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다른 복음이 섞인 설교 홍수' 속에서 바른 복음(이웃교회)을 전달하는 말씀 배달부입니다!"

[태그] 개신교, 초교파, 회개와 개혁, 예수천국 불신 유황불지옥 협박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

* 원출처: 앤드류강 목사 / 마지막 사명 

* 원제목1: 사람이 죽으면 불멸의 존재가 되나요? 하나님의 창조 공식을 아십니까? 

원제목2: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2)

* 수신자1: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은 미검증 천국지옥 신비체험을 믿고 전하도록 허용한 목사들!

* 수신자2: 천국지옥 신비체험을 성경처럼 믿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맹신하며 전하는 지체들! 

                                         ♧ 40분 메시지 url, https://zrr.kr/Fpr8

☞ 원출처 url: https://zrr.kr/b2nK , https://zrr.kr/GTcC , https://zrr.kr/6kfv

[청각장애우를 위한 한글 텍스트]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 개신교 노아박 전도자입니다. 라스트타임 넷을 운영하시는 앤드류강 목사께서 Q&A 메시지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죽은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라는 원제목을 음성으로 변환하여 국내외 한국 개신교 그리스도인 사역자및 기독교 종교단체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들으시겠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특이한 습성이 있는데, 그것은 2천년 전의 유대 민족과 이방 민족 사이에서 성령의 복음 전파 역사가 일어나는 과도기적인 당시 배경도 감안해야 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말 번역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읽어 버린 나머지, 계시된 진리의 복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무엇보다도 세상끝날에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이 일어난 후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고 악인은 영원토록 죽지도 못하고 벗어나지도 못하는 유황불 지옥이 아닌, 단회적으로 지구 전체에 일어나는 지옥불 불가마 속에

부활한 악인들과 끝날에 살아있는 악인들을 깨끗하게 태워서 없애 버리는 불심판을 믿지도 전하지도 않으며, 전하는 공동체를 이단 사이비로 규정하여 회중들을 입단속시킨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있는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간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예를들면, 이혼이나 재혼을 성경 글자 그대로 지키지 않으면 성경에서 말씀하지도 않은 그러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영원한 유황불 지옥"에 간다고 사기를 치고 있으며, 결혼하지 않는 비혼 즉 독신까지도 지옥간다고 가르치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짓 선생이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성경을 사사로이 자의적으로 푸는 일이 도리어 성령훼방죄가 되는 것을 아십시오! 그리스도인 누구라도 자살 예방에 기도하면서 힘쓰는건 좋은데, 자살하면 영원한 유황불 지옥에 간다고 가르칩니다. 한국 개신교가 가장 심각합니다. 주일성수 안하면 유황불 지옥! 십일조 안하면 유황불 지옥! 뭐 안하면 영원한 유황불 지옥!이라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목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중보자의 역할을 하면서 교인 숫자 늘리기 경쟁을 해서라도 재정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부자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세계 천국지옥 신비체험 거짓말 대잔치까지도 100% 수용해서 목사와 성도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 놀이하듯이, 삐끼식 포교짓을 해서 교회로 나오도록 동서남북 해외 오지 구석구석을 뛰어 다니는데, 당신이 교회 나와서 예수 안믿으면 영원한 유황불 지옥 심판받는다고 으름장을 놓는 한국 개신교 특유의 새빨간 거짓말을 해대고 있습니다. 사단의 회당입니다. 태양신 바알을 숭배하는 이세벨을 추종하는 집단입니다. 강도의 소굴입니다. 사기꾼 집단 공동체입니다. 저는 40년간 한국 개신교 골수분자 열심당이었고 어마무시한 가짜 교리들을 가지고 포교해 왔던 교회 호객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성령께서 저를 그곳에서 나오도록 강력하게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근본이 개신교 사람입니다. 다만, 다른 영,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벗어 버린 다메섹 도상 이후의 바울의 복음을 쫒아가는 사람입니다. 40일 40주야로 물심판 전까지 120년 동안 방주를 예비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한 노아를 쫒고 있는 사람이며, 신약의 사도들이

마지막 단1회의 지옥불 불심판을 전한 메시지를 믿고 따르고 있으며 이를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론이 조금 길어진 점 많은 이해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마지막 사명'의  앤드류강 목사님의 메시지를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성경의 원어가 말하는 “영혼”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창세기 2장 7절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즉, 네피쉬가 된지라.” 성경은 완성된 인간 창조물을 가리켜 “생령”즉,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구약 성경에서는 히브리어로 “네페쉬”(nephesh)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신약 성경에서는 헬라어로 “프쉬케”(psuche)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이 두 원어는 모두 “숨 쉬며 살아있는 존재” 또는 “생명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네페쉬=프쉬케=살아있는 영혼=생명체=사람). 그래서, 새번역 성경에서는 혼이나 영이라는 표현 대신에 “생명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원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나타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호흡”이라는 뜻을 가진 “루아흐”와 “프뉴마”를 잘못 번역함으로써 생긴 오해가, “생명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잘못 번역함으로써 똑같이 오역한 것입니다. 죽음과 영혼에 대한 성경 말씀을 번역하면서 왜 이런 문제가 계속해서 반복되었을까요? 왜냐하면, “영혼”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에 맞추어서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두째, “영혼”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입니다. “생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종종 “영혼”으로 번역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의미를 크게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잘못 번역된 말씀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영혼”을 불멸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혼이나 연기같은 존재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라는 말을 읽거나 들을 때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단 한 번도 영혼을 불멸이나 죽지 않는 연기같은 존재로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의 원어인 “네페쉬”는, 구약에 기록된 총 754회 중에서 22회는 “새. 물고기. 짐승” 등을 가리켰으며, 7회는 사람과 짐승을 동시에 가리켰고, 절반 이상은 “영혼”(soul)으로 오역되었습니다. “네페쉬”의 참뜻인 “생명”(life)으로는 119회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한, “네페쉬”와 동의어인 신약 성경의 “프쉬케”는 총 105회 사용되었는데, 번역하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서 “생명”으로 40회, “마음”으로는 3회가 번역되었고, “영혼”이란 말로는 58회나 오역되었습니다. 이러한 번역 상의 심각한 문제 때문에, 사람이 죽는 순간 영혼이 몸에서 빠져 나가서 불멸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을 제시하면서, 영혼불멸설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말씀! “몸은 죽여도 영혼 즉, 프쉬케는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 즉, 프쉬케를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영혼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성경 구절을 지적하면서,

“몸은 죽어도 영혼은 몸으로부터 빠져나가기 때문에 결코 죽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오해는 이어지는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쉽게 풀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10장 39절 말씀! “자기 목숨 즉, 프쉬케를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 즉, 프쉬케를 잃는 자는 얻으리라.” 28절에서는 “영혼”으로 잘못 번역되었던 “프쉬케”가 39절에서는 “목숨”, 즉 “생명”(life)으로 올바르게 번역되었습니다. 왜 계속해서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까? 죽음과 영혼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견해에 맞추어서 번역하다 보니까 이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성경을 재번역할 때 이런 부분을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 9절 10절 말씀!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 즉, 프쉬케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이 장면은 일곱인 예언의 다섯째 인에 나오는 장면인데, 중세 로마 시대에 죽임을 당했던 순교자들의 영혼이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중세기 천주교회는 종교재판소라는 것을 만들어서 수많은 성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진리를 따른다는 이유 때문에 약 5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 핍박의 시대가 끝나면서 중세 로마 시대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장면을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실제로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 외치는 장면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연기처럼 그 혼이 빠져나가서 천국에 간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서 불멸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여기에 나온 영혼들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인데, 그들의 영혼은 하늘에서 자신들의 원통함을 부르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이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중세기에 죽은 순교자가 5천만 이상이나 되는데, 그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조그만 제단 아래 모여서 탄원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순교자들이 하늘에서 연기처럼 존재하는 영혼들이라면, 어떻게 영혼들이 흰 두루마기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6장 11절 12절을 읽습니다.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이 실제 장면인지 상징적인 표현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다섯째 인에 나오는 영혼들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들입니까? 아니면, 중세 로마 시대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에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라고 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제단은 어떤 제단입니까? 성소에는 두 가지 제단이 있습니다.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이 있고, 성소 안에는 분향단이 있습니다. 희생 제물로 드려진 양이 죽임을 당하고 그 피를 쏟는 곳은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입니다. 그러므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라는 말씀은 중세기 성도들이 순교할 때 번제단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고 희생의 피를 흘린 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실제로 번제단 아래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순교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은유와 상징적인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을 책망할 때도 하나님께서 은유와 상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4장 10절 말씀!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아벨)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였느니라.” 이 말씀도 실제로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벨의 억울한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상징과 은유로 해석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죽은 순교자들이 탄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도서 9장 5절 말씀!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편 6편 5절 말씀!

“사망 중에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시편 146편 4절 말씀! “그 호흡이 끊어지면(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죽는 그날에) 그 도모(계획, plan)가 소멸하리로다.” 아멘입니다. 성경에서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억도 못하고, 계획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호소한다는 말씀은 상징적인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감리교회의 주석가인 아담 클락 박사도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상징적인 계시 가운데 제단을 보았다.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순교를 당한 성도들로서 우상숭배와 미신적인 거짓 가르침들 때문에 희생당한 자들을 표상한다. 왜냐하면, 이 제단은 이 땅에 있는 제단을 말하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제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편집인 주, 아담 클락 박사도 성도들의 순교를 이 땅의 제단에서 희생당하는 것으로 해석했음).”(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들, p.433). 요한계시록 6장 11절을 가지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서 흰 두루마기, 흰 옷, 흰 세마포는 모두 순결과 승리와 구원을 상징하는 의의 옷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순교당한 성도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잠시동안 쉬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은 승리와 구원을 나타내는 흰 두루마기를 받았는데, 왜 잠시동안 쉬어야 합니까?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죽은 성도를 부활시키고 영생의 보상을 주실 때까지 잠시 무덤에서 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 신앙입니다. 죽은 의인들은 구원의 증거인 “흰 두루마기”를 받고 무덤 속에서 쉬면서 예수께서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나팔같은 소리로 죽은 의인들을 부르시면, 그때 무덤이 열리면서 부활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 16절 17절 말씀!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 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쫒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부활),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셋째,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 대한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꼭 나오는 것이 누가복음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비유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일어난 장면입니까?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실제로 해석하게 되면, 지옥에 있는 부자와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이 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천국에 간 나사로가 손끝으로 물을 찍어서 지옥에 있는 부자의 혀에 물방울을 떨어뜨려 시원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천국에 간 의인과 지옥 불구덩이에서 지글지글 타는 악인이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하며 물을 찍어서 혀에 묻혀주면서 살아야 한다면, 그런 장소가 과연 천국이 될 수나 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자녀, 남편, 아내를 보면서 영원토록 살아야 한다면,

그 곳이 정말 천국이 될 수 있느냐? 이런 말씀입니다. 그 곳은 천국이 아니라, 고문이고 형벌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실화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성품과 기독교 신앙 자체가 이상하게 됩니다. 한번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떤 젊은 목사가 치명적인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다. 교회에서 나이 많은 장로들이 문병을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해 주려고 하자,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이 좋은 장로님들이 먼저 천국에 가야 하는데 젊은 제가 먼저 가게 되어 죄송합니다. 몸은 죽지만, 제 영혼은 곧바로 하늘에 가서 주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믿음이 정말 성경적인 믿음입니까? 만일, 사람이 죽는 순간에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와서 의인들은 하늘에 가고 악인들은 지옥으로 간다면,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나 의인들의 영혼은 지금 하늘에 있어야 하며, 악인들의 영혼은 지옥에 있어야 합니다. 정말 그런 것입니까? 성경에서 죽은 자의

현주소를 찾아보겠습니다. 넷째, 죽은 의인들이 있는 곳은 무덤 속인가? 아니면, 천국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죽은 지 900년 이상이나 되는 다윗에 대해서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4절 말씀!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다윗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죽는 순간에 의인의 영혼은 즉시로 몸을 빠져나와서 천국에 갔다면, 왜 베드로가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다고 말을 했습니까? 다윗이 죽고난 후 90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윗은 천국에 올라가서 영생의 복을 누리지 못했을까요? 사도 베드로는 다윗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9절과 34절 말씀!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얼마나 확실하고 분명합니까? 베드로는 다윗이 지금 무덤 속에 있으며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다고 선언했습니다. 다윗과 같은 위대한 의인도 아직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는데, 누가 다윗보다 먼저 천국에 간단 말입니까? 요즘 신문에 나오는 부고 광고를 보면, “000님의 영혼이 소천하셨습니다”라고 나오는데, 그것은 성경적인 부고 광고가 아닙니다. 죽음과 영혼에 대한 깊은 오해를 갖고 있는 분들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사도 베드로는 진실을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다윗도 죽은지 700년이 지났지만 무덤 속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의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윗처럼 그들도 무덤 속에서 쉬면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의인들의 현주소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 말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되..” 히브리서 11장에서 바울은 믿음의 조상인 아벨. 에녹.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열거하면서, 그런 믿음의 조상들도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다가 죽었지만,

아직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구약 시대 믿음의 조상들도 다윗처럼 무덤 속에 누워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 받게 될 부활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의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부활과 영생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 14절 말씀입니다.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마태복음 16장 27절 말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성도 여러분! 이 말씀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의인들을 부활시킬 때까지 아무도 보상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아무도 하늘이나 지옥에 먼저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재림의 날까지 죽은 의인들은 어디에 있게 됩니까? 무덤 속에서 기다리게 됩니다. 무덤 속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몸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생명의 호흡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무덤 속에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보상을 받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 23절 24절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말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주리라.”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보상을 받게 됩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1절 52절 53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28절 2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은 의인들은 예수 재림 때까지 무덤 속에서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다섯째, 죽은 악인들이 있는 곳은 무덤 속인가? 아니면, 지옥불 속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악인들이 죽었을 때 영혼이 즉시로 몸을 빠져나가 지옥의 유황불에 들어가서 형벌을 받게 됩니까?라는 이런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43절 말씀!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악인의 혼이 지옥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두 손”을 가진 몸이 지옥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도, 예수께서는 “온 몸”이 지옥불에 던지운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악인의 혼이 아니라, 몸이 유황불 속에서 형벌을 받으면서 태워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30절 말씀!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그러므로, 악인이 죽을 때 영혼이 소리 없이 몸을 빠져 나가서 지옥불에서 형벌받는 것이 아니라, 몸이 형벌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의인들이 부활해서 몸으로 천국에 가는 것처럼, 악인들도 부활해서 몸으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악인들의 부활에 대해서 다음과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15절 말씀!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의인에게 부활이 있는 것처럼 악인에게도 부활이 있는데, 예수께서는 악인의 부활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절 29절 말씀!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의인들은 예수 재림 때까지 무덤 속에서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게 되며,

악인들 역시도 무덤 속에서 “심판의 부활”을 기다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을 살짝 빠져 나가서 의인은 천국에 가고 악인은 지옥에 간다면, 부활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이미 천국과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을 다시 지구로 불러 내려서 무덤 속에 들어가게 하여 부활시킨 다음에, 공중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처럼 영접하고 다시 천국과 지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이야기입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판단해서 각자 대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죽은 의인과 악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무덤 속에 있습니까? 아니면, 천국이나 지옥에 있습니까?” 여섯째, 데리고 오는 것인가? 데리고 가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의인이 죽으면 영혼이 연기처럼 빠져 나가 천국에 간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궁여지책으로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제시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말씀!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천국에서 자는 자들을 함께 데리고 오시겠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천국에서 자는 자들을 데리고 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도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아야만 올바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데리고 온다”는 말은 헬라어로 “악세이”인데, 그 의미를 찾아보면 “데리고 가다” 또는 “데리고 오다”입니다. “악세이”는 “간다”는 의미와 “온다”는 의미를 다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 “데리고 온다”로 번역했습니까? 왜냐하면, 성경의 번역자가 “의인이 죽으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천국에 간다”는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들을 “데리고 온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 문제를 수정해서 올바로 번역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난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늘에서 자고 있는 의인들의 영혼을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자는 의인들을 부활시켜서 하늘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악세이”를 “데리고 간다”로 번역해야만 15절부터 이어지는 말씀과도 문맥이 정확하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17절 말씀!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쫒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죽은 자들은 부활의 순간까지 무덤 속에서 어떤 상태로 있습니까?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가리키면서 “잠자고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마태복음 9장 24절 말씀!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니엘 12장 1절 2절 말씀!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성경에서 성령께로부터 복음을 받아 쓴 저자들은 왜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했습니까? 몹시 피곤에 지쳐서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눕자마자 깊이 잠들게 되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면 긴 밤이 마치 한순간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자신이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깊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죽는 순간부터 부활할 때까지를 “순간”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의 상태입니다. 일곱째의 1번, 자식이 잘되고 못 되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욥기 14장 21절 말씀!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일곱째의 2번,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고 했습니다. 전도서 9장 5절 말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시편 146편 4절 말씀!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 일곱째의 3번, 무활동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9장 10절 말씀!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나니..” 일곱째의 4번,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시편 6편 5절 말씀!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 즉, 무덤. grave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편 30편 9절 말씀!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편 115편 17절 말씀!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이사야 38장 18절 19절 말씀! “음부 즉, 무덤이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죽음은 이런 상태로 들어가는 것인데, 어떻게 영혼이 살아있어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눈을 떠서 성경을 읽고, 성령의 음성에 들을 귀가 있는 성도들은 죽음과 영혼에 대한 진리를 반드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잠”(sleep)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를 풀어줍니다. 오늘날 기독교 뿐만 아니라, 여타의 종교계에 공존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오직 성경에서만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9장 5절 6절과 10절을 읽겠습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 즉,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 누가 감히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서 느끼고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이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분명한 성경 말씀을 눈 앞에 보여줘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라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무조건 믿고 따라갑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교와 불교와 미신에서 가르치는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 있다”라는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의인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죽은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시편 115편 17절 말씀!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시편 6편 5절 말씀!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 여덟째,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입니다. 신문에 가끔 실리는 장례 광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됩니다. “000님께서는 향년 8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기에 이에 부고합니다.” 동시에, 장례식장에서 “성도님의 영혼이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후에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들의 영혼은 하늘에

지금 올라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라는 것으로 장례 설교를 끝마쳤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유가족을 위로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17절 18절 말씀!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장례 설교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쉽게 넘기면 안됩니다. 언제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성도들이 부활해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때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죽은 가족의 영혼이 연기처럼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설교는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부활 신앙과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가서 지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세상에서 겪는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유가족들에게 참된 위안을 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소망이 가득한 진리를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유가족들에게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부활을 말하면서 위로했습니다. 부활의 날에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 52절 53절 말씀을 읽습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모든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었든, 아니면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하루 전에 잠들었든,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0.01초도 안되는 “찰나”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썩어서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 시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수 있을까? 를 생각하면서 염려합니다. 물론,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아서 흩어지고,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어떤 사람들은 깊은 바다에 빠져서 수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 한마디로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각 사람의 모습과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부활의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메시지를 듣고 계시는 여러분들이나

뭇 심령들께서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앤드류강 목사 설교 마지막 시간으로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죽은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보내드렸습니다. 혹시, 국내외 한국 개신교및 이단 사이비로 불리우는 기독교 종교단체를 떠나서 가나안 성도가 되기로 결심한 분들을 위해 하단에 링크를 걸어 두겠습니다. 끝까지, 청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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