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출처: https://is.gd/UQzSOT

 

 형제운동(Brethren Movement)에 대한 

 교회사 연구학자들의 견해 

 

성경에 나오는 초대 기독교회를 본받아 실천하려는 모습은 아닐까요?

 

[일부 스크랩]

 

오늘날의 형제회(형제 모임)는 확실한 성경에 기초한 단순한 신앙을 가진 하나의 살아 있는 확실한 힘이다.

 

그들은 죄에 의하여 인류는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만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내세의 생활이 더 중요한 만큼 그들에게 있어서는 영혼의 구원이 사회개혁이나 정치 철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대학이나 기업활동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사람들이었고, 영국, 영연방, 유럽, 미국의 어디에서나 적은 숫자로 조용하지만 효과적인 사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선교에 강력한 관심이 있다.

 

플리모드 형제단의 조직으로 부터 상기 내용들을 대강을 다시 정리해 보면, 그들은..

 

① 사람이 안수하는 성직자가 없다.

 

② 전도자 호칭은 사역자, 전도사, 교사로 부른다.

 

③ 교회(교파..)가 조직되지 않고,

회원(주 안에서의 형제및 자매) 제도이다.

 

④ 형제단 최고 감독자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성령의 인도를 따라 전도계획을 세우고 복음사업을 한다.

 

⑤ 목사, 전도사, 선교사는 일정한 급료가 없어 개인의 능력으로 살든지..아니면, 주님께 직접 의뢰한다.

 

⑥ 예배 시에 연보가 없다.

 

⑦ 교육기관(신학교..)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까지 60여개의 나라에 1,0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놀라운 단체이다. 플리머드 형제단에는 유능한 성경학자나 설교자들이 많이 있다.

 

(이하생략)

 

 

 부득이한 개인 사정으로 

 

 개신교 기독교회를 떠나고 싶은 분들은 

 

 전국에 있는 200개 이상의 형제교회와 

 

 신앙 상담 후, 출석하세요! 

 

 

- 형제교회(노량진교회)

: http://noryangjin.or.kr/home/bbs/page.php?hid=link_local

 

- 모임뉴스: http://www.moimnews.or.kr/


 

 WCC 홈페이지에 아직도 현존하는 문서 


먼저 아래는 WCC 홈페이지에 지금도 현존하는 문서이다. 확인해 보시기를 바란다.


https://www.oikoumene.org/en/resources/documents/wcc-programmes/interreligious-dialogue-and-cooperation/christian-identity-in-pluralistic-societies/baar-statement-theological-perspectives-on-plurality


위의 문서 주제는 '다양한 종교의 신학 이해' (A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Religious Plurality) 이다.


그 중 심각한 내용을 공개하기로 한다.


We therefore take this witness with the utmost seriousness and acknowledge that among all the nations and peoples there has always been the saving presence of God. Though as Christians our testimony is always to the salvation we have experienced through Christ, we at the same time "cannot set limits to the saving power of God" (CWME, San Antonio 1989).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은 증언에 대해 지극히 진지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며, 모든 나라와 민족들 가운데 항상 하나님의 현현(presence)의 구원 역사가 항상 존재해 왔음을 안다. 기독교인인 우리의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한 구원'에 언제나 집중하겠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 구원의 능력을 제한할 수 없다"(CWME, San Antonio 1989)


We see the plurality of religious traditions as both the result of the manifold ways in which God has related to peoples and nations as well as a manifestation of the richness and diversity of humankind. We affirm that God has been present in their seeking and finding, that where there is truth and wisdom in their teachings, and love and holiness in their living, this like any wisdom, insight, knowledge, understanding, love and holiness that is found among us is the gift of the Holy Spirit. We also affirm that God is with them as they struggle, along with us, for justice and liberation. 


우리는 종교 전통의 다원성을 하나님께서 각 나라와 민족과 관계하시는 다양한 방식의 결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다양성과 풍성함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의 종교적 모색과 발전 가운데 함께 하셨음을 인정하며, 그들의 가르침 속에 지혜와 진리가 있고 그들의 삶 속에 사랑과 경건이 있는 이상, 이는 우리 가운데 발견되는 지혜, 통찰, 지식, 이해, 사랑, 경건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선물임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그들이 정의와 해방을 위해 우리와 협력하고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다.


This conviction that God as creator of all is present and active in the plurality of religions makes it inconceivable to us that God's saving activity could be confined to any one continent, cultural type, or groups of peoples. A refusal to take seriously the many and diverse religious testimonies to be found among the nations and peoples of the whole world amounts to disowning the biblical testimony to God as creator of all things and father of humankind. "The Spirit of God is at work in ways that pass human understanding and in places that to us are least expected. In entering into dialogue with others, therefore, Christians seek to discern the unsearchable riches of Christ and the way God deals with humanity" (CWME Statement, Mission and Evangelism). 


다양한 종교들 속에 임재하시고 움직이시는 만유의 주로서 하나님을 확신한다면, 그분의 구원행동이 어느 한 대륙, 문화, 민족에 갇힌다는 편협한 사고를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여러 민족과 나라가 보존해 온 각기 고유한 종교적 증언들을 무시하는(disowning) 처사는, 인류의 아버지요 만유의 주라는 성서 메시지를 결국 부인하는 결과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신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pass human understanding)과 예측 불가능한 장소(in places that to us are least expected)에서 활동하신다. 그러므로 이웃과의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부요함을 깨닫고,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방식(the way God deals with humanity)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It is our Christian faith in God which challenges us to take seriously the whole realm of religious plurality. We see this not so much as an obstacle to be overcome, but rather as an opportunity for deepening our encounter with God and with our neighbours as we await the fulfilment when "God will be all in all" (1 Cor. 15-18). Seeking to develop new and greater understandings of "the wisdom, love and power which God has given to men (and women) of other faiths" (New Delhi Report, 1961), we must affirm our "openness to the possibility that the God we know in Jesus Christ may encounter us also in the lives of our neighbours of other faiths" (CWME Report, San Antonio 1989, para. 29). The on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has not left Himself without witness, anywhere (Acts 14.17).


기독신앙은 우리에게 종교 다원성의 전 영역을 진지하게 검토할 것을 요청한다. 종교다원성은 극복해야 할 장애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실" (고전 15-18) 때를 갈망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과 이웃을 더 깊게 만날 수 있는 호기인 셈이다. "하나님께서 타 종교인들에게 주신 지혜와 사랑과 힘"을 새롭고 더 원숙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께서 타 종교인들의 삶 속에서 만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개방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어디에든지, 자신의 증인들 없이 내버려 두신 곳이 없다.


Because we have seen and experienced goodness, truth and holiness among followers of other paths and ways than that of Jesus Christ, we are forced to confront with total seriousness the question raised in the Guidelines on Dialogue (1979) concerning the universal creative and redemptive activity of God towards all humankind and the particular redemptive activity of God in the history of Israel and in the person and work of Jesus Christ (para. 23). We find ourselves recognizing a need to move beyond a theology which confines salvation to the explicit personal commitment to Jesus Christ. 


다른 종교의 길을 걸어온 이웃들의 삶 속에서 선함과 진리와 경건함을 보고 경청한 우리는, '대화를 위한 지침'(1979)에서 제기된 문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 구속의 활동과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사역을 통한 특수한 구속의 활동에 대한 문제 제기를 매우 진지하게 해야만 한다. 우리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향한 명백한 인격적 위임으로만 국한시키는 신학을 넘어서야 할 필요를 느낀다.


Our recognition of the mystery of salvation in men and women of other religious traditions shapes the concrete attitudes with which we Christians must approach them in interreligious dialogue.We need to respect their religious convictions, different as these may be from our own, and to admire the things which God has accomplished and continues to accomplish in them through the Spirit. Interreligious dialogue is therefore a "two-way street". Christians must enter into it in a spirit of openness, prepared to receive from others, while on their part, they give witness of their own faith. Authentic dialogue opens both partners to a deeper conversion to the God who speaks to each through the other. Through the witness of others, we Christians can truly discover facets of the divine mystery which we have not yet seen or responded to. The practice of dialogue will then result in the deepening of our own life of faith. We believe that walking together with people of other living faiths will bring us to a fuller understanding and experience of truth.

 

We feel called to allow the practice of interreligious dialogue to transform the way in which we do theology. We need to move toward a dialogical theology in which the praxis of dialogue together with that of human liberation, will constitute a true locus theologicus, i.e. both a source of and basis for theological work. The challenge of religious plurality and the praxis of dialogue are part of the context in which we must search for fresh understandings, new questions, and better expressions of our Christian faith and commitment.

 

우리는 타 종교 속에 신비한 구원이 있는 것을 인정하며(Our recognition of the mystery of salvation) 반드시 타 종교들과의 대화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 준다. 우리와 다른 그들의 종교적 확신들을 존중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들 가운데 성취하시고 또 성취하실 일들을 존경하는 자세는 이제 무엇보다 필요한 조건이 되었다. 그러므로 종교 간의 대화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교차로인 셈이다. 우리는 개방적인 정신으로 대화에 임하고,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신실하게 증언하는 타 종교인들로부터 배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진정한 대화는 쌍방의 지평을 넓혀주면서, 각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더 깊은 회심으로 인도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타 종교인들의 증언을 통하여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신비를 다각도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화를 통해서 신앙적인 삶의 깊이를 더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장황하게 부언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타 종교인들과 협력하는 태도야 말고 진리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더 깊게 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소명의식 가운데에서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하여 기존 신학의 방법을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걸감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대화적 신학과 인간 해방의 실천을 통해 진정한 신학 작업의 원천과 근거가 형성될 것을 믿는다. 종교 다원주의와 대화적 실천의 도전은, 기독교 신앙의 신선한 이해, 새로운 질문들, 그리고 더 나은 표현을 규명해 가야 할 우리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서야할 자리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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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https://is.gd/ibEI5n



개신교 기독교회에 대해 적응을 잘 못하고 가톨릭, 신/천/지/, 안식교, 안상홍교..  같은 기독교 유사종교(성경 말씀의 '기독교'가 아닌  짝퉁)로 개종해 버리는.. 거듭나지 못한 표면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안타깝고 불쌍한 일입니다. 비록, 개신교 기독교회 일부 변질된 장로-목사 종교인들이 있긴 하지만, 전체는 아닙니다. 극소수 선동하는 무리들이 있어도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 7,000인을 남겨 두셨다고 구약의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신약시대의 일곱교회들에게도 각각 말씀하십니다. 가톨릭, 신/천/지/, 안식교, 안상홍교.. 와 같은 기독교 유사종교(성경 말씀의 '기독교'가 아닌  짝퉁)를 경계할 줄 알고 지혜롭게 깨어서 설교하는 목사-교사와 전도하는 장로-집사가 되셨으면 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신약)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도 기독교 유일신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은 장로-목사 무리들이 있는 반면, 일본 군국주의에 아부하며 협력한 조선기독교단 선동 목사와 장로들도 있었습니다. 내가 어느 부류에 속하여 살 것인지를 취사선택하는 것이 중요하지, 내 영혼을 사단에게 맡기면서도 전혀 알지 못하고 경거망동하는 것은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스스로 빠져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견입니다만, 도저히 개신교 기독교회에 부적응자가 되어 힘든 분이 계신다면 아래 링크로 들어가서 신앙상담 하시고 등록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초대 기독교회의 말씀 신앙을 힘써 실천하려는  형제교회(Brethren Church) 를 추천합니다. 형제교회는 성경대로 믿으려고 애쓰는 이웃교회 입니다.


형제교회는 1820년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시작이 되었고, 한국에는 1890년대에 일본과 영국의 형제교회 선교사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1980년대에 180개 교회가 되었고, 현재는 200개가 훨씬 넘는 형제교회들이 독립교회 형태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중략)  종교다원주의를 선동하는 개신교 기독교회의 연합은 예수 배도에 해당되며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이러니하게도, 가톨릭은 WCC에 가입하지 않으면서도 주도적으로 세계종교간의 종교통합 운동을 펴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KNCC(WCC 한국지부, 9개 교단)와 WCC(교회수가 많은 '통합' 포함 4개 교단)에 가입하여 활동합니다. 바리새인처럼 되지 맙시다. 블로그 방문 그리스도인께서는 아래 동영상을 끝까지 시청하시고..예슈아를 모시고 공력 들여 만든 동영상을 많이 홍보해 주셨으면 합니다.


- 형제교회(노량진교회)

: http://noryangjin.or.kr/home/bbs/page.php?hid=link_local

 

- 모임뉴스: http://www.moimnews.or.kr/


 동영상이 안 보일때: https://youtu.be/3ESN7gSO7pU

        원출처: 회복의빛 서광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https://www.youtube.com/channel/UCmfwlMQ7MGvq5Eew_cNSdEg/videos

 

http://blog.daum.net/wwwwp

  

  '다른 이름으로 사진 저장' 후, 메시지를 정독하세요!! 

 




  제1부 동영상이 안 보일때

: https://youtu.be/5VuXsJlFLc0


 

  제2부 동영상이 안 보일때

: https://youtu.be/2P_tkkHDj7U


제1




제2



"십일조는 유대교에서 끝났다. 기독교는 십일조와 상관없다."


유대교의 경우,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레위 지파로 이루어진 제사장 계급이 사라지면서, 성전 참배를 토라 학습으로 대체하고 종교적 지도자의 역할은 랍비들이 대신하였다. 이와 때를 함께 하여 레위 지파 제사장들을 위한 십일조 제도도 같이 없어졌다. 성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제사장도 필요없고, 제사장 계급이 없으니 제사장 계급의 생계 유지를 위해서 걷던 십일조 제도도 더 이상 존속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랍비들이나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에서는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거두도록 되어 있는 십일조를 제사장이 아닌 다른 지파 사람들이 받는 것은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짓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물론 레위 지파는 커녕, 유대인조차도 아닌 개신교목사들이 십일조를 내라고 강요하는 것은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그 대신 랍비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별도의 직업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업 랍비는 이스라엘군의 군종 랍비(military rabbinate)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펌출처: https://namu.wiki/w/%EC%8B%AD%EC%9D%BC%EC%A1%B0

[질문자 상담글] 느티나무 2016.08.24 19:25


유튜브에서 목사님 강의 들었습니다. 저는 싱글입니다. 몇개월전 대학 친구를 만났는데 그 분도 우연치않게 싱글 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성실히 살아온 모습에 우리는 서로의 동반자가 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 분은 모아놓은 재산은 없지만 제가 조금이나마 재산이 있고 이제부터라도 힘을 합하면 앞으로의 삶은 행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십일조라는 걸림돌로 인해 지금 냉전 중입니다.


그 분은 보증금 300에 월세 30만원 내고 살고 있습니다. 소득은 월1000만원 이고. . 그래서 십일조를 100만원 합니다. 실수령액은 700만원인데요. 하나님이 저를 만나게 해 주셨다고 무조건 해야 한답니다. 저도 신앙생활 하고 있으니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성전건축 5000만원도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금 2000만원을 못내고 있고 이자도 밀려있고 대출은 모두 받아 썼고요. 그렇지만, 함께 하기로 했기에 다 감수할 수 있습니다. 둘이 노력하면 빚도 갚을 수있고. . 그런데, 제가 이단이랍니다..십일조를 실수령액으로 하자고 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매달 교회에 내는 헌금이 성전건축비 빼고 120만원 입니다.


십일조 안했을 때에 다가오는 환란은 제가 책임져야 한답니다. 이젠 다투는 것도 지쳤습니다..목사님께 말씀 드렸더니 신앙이 우선이라고 저를 포기하라고 하셨답니다.. 저도 이 사람을 포기해야 할 거 같습니다..제가 이단인가요...?


[답변자1 댓글] sozo2016.08.25 11:04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죽이라는 계명처럼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일이었던 유대인들에게 그 안식일에도 나락을 따 먹어도 되고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도 된다고 하셨거든요.


즉, 더 중요한 건 사람인데 교리로 사랑을 꺾어 버리니 남자 친구분의 신앙은 말씀을 근거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종교공동체 관습의 바탕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사람을 버리는 것이 신앙이라고 한 그 목사는 도대체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 무언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도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성전조차도 허물라고 하셨는데 예배당 짓는 일에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실까요.


5천만원이면 사회의 하부구조에 속해 정말 마지 못해서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들 여러명을 살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돈(재물)을 버는 것이나 쓰는 것에 올바른 신앙윤리를 가져야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들은 교회 건물과 목사들 인건비로 너무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기는 커녕, 집단이기주의에 빠진 사람들로 비춰지죠.

남자친구하고 장래를 약속까지 하셨으면 좋은 사람이라 그리 결정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교리의 다름으로 그 분을 버리지 마시구요. 다만, 시간을 더 갖고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 많은 대화 나눠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작은자교회는 가나안성도들과 심정적 가나안성도들의 공동체이거든요. 지금 하신 고민들을 한번씩은 다 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과 교제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주실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십일조에 대해 너무 지독하고 악랄한 교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적인 교리에서 벗어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사랑과 인내로 남자친구를 대하시면서 참 신자의 삶으로 인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신 말씀이 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질문자 댓글] 느티나무2016.08.25 19:09

 

  • 감사합니다.. 살면서 생각이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크나큰 행복일테지요..결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저를 버리고 신앙을 선택하겠답니다..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그 목사님을 따르고 본인에게 저보다도 더한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간답니다..

  • 자신이 없습니다. .말로는 제가 우선이라 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지 못하다고 저를 책망하는 그 사람을 감싸안을 자신이 ~~ 교회도 함께 갔습니다. 가정을 포기하라는 목사님의 주일 설교를 들으면서도 그 목사님을 숭배하는그 사람과 함께 할 자신이 없네요.. 그리되면, 그 교회를 나가야 하니까요..

  • 홀로 살아온 그 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 새 가정을 이루고 싶어하는 그 마음. .너무도 잘 알지만 길이 틀리면서 함께 한다는 건,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주는 것일테니까요. . 저를 버리겠다는 선택은 지금 제게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제 상처를 치유해야 하겠지요. 목사님 덕분에 더 빨라질듯 합니다. . 감사합니다. 꾸벅^*^

  • [답변자2 댓글] 쥰(joon) 2016.08.29 06:14

     

  • 감히 쓸데없는 사족 하나붙이겠습니다. 황목사님은 신앙상담처럼 말씀하셨는데, 간단히 쓸데없는 몇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첫째, '십일조 안했을 때 다가오는 환란을 책임지라고 하셨다는데, 기독교의 신이 그 정도로 쪼잔한 분으로 믿는다면 잘못된 신앙입니다. 성서 처음부터 다시 읽으라고 하세요.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 환란 무서워 십일조한다면, 액땜하고자 무당에게 바치는 굿값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 그걸 미신이라고 하고 우상숭배라 하며 지옥행이라고 성서에서는 이야기하죠.

    (바리새인이)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둘째, 십일조를 안하면 이단이 아니고 십일조를 하면 이단입니다.


    제7일 안식교를 보통 개신교에서 이단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묶여있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율법중 매우 중요한 위치인 안식일을 지켜도 율법에 묶여 있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하는데, 십일조라는 율법을 안지키니까 이단이라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 돼지고기나 장어는 먹으면서 십일조만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은 모두 지옥행입니다.율법의 의미를 받아 들여야지 구약시대처럼 문자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나중에 아이가 말 안듣는다고 성서의 명령처럼 때려 죽이시렵니까? 문자적인 율법주의를 때려 부시겠다는 개혁가가 예수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율법이 문자적 수행이 아닌 의미적 내적 수행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한 번 큰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바로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지고.."

    셋째, 십일조는 땅을 소유하지 못한 레위인(제사장)에게 주도록 정의하고 있습니다.(교회가 아닌) 그리고 제사장은 받은 십일조를 과부, 고아, 나그네에게 나눠 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 십일조를 문자대로 지키려면 제사장에게 바쳐야 합니다. 목사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 구약에 제사장은 레위인만 가능합니다. 더구나, 기독교는 믿는이 모두를 제사장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다 못해, 목사를 제사장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십일조는 소외계층에 나눠줘야 합니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당신은 그들로 하여금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왕국을 이루게 하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은 땅 위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

    성서적 기준에서는 십일조를 안하는게 이단이 아니고, 십일조를 하는 것이 이단입니다.한가지 사족을 붙이자면 성전건축이라는 건 없습니다. 그냥 예배당 건축이죠. 성전이라는 것 역시 구약적 개념입니다. 율법적 개념이고 이단이며 건물에 대한 우상숭배입니다.. 개신교(프로테스탄트)는 예배당 짓는 돈을 거두어 들인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싸워서 분리된 교파입니다.


    예수께서 복음서에 수차례 성전이 무너질 것을 이야기 하셨는데, 아직도 성전 타령을 한다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성전 건축을 하신다고 하셨는데, 성전을 짓는다면 그 성전에서는 예배드릴 것이 아니라, 양새끼 잡아서 피를 뿌리고 태워야 합니다. 그게 성서적으로 정확한 성전의 용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곳이 예배당 입니다.


  •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셨다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예수가 영원한 화목제물이 됐다는 것을 믿을 것이고 그렇다면 성전의 제사 의식이 종결됐다는 것도 아실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성전은 건물이 될 수없고 바로 예수믿는 자들을 가르킵니다.

    레위인도 아닌데 제사장인 척하고 십일조 거짓에다 성전 굿당 팔이 하는 목사가 신앙이 우선이라고 헤어지라고 했다는데, 성경은 '독사의 자식' 이라고 합니다. 월세 300만원에 살면서 헌금을 매달 100만원 이상하고, 세금도 못내면서 예배당 짓는데 5천만원 씩이나 낸다면, 정신병자이거나 일부 변질된 목사에게 세뇌되어 버린 아바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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