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초교파, 개신교 안에 뿌리 박힌 가톨릭주의는 이교의 맞지 않은 옷을 고쳐 입은 것과 똑같다, 46년된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신 예수를 바라보자, 천국지옥


 

[원제목] 신약 성경의 초기 그리스도교로 돌아갑시다!


 

 16분 오디오 설교를 청취하세요!!

by Messenger

개신교, 초교파,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아는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아고보서 3:1, 새번역),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들을 나도 버립시다, 천국지옥


 

[원제목] 모든 인간들의 거짓 교리를 배설물처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라  


 

 13분 오디오 설교를 꼭 청취하세요!!

원출처(일부 자료): 독립장로교-D교회


 

[비성경적인 칼빈의 5대 교리]

                    이미지 출처: https://is.gd/vvbdft







































                   





개신교, 초교파, 로마 가톨릭의 삼위일체는 음녀의 교리이며 사단의 독주이다, 양태론은 또 다른 형태의 삼위일체이다, 삼신론은 삼신 할머니 미신과 똑같다, 천국지옥


[Messenger 小考]


성삼위일체, 양태론, 삼신론은 사단의 새빨간 거짓말 교리입니다. 각 교단및 교회 조직 직분에 매여서 덮어놓고 잘못 믿는 것보다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신구약 원어성경과 현대성경을 비교 분석하여 거짓을 밝혀낸 다음, 깨달아 알고 믿으며 개혁할 것을 권면합니다. 삼위일체(셋=하나) 독주가 그리 좋거든, 가톨릭으로 개종하십시오!


 삼위일체론자가 알아야 하는 원어성경의 말씀은? 


이미지 출처: https://is.gd/kMz8OC 



           이미지 출처: https://is.gd/ojH21H





개신교, 초교파, 666은 사람 이름 수이며 물질이 될 수없다, 7년환난은 가톨릭이 거짓되게 조작했다, 계시록은 과거에 이미 성취된 것이 많이 기록되었다, 천국지옥


 클릭하세요: https://is.gd/gTx9ro 

                  이미지 출처: https://is.gd/YkiqYX

개신교, 초교파, 7년대환난은 예수 재림 2회를 만들고 성경 해석의 오류가 되었다


[Messenger 小考]


1992년 시한부종말론은 세대주의 전천년을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아래 도표 흐름과 똑같았고, 딱 한가지 다른 점은 1992년 당시에 재림 날자를 들이댄 것이었는데, 재림날자는 기록된 성경을 위반했기에 이단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세대주의 전천년은 성경과 많이 다른 해석입니다. 미국교회  64%는 세대주의 전천년을 지양(인정하지 않음)하는 반면에, 한국교회 93%는 세대주의 전천년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며 상반됨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수가 믿는다 하여 성경적이라 말할 수없습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과 쌍벽을 이루며 논란 중에 있는 종말론 학설로는 역사주의 전천년설이 있는데요. 7년대환난은 세대주의 전천년과 동일하되, 예수재림은 새대주의 전천년의  2회와 달리, 재림이 1회라는 것입니다. 7년대환난과 재림 2회는 비성경적으로 보기 때문에 세대주의와 역사주의는 아닙니다. 후천년설은 악이 점차 사라지고 선이 도래한다는 황당한 주장의 학설이므로 더더욱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천년설(재림 1회)을 성경에 가깝다고 보는 입장이며, 세대주의에서 무천년으로 돌아서고 있는 추세입니다.


 1분 동영상을 시청하세요

: https://youtu.be/t1E-c69NMcI 

by 프란치스칸김


 

* 국민일보-美 목회자 3분의 2가 '환난 전 휴거' 안 믿는다  https://is.gd/Qtai4g 

 

* 설문조사-한국교회의 세대주의 전천년(환난 전 휴거, 재림 2회) 지지 비율 93%


이미지 출처: https://youtu.be/jAQGhj1xq6E 


 

[세대주의 전천년=7년대환난 전 휴거]

이미지 출처: http://blog.daum.net/lesther1/260


 

[성경에서 예언한 현존하는 적그리스도, 7년대환난(X), 베리칩(X), 제3성전(X)]


개신교, 초교파, 한국교회는 구약의 토지 소산물 십일조등을 돈으로 환산 왜곡시킨 다른복음(갈 1:6~10)을 선포하고 있다, 성경가감죄는 유황불 지옥이다(계 21:8)

 

                     펌출처: https://is.gd/aFzg5g


[이 글은 영국에 계시는 김폴 목사의 글입니다]


들어가는 말 (신앙배경)

이 엄청난 제목으로, 어떻게 쉽게 독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습니다. 본 제목을 소화해 내기 위해서는 (1) 성서적, (2) 역사적, (3) 신학적인 측면에서 광범위하게 다루어야 하겠지만, 위의 요소들을 일체 생략하고, 저의 개인적인 신앙성장 (Personal Testimony) 배경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는 소위, 모태 신앙으로 기독교 가정에서 엄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십일조와 주일 성수는 물론, 돼지고기와 피가 묻어 있는 고기까지 먹는 것을 금했습니다. 심지어 주일날은 굴뚝에서 연기 나면 안된다 하여 금식을 하면서 성장했는데, 율법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고등학교 교사 근무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굳어진 기존 신앙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 입니다.

(참고로, 저는 그리스도의 교회-개혁 장로교회-감리교회-침례교회-오순절 교회-성공회 등에 장기간 출석하고 공부했거나 가르친 경험이 있습니다)

십일조와 헌금 바구니 없는 영국교회

유학을 떠날 때가 1985년 7월이었고, 한 영국 침례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중 헌금바구니를 돌리지 않더군요. 처음엔 “특별한 날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헌금시간과 축복기도도 없는 겁니다.

몇 주 후에 안 일이지만, 헌금바구니 대신에 조그마한 편지통 모양의 상자(연보함)가 교회 뒤편 코너에 놓여 있어, 원하는 사람은 아무 때나 자유롭게 연보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신앙의 척도로 간주되는 십일조, 작정 헌금, 건축헌금 등 각종 헌금도 없었습니다.

주일 성수 없는 영국교회

그 다음해 봄이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부터는 300 여명이 모이던 교인들이 점점 줄어드는 겁니다. 어느 화창한 봄의 주일날은 20여 명 정도 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목사님께서 웃으시며 예배시간 전에 한 말씀입니다: “아주 좋은 날씨입니다, 우리 가족들이 봄 나들이 나갔군요, 모두 즐거운 시간 갖기를 기도합니다.”

가족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공원을 찾는 것에 대하여, 그는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습니다. 오히려 예배에 참석한 내가 민망할 정도였으니까요.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영국교회가 망했다더니 정말이구나.”

다른 교회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의문이 일기 시작했고, 그래서 한 달에 한 번만 본 교회에 출석하고, 다른 교회를 순회 / 방문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교회를 찾기도 했습니다.

십일조 없는 유럽 교회

영국을 벗어나 유럽 다른 나라들의 예배형식이 궁금해졌습니다. 그 해 여름방학은 프랑스에서, 겨울방학은 독일에서, 이듬해 여름방학은 독일의 학생들과 합류하여 유럽 16개국을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주일 예배형식, 헌금방식, 십일조 제도에 관해서 리서치를 수행했습니다.

오순절 교회, 희랍 정교회, 어떤 영국교회나 감리교회서는 헌금바구니를 돌리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교회가 헌금바구니 대신 연보함을 배치하였고, 십일조나 각종 헌금 제도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학문의 세계로

일단 유럽교회들은 십일조 제도가 없고 연보함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여기에 대한 성서적 근거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석사과정에서는 조직신학이었지만, 박사과정은 구약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관련 학과목인 고대 근동학, 고대 문헌학, 고고학, 문서비평학, 성서언어학, 문화인류학, 고대 역사학, 사회학 등에 거침없이 도전했습니다.

세계 구약학회 회장이기도 했던 원로 지도교수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연구분야가 요구됨으로 학위논문 방향을 바꿀 것을 여러 차례 제시했지만, 6년 동안 하루 평균 3, 4시간의 수면으로 버티어 내는 열심에 감탄을 하더군요.

중간에 경제적, 학문적인 어려움으로 포기할 위기를 몇 차례 넘기며 외롭고 긴 유학 여정이 끝나면서, 암흑 속에 가리어졌던 기독교의 실상 (죄악상) 이 눈에 드러나기 시작했고, 십일조 제도나 각종 헌금 각출은 종교적 범죄행위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박사학위 심사가 끝나던 날! 지도교수는 나를 끌어 안으면서, “이 분야에서는 자네가 세계적인  권위자라네” 하며, 이젠 학자로서의 동등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몇 가지 팁

* 이미 58호에서 언급했듯이, 아하스 왕을 포함한 역대 이스라엘 왕들이 자녀를 잡아 신께 바치는 가증한 짓을 한 것처럼(상하 16:2~3),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십일조를 바침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 16세기 천주교의 속죄권 판매를 거부한 종교개혁의 산물이 오늘날의 신교입니다. 그런데, 정작 타락했던 천주교는 발전적으로 개혁이 되고 (물론, 교리상 차이는 있음), 개혁의 결과로 태어난 신교는 타락하여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고 말았습니다.

* 종교개혁 이후 유럽교회에서 십일조 제도가 사라지자 유럽의 교회들은 교회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교회는 운영난 때문에 한때 십일조 제도를 눈감아 주기도 했습니다.

* 오늘날은 미국산 오순절 교회가 영국을 포함한 유럽으로 파고 들고 있는데, 이들은 방언, 능력, 축복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십일조나 헌금을 강요하는 추잡한 냄새를 풍기는 집단들입니다. 어떤 오순절 교회에서는 예배 중에 헌금바구니를 3번 돌리는 곳도 있더군요.

목사 공화국 대한민국

학위를 받고 바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유럽문화에 오랫동안 길든 탓인지 한국에서의 생활은 질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부패한 정부, 무질서한 사회, 타락한 종교지도자들, 동서남북 어느 곳을 돌아 봐도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목사를 섬기고, 목사는 교회를 장사하는 회사로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런 실상들을 느끼거나 보지 못하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세뇌 되고  맹종  당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때 충격이었습니다.

종교적 부는 반드시 타락과 부패를 부릅니다.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돈이 지나치게 많은데 있다고 판단하고, 잘못된 십일조 폐지운동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여러 대학에 교수 임용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또 놀란 것은, 교수를 이미 내정해 놓고 광고만 내든가, 그렇지 않을 경우 1, 2억을 요구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더군요.

십일조 제도 폐지운동

3년간 세 곳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동안, 한국교회의 타락상과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 두 대학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경험을 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학과마다 이사장이 심어둔 요원(?)들이 있더군요.

십일조 제도 폐지 운동의 많은 효과를 얻기 위해, 신학 대학교수들을 상대로 몇 차례 십일조 제도에 관한 공개토론을 제의했지만, 아무도 나서주는 상대가 없었습니다. 원고를 작성하여 각 기독교 신문사와 잡지사에 발송했으나 단 한 곳도 원고를 실어 주지 않았습니다.

방향을 바꿔, 조선일보를 포함한 일반 신문사와 인터넷을 통해 십일조 폐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때가 1996~1998년이었는데, 그 당시 쓴 원고들이 책 2권 분량이 됩니다.

십일조 제도 폐지라니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층에서 서서히 반응이 일기 시작했고, 많은 격려와 문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들로부터는 수 없는 협박이 끊이지 않으면서 신상에 위험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에 있는 한 선교사는 죽인다는 이메일을 거의 매일 보내왔으니까요.

3년 가까이 한국에 있는 동안, 그야말로 생사를 건 투쟁이었습니다. 철벽같은 한국교회에 십일조의 파문을 불러 일으켰고, 지금은 소신있는 젊은 후배들이 나타나 그 바톤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가족을 잃고

다시 영국으로 귀국(?)하게 된 동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타락상을 접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동안 영국에 남겨 두었던 가족을 잃게 되었습니다.

홀로 되었으나 찢긴 상처들이 많이 회복되었으며, 지금은 교회-선교-교육사업 등과 관련하여 뛰고 있습니다. 재혼할 상대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한 학문은 결국 3년의 십일조 폐지운동에 불을 붙이며 끝을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학문적 자만을 꺾기 위해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주셨고, 나의 삶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간섭해 주심에 감사드리며 겸손히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400년 전의 유럽교회

지금의 한국교회 모습은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교회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한국교회는 유럽교회에 비해 400년 뒤떨어졌다는 뜻이 됩니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복사판입니다. 교회가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게 되면, 망하게 될 징조입니다. 미국교회는 완전히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고, 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이 한국교회보다 10년을 앞서가고 있습니다.

한국에 교인 수가 많은 이유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유럽교회가 망했다는 설교를 즐겨 하더군요. 이것은 무식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교인 수가 많이 감소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신앙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제가 볼 때, 한국교회는 5% 정도만 거듭났으나 유럽의 교회는 98%가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한국에 교인 수가 많은 또 다른 이유는, 아직 한국인들의 삶의 질이 낮고 가난하며 사회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이 잘사는 시대에 무슨 말씀이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인간이 종교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시설이 어디나 잘 되어 있고, 사회복지제도가 완벽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갖는 그런 불안의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한국에서는 교회에서 감당하고 있는 요소들을 유럽에서는 사회복지제도가 모두 해결해 주기 때문에 반드시 교회를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유럽교회들은 십일조 제도가 없을까?

이 글을 통하여 어떤 위대한 신학이나 고상한 학설이나 지식으로 십일조 폐지의 정당성을 주장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신앙적 배경을 자랑삼아 늘어 놓은 이유는, 단 한마디의 질문을 드리기 위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왜 유럽교회들은 십일조 제도를 단죄하여 교회로 부터 추방한 것일까요? 유럽교회들이 폐지하고 있는 십일조 제도를, 왜 한국교회들은 그토록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관하여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남기고 싶은 한마디

십일조 제도는 한국의 돌팔이 교수, 삯꾼 신학자들이 빵 한 조각을 얻어내기 위하여 침묵으로 일관하고, 3대 근성 (명예-권위-탐욕)에 눈이 먼 목사 집단들이 만들어 낸 종교적 범죄행위 입니다. 신앙이나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속지 마십시오!
 

펌출처: https://is.gd/X6cCQK새글  


개신교, 초교파, 신약교회의 십일조 헌금(제물 바치는 행위)은 다른복음으로 저주받는다, 신약교회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각자 정한 연보(기부금)를 내면 된다, 천국지옥


이미지 출처: https://is.gd/iVNKDn , https://is.gd/iVNKDn

 

[원제목] 11계명? 십일조를 읽고..


신완식     2006. 12. 26     조회: 743


이 곳 영국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른 한국교회의 독특한 목회 문화 중의 하나는 ‘오직 순종’인데, 그것의 일차적 대상은 하나님이시지만 그에 버금가는 정도의 순종을 표하는 대상은 다름아닌 목회자이다. 적지 않은 교인들이 목회자의 말 특히 강단에서 행해지는 설교에 대해서는 거의 맹목적이다 싶을 만큼 순종을 잘 하는 것 같다.


목회자에게 순종을 잘하는 이들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직분이나 교회활동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배려를 받을 수 있으니 너도 나도 순종경쟁에 나서게 되는 듯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 성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런 순기능으로써의 순종문화는 한국교회의 좋은 미덕이 될 수도 있으나 반면 시급히 극복되어야 할 한국교회의 고질병이라는 생각도 든다.

<전형적인 순종주의자>

나도 천성이 순종적이고 성격상 논쟁이나 비판을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순종’에 관한 한 언제나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중의 하나이다. 시골에서 도시로 학교를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행정적인 착오 때문에 부득이 결석할 수 밖에 없었던 초등학교를 제외하면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나는 단 한 차례도 지각이나 결석을 한 일이 없고 교내에서 말썽을 피워 교사들로부터 매를 맞은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


성적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으므로 주목 받을 일도 그렇다고 품행에 문제가 있어 눈에 띌 일도 없는 평범한 사람의 전형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목회도 될 수 있는 한 선배들이 하라는 대로 했고 특히 군목으로 활동할 때는 ‘까라면 깐다’는 독특한 군대문화에 맞게 교회를 운영해 나갔던 것 같다. 더욱이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군목 세미나에 초청되어 오는 강사들이 대개가 이른바 대교회의 ‘스타급’ 목회자들이었던 관계로 나는 그 분들이 가르치고 조언하는 대로 목회를 하려고 애를 썼다.


어느 강사가 새벽기도로 목회 승부를 걸었다고 하면 나도 즉시 그 일을 실행했고, 주일 공예배 시간에 통성기도만 시켜도 교회가 부흥된다고 역설하는 어느 강사의 말에 감동을 받고는 즉시 순종하기도 하였다. 심방이면 심방, 금식이면 금식, 성경공부면 성경공부, 기도면 기도..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분야는 다름아닌 <십일조>였다. 다른 목회자들도 다 그러하듯이 나도 월 20만원 사례비를 받던 전도사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빼먹은 적이 없고 군대에서 목회할 때는 십의 2내지 3조뿐 아니라 매주 감사헌금도 작정하여 드리는 순종의 대명사가 된 것은 모두 강단에서 선포된 선배 목회자들의 말씀에 근거한 때문이었다.

어느 해였던가, 지금은 원로가 되신 어느 서울 강남지역 대교회 담임목회자께서 쓰신 설교집을 읽다가 나는 큰 자극을 받았다. 그는 말라기 3장 8절로 12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도둑놈으로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욱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라고 역설하는 것이었다.


평소 성공적인 목회의 푯대로 까지 여긴 적이 있는 그 분의 인상 깊은 설교에 도전을 받은 나는 즉시 십일조를 주제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강단에서 ‘돈’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은 나였으나 우리 교인들을 도둑놈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나’ 싶어서 용기를 내어 입에 불을 뿜었던 것이다.

십일조를 하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실 것’이라는 말라기 말씀 그리고 십일조 한 번 떼먹었더니 네 배의 손해를 봤다는 어느 목회자의 간증! 십일조로 사업이 번창해졌다는 어느 기업인의 간증! 오랜 동안 자녀를 보지 못했는데 십일조를 하면서 작정 기도한 후 쌍둥이를 얻었다는 이야기 등을 들려 주었고, "십일조 했는데 물질적으로 손해를 본 사람 있다면 나중에 나한테 오세요! 내가 다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확신에 차서 설교하고 가르친 덕분인지,


나는 대체로 어려운 군대교회에서 11년 간 목회하면서도 물질 때문에 그다지 어려움을 겪어본 기억이 없는 듯하다. 오히려 인근 학교에 교회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불한 적도 있고 구제 사업에도 적잖은 일익을 감당한 경우도 있었다. 넉넉한 교회 재정 탓에 ‘원 없이’ 활동해본 기억도 많은 것 같다.

<런던에서의 충격>

런던으로 건너 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퇴직금과 기타 수입으로 마련한 3백 만원의 십일조를 어느 지인께서 개척하신 교회에 기쁜 마음으로 드린 일이었다. 이처럼 나는 십일조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소신과 확신에 찼었고 십 수 년 동안 몸소 실천한 바 있는 신앙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영국교회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나는 뜻하지 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돈은 이미 개척교회에다 드린 십일조를 뺀 나머지였으므로 한동안 하지 않았지만 다시 수입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에 내가 재정을 담당하는 성도에게 십일조 봉투를 달라고 요청하자 “십일조 봉투는 따로 없는 데요”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이 교회 성도들은 십일조 안 해요?” 라고 물으니 “몇몇 하시는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하지 않습니다.” 그 분과 대화하면서 가졌던 나의 생각은 ‘도대체 십일조를 안 하다니! 무슨 신앙이 이래? 이러니 영국 교회가 죽어가는 게지!’ 였다. 또, 십일조도 안 가르치는 진보적인 마틴 목사 밑에서 내가 무슨 신앙을 배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교회를 옮길까?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한 적도 있었다.

이보다 더 큰 충격은 영국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학교 중의 하나인 런던신학교(Lond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할 때였다. 그 신학교는 마틴 로이드 존스가 설교자 양성을 위해 설립한 2년 과정의 신학교인데 영국에서는 어쩌면 가장 보수적 분위기의 신학교가 아닌가 한다.

어느 날, 이 학교 학장이신 필립 입슨(Philip H Eveson)께서 강의하시는 구약학 시간에 뜻밖에도 십일조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장로교 합동측 소속의 어느 한국인 목사가 십일조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그처럼 보수적이고 평소에 자상하며 친절하신 그 학장께서 다소 근엄한 얼굴로 "한국 교회는 십일조를 오해하고 있어요.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비성서적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데 십일조 보다 더한 것도 드릴 수 있어야 해요. 우리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이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하는 게 아닌가!


그는 한국 교회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졌고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분이다. 충격에 휩싸인 내가 수업이 끝나고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나이젤(Nigel)이라는 매우 모범적인 영국인 학생에게 “왜 너희들은 십일조 안 해?’ 라고 물으니 십일조는 율법 시대에 행해진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의무적으로 행할 이유가 없어진 때문이지! 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막 신학에 입문한 평신도 젊은이였다.

내가 14년 간 목회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던 십일조! ‘하나님께 좀 더 드려야 하는 데’ 싶어 언제나 올려서 넉넉히 드렸던 그 십일조! 하나님께는 헌 것이 아닌 새 것으로 드려야 한다는 어느 교수님의 조언을 좇아 은행에 근무 중인 친구에게 부탁하여 신권으로 교환하기까지 했던 나!

"도대체, 누구 말이 옳은 거야?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교회들에서는 더 이상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까지 하며 시행하고 있지 않은데 한국에서는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까지 가르치고 있으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나?" 내가 그 때 겪었던 정신적 충격은 말로 설명하기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내 신앙의 터전이 뿌리채 뽑혀 나갈 듯 심하게 영적인 몸살을 앓은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실을 찾아서>

인터넷으로 또 여러 방면으로 자료를 찾으니 역시 한국 것과 영국 것 사이에는 논리에서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 논문들은 여전히 십일조를 유지 보존하는 내용인 반면 영국과 미국 학자들이 쓴 글들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쟁점을 다루어 보는 것이 유익할 듯싶다. 우선 한국에서 제시하고 있는 십일조의 근거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약의 근거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에게 드린 십일조 (창 14:18~20), 야곱의 서원과 십일조 (창 28:20~22),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성구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언급이 없다가 아모스 4장 4절에 잠시 언급이 되며,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 느헤미야와 말라기 시대에 다시 언급되고 있다.

가장 빈번히 가르쳐지고 설교되는 본문은 다름아닌 <말라기>이다. 말라기는 부흥회나 이른바 각종 축복성회, 헌신예배, 간증 때 가장 널리 인용되고 사랑 받는 본문이기도 하며 부흥사들의 부흥회 최대 승부처(?)가 되기도 한다. 이 말라기를 들으면 이내 십일조를 하지 않는 교인들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며 믿음 없는 신자가 되며, 교회 직분이나 각종 봉사활동 방면에서도 늘 찬밥 신세가 되고 만다.


십일조 안 하는 사람이 장로나 권사 혹은 기관장이 될 수 있을까? 혹시 되었더라고 큰 소리 칠 입장에 설 수 없는 게 우리의 실정이 아닌가!

나는 십일조에 대한 한국적 입장은 비교적 위와 같이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다들 너무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 거의 언급이 안되거나 소개되고 있지 않은 부분들 그래서 더 이상 십일조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되기 어려운 것들만 핵심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첫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렸다는 십일조는 이름만 관련이 있지, 실제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른 것이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에 의하면, 십일조는 반드시 “땅”에서 난 것. 씨나 농작물. 나무에서 난 열매 등. 가축 들에서 구별하여 드려야 한다 (레 27:30~33; 민 18:20~32; 신 14:22~29). 하지만, 멜기세댁에게 드린 아브라함의 것은 자신의 소유에서 거둔 수확물이 아니라 전리품이며 나머지 10분의 9도 아브라함이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유일회적인 사건이며 오늘날 매달 정기적으로 드리도록 요구되는 십일조 근거가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전리품은 율법시대에 십일조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 창세기 본문의 핵심은 십일조에 있기보다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사장 되심에 있다. 제사장은 모두 아론의 반차를 좇는 레위 족속 중에서 임명되지만 예수님은 레위 족이 아닌 유다 족속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레위와 무관한 멜기세덱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율법을 뛰어 넘어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우리의 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이다 (히 7장 참조).

둘째, 야곱의 사례 (창 28:20-22) 또한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십일조의 근거가 되기가 어렵다. 이스라엘은 먼저 소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


야곱이 이 기도를 드린 시점은 자신이 아직 아무런 소유를 가지지 않은 때였고, 그 후 실제로 십일조를 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다. 핵심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한 그가 <만약>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만약> 내가 가는 길을 지키시고, <만약> 먹을 빵과 입을 옷을 주셔서 ‘내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그러면>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되시고 이 돌은 하나님 집의 기둥이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것 중에서 드리는 것이 십일조이지, 아직 소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까지 요구하는 것은 십일조 원리가 아니다.

셋째, 흔히 오해되는 것은 교회가 성전으로, 목회자가 제사장으로, 십일조와 헌금이 제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교회는 율법에 의해 제사가 행해졌던 성전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제사장과 제물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되는 것이다. 현대의 목회자들 중에 레위 지파 출신이 어디에 있기에 그를 제사장처럼 간주하는가? 더욱이, 가장 쉽게 간과되는 것 중에 하나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성도들은 결단코 ‘돈’을 십일조로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돈은 십일조 품목에 들지 않았던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오직 돈만을 십일조로 드리고 있다. 그것도 마치 제물을 드리는 듯한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만약, 구약의 좋은 전통을 오늘날에도 계승해야 한다면 구약 성도들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할례’는 왜 시행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가? 다른 수 많은 구약적 요소들은 재해석을 통해서 시행하지 않으면서 유독 ‘돈’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석도 개입시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성경은 기독교인 중에서 십일조를 한 사례를 들지 않고 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의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부단한 투쟁을 하였고 (행 15), 초대교회에서 십일조를 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기독교에서 번제, 돌로 쳐죽임, 회당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구약적인 십일조는 근거가 희박하다.

넷째,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제사가 있던 시절에 십일조는 누구나가 다 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수확을 위한 바구니를 만든 상인,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신는 신발을 만든 사람, 추수 수확을 위해 마차를 만든 목수,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물을 길어 나르도록 물통을 만든 도자기공, 들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외투를 만든 여인들, 임금을 받고 들에서 일한 종들은 십일조 의무에서 면제 받았다. 따라서, 목수였던 예수님은 십일조를 하지 않을 수 있었고, 심지어 성전세도 내지 않으셨다.

다섯째, 말라기 3장의 핵심은 십일조를 드렸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드림’ 뒤에 있는 마음과 심령 즉 영적인 태도와 상태에 대한 책망이다. 그들의 죄악 즉 위선적이며 형식적인 신앙상태를 꾸짖는 것이 핵심이지 십일조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말라기의 경고는 일차적으로는 영적 소경, 절름발이, 병자들이 된 당시 유대 성도들의 신앙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제사인 기쁨의 제사(시 26:6). 의의 제사(시 4:5). 감사의 제사(시 107:22) 및 즐거움의 제사를 드릴 수 있기를 촉구하고자 한 것이 ‘말라기’의 직접적인 메시지이다.

여섯째,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오늘날의 교회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는 십일조는 8세기 말이나 9세기 초에 최초로 나타난다.


샤를 마뉴 대제 (A.D. 742~814, 서로마 제국 황제)의 참사회에서 국가법으로 제정되었는데 주교, 성직자, 가난한 자, 건물 유지 및 존속을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내용에 변화가 생겼고 농산물과 가축이 아닌 장사한 것, 점유, 봉급 등에서 발생한 수입을 ‘돈’의 형태로 지불하게 된 것이다. 이후 마침내 모든 종류의 소득을 포함하여 십일조를 거두는 것으로 적용 범위가 확장이 되었다.

<즐겁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는 정말 오랜 동안 십일조의 효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십일조가 축복이냐? 저주냐?의 잣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내가 잘 아는 어느 장로 가정은 자신의 돈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를 정도로 부자였다. 그들은 새벽기도, 십일조, 봉사, 충성, 헌신……십일조는 출석 교회뿐 아니라 새벽마다 나가는 집 근처 교회에도 드리는 거부였다. 그 부부가 물질로 보인 헌신은 한국 교회 어디에 내놓아도 귀감거리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내외는 최근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져 버렸다.


물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건강마저도 치유 불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 가정이 겪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은 ‘욥’의 그것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인데 나는 더 이상 십일조 신화를 의지할 자신이 없어졌다. (중략)


지금도 아내와 나는 매주 일정한 액수의 헌금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는 교회의 필요 때문이지 나의 유익 혹은 기복적인 목적으로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의 구조적 특성상 앞으로 당분간은 지속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풍토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유럽 교회가 걸어간 이 길을 한국 교회도 반드시 걷게 될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오랜 시간 동안 이 문제로 혼란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내리게 된 결론은 이러하다.


1. 성서적인 근거가 미약한 십일조 제도를 주술화 혹은 미신화 시키려 들지 말고, 교회 구성원들이 정직한 마음과 자세로 재정 문제에 접근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재정을 투명하게 사용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합목적적으로 운영하면 굳이 부흥회니 뭐니 하지 않아도 신자들이 기꺼이 참여할 것이다.

2. 십일조를 신앙의 척도로 삼거나 직분 및 직책 수여의 명목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3. 더 이상, 십일조를 축복과 저주의 이분법 속에 몰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않는다고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영국 교회 신자들 중에 남아날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십일조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잘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중략)

4. 영국 교회는 재정을 목회자나 주요 직책자들이 임의 사용할 수 없도록 매우 엄격한 감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교회가 시급히 이런 제도를 도입하여 정착시켜 나가야 할 것 같다.

끝으로,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들이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 기복신앙이나 주술신앙 혹은 저주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생명까지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범사에 감사하는 심정으로 또한 즐겁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분량에 따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원출처: 런던 트리니티 교회(London Trinity Korean Congregation) 신완식 목사

펌출처: 휴스턴서울교회, https://is.gd/42dC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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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senger 추천 설교]


 십일조 받는 목사!   

당신은 구약시대 레위인 제사장 입니까? (예, 아니오)

 

 십일조 내는 장로, 집사, 성도!   

당신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 입니까? (예, 아니오)

 

 십일조 받으면 지옥간다(오디오 설교 모음 듣기): https://is.gd/jZjEw1             


끝까지,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신교, 초교파, 구약의 십일조는 돈이 아니다, 신약은 각자 돈 연보가 가능하다


[원제목] 성경에 근거한 십일조 폐지의 증명


글쓴이: 시크릿가든            


제 십일조 관련 글에 대한 댓글들을 살펴보니.. "십일조가 맞네, 틀리네" 논쟁은 소모적이라며 십일조와 헌금 조차 구별 못하는 분! 부터 <십일조를 누리는 자유함>을 자랑하시는 분! 심지어는 십일조가 "신구약을 떠나서" 신앙의 증표이고 부활신앙의 한 표현이라는 그야말로 <십일조 신앙>의 정수를 주장하는 분! 까지 거의 제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들인 듯 하네요.

 

따라서, 이런 부적절한 주장들을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다시 간략히 구약의 십일조가 완벽하게 폐지되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증명하오니, 이의 있으신 분은 누구라도 좋으니 분명한 반박글을 요청드려 봅니다^^ 자! 제 주장의 핵심을 다시 요약해 말씀드립니다. (이 모든 주장은 당연히 성경에 근거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1. 구약의 모든 성전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완벽하게 폐지되었다.


2. 구약 십일조는 성전제사와 직접 관련된 예물이었다.


3. 따라서, 십일조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제사로 완벽하게 폐지된 것이다.


4. 따라서, 아직도 십일조를 말하는 분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3단 논법!)

 

<제1전제>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구약의 모든 성전제사가 폐하여졌음은 어느 목회자라도 인정하는 사실이겠지요? 굳이, 성경을 끌어 올 필요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9,12)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8,11,14,18)

 

<제2전제>로 십일조는 제사와 관련된 성전 예물이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전 글에서 명백히 밝힌 바 있어 간략히 재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신명기 12:6)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찌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가져가고.." (신명기 12: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민수기 18:24)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민수기 18:26)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 (민수기 18:28)


구약 당시의 성전제사에서 예물을 드리는 두가지 방법은 바로 요제물(흔들어서 드리는 것)과 거제물(두 손으로 들어 올려서 드리는 것) 두가지가 있었는데, 십일조는 분명히 거제물에 속하는 예물이었음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의 있는 분이 계십니까? 있으시면, 성경말씀을 근거로 반박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성전제사는 그리스도로 단 한번에 완벽하게 완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결코 더 드릴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전제사와 관련된 십일조를 말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완벽하게 완성하신 제사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거나, 그것을 믿지 못하는 참으로 기가막힌 불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일조 문제는 하고 말고를 결정해야 하는 개인의 선택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쯤되면, 십일조주의자들의 판에 박힌 반박이 나옵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폐지되었지만, 구약 율법의 사회적 약자 구제의 정신은 살아 있으므로 이 정신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려 좋은 곳에 쓰여지기만 한다면 충분히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주장 말입니다.

  

물론, 당시 십일조를 받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던 <레위인>이 신약에 와서 완전히 빠져 버렸다면..또다른 대상이었던 <객과 고아와 과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이 사회적인 최약자들은 과연 모두 거리의 노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사회적 약자의 구제와 이웃사랑을 위한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연보>의 개념인 것입니다. 즉, 아주 단순무식하게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레위인 = 객과 고아와 과부! (사회적 약자, 빈민)

 

--> 구약의 십일조 정신 = 의와 인과 신! (누가복음에선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  

 

--> 신약에서는 사도바울의 연보의 개념!

 

실제로, 신약에서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 "하플로테스(고후 8:2, 9:11, 9:13)", "코이노니아(고후 8:4, 9:13, 히 13:16), "로기아(고전 16:1-2)" 등의 단어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영어로는 "generosity", "generous gift", "impartation", "donation"으로, 우리말로는 "타인에 대한 관대함", "친교", "자선", "기부금", "나누어줌" 등..사회적 약자의 구제를 염두에 둔 나눔의 의미를 가진..바로 <연보>의 올바른 개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보는 있는대로 형편대로(고후 8:11~12), 준비하는 자세로(고후 9:5), 마음에 정한대로(자율적으로) (고후 9:7), 즐거운 마음으로(고후 9:7)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 어떻게 구약 제사장 성전시대의 십일조가 떠오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전제사의 거제 예물이었던 십일조를 <형편대로>, <마음에 자율적으로> 합니까? 아~ 옛날이여! 를 외쳐도 정도가 있지요..이건 분명 아니지 않습니까?

 

말라기 3:10마태복음 23:23을 들고 나오실 때는 좀 신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많은 분들이 제 글이 교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위험한 이단성 주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 주장은 결코 근본을 뒤집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집어졌던 근본을 다시 돌려 세우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 개신교의 십일조 관행은 초기교회 태동시부터 출현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초기 한국교회에 있어서 십일조 제도의 기원은 네비우스 선교정책 중의 하나인 자급자족의 원칙(self-support)으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처음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주로 미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주축을 이루었지요.


당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와 북감리교회의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0년대 최초로 한국에 상륙했는데, 당시 이 젊은 선교사들을 지도했던 네비우스의 선교원칙인 <자급자족의 원칙> 즉, 교회에 시무하는 목사들과 교회의 건축 등은 모두 교회 스스로의 재정으로 이루어 나간다는 원칙이 결정되면서 이에 발맞추어 십일조 제도 역시 쉽게 뿌리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즉, 1920~1930년대에 이미 미국 장로교 계열의 D.맥코노이 목사와 H.E.Blaire 목사 등에 의해 십일조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특히, 블레어 목사는 구약 율법의 십일조를 바울의 연보 개념과 동일시하여 -> 바울의 연보를 기독교적 십일조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모든 교파가 절대적으로 수용한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초대 한국교회는 십일조를 영속적인 하나님의 법으로 선포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당시에 대략 3가지 조류가 있었는데요.

 

1. 구약의 십일조를 인정하되, 다만 신약에서는 의무는 아니며, 십일조를 교리화 내지 제도화 하는 것에는 반대했던 한경직 목사파


2.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므로 폐지되었다고 주장했던 전경연 교수, 송 자 교수파


3. 십일조는 구약에서만 유효했던 게 아니라, 신약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던前.총신대 총장이었던 김의환 교수파

 

물론, 이들 중 당연히 김의환 교수파가 승리했음은 굳이 말씀 드릴 필요가 없을듯 합니다. 참고로 문태석 교수, 임태수 교수, 특히 조용기 목사는 아예 십일조는 신구약과 상관없이 에덴동산에서 부터 현재까지 유효하다 주장했고, 바로 이러한 주장이 현재 한국 모든 개신교 교파의 흔들리지 않는 <최고의 강령>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1] 아직까지도,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나라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 한국의 전교단 전교파

2. 미국의 남침례교회, 오순절파

 

[참고2] 재, 십일조가 폐지된 나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전세계의 모든 가톨릭

2. 동방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 모든 정교회

3. 한국 단 한 나라를 제외한 전세계의 개신교파

  3-1. 유럽대륙 전체, 남미, 아시아, 중동, 중미, 아프리카..등등

  3-2. 미국의 모든 개신교 교파가 십일조 폐지(美-가톨릭, 남침례교회, 오순절파 제외) 


구약의 율법을 엄청 중요시하는 대표적인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도 몇년 전에 십일조 만큼은 도저히 양심상 안되겠다고 결론을 냈고, 결국은 폐지 했답니다.



펌출처: https://is.gd/in2t1U

 

원출처: 예수님의 친구들-신앙회복운동(말씀창고)

             원문보기 이여호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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