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남 목사 프로필: 예장 선교총회 총회장

          

  동영상이 안보일 때

      : https://youtu.be/e6EYRx4ETbQ  

 

 

 

 

 

 

  동영상이 안보일 때: https://youtu.be/JiH2Nb1RyT0

베리칩을 악마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인(?)

주장에 대해서 논박하고 싶습니다!!

울프맨(21730)일시 2016.05.19 (19:07:03)IP : .***.***

역이나 교통 많은 곳 근처에는

'베리칩 받으면 천국에 못간다(=베리칩 받으면 지옥이다)' 라는

팻말을 들고

조끼 앞뒤에다 '베리칩 666 지옥' 을 새겨 넣고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수의 보혈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베리칩이 예수의 권능을 무시하다니 말이 되나요?

 

그 분들의 논리대로 라면,

 

사탄의 권능이 예수님의 권능을 이긴다는 말씀인가요?

 

누구든지, 예수의 보혈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천국문이 열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다니요.

 

 

아! 베리칩 그게 얼마나 가공할만한 거짓말이며

무서운 사단의 흉계인가!

 

사탄이 하나님의 권능을 누른다는 주장을 하다니

 

 

혹시, 베리칩 거부하면 천국간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이단이 아닌가요?

 

이러고 싶은데

 

시간이 아까워서 그만 두겠습니다. 쩝!

 종교개혁을 위한 20개조 반박문  


- 율법을 지키는 율법주의나 율법을 폐지하는 율법폐기주의 모두를 거부하고, 성령의 법을 따릅니다.


 

- 각종 절기를 중시하는 형식주의를 멀리하고 성령의 법을 따릅니다.

 

- 술, 담배 금지를 규정으로 두지 않고, 자원함으로 성령님께 맡깁니다.


- 목사는 신학교 출신으로 제한하지 않고, 회중이 선출한 장로인 감독이 목사의 자격을 갖습니다.

 

- 목자로써의 감독은 별도의 신학교보다 교회에서 선출되는 것이 우선이며, 교회는 공동체와 신학교의 기능을 겸합니다.


- 축도와 설교권이 목사가 아닌 회중에서 선출한 장로와 감독에게 있습니다.

 

- 교회 장로로써의 감독은 만인 제사장직에 의하여 교인 누구나 임명 받을 자격을 갖습니다.

 

- 만인 제사장직에 의거하여 감독의 권한 아래 회중 누구나 설교하거나 말씀을 나눌 특권이 있습니다.

 

- 교회 예배는 예식적인 종교 행위가 아닌 성도 간에 마음을 나누고 말씀을 먹는 주의 만찬과 교제와 말씀나눔을 중심으로 합니다.


- 교회 예배는 안식일 개념으로의 주일성수를 거부하며 매일 자유롭게 참여합니다.

 

- 십일조와 기타헌금의 강제 규정이 없고, 성도 간에는 한 지체임으로 네 것과 내 것이 없이 자발적으로 연보합니다.

 

- 식사기도, 사도신경하거나 성경책을 지참해야 하는 등의 강제 규정이 없습니다.

 

- 성가대나 목사가 입는 성의란 주님이 죽으실 때 회장이 찟어짐으로 없어졌습니다.

 

- 새벽기도는 없고, 매일같이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 자유롭게 참석합니다.

 

- 성만찬, 침례만이 유일한 예식이고 이를 제외한 어떠한 예식 행위나 종교 행위를 거부합니다.


- 이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영적 교만을 멀리 합니다.


- 교단 교파, 신학이론, 교회 전통, 장로의 유전등을 주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보다 먼저하는 불신앙을 거부합니다.

 

- 주님의 말씀을 경외하기 보다는, 십자가나 예수님의 초상화등을 숭배하는 외형적 종교 행위를 거부합니다.


- 참 성전된 주님의 몸과 교회를 제처 두고 교회당 건물을 성전으로 여기는 종교 행위를 거부합니다.

 

- 교회 지체로써 한 몸된 영적 가족임은 등록서류가 아닌 신앙고백(구원 간증)과 만찬과 침례를 통하여 확인합니다.


- 전도는 삶으로 늘 함께 하는 것이고, 교회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교회 차원의 근신과 징계를 통하여 엄격히 다스려 주님 오실 때까지 교회를 늘 순결하고 정결하게 유지합니다.


- 교회 사역자는 교회의 필요에 따라 여러 사람을 둘 수 있으며, 교회 사역자와 직분자(장로, 집사등)는 세상의 계급이나 지위와 같은 서열이 아닌 봉사와 섬김의 자리임으로 회중에 군림할 수 없습니다.


- 교회 회중에 의해 선출된 대표 사역자는 사역 외 직업을 갖고 있다 해도, 매일 같이 교회 모임에 성도들이 올 수 있도록 교회당 문을 항상 열어 놓고 있을 의무가 있습니다.


- 교회 예배의 통신을 통한 예배 참석에 대하여 누구도 판단하여 정죄할 수 없습니다.


- 교회 내에서의 여가 활동및 나아가 우리의 24시간 전영역의 삶이 포괄적인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찬양에 포함 됨을 믿습니다.


- 한국교회에 이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 형식을 전하여 한국교회가 제2의 종교개혁을 할수 있도록 늘 기도합니다.

 

펌출처: http://boxs.kr/jua4y


[참고사항]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위한 20개조 반박문에 잘 맞는 교회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본받아 실천하려고 힘쓰고 애쓰는 성경적인 교회라고 생각하여 여러분들께 추천합니다!!


- 형제교회(노량진교회)

: http://noryangjin.or.kr/home/bbs/page.php?hid=link_local

 

- 모임뉴스: http://www.moimnews.or.kr/


개신교, 초교파, 개신교는 천주기독교가 되어 간다, 초기 기독교회로 돌아갑시다, 회개와 개혁, 천국지옥



  식사기도하는 손님에게 15% 할인해 주다 '된서리'  

     <- 위 한글 제목을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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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수도원에서 만들어 행하는 식사기도가 개신교로 일부 들어 온 것같습니다. 아래 글은 개신교가 사용하는 '식사 전 기도' 원출처로 보여지는 가톨릭 자료입니다. 


"또한 식사 전 기도에는 그날의 성경을 봉독하였고

 

식사 후 기도에는 그날의 성인의 행적을

 

게 소개하는 성인록을 읽었다.

 

즉 원래  식사 전·후 기도는 수도원에서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수도원에서는 식사 전 기도를

 

예전의 형식을 갖추어서 한다."


성경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축사와 바울의 떡 떼는 행위가 식사기도라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예수님이 음식물을 가지고 축사하시는 행위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면서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고, 바울이 가정교회에서 떡을 뗀 행위는 예수님의 분부를 받들어 행한 성찬이라고 봐야 합니다. 예수 대속을 기념하는 성찬입니다.


식사기도가 겉으로는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일지 몰라도, 기록된 성경의 말씀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음식을 차려 놓고 기도하는 행위가 성경적이냐? 이방종교에서 본 딴 것이냐?는 개신교 기독교회가 초대 기독교회를 본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신앙경주를 함에 있어 걸림돌이 될 수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성경대로 믿으십니까?


음식 차려놓고 기도하는 행위가 자칫 음식제사 행위와 비슷한 맥락이 되거나, 겉만 깨끗이 하는 바리새인 스타일의 거듭나지 못한 표면적 그리스도인을 양산해 낼 수있습니다. 가톨릭의 좋은 운영 방식을 접목하는 것은 참고할 수도 있지만, 가톨릭 교회 전통을 개신교로 끌어 온다든지..예로, 가톨릭만의 교리를 혼합한다면 천국에 못갑니다.


펌출처: http://liturgia.kr/?p=43 

 이춘우 목사: 미국 로고스 교회 (워싱턴주 다코마)

  동영상이 안 보일때: https://youtu.be/bQc3sBLsYtQ


 [주기] 설교자가 '십일조를 바치면 지옥간다' 라고 전한 성경적인 근거는?  


"회개하고 십일조를 중단해야 할 이유는? -> 다른복음=저주=지옥 심판"


(KJV)
But though we, or an angel from heaven, preach any other gospel unto you than that which we have preached unto you, let him be accursed.  

(NIV)
But even if we or an angel from heaven should preach a gospel other than the one we preached to you, let him be eternally condemned!

(개역한글)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 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표준새번역)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국내외 기독교회에서 제물 개념의 십일조는 성경 외의 다른복음입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모두 사망)의 발 앞에다 개인 재산을 내어 고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먹이고 입히는 것을 책임지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경제 체재 하에서는 성경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개인및 가정경제를 운영합니다. 만약, 성경대로 한다고 하면서 지금의 기독교회에다 개인-가정-기타 사람들이 재산을 모두 내어 놓고 교회가 책임진다면, 아마 교도소에 갈 사람들을 많이 양산해 낼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의 신약시대에는 사도가 없습니다. 그러니, 성경대로 할 수없는 이유가 충분합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에 각자 자원한 연보(십시일반의 기부금)를 스스로 정해서 내 놓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가르칩니다. 아멘입니까? 교회가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기준으로 하여 직분자를 투표해서 세우는 것은 성경에 없는 잣대입니다. 차라리 직분을 안받는 한이 있더라도, 십일조 설교나 십일조 내는 일은 중단하십시오! 

 동영상이 안보일 때: https://youtu.be/xpNSYZ0lMos

 십일조의 두 얼굴 / 박 양 목사(남포교회)  


2004 / 06 / 01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약에 존재하였던 주님의 모형이며 그림자들을 모두 제거하셨다고 믿었는데, 그러면 십일조는 구약의 요구입니까? 신약의 요구입니까? 신약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계시지요. 그것도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라는데 목사들은 용기를 얻고 있다!


그래서, 무지하지만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고하여 보고 과연 이 말씀이 오늘 신약시대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인가? 본인은 박식한 성경학자는 아니나 이 한 성경에서만 보아도 십일조라는 의미가 얼마나 거짓되고 가증하며 추악한 것들로 드러내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마 23:23)


대화에는 항상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 의미는 흑백의 논리처럼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마태복음 23장 전체의 내용을 보면 시종일관하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며 하시는 말씀으로 일곱 구절의 말씀은 서두에서 부터 “화 있을찐저”라고 저주를 전제로 하셨고, 또 33절에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는 그들의 결과론을 필설 하셨다.


더욱이,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 말씀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기 보다 오늘의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목회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데에 대해서 누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23장 서두인 2절에 이미 교황 같은 목사들을 일컬어 하시는 말씀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라고 하셨다. 어쩌면 이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새 오늘날 목회자들에 적중하는 말씀으로 탄복을 할 지경이다.


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함은 율법의 자리에 앉았음을 일컫는 말이요,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자리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기 위해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오늘의 목사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 위해 직분자들의 혈세인 십일조를 착취하지 않았는가? 아니라면, 어디서 도적질을 한 것인가? 연보며 감사헌금이며 십일조는 가난한자와 고아와 과부에게 사용하라고 한 물질이 아닌가?


수 천만원, 억대가 넘는 자가용들은 성도들의 피를 태우며 달리고 있지 않는가? 로마 천주교의 바티칸 궁전을 바라보고 손가락질하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십일조라는 면죄부로 궁궐 같은 가짜 성전들을 짓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너희들은 스스로 교황들이 되어 가난한 백성들의 혈세로 부를 누리고 있지 않는가? 멜기세덱은 드리는 자가 아니요 받는 자로 그 멜기세덱이신 예수는 자신을 드리시므로 속죄의 제물을 종결하셨고, 그래서 제사는 예배로, 모든 절기가 주일로, 제물은 우리 헌신으로, 십일조는 연보가 되지 않았는가?


십일조는 율법이요 강제적이라면, 연보는 은혜로 즐겨드리는 것이요, 또한 연보는 자신을 드려 이루신 십일조의 완성으로 전부를 드리는 것의 표(과부의 두렙돈)가 아닌가? 율법아래 있는 자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할 것이나, 율법의 완성 아래 있는 자는 모든 것이 주의 것으로 여기는 산 제사의 표본이 아닌가? 또 성전을 허물어 버리시고 우리를 성전을 삼으심이 아니신가?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이제는 실체로 나타나셨는데,왜 십일조는 그대로 존재해야 하는가? 말대로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나 연보는 전부의 드림이 아닌가?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다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으니 다 나누었으니 핍절한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들의 신앙은 율법적이요 계산적인 십일조가 아니라, 전부를 드렸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바울 서신들이나 제자들이 기록한 신약의 모든 성경을 훑어보아도 십일조를 하라든가 주일성수 하라는 가르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연보와 십일조를 어떻게 구분을 지어야 하는가? 아니면, 구태여 신약에 와서 본질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십일조를 다시 율법화하여 그리스도인들을 꽁꽁 묶어 놓으려는가?


신약시대에 십일조가 없었다는 사실은 바울을 통해 확실히 드러났다. 만일에 그 당시에도 십일조가 있었다면 바울이 구태여 천막을 지으며,(직업을 가지며) 또는 루디아를 비롯 많은 성도들에게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 또한 그러했으며 특히 일곱 집사들을 세운 것은 십일조의 관리를 위한 것이 아닌 성도들의 연보를 관리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더 확실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라디아서가 말하는 율법과 복음을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수차에 걸쳐서 다른 말들로 이해시키려 하지만 한국교회 직분자들은 바리새인들 같은 목사들 때문에 십일조라는 율법에 완전히 묶여 버리고 말았다. 구약의 율법은 쉽게 말해서 약속어음과 같은 것이라고 “윌리엄 헨드릭슨”의 갈라디아 저서에서 밝히면서 속어음은 현찰과 교환되고 나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 수 없는 버려진 휴지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큰 약속이라도 지키는 듯 목에 힘을 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다른 얼굴을 벗어 버리고 은혜의 얼굴 곧 그리스도의 얼굴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분 자신을 드려서 우리를 사신 것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 그분을 사야 한다. 나는 언제나 바울의 고백을 즐겨 듣고 본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리스도를 향하여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는 십일조라는 제도 자체오히려 가증스런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수양이나 물의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우리의 제는 죽은 제사가 아닌 산제사(롬 12:1)임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배의 어떤 의적인 날이나 제물이나 절기나 규례나 나타나 보이는 어떤 물질적인 것에 있는 것이 니라, 산 제사로서의 삶속에서 열매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으로 완성이 되었고, 이로 인해 모든 절기와 제사는 폐하여지고 안식 후 첫날인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로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아직까지도 성전이요 율법이요 절기며 제사와 십일조를 말하는 자들은 구약이나 율법을 이렇게 해석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율법을 완성하셨지, 율법을 폐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율법은 존재를 하여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런 말씀을 채택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17-20)


율법의 완성을 아래와 같이 답 하고 본질적인 것을 논하고자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30-31)


우선 근본적인 논리로 율법은 종이며 백성의 신분에서 지켜야 하는 법이라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하는 자들의 법으로 곧 하나님의 근본 사랑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바울서신들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서는 율법의 초등학문을 버리고 담대히 그리스도 앞에 서라고 요구하심을 보지 않았는가? 십일조는 레위지파와 과부와 고아와 객을 위해 지정된 것이다. 레위지파는 다른 어떤 분깃도 없다. 그러면 신약시대인 오늘날에도 레위인이 존재하는가? 결코 아니다.


구교 (펌게시자 주기:초기 기독교) 신교 (펌게시자 주기:기독교에서 변질되어 떨어져 나간 천주교)에 구약의 레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성도들 모두가 만인 제사장들이다. 그런데, 오늘 목사들은 자기를 레위인처럼 제장들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줄곧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성전이 어떻고 제단이 어떻고 제사가 십일조가 어떻고 절기를 찾으며, 그리스도를 완전히 욕되게 하며 성도들을 기만하고 있다. 은혜가 무엇이며 믿음이 무엇인가!


은혜 아래, 믿음 아래 있다고 하면서도 율법의 종처럼 굴어야 하겠는가? 생명의 피이신 곧 예수의 이름을 영접한 참 믿음생활을 하는 참 성도라면 그 영혼과 당신의 생활에서는 속박을 벗어난 새들처럼 자유로움과 다정함의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날 것이다. 고로 기독교란 예수 믿고 인간다워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다워 지는 것이다. 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도덕 군자의 피를 주신 것이 아니다. 당신의 피 곧 하나님의 생명을 주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격으로 살 수 있도록 말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명하기를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피조물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완전할 수 없었기에 인간은 율법의 명령을 어길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 보니 율법에 사로잡힌 바 되어 율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할지니, 율법의 규제를 받을 필요가 없는 완전한 권세를, 예수님 피를, 자유의 생명을, 주님 은혜로 값없이 받게 된 까닭에 인간들도 마침내 피조물만을 억압 할 수 있는 율법의 세력을 뛰어 넘어서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교회라고 하는 직분자들이며 제사장을 가장한 목사들이여! 아직도 제2의 이스라엘을 꿈꾸고 있다는 말인가? 율법의 노예들이었던 저들의 누추함이 그렇게도 좋아 보이던가 말이다. 진정으로 교회들이 십일조에 목숨을 걸 만치 중요한 사안이라면 왜 바울이나 사도들이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마 10:10)

 

또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눅 9:3)


그리고, 그 결과적인 답으로 그들에게 이렇게 묻지를 않으셨는가?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눅 22:35)


제자들이 복음 전도에 나섰을 때, 사도적인 권위나 제사장적인 위엄을 가지고 않고 님처럼 형제요 친구처럼 찾아갔던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모습은 형제요 식구요 친구처럼 모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율법적인 성전 세나 열한 지파에게 내는 십일조의 세는 더 이상 존재해야 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펌출처: http://lamp.kr/?p=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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