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국 개신교 예수복음 전도자입니다. 제목만 보고, 뒤로 물러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태그] 개신교, 초교파, 회개와 개혁, 바리새인의 종교적인 열심과 의로는 천국가지 못한다!
* 원출처: Pastor Jin-guk Jeong
* 원제목: 율법과 자유
* 부제목: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가정예배, 주중예배등에 얽매이지 말라!
* 수신자: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가정예배, 주중예배등의 틀에 얽매어 사는 교회들!
♧ 30분 설교 메시지 url, https://youtu.be/8JaF4a3uD1g
[청각장애우를 위한 한글 텍스트]
☞ 메시지를 정독하는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일부분 매끄럽게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 개신교 예수복음 전도자입니다. 한국교회의 회개와 개혁 메시지 오늘의 제목은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가정예배. 주중예배등에 얽매이지 말라’입니다. 오늘은 깨어있는 설교자께서 2006년 4월 어느 수요일 밤예배 시간에 전했던, "율법과 자유" 라고 하는 원제목의 메시지를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교회조직의 율법적이고 비복음적인 멍에라는 틀 속에 갇혀 지냈던 지난 날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참예수 복음으로 자유하기를 원하시는 성령께 받은 바 말씀 안에 잘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5절까지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나 바울이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증언합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이행해야 할 의무를 지닙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첫째, 종의 멍에를 매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되었으니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십니다. 십자가 희생의 대가로 자유롭게 하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종의 멍에를 매는 것은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며, 십자가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종의 멍에를 매게 되면 오히려 그리스도안에서 끊어진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 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종의 멍에를 다시는 매지 말라고 사도 바울은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째, 자유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전체를 읽지 않았습니다만,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과 13절의 강조는 서로 다른 것같은데,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이것은 자유의 양면성을 말해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우 다양하게 하신 말씀 속에서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는 것만 봐서도 안 되고, 종노릇 하는 것만 봐서도 안됩니다. 한 면으로 우리는 자유자이지만, 한 면으로는 여전히 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혼돈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셋째,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5장 1절에서 말하는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심령은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이고, 사망권세로부터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던 자가 예수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는 자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망으로부터의 자유를 받을 뿐만 아니라, 율법도 예수님이 다 감당하셨기 때문에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율법의 의무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율법으로는 죽은 자라는 것이지요. 구원받을 때만 율법이 조건으로 작용 안한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도 율법을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엮으려고 하는 그것으로 부터 자유하다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은 성도의 구원을 위한 것이고, 율법의 자유를 구원 문제에 한하여 제한합니다. 오늘 말씀도 그런 맥락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는 구원받고 난 이후에도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의무조항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율법의 의무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7장에서 언급이 됩니다. 로마서 7장은 구원받고 난 이후의 성화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고 난 이후에 율법을 그리스도인의 의무조항으로 짊어질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율법은 구원의 조건으로서는 의무가 없지만, 구원받은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혼동을 합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고 했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은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말입니다. 십계명은 구약성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꼭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성도들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구원받고 난 이후에 철저하게 율법에 다시 매여 버리는 것입니다. 넷째, 성령의 새로운 법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입니까?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라고 표현이 되어 있지, 영의 새로운 것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요! 라고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섬김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제는 율법의 의무조항이 아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새로운 법이 됩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성령이 법이 됩니다. 율법을 대체한 그것이 “성령의 법”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서와 히브리서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대체한 새로운 법을 주시는데, 그것은 사람의 돌비 즉 육체에 세우지 않고, 우리의 심비 즉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 심비에 세우는 법이 하나님의 영으로서 우리에게 세우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난 이후 성화에서도
율법에 대해서는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자유를 굳세게 지키라고 말합니다. 다시는 율법의 종의 멍에를 매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조항이 있든지 없던지, 그것들은 이제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조항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의 틀에 다시 들어가서 율법에 묶여서 지내지 말라는 말씀이 됩니다. 어떠한 의식이나 도덕법이나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조항이라고 율법화 시켜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율법의 의무로부터 벗어났다면, 우리가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인 육체의 욕심대로 행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자유함을 위해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자유함을 얻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유가 주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육체의 기회를 삼으라고 주어진 자유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조항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육체의 자유까지 허락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율법의 조항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의무조항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지, 죄를 범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 의무조항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육체의 기회를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라고 하면서, 자유면 자유이지, 또 다른 법이 있다면 어떻게 자유인가?라고 하면서 이해를 못합니다. 이런 부분이 정리되어야 됩니다. 율법에서 자유하다고 하면 성도들이 방종할까 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온전하게 깨닫지 못하고 율법의 틀 속에다 집어넣게 되고 스스로 들어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과는 관계없지만, 구원받고 난 이후에는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십일조도, 주일성수도, 새벽기도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고 이렇게 해야 됩니다.”라고 설교하고, 그 설교를 따라 철저하게 실천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율법에서 자유해졌다 라고 하면 성도들이 헌금도 안하고 새벽기도도 안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 율법에서 자유하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이고 편견입니다. 의무조항을 만들지 않으면 사람은 방종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성령에 대한 말씀의 능력의 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대체한 사랑의 법의 위대함과 뜨거움을 모르기 때문에 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섯째, 교회 안에 어떠한 형식이나 틑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들이 주일성수에 대해서 강조하는데, 주일성수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데, 그 안식일이라는 것도
실제적인 의미로는 태양력이 아닌 유대력에 의한 토요일입니다. 한국에서 이스라엘처럼 유대력을 사용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안식일 교도들처럼, 최소한 태양력에 의한 토요일 안식일을 지켜야만 합니다. 제대로 율법의 조항을 지키려고 하면 모든 구약시대 율법을 제대로 지켜야 합니다. 새벽기도 안하면, 그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입니까? 새벽기도 안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합니까? 그런 말씀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아직 찾지를 못했습니다. 다윗, 세례요한, 사도바울, 베드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새벽기도를 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없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를 강조한 성경구절도 없습니다. 수요일예배가 성경에 있습니까? 수요일에 예배 참석안하면 큰 난리가 납니까? 제발, 그런 틀에 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 자유를 만끽해야 합니다. 왜 틀을 만들고 그 틀 속에 다시 들어갑니까? 왜 다시 우리가 종의 멍에를 매고 다시 들어갑니까? 특별 새벽기도회를 비롯하여 매일 새벽예배 그리고 심령부흥회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멍에, 십일조와 각종 헌금이라는 멍에, 철야기도라는 멍에, 주일성수라는 멍에, 날마다 가정예배라는 멍에, 금요 철야예배라는 멍에, 최소 하루에서 최대 40일까지 도전하는 금식기도의 멍에, 하루 몇시간씩 기도해야 하는 멍에, 어디서든지 식사기도만큼은 빠뜨리지 않고 해야 한다는 멍에,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대면서 교회에 사람 끌어모아야 상급받는다는 오지랖 넓은 멍에, 기독교계 방송을 하루종일 붙들고 살아야 믿음을 지킬 수있다는 온갖 멍에들을 스스로 만들어 뒤집어 쓰고, 그런 율법적인 멍에 속으로 왜 들어가십니까? 멍에를 쓴다는 말은 마땅한 성도의 의무조항이라는 말이 되어 버립니다. 멍에는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그 일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이지요. 종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 교회들이 율법을 만들어서 거기로 들어가게 합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조항이라는 개념이니까 그 조항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축복의 조건이 이뤄지지 않는 사람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하면서, 정죄하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을 가리켜 종의 멍에를 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유하게 한 복음의 믿음을 굳세게 지키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얻은 자유가 어떤 것인데, 왜 다시 굴레를 만들어서 그 속으로 들어 가냐?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을 의무조항으로 만들어 가두려고 한다면 그 모든 것들과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틀로부터의 자유를 한다는 것이지, 내용에서 자유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배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아니라, 예배를 어떤 틀로 만드는 자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아니라, 기도를 의무화시키고 어떤 틀 속으로 집어 넣는 것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할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에 할례를 받으면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은혜로부터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진 자가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이런 경우에 누군가가 바울에게 따질 수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쓴 서신서를 보면, 우리가 이미 자유롭게 되었으니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면서 할례를 받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동시에,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이루어놓은 것들이
무익하게 된다고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율법의 모든 의무조항을 다시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준 것은 또 무엇입니까?라고 하면, 바울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예외의 경우도 있는 것 같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에,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었습니까? 바울이 누구나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틀을 만들면, 그것은 말씀의 교훈과 신앙이 변질된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할례가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 하게 된다면 그리스도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점을 분명히 이야기 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준 것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행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여! 내가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기 시작했으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디모데처럼 다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거나, 할례가 옳다고 하거나, 할례가 틀리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이 분명해야 합니다. 깨달아져야 합니다. 이 사실이 깨달아지지 않으면,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는 바울 자신이 할례를 행해 버린 일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점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마땅한 조건으로서, 의무로서, 축복의 조건이 되었든, 의무조항으로 강조되어지면, 종의 멍에를 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무조항이 아니라, 어떤 효율적인 것이 되어지고 하나의 과정으로서 필요에 따라서 진행될 수 있는 것들이라면, 그것은 다시 종의 멍에를 매거나 율법의 조항으로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했던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없으므로 새벽기도를 꼭 하라고 말하는 것은 율법의 멍에 아래로 들어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율법의 종의 멍에를 뒤집어 쓰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의미로서의 새벽기도는 거부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새벽기도는 함께 할 수없습니다.
그때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새벽에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영을 강화시키니까 좋더라!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이 참 유익하더라! 기도를 통해서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자! 등등.. 영안에서의 건강함과 영안에서의 영성을 위해서 모이자고 하면 그것은 얼마든지 모여도 됩니다. 이것은 제가 말만 바꾸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무리 유익하고 마땅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의무조항으로 만들거나, 하나의 조건부로 시키거나, 평가의 근거와 기준으로 삼는 일이 되면,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종의 멍에를 다시 매게 하는 일이 됩니다. 주일날 11시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해보니까 가장 효과적이어서 11시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만, 11시에서 10시로 바꾸면 무슨 큰 난리가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1시에 드리는 예배는 대예배이고, 나머지는 중예배나 소예배입니까? 우리는 주일성수라는 개념의 예배는 거부하지만, 예배로부터 자유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의 정신은 우리의 영안에서 더 강화됩니다. 율법의 정신은 성령 안에서 더 강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항으로 묶으려는 것을 거부하지만, 우리가 거짓말을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영이 더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조항을 묶어 놓으면 안됩니다. 제가 율법적인 교회에 있을 때는 이렇게 배웠습니다.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말이다.“ 그런데, 거짓말을 잘해서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온 사람이 있습니다. 라합은 거짓말을 해서 정탐꾼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족보에 들어옵니다. 어떤 경우의 거짓말은 허용되어질 수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여러분께서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육체의 기회를 삼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유의 한계와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본질로 바뀐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조항에서는 바뀌었지만, 본질적인 정신으로부터는 돌아와야 합니다. 결국,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것을 못하니까 한계를 정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깨닫게 되면 우리의 삶에 굉장한 자유를 누릴 뿐만 아니라,
굉장히 수준 높은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은 사랑을 이루기 위한 말씀의 근본이십니다. 조건 때문이 아닙니다. 조건으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니까 그 사랑이 오히려 율법 이상의 조항들을 지켜내더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지옥 불에 들어가리요.” 라고 했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살인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 됩니다. 사람을 죽이라고 역사하시는 성령이 있습니까? 내 속에서 미워하는 마음까지 사랑의 마음으로 바뀐다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의 조항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뻐서 내면적인 동기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 본질은 또 다른 법입니다. 그 법은 생명의 법, 성령의 법, 사랑의 법입니다.
이제 율법의 조항들이 우리를 더 이상 얽어매지 못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생명의 법이요 성령의 법은 의무조항이 아니기 때문에, 평가의 기준이나 잣대가 아니기 때문에, 의를 행하면서 자유함이 동반됩니다. 기쁨과 의욕 가운데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유 가운데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수준 높은 삶입니까?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무조항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조직화된 틀을 만들지 마십시오! 영은 조직을 만들면, 틀을 만들면 그 안에서 죽어버립니다. 영은 유기적입니다. 자유로워야 합니다. 영은 마땅하다는 조건이라는 판단기준을 만들어 버리면 그때부터 죽습니다. 주일낮 예배가 판단기준이 되고 조건이 되어 버리면, 그때부터 예배 형태는 다 죽어버립니다. 예배 중에 교독문을 생략하고 사도신경을 안하고 지나가면, 어떤 장로는 큰일나는 줄 압니다. 여러분! 사도신경을 안하면 그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가 안 됩니까? “어느 교회나 다 그렇게 예배를 하니까
그렇게 예배를 해야 된다. 그렇게 예배를 안하면 정통에서 벗어난 것 같고, 이단인 것 같고 하는 유전들이 하나의 조건과 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안하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그 틀은 이미 생명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날이 아닌 주중에 드리는 예배들은 참으로 자유한 가운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 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주일예배 만큼은 규격화된 틀 속에서 해야만 된다라는 고정관념이 율법의 멍에를 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시간이 두 시간 가면 어떻습니까? 기도만 하고 끝나면 어떻습니까? 대표자만 기도하라는 법이 있습니까? 대표자를 세웠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 안의 성령의 역사를 무시해 버립니다. 성령의 역사를 따르게 되면, 언제 내가 대표기도 차례가 될지 모릅니다. 오늘 예배 모임에 오면서 어쩌면 내가 대표기도가 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지만, 찬양을 부르다가,
말씀을 듣다가, 기도를 하다가, 영의 감동이 왔습니다. 그러면 그때 내가 기도하면 됩니다. 물론, 정확한 사실들을 통해서 영이 튀어나올 때는 그 영을 제제 시켜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려 하는데 그가 주책없이 찬양을 한다면 사회자가 말씀의 양과 질 때문에 그것을 제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배 흐름 가운데 기도를 하고 싶은데 정해진 기도자가 있습니다. 아무개 장로께서 기도를 합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군의 여호와되신 하나님 아버지는 무소부재하시고..” 라고 계속 기도합니다. 다들 졸음이 오는데도 그것이 10분을 넘어가면서 화가 납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입니까? 저는 어떤 고정된 틀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생명은 유기적입니다. 유기적인 것은 틀이 아닌데도 그 안에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통일성을 깨고 질서를 깨는 영은 거짓된 영이요 잘못된 영입니다. 흐름과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의 흐름이 말씀에 집중하는 흐름이라면, 내 개인적인 간증이 있을지라도 그 말씀 중심으로 간증이 나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와서 “내가 처녀시절에 생각했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오늘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라는 그런 간증을 한다고 합시다! 그런 것은 혼자 누려야 할 내용이지, 성령의 흐름을 깨뜨려 가면서 까지 하는 것은 안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간증을 해야만 한다는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첫 스타트는 내 차례라고 하면서 결정하려 듭니다. 그 못을 스스로 박았기 때문에, 안나가도 될 것을 굳이 나가서 다 죽입니다. 법과 틀을 만들지 마십시오! 율법화하려고 하는 의무화, 조직화, 경직화, 형식화하는 것들과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싸워야 합니다. 이것을 지켜낸다는 것은 성령과 생명이 그 사랑을 이루어 낸다는 것을 믿고 지켜내야 합니다.
육체의 기회를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난 주일날 왜 안 왔습니까?..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그곳에 가느라 주일예배 참석 못했습니다.” 물론,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그가 자신 안에서 생명의 유기적인 흐름 안에서 갔다 왔느냐?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강조해야 될 것은 예배자체를 강조해야 될 것이 아니라, 생명 때문에 강조해야 합니다. 예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동기를 부여하도록, 생명이 우리 안에서 어떤 행동을 요구하도록, 생명이 우리 안에서 어떠한 자세와 태도 그 무엇을 요구하도록, 끊임없이 생명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당신 안에 생명이 수요일 날에 과연 자유를 줬습니까? 생명의 요구는 수요일 날 요구했는데, 안 갔다면 수요일 날 예배를 안 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 속에서 수요일 날 예배를 참석해야 된다는 성령을 차단하는 것!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제의 대상과 내용이 틀리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섯째, 사랑과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사랑과 생명의 역사의 수준은 율법과 비교도 안 됩니다. 진정으로 생명의 역사가 되면 수요예배로 갈지 말지 씨름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을 아예 비우게 됩니다. 우리 안에 강력한 성령의 흐름이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5절 6절을 보면,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쫒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할례나 율법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을 믿음으로 쫒아서 의의 소망을 기다립니다. 그런 후에 사랑을 쫒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틀이요 그리스도의 멍에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멍에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이미 내 속에서 율법의 틀의 종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차단이 되고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내 속에 왜 생기가 없느냐면, 알게 모르게 그 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이 틀을 가두어서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터집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신축성 있는 생명의 룰 속에 넣어야 되는데, 생명을 룰 속에 가두니까 생명은 팽창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고, 틀은 반드시 이것이여야만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난리나는 줄 압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생명의 말씀이신 성령은 이것을 깨뜨려야 하는 역사를 펴시게 되는데, 결국은 터져서 이것도 못쓰고 저것도 못 씁니다. 생명은 생명에 담아야 합니다. 생명은 적어도 이렇게 역사한다는 틀을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명은 적어도 주일낮 예배만큼은 드리더라! 라는 틀을 만들지 마십시오. 이 틀을 가지고 있는 한, 이 틀을 가지고 생명을 판단하게 되고 영적인 상태를 판단하면서 비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 틀들이 깨지니까 여러분들이 볼 때에는 타협하는 것같고, 목사가 느슨해지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속에서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는 생명의 역사들을 더많이 체험하게 되어지고 알아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각자 살펴보셔야 합니다. 내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율법의 틀인가? 아니면, 사랑의 법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 이 말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역사되어지는지, 이 부분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교회조직 직분의 율법적인 틀이라는 멍에의 무거은 짐을 진 종교생활은 유대교 바리새인의 회칠한 무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책망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멸망당하기를 바라서 하셨다기 보다는, 회개하고 예수 말씀을 따르도록 하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시각장애우를 위한 오디오와 청각장애우를 위한 한글 텍스트를, 한국교회 그리스도인 사역자 누구라도, 주변에 가까이 계시는 분들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친절한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끝까지,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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