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초교파, 삼위일체가 성경에 있다고? 하나님이 세분이면서 한분이라고?
삼위일체설의 역사적 실체
교독기 2006. 09. 10
삼위일체설! 그것에 대해 고찰해 보기 위해서, 우선 그 역사적인 상황에 대해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생전의 예수는 자신을 여호와와 동일시하지 않았으며, 초기 교회에서는 신과 예수를 동일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삼위일체설이란? 종교를 정치에 이용해 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날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때엔, 당시 로마에서 스스로 황제라 지칭하는 사람이 6명이나 되었던 혼란의 시기였다고 한다. 로마의 황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식의 강력한 황제가 아니라, 황제는 프리켑스(princeps=제 1의 시민)또는 가이사(caesar)로 불렸으며, 민주주의와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인의 자유로운 사상때문에,
시이저 마저도 황제가 되려다가 공화파에게 로마시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암살 당하기까지 했으며, 그의 양아들 옥타비우스는 황제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프리켑스라는 명칭을 썼다. (옥타비우스는 그 명칭보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존엄한 자 라는 명칭을 들었음) 그 후, 폭군으로 알려진 칼리귤라(=가이우스)와 네로황제가 암살당한 후,
군인 황제시대 서기 69년에는 한해 동안 무려 4명의 황제가 등장하기도 했을 만큼, 황제의 권위와 권력 세습체계가 미약했으며, 누구든지 힘있는 자는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6명의 황제 중에 프랑스와 브리튼의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부제는 마지막 라이벌인 막센티우스를 쓰러뜨린 후 유일한 황제가 되긴 했지만, 언젠가는 또 다른 경쟁자가 나올 것을 막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던 것이다.
우선,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의 자유로운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미트라 종교의 수명이 다했다고 보는 경향이 강함) 그 동안 핍박했던 크리스트교를 서기 312년 공인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후임 황제에게 유언으로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명했고, 392년에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한편, 크리스트교가 박해 받았던 서기 320년경 까지는 예수의 신성을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인성을 위주로 예수를 말하는 초대교회가 아리우스와 그의 제자 세쿰을 중심으로 지하에서 로마제국에 투쟁했다. 삼위일체설은? 크리스트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325년 콘스탄티누스가 개최한 니케아 종교회의(=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라는 자가 최초로 주장했는데,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아첨하여 그(콘스탄티누스)를 신과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교황이라 추대하여 아첨을 떨었던 것이다. 신성을 여호와만이 가질 수 있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이 이론은, 교황으로서의 로마 황제는 신의 대리인으로 추앙받고,
무오류(로마 황제의 행동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별의별 아첨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 나왔음) 의 법칙도 이때 확립되었다. 삼위일체설은? 당시 정통의 아리우스파들 조차도 부정했는데, 이유는? 예수가 스스로를 여호와의 아들이라고 늘 말했으며,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와 여호와가 일치한다는 말이 없었다.
즉, 예수=여호와=성령이라는 공식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 당시 그들의 반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아타나시우스파는 그들의 삼위일체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는 극소수 예수의 제자들 이론을 마치 예수 자신의 입장인 것처럼 떠벌렸다. 결국, 삼위일체설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투표'로 결정났다. 기독교의 진리는 결국 '투표'로 정해진 것이다.
종교란 승자의 정신적 먹이가 된 것이었다. 그 로마황제에 대한 아첨꾼들이 두 번 다시 아리우스의 정통파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는 적그리스도파라고 못을 박아버렸고, 이는 아리우스파를 결국 박해와 순교에 소멸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초기 교회에서는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가 분리되어,
예수를 신과 동일시 하는 내용과 예수는 신이 아니다 라는 내용으로 의견을 통합하지 못하였는 바, 1차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하여 '삼위일체'가 투표로서 예수의 신권을 인정한 후 '아리우스파'의 몰락으로 자연스럽게 초기교회가 로마교회로 통일되면서 "예수는 신이다" 라는 명제 하에 삼위일체론이 만들어진 것이다.
크리스트교 공인과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나온 삼위일체설! 그것은 종교를 정치에 이용해 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고도 정치전략 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정통 사회주의와 동떨어진, 김일성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처럼, 삼위일체설도 당시의 기독교인들로 부터 외면받은 정치적인 논리였던 것이다.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펌출처: http://pann.nate.com/talk/124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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