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기원에 대한 매우 소중한 자료입니다. 성경대로의 믿음과 각자 구원은 직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다소 긴 메시지이지만, 성경 1독과 비교하면 머리카락 한올 정도입니다. 그리스도 종된 장로-집사-목사 사역자분들의 필독과 함께, 개혁을 부탁합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놀라운 기원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의 완성 이후 수 세기 동안에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아는 이는 별로 없다! 하지만 그 뿌리는 역사 속에서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간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딱지가 붙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처음 제자들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말이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말씀을 살펴서 이점이 분명히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과 신약성서 기록자들이 예언한 바와 같이, 다양한 이단적 사상과 가르침들이 초기 교회 안에서 일어났고 외부로부터 그 안으로 유입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자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올 것이다..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마태복음 24:4~5).
다른 본문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고를 읽을 수 있다(마 24:11, 행 20:29~30, 고후 11:13~15, 딤후 4:2~4, 벧후 2:1~2, 요일 2:18~19, 26, 4:1~3).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지난 후 약 20년 만에,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다른 복음으로 이미 돌아섰다”고 기록했다(갈 1:6). 그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거짓 사도들과, 거짓 사역자들”과 싸워야 했는데, 그들은 사기를 쳐서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한” 사람들이었다 (고후 11:13). 그가 처리해야 했던 주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거짓 형제들”이었다 (26절).
1세기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요한삼서 9~10절에서 보듯이, 상황은 매우 심각해서 거짓 사역자들이 공개적으로 사도 요한에게서 온 대표자들을 영접하기를 거부했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서 쫓아냈다!
이 혼돈된 시기에 대하여 저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그의 고전적인 책 로마제국이 쇠망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검은 구름이 교회의 첫 번째 시대에 가득했다(1821, vol 2, p. 111).
오래지 않아서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수의 무리로 흩어졌다. 이제는 고대의 이교도에 뿌리를 둔 많은 개념과 관습과 타협을 한 매우 다른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신앙을 점유하고 바꾸어버렸다. 그렇게 종교를 서로 섞는 것을 혼합주의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 로마제국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역사학자 제시 헐버트(Jesse Hulburt)는 이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1세기의 마지막 세대인 68년에서 100년의 시대를 ‘암흑기’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교회에 대한 박해의 암울함 때문이지만, 더 두드러진 이유는 교회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우리가 가장 적게 알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처럼 우리를 인도해 주는 빛도 없으며, 역사에서 빈칸으로 남겨진 그 공란을 채워줄 작가도 없다…
“사도 바울 이후 50년 동안 교회에는 암막(暗幕)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우리는 희미하게 볼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암막이 걷힌 것은 주후 120년경에, 초기 교회 교부들의 글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시대와는 여러 측면에서 다른 교회를 발견하게 된다(기독교 교회사, 1970, p. 33).
이렇게 “매우 다른” 교회는 권력과 영향력이 증대되었고, 겨우 두세 세기 안에 강력한 로마제국마저 지배하게 되었다!
2세기까지, 신실한 신자들은, 곧 그리스도의 ‘적은 무리들’(눅 12:32)은 지독한 박해의 물결에 떠밀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성서적인 진리를 굳게 붙들었다. 그들을 박해한 것은 로마의 주권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실제로는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이었다(고후 11:4, 갈 1:6~9).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다른 생각이 갈등으로 치달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 이후 그와 같은 초기 십여 년 동안, 그리고 그 이후 두어 세기 동안, 다양한 사상들이 예수님의 진정한 본성을 설명하려고 출현했다. 그분은 사람이었나? 그분은 하나님이셨나? 그분은 사람처럼 보인 하나님이셨나? 그분은 단지 환상으로 보이셨나? 그분은 사람이셨는데 나중에 하나님이 되셨나? 그분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지으심을 받으셨나, 아니면 그분은 영원히 성부와 함께 존재하셨나?
이 모든 사상들은 그에 대한 반대파를 만났다. 원래 교회의 신앙의 일치는 사라졌는데, 그것은 새로운 신앙과 이교도로부터 차용하거나 수용한 많은 것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대체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점은, 초기 역사에서 있었던 지성적이고 신학적인 논쟁이 일어나 삼위일체의 교리가 만들어질 때, 진정한 교회는 대부분 그곳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지하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시기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다룬 우리의 책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The Church Jesus Built)의 “거짓 그리스도교의 출현”장을 참조하세요.)
이런 이유로, 그 격랑의 시기에 우리가 자주 보는 것은 진리와 오류의 논쟁이 아니라, 오류와 다른 오류 사이의 논쟁이다. 이것은 많은 현대의 학자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는 중요하다.
이런 것의 고전적인 예로는 그리스도 본성에 대한 논쟁인데, 그 논쟁으로 인하여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는 325년에 열린 니케아(오늘날의 터키 서부) 공의회에 개입했다.
콘스탄틴은, 비록 많은 사람들에게 최초의 “그리스도인” 로마황제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태양숭배자로서 임종 직전에서야 세례를 받았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 그는 그의 장자와 아내를 살해했다. 그는 또한 셈족을 극렬하게 싫어했는데, 그의 칙령 중에는 “혐오스러운 유대인 놈들”과 “가장 사악한 자들의 관습”이라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관습들은 사실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고 예수님과 사도들도 행하시던 것이었다.
로마제국 안에서 일어난 큰 규모의 소요가 있던 시절의 황제로서, 콘스탄틴은 제국을 통일해야 한다는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제국을 통합하는데 종교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이 사실 그가 “그리스도인”의 종교를 수용하고 공인한 일차적인 이유였다(이 때까지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었으며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콘스탄틴은 새로운 도전을 만났다. 종교 연구가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그의 책 신의 역사(A History of God)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였다… 그리스도인의 분열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날 새로운 위험이 일어났다”(1993, p. 106).
니케아 공의회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논쟁
콘스탄틴은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그 이유는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통일이라는 목적을 함께 이루고자 함이었다. 그 당시에 일차적인 문제는 아리우스 논쟁(The Arian Controversy)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자신의 왕위를 든든히 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점차 큰 집단으로 성장해가는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그는 그들에게 상당한 호의를 보여주었으며, 그렇게 한 그의 의도는 교회를 강하게 하고 하나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리우스 논쟁은 그 하나됨에 위협이 되었고 그 힘을 약화시켰다. 그러므로 그는 이 문제를 종식시키는 일에 착수한다. 당시의 모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스페인의 주교인 호시우스가 그에게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동방과 서방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시노드(총대원=총회대의원)들이 모인다면 조화는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콘스탄틴 자신은 그 논쟁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으나 그 논쟁을 끝내는 일에 열심이었으며, 호시우스의 조언은 그에게 매력적으로 들렸다” (Arthur Cushman McGiffert,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1954, Vol. 1, p. 258).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성직자인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기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반드시 시작이 있었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셨다. 나아가, 만약 예수님이 아들이시라면, 아버지는 더 이전에 계셔야만 한다.
아리우스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람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였다. 그도 역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집사였다. 그의 관점은 삼위일체의 초기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데,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서로 구별되신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공의회가 어느 관점을 받아들일 것인가 결정하는 것은 크게 보면 임의적인 것이었다. 카렌 암스트롱은 자신의 책 신의 역사(A History of God)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교들이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325년 3월 20일에 니케아에 모였을 때, 그리스도에 대한 아타나시우스의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대의원들은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주장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110쪽).
황제로서 콘스탄틴은 비록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교회의 교리를 결정해야 하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다음 해에 그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살해했다.)
역사가 헨리 채드윅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콘스탄틴은 자기 아버지처럼, 불멸의 태양(the Unconquered Sun)을 숭배했다” (The Early Church, 1993, 122쪽). 기독교를 수용한 것과 관련하여 채드윅은 설명하기를, “그의 회심은 은혜에 대한 내적인 경험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군사적인 문제였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그의 이해는 결코 명확하지 않았다” (125쪽).
채드윅이 강조해서 말한 것은 콘스탄틴이 임종 시에 받은 세례는 “그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가진 것을 의미한 것”이었으며, 당시의 통치자들은 고문이나 범죄자의 사형집행 같은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세례를 미루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127쪽). 그러나 이런 정당화가 황제의 회개가 진실한 것이었다는 것을 규명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버트 브락스(Nobert Brox)는 교회사 교수인데, 콘스탄틴은 결코 실제로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음을 확증하는 이런 주장을 한다: “콘스탄틴은 어떤 회심의 경험도 없다. 그에게는 신앙의 변화에 대한 어떤 표지도 없다. 그는 스스로 다른 신에게로 돌아섰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가 기독교로 전향할 때, 그에게는 그것이 불멸의 태양(Sol Invictus, the victorious sun god)이었다” (A Concise History of the Early Church, 1996, 48쪽).
니케아 공의회에 대한 설명의 글에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콘스탄틴이 직접 그 회의를 주재했으며, 토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고, 개인적인 견해도 피력했다… 그 공의회에서 제기된 신앙고백에서의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양식에 대해서도 말했다… 황제에 의해 장악된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은 두 가지 경우만 빼고 그 신조에 서명을 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견해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1971년도 판, 6권, “Constantine,” 386쪽).
황제의 승인을 받아서 그 공의회는 아리우스의 소수견해를 배척했으며, 그것을 대체할 명확한 어떤 것도 없이 아타나시우스의 관점을 인정했다. 그런데 그의 견해도 역시 소수견해였다. 교회는 그 시점 이후로 공식적인 지지를 하는 이상한 위치에 남겨지게 되었으며,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은 그 회의에 참석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지지를 받았다.
삼위일체 교리가 공식적으로 수용될 토대가 이제 놓여졌으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지난 지 삼 세기 이후에야 일어난 비성경적인 가르침이었다!
니케아의 결정으로 그 논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그 논쟁을 종식하지 못했다. 카렌 암스트롱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신학을 사절단에게 주입하려고 애썼다… 황제의 호의를 등에 업고서… 의견의 일치를 이루는 모습은 콘스탄틴을 기쁘게 했는데, 그는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거의 이해가 없었지만, 실은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결코 만장일치가 없었다. 회의가 끝난 후에, 주교들은 자신들이 전에 하던 대로 가르쳤으며, 아리우스 논쟁으로 인한 위기도 6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다시 일어나 싸웠으며 황제의 호의를 다시 얻어냈다. 아타나시우스는 추방되었는데 최소한 다섯 번 이상 그렇게 되었다. 자신의 신조를 수용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10~111쪽).
계속되는 불일치는 때로는 폭력과 피를 부르기도 했다. 니케아 공의회의 여파로 생긴 일에 관하여, 역사학자 윌 듀란(Will Durant)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 “아마 그 2년 동안에(324~325) 그리스도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인의 수는 로마 역사에서 이교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인의 수보다 더 많을 것이다” (The Story of Cilvilization, 4권: The Age of Faith, 1950, 8쪽). 잔혹하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다른 관점을 가진 다른 이들과 싸우며 살해했다!
그 이후 십여 년 동안에 대하여, 앞서 소개한 해럴드 브라운 교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이 세기의 중간 십여 년 동안, 즉 340~380년까지, 교리의 역사는 재판과 교회 음모 그리고 사회적 불안정의 역사에 가까웠다… 이 시기에 형성된 중심교리는 종종 음모나 대중 선동에 의해 형성되었고 성령이 이끄시는 기독교의 공통된 의견일치로 된 것이 아니었다” (119쪽).
논쟁은 성령의 본질로 옮겨가다
불일치는 곧 또 다른 주제로 옮겨갔는데, 그것은 성령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 니케아 공의회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이것은 “아타나시우스의 신조에 갑자기 생각 난 듯이 추가된 것처럼 보였다,”고 카렌 암스트롱은 말한다. “사람들은 성령에 대해서 혼동을 하고 있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일한 이름을 가지신 분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분일까?” (115쪽).
앞에서 언급한 라이리(Ryrie) 교수도 이렇게 말한다: “4세기 후반부에 세 명이 신학자들이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오늘날 중부 터키)에서 와서 삼위일체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했다” (65쪽). 그들이 제안한 생각은 아타나시우스의 관점보다 한 걸음 더 나간 것이었다. 즉,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동등하시며 하나의 본체로 계시지만, 서로 구별되어 계신다는 주장이었다.
이 사람들은, 가이사랴의 부교 바실과 그의 형제인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였는데, 그들 모두는 그리스 철학으로 단련된 사람들이었는데” (Armstrong, 113쪽), 그 철학은 그들의 개인과 신념에 분명히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 철학이 삼위일체 교리에 미친 영향을 참조하라).
그들의 관점에서, 카렌 암스트롱이 설명하듯이, “삼위일체는 신비하고 영적인 경험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그것은 논리적이나 지성적인 양식이 아니며 상상적인 패러다임으로서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나지안주의 그레고리는 이점을 분명히 하여 말하기를, 하나 안에 있는 세 위격을 묵상하는 것은 사고를 혼동하게 하고 지성적 명료성을 흔들리게 하는 심오하고 압도적인 감정을 일으킨다.
“세 위격의 영광을 상상하기 전에는 하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다. 나는 다시 하나로 돌아오기 전에는 셋을 구별할 수 없다. 세 위격 중에 하나를 생각할 때, 나는 그분을 전체로서 생각하며 나의 눈은 가득해지고, 내가 생각하는 더 위대한 부분은 나에게서 멀어진다” (117쪽). 암스크롱의 결론은 “많은 서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삼위일체는 정말 당황스러운 것이다”라는 것이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계속되는 논쟁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로 이어지다
381년에 즉, 콘스탄틴이 죽은 지 44년이 지나,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이러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나지안주의 그레고리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공의회를 주재했으며, 성령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했다.
역사학자 찰스 프리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381년의 공의회에서 있었던 신학적인 논쟁에 관해서 사실상 거의 몰랐지만, 그레고리는 확실하게 성령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수용하게 하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성령은 성부와 동일본질을 가지고 있다(인격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의미다. 이 경우에 본질은 개개의 성질을 가리킨다).
“그 문제를 그가 소극적으로 다루었는지 또는 의견의 일치를 볼 기회가 없었는지, 그 ‘마케도니아인’ 주교들은 성령의 신성에 대하여 완전히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공의회를 떠났다… 보통, 그레고리는 자신의 권위로 삼위일체에 대한 ‘신성한 말씀’을 수용하기보다는 대중의 의견을 선호한다고 주교들을 비난했다” (A.D. 381: Heretics, Pagans and the Dawn of the Monotheistic State, 2008, p. 96).
그레고리는 얼마 가지 않아서 병들었고, 공의회에서 물러났다. 이제 누가 그 회의를 주재할 것인가? “그 사람은 넥타리우스라는 나이 든 그 도시 원로의원으로서 도시의 시민들에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일을 한 결과로 사람들 사이에 인기 있었던 고위공직자였다. 그런데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받지 않았는데 의장으로 뽑혔다… 넥타리우스는는 신학에 대해 무지한 것 같았으며, 요구된 신앙을 억지로 수용한 뒤에 세례를 받고 성별 되었다” (Freeman, pp.97~98).
이상하게도, 바로 직전까지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사람이 대 공의회의 사회를 맡아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을 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삼위일체는 공식적인 교리가 되다
갑바도기아의 세 신학자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는 성령의 신성을 확정했는데, 그것은 그 때까지 어디에서나 분명하게 가르친 적도 없었고, 성경에도 없는 것이었다 (The HarperCillins Encyclopedia of Catholicism, “God,” p. 568).
그 공의회에서 결의된 결정을 일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신 유일하신 분이시며, 영원 전에 성부에게서 나셨으며… 또한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 그분은 주님이시며 생명의 공급자시며,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그분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그 신앙고백은 또한 “하나의 거룩하고, 공교회적인(여기서는 우주적이고 완전하고 전체적인) 그리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는 내용을 확정했다…
381년에 나온 이 선언은 훗날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신조로 알려지게 되는데, 오늘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삼위일체 교리가 공식 신앙이 되어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이 되었다.
신학교수 리차드 핸슨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 공의회 결정의 결과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대체 가능한 다양한 의미로부터 축소하여 오직 한 분이시라는 의미로 바꾸어버렸다. 오늘날 서양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Studies in Christian Antiquity, 1985, pp. 243-244).
그러므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 공의회를 소집하기 일년 전에 스스로 세례를 받고서, 약 60년 전의 콘스탄티누스처럼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결정하는데 참여했다. 역사학자 찰스 프리만이 말한 바와 같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테오도시우스는 신학적 배경지식이 전무했으며 그 결과 자신이 모르는 어려운 철학적인 문제를 가진 양식을 교리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논쟁을 황제령이 잠잠하게 했던 것이다” (p. 103).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금지된 다른 신조들
이제 결정이 내려지자, 테오도시우스는 다른 관점들에 대해서 어떤 관용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칙령을 반포했다: “우리는 이제 모든 교회로 하여금 주교들이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가르는 말에 순종하라고 명한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단일한 위엄과 동일한 영광을 가지고 계시며, 신성모독적인 구별에 의해서 어떤 차별도 없으며, 위격에 대하여 인정하고 신격이 통합되어 있음으로써 삼위의 질서가 세워진다” (리차드 루벤스타인의 말에서 인용, When Jesus Become God, 1999, p. 223).
테오도시우스가 내린 다른 칙령은 계속해서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더 가까이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한 하나님이시며, 동등한 위엄을 가지고 계시며, 삼위로 계심을 믿읍시다. 우리는 이 법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르기를 승인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우리의 판단으로는 그들은 어리석은 광인들이기에 이단자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이 붙여져야 한다고 선언하며, 또한 교회의 이름으로 그들의 집회를 불러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가장 먼저 신적인 정죄라는 벌을 받을 것이며, 둘째로는 우리의 권위로 처벌되어야 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서 그들에게 고통을 줄 것을 결정하노라” (헨리 베턴슨(Henry Bettenson)이 쓴 그리스도교의 문서(Documents of Christian Church)에서 재인용, 1967, 22쪽).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도 다르고 사도들도 결코 가르치지 않았던 그리고 성경의 다른 저자들에게도 낯선 가르침이 단단히 고정되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성경의 진정한 계시로 확정되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나 황제의 칙령과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이단자로 낙인 찍혔고 그에 따른 대접을 받았다.
시행착오를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비정상적인 사건은 신학교수 앤토니와 리차드 핸슨이 그들의 책에 그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한 이유가 된다. 그들이 쓴 책, 합리적인 신앙: 그리스도 신앙을 조사함(Reasonable Belief: A Survey of the Christian Faith)에서 그들은, 삼위일체 교리의 수용은 최소한 삼백 년 동안 지속된 신학적 탐험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사실 그것은 “시행착오의 과정(거의 무작위적인 과정)으로서 그 과오는 결코 비정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성삼위일체 교리를 다른 어떤 방식으로 얻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1980, 172쪽).
그 후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냈다: “이것은 오랫동안의 혼란 가운데서 이루어진 과정으로서 교회 안에 다란 사상적 학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 것이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가?’… 시행착오의 과정으로 결정된 논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175쪽).
성공회의 교회 지도자요 옥스포드 대학의 강사인 커크(K. E. Kirk)는 삼위일체 교리의 수용에 대한 계시적인 글을 다음과 같이 썼다: “성령의 신성에 대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입증은 사 세기에 시작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시대의 작가들이 자기들의 신념에 기초하여 그것을 발견했을 것이라고 여긴다. 놀랍게도, 그들은 아무런 신념도 없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기독교 신학의 이런 실패는…. 삼위일체 교리에 있어서 중심축이 되는 논리적 정당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음에도 사실로 일어났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그 교리의 입증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를, 그 신조가 삼위일체이어야 하는 이유를 신학이나 철학이 제공하고 있는가 하고 물어보아야 할 것만 같다” (삼위일체 교리의 진화,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관한 에세이에서, A. E. J. Rawlinson, 편집자, 1928, 221~222쪽).
성경적이지 않는 교리를 왜 믿는가?
짧게 말해서,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가 어떻게 도입 되었는지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이며, 또한 그것을 수용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어떻게 이단이라고 또는 불신자라고 낙인 찍혔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두고자 할 때, 성경이 말하지 않는 교리에 기초를 해야만 할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이후 3세기가 지나 명문화 된 교리에 기초하여, 또한 (지난 수세기는 고사하고) 수십 년 동안이나 논란이 되고 있는 그런 교리에 기초하고, 또한 신앙의 초보자나 불신자가 주재하는 종교회의에서 강요된 교리라면, 그리고 “시행착오의 과정에 의해 결정된” 교리라면 꼭 그런 교리에 기초를 두어야만 할까?
물론,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창조주께서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셨는지를 보아야 한다.
원출처: https://is.gd/d67I9a
개신교, 초교파, 삼위일체는 세분 하나님 신관이다. 삼위일체는 로마 가톨릭에서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