시 홍수로 죽은 자들은 자기의 자유의지로 회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의지로 구원을 져버린 것이지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정론과 자유의지의 문제는 아브라함에게서도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창세기 17장 1-2절 말씀을 보라!
(창세기 17:1~2)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완전할 것'을 요구하신다. 칼빈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런 것을 요구하실 수 없지 않겠는가? 선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인간에게 왜 하나님은 '완전'할 것을 요구하시는가? 그것은 곧 아브라함에게 '완전'히 행할 수 있는 의지의 결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하는 말은 맞지 않다.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되는 복을 받는 것도 그렇다. 그가 하나님께 부름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를 지명하여 불렀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다 해서 무조건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열국의 아비로 만들어 주었는가? 아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고 통과되었을 때 열국의 아비가 되는 복을 주셨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 예정이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하느냐 못하느냐는 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바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한 시험이다. 아브라함이 거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유의지로 아들을 바쳤던 것이다.
그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전혀 손댈 수 없는 부분이다. 오로지 아브라함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부분이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도록 자유의지까지 간섭한다면 더이상 인간이 아닌 로봇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온전한 자유의지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 그 시험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셨다.
(창세기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을 위해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위를 보고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준행하는 것을 보고서 복을 내리신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했더라도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그 자유의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해서 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자료출처: http://me2.do/5sAAvN1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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