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다른 복음이 섞인 설교 홍수' 속에서 바른 복음(이웃교회)을 전달하는 말씀 배달부입니다!"

[태그] 개신교, 초교파, 회개와 개혁, 부흥회나 기도원 쫒아다니며 받은 거짓 방언& 통역 버려라!

 

* 원출처: 바른믿음 

* 펌출처: 네이버 블로그 - greatimpact 

* 원제목(2021년): Babbling 옹알이 방언 기도를 버려라 - 제2부

* 부제목: 목사님은 어떤 영적 체험이 있으신가요? 

* 수신자1: 베리칩, 천국지옥 체험, 세대주의, 방언및 통역 등의 신비주의 표적을 쫒는 목사들!  

* 수신자2: 베리칩, 천국지옥 체험, 방언및 통역 등의 신비주의 의 목사 교리만 쫒는 지체들!

 

                                             ♧ 17분 메시지 url, https://youtu.be/hgw_9aLUFCE

 

[Babbling의 사전적인 뜻과 의미]

 

와글와글, 왁자지껄(여럿이 한꺼번에 떠드는 소리), 횡설수설, 지껄임(알아듣기 어렵게), 소리내며 졸졸 흐름(물이), 재잘거림, 주절주절, 아기말 소리(다다다, 가가가, 바바바, 푸푸푸, 만만마 등), 예문: 옹알이 단계에 있는 8개월 아기(an eight month old baby in the babbling stage)

 

​[청각장애우를 위한 한글 텍스트]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 개신교 노아박 전도자입니다. 오늘의 메시지 제목은 "Babbling 옹알이 방언 기도를 버려라'(목사님은 어떤 영적 체험이 있으신가요?) - 제2부"입니다. 오늘은 원출처가 바른복음이고, 펌출처가 네이버 블로그 - greatimpac에서 어느 파송 목사인 선교사가 쓴 메시지를 청취가 편하시도록 잘 다듬어서 음성으로 변환하여 몇 회로 나누어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셋째, 성령의 방언, 방언기도가 아닌 언어(Languages)은사가 계속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과연 이 시대에도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의 방언, 언어(Languages)은사가 계속되고 있는가? 아니면, 중단 되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해석 이슈인데, 역시 두 관점 논쟁으로 인하여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어느 날 이 방언 문제로 이야기하는 중에 한 선교사가 말하기를, “어떤 교포가 자기는 한국 말을 모르는데 한 사람의 목사가 한국말로 설교를 하는데,

 

영어로 잘 알아들었다”라는 간증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되기만 하면, 종족 언어를 공부하지 않고 현재 선교 필드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가 과연 몇 명이라도 있는지, 아니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런 통계가 전혀 없습니다. 방언의 은사가 있다면 선교사들이 언어를 공부한다고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소위 Babbling(옹알이) 기도 방언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솔직히 성경을 번역할 때 '방언'이라고 번역해서는 안됩니다. 번역을 잘못해서 오늘날 현대교회 방언 문제가 더 생긴 것같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직통한다는 신비적인 Babbling 기도가 기독교 영성이 아닌 이방 종교 영성의 침투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우려한 바 있었고, 노우호 목사는 그의 37년간 임상 검증에서 Babbling 방언은 100% 거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총신 이상원, 서철원 두 교수는 '오순절 방언은 단회적인 표적 방언이고, 길흉을 점치는 예언은 구약의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에 소위 지금 일어나는 Babbling 방언기도로 인하여,

 

방언들 중에 성령에 의한 방언이 전혀 없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아직 그런 경우들을 만나지 못하였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성령 사역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자료에서 아주 조심스러운 평가를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영적 혼란과 현대 교회의 영적 혼란의 상관성을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고린도교회의 지리적, 역사적 형편을 고찰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넷째, 고린도교회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입니다. 고린도는 올림픽게임(Olympic Games)과 이스미안 게임( Isthmian game)발상지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B.C 146 년에 파괴되었고, A.D 100년 경 로마의 씨져(Caesar)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그후 로마로부터 많은 로마의 자유민이 정착했습니다. 이에 그들의 노예들과 그리스인들이 들어왔고, 유대인들은 비지니스의 붐을 타고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고린도라는 뜻 자체가 “방탕과 부도덕( Corinthianize'means drunken debauchery and immorality)"의 대명사였을 정도로

 

죄악이 팽배한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의 美의 여신 Vinus에 해당) 신전에서 사랑의 여신을 숭배했고, 남녀가 서로 어울려서 광란의 섹스 파티(Sex party)를 벌리는 예식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 상황에 처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서 거듭났다고 하지만, 옛 생활은 믿음에 따라 거듭나지 못했고, 그만 영적인 혼란 속에 성장을 멈추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라고 고린도전서 6장 8절 9절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강하게 지적합니다. 바울은 이런 도시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목숨걸고 개척했는데,

 

첫번째 고린도교회가 탄생했습니다. 바울이 다른 도시에 복음 전도를 위해 떠나면서 에베소에서 만났던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이고 성경에 탁월한 웅변가이면서 설교자였던 유대인 아볼로가 제2대 목회자로 부임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을 참고하십시오! 아마 바울의 시원찮은 설교에 졸리고 갈증을 느꼈을 교인들은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아볼로의 웅변에 매료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크게 성장하기만 하던 이 교회에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 그리스도파로 파당이 일어났습니다. 아볼로는 이런 분쟁을 수습하지 못하고 깊은 상처를 안고서 고린도교회를 사임합니다. 그후에 바울이 아볼로에게 고린도교회에 다시 돌아갈 것을 강청했지만, 결국 사양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2절 말씀을 참고하십시오!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 고린도 첫 서신을 먼저 한번 보냈었는데 그 첫 서신은 없어졌고, 고린도전서 5장 9절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까지 3편을 그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 수습할 목적으로 썼는데 바울의 심정을 묘사한 대목을 보면, 고린도전서 4장 21절에서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라고 하는 대목에서 그 교회의 심각성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통해 본 이 교회의 문제점은 1장 10절에서 4장 21절까지 나오는 분열, 5장 1절에서 6장 20절까지 나오는 부도덕, 7장에 나오는 결혼의 오류. 8장에서 11장에 걸쳐 나오는 자유의 남용과 오류, 11장에 나오는 성찬의 오류. 12장에서 14장까지 나오는 은사의 오류. 15장에 나오는 부활의 오류. 16장에 나오는 금전에 대한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별 문제가 없는데, 방언 은사에 대한 번역 상의 오류와 아직도 해석 상의 문제를 안고 있는 갈등은 아마 주님 오실 때까지 평행선을 달릴 것 같습니다. 소위 Babbling 신비 방언기도 옹호론과 무용론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고린도전서의 역사적 상황과 집필 이유를 생각한다면 성경 관찰자는 성경을 읽을 때 평면적인 시각으로 읽는 것보다는 상황적 시각으로 드라마틱한 톤을 바꿔 읽을 때

 

더 잘 실감나게 내용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상황적이고 문체적인 시각으로 성경 읽기를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5절은 과장법(hyperbole)으로 쓰였다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가 전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자 여기를 보십시오! 바울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 30절에서 "다 방언을 말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서두에 이 말을 꺼낸 것은 진정한 은사를 강조하고 다른 것 즉, Babbling 기도 방언에 대항하기 위해 꺼낸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7절 8절은 유추적 비유법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 당신이 누가 방언을 한다고 할 때, 참 언어 방언이라고 할지라도 의미를 이해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하물며 의미없는 Babbling 방언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생각을 유추해 낼 수 있다면 

 

현대교회의 방언 문제는 쉽게 풀리게 됩니다. 고린도전서14장 9절을 유추적 비유법으로 살펴 봅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Babbling 옹아리 방언을 한다는 것은 어디에다 하는 것입니까? 허공(虛空)입니다. “Babbling 신비 직통 기도를 한다는 것은 어디에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도 모르고 아마도 반복적으로 "예수는 저주할 자, Jesus is anathema!" 고린도전서 12장 3절 처럼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가졌던 무지, 감정, 미신의 장벽 때려 부수기를 계속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 은사의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바르게 깨닫고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3절은 풍자법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통역이란 두 개의 다른 언어 사이에 의사 소통을 말하는 것인데, Babbling 기도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하는 것으로 통역이 필요 없는 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께서는 “통역해 봐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통역을 세워 검증하라는 것이기보다는, Babbling 기도 방언은 기도가 아니라, 언어 방언의 왜곡임을 신랄하게 꼬집는 대목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 15절은 가정법 조건절로 봅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For if I pray in an unknown tongue, my spirit prayeth, but my understanding is unfruitful." (KJV) 영문법의 “If"는 가정법 조건절로 의심스럽거나 사실이 아닌 것을 표현합니다. 여기 ”my spirit“은 'spirit,' 'breath,' or 'wind, the inner feelings 을 뜻할 뿐, 결코 성령(Holy Spirit)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카리스마틱 해석자들은 여기

 

'My spirit prays” =“The Holy Spirit prays” 로 해석합니다.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기도 방언 예찬자인 어느 고신 목사는 저의 펫북 칼럼에 코멘트하기를,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다 안다면 방언 기도는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탄식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방언 기도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그 기도가 의미없는 소리나 음향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영으로 하는 그 기도를 내 마음이 하게 되기를 원하시므로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게 될 그날 천국에서는 방언도 예언도 그칠 것입니다.” 더 부연하자면 보통 방언기도 주창자들이 공식처럼 흔히 하는 말인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에 가르쳐 주시는 기도가 바로 방언 기도라고 정의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를 정리해 보면, “마땅히 빌 바를 모르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 때까지 계속 방언 기도만 해라. 방언 기도는 성령 자신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이다.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게 될 천국가는 날까지 방언 기도는 전혀 이상이 없는 성경적인 기도다!”라고 겁을 상실한 채 주장합니다. Babbling 신비 기도 방언 옹호의 정당성을 위한 그럴 듯한 변명이지만, 그렇다면 평생 방언 기도를 못하는 사람은 영으로 기도하지 못하는 불쌍한 자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불쌍한 처지를 벗어나려고 기를 쓰고 Babbling 기도 방언 이든, 귀신 방언이든, 뭐든 받으려고 환장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으로 되돌아가서 그렇다면 “My spirit” 이라는 의미가 “The Holy Spirit”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얼토당토 않은 넌센스요, 거짓을 참인 것처럼 정당화시키려는 궤변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속 이어지는 가정법의 결과를 보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성령이 기도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 “내 마음은 열매가 없다!(but my mind is unfruitful!)” 결코 그럴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령이 탄식하며 기도하는데 열매가 없다는 것은

 

성령의 속성 면에서 논리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Babbling 기도가 신비적 성령의 기도가 아니라, 소위 신비적 기도 방언의 치명적인 약점을 분명하게 노출시키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5절로 결론을 맺으려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I will pray with my spirit, but I will also pray with my mind' I will pray with the spirit, and I will pray with the understanding also!)”. 직역하면, “내가 하나님께 기도(말)를 할 때, 그것은 나의 속(내 영, 내 속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 역시 나는 나의 두뇌(마음)를 사용하여 이해하면서 기도한다. 내 영(inner being)으로 노래할 것이며, 역시 마음(understanding)으로 노래한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현대 기도 방언 주창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당시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황홀경에 빠져 Babbling 신비 노래를 하곤 했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옳지 않다고 꼬집었습니다. 한국인 신자가 자기가 아는 익숙한 (한국)말로 진심으로 기도하고 말하고 찬양하는 그것 자체가 바로 주님께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괴로워하고, 영으로 노래하고,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Babbling 옹알이 방언 기도를 버려라' 제3부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청각장애우 여러분께는 한글 텍스트가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이상으로 비영리, 비인기 그리스도인 유튜버 노아박 전도자 메시지를 마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끝까지, 청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원출처 url: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 펌출처 url: https://url.kr/hnj3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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