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투    2014.10.10

 다른 복음에 해당되는 십일조 폐지 

 

개혁과진보   

십일조 찬성론자들 중의 일부는 반대론자들에게 서슴지 않고 마귀라고 정죄한다. 문맥과 정황을 무시하고서는 성경에 십일조 하라고 되어 있고 예수님이 십일조 하라고 하셨는데 반대하기에 마귀라는 것이다.

 

교회의 선한 사업을 위해 교회 재정을 확보하려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을 가로막기에 마귀라는 것이다. 잘못된 관점에 기초한 잘못된 열성이 빚어내는 참극이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참극이다.

 

십일조에는 모든 소득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담겨있다. 십일조의 정신이라고 이야기된다. 그 정신 자체는 귀하고 아름답다. 그렇다고 십일조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실 율법의 십일조에도 그 정신이 담겨있다.

 

그러한 정신이 담긴 십일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셨다.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셔서 교회에게 주셨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인 씨다.

 

율법의 십일조와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신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인 씨. 율법의 십일조는 아무리 좋은 설명을 갖다 붙인다고 하더라도 다른 복음이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약화시키거나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옮기시고 새 언약만으로 살아가도록 하신 그분의 뜻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에 대해 천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말한다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다(갈 1:9). 십일조 요구는 다른 복음인데, 십일조를 강조함에 대해 하나님께서 저주하실 지에 대해서는 뭐라 말을 못하겠다. 나의 영역 밖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성경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다른 복음의 의미에 십일조가 해당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말할 뿐이다. 그 이후의 선택은 각자 자신들의 몫이다.

 

율법에는 안식년과 희년 규례가 있다. 안식년에는 땅을 경작하지 않고 그 이전의 소출로 한 해를 살아야 한다. 희년에는 땅을 경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안식년과 이어지는 희년, 두 해를 경작하지 않고 안식년 이전의 소출로 살아가야 한다.

 

많은 소출을 얻은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양식을 나누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성경학자들은 이스라엘에서 희년 규례가 지켜지지 않았다고 본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부자라면 부자라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 것이고 가난한 자는 가난해서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호주머니를 열어서 그 안의 재물을 내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만큼 호주머니 안의 재물을 받아내기가 어렵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복음 전파에 힘을 쏟는다. 이 사회에서 복음을 드러내며 복음의 정신을 실천하여야 한다. 저절로 되지 않는 일이다. 많은 재정을 필요로 한다. 신자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하여야 하고 그 안의 물질을 내놓게 만들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십일조는 최상이다. 교회 재정 확보에 너무나도 유익하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재정을 확보해서 나쁜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여러 방면의 신앙적인 일에 사용하려는 것이다. 더욱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에서 벗어난 잘못이다.

 

하나님 신뢰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을 따르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각각의 시대에 교회에게 원하시는 방식을 파악하고 따르는 것이 그분을 신뢰하는 모습이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재정 확보의 방식이 십일조가 아니다.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인 씨다. 성도들이 그 원리를 깊이 숙지하고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기꺼이 씨(연보)를 심도록 하는 방식이다.

 

십일조에 비하여 훨씬 복잡하고 너무나 어렵다. 이스라엘이 십일조는 그래도 했지만 안식년이나 희년 규례는 전혀 지키지 않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강제성이 아닌 자발성에 의존하는 것은 언제나 큰 위험 부담을 가진다.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제성을 통하여 필요한 것을 확보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 유혹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다. 현실이다. 얼마든지 공감이 된다.

 

그러나, 유혹은 어디까지나 유혹이다. 악한 자가 하나님의 자녀를 넘어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술수이다.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비록 그 과정이 쉽지 않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씨에 해당하는 부분을 잘 분별하고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심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포로 회복 언약인 새 언약,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완성된 새 언약. 사람의 일생으로 생각하면 탄생기, 유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연결시킬 수 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완성된 새 언약의 시대이다. 사람의 생애와 연관시키면 자신의 생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장년이다.

 

물질 사용에 있어서 강제성을 완전히 없애시고 자발성을 부여하심은 장년에게 주신 복이다. 십일조는 편리성을 앞세워 그 복을 발로 걷어차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겸손하게 받아야 한다. 철저하게 자발성에 의존하는 씨(연보)를 통한 재정 확보라는 복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십일조는 하루 속히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율법 준수 요구를 종의 멍에를 메는 것으로 규정하였다(갈 5:1). 그렇게 가르친 유대인 교사들에 대해 갈라디아 교회를 이간 붙여 저희에 대해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갈 4:17)고 경계하였다. 십일조도 종의 멍에이다. 또한 그것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열심 내게 하려는 것이다. 십일조를 하면 물질적인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이들에게 온갖 좋은 것을 바치는 모습에서 확인된다. 목사를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교회 재정 확보에 있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역사하시기에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된다. 오히려 교회 재정이 더욱 풍성해질 수도 있다. 성도들이 성경적인 재정 사용에 대해 공감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고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재정을 성경적인 원리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다.

 

십일조를 폐지한다고 교회가 허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온전히 의지한다면 교회는 아름답게 세워질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성경적인 모습으로 아름답게 세워질 것이다.

 

펌출처: http://m.blog.daum.net/tithestory952014/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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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칩에 대한 바른 기독교적 관점은 -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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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칩이 천국의 열쇠가 아닙니다 - 마16장15 - 성서유니온선교회





“ 미국에 거주하는 통합측 목사의 WCC & 카톨릭 반대 설교 2탄 “미혹의 영 ”


주의 머슴

2014.09.06. http://cafe.daum.net/cuigen1964/DyCy/1302

 

영 분별 시리즈(2)

“미혹의 영”(요일 4:1-6) 1/29/2012



오늘은 “미혹의 영”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영 분별의 가장 주된 관점은 그 영이 하나님께 속했는가? 악 영에 속했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하였으며, 2-3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설 때, 진리의 영과 거짓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이 진리에 굳게 설 때, 비 진리를 분별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을 알고 그를 체험하여 성숙한 신앙인이 될 때, 우리가 악한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혹의 영들은 항상 미약하고 장성치 못한 신자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 마지막 혼란의 때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때,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할 수 있으면 믿는 자들까지라도 미혹하여 멸망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미혹의 영들과 거짓 교사들을 분별할 수 있기 위해 무엇보다도 주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요한 일서 3장에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 그리스도를 분별하고 미혹하는 자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로, 그럼 이 미혹이란 무엇입니까?


미혹이란 말의 뜻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멘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혼란이란 뜻으로 confusion, 홀림이란 뜻으로 delusion이라고 쓰였습니다. 그러면 이 미혹의 영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 미혹의 주체를 마귀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0:10에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분문 6절과 디모데전서 4:1에 보면 미혹의 영, 미혹케 하는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꾀어 선악과를 따먹게 한 마귀가 미혹의 영으로 역사하여 진리를 거짓으로 믿게 하고, 거짓을 진리로 믿도록 미혹하여 인간을 파멸에 이르도록 힘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령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거룩한 영, 진리의 영이라고 하면, 사탄 곧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미혹의 영이 되어 진리를 왜곡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적 그리스도의 영, 미혹의 영이라고 말하고, 이러한 미혹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이 미혹의 영이 점점 더 교회 안에까지도 몰래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대체적으로 이 미혹의 영에 속는 사람들의 유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교사들에 의한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미혹된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가르침을 깨닫게 해 주고 바른 진리를 알게 해 주면, 돌아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는 이미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경우입니다.


명백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아무리 진리를 말해 주어도 받아 들이지 않고 자기들이 믿는 것을 진리로 여기는데, 심지어는 자기들의 교주를 하나님으로, 재림하신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경우입니다.


신/0/0의 000 교주나 J/0/0의 000 교주같은 사람들은 많은 여자들과 음란한 관계에 빠져 있음에도 그런 사람들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미혹의 영인 귀신이 그들 가운데 들어갔기 때문에 좀처럼 돌이키기 힘들고 빠져 나오기 힘든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는 WCC,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 10회 대회를 한국 부산에 유치한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WCC는 “기독교만의 부활과 영생, 구원을 벗어나 모든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모든 종교가 같은 목적을 가졌다”고 보고 로마 카톨릭과 손을 잡고 세계종교를 하나로 통일하려고 하는 종교혼합주의적 범신론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되고 미혹된 사상들이 교회 안에 점점 침투하고 있는데, 많은 교단들이 이러한 종교통합운동에 가입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종교연합을 주장하는 세속적인 교회에 물들어가는 마지막 때에 주의 종으로 행세하는 거짓선지자들이 성경의 예언대로 많은 성도들에게 쑥 물을 먹여 죽게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버젓이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의 종교예식이 행해지고 있는데도 이것을 "타 종교와의 대화"라는 구실로, 사단의 우상숭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일부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혹의 현실입니다.



2011 25 0시 서울 구로구 구로동 000 교회에서 종교행사가 열렸습니다. 예장통합 영등포노회 소속 000 목사는 이날 성탄절 축하예배에 불교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승려와 정토회 회원 30명을 초청해 종교간 화합을 빙자한 행사를 진행하였는데, 000 목사는 설교 후에 답사로 법륜 승려를 강단에 올라 오게 하여 설법을 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교인들 중에 하나도 거부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에 더 놀랐습니다. 000 목사와 000 교회는 이미 2009년부터 불교계와 교류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2009년 사월초파일에는 부처 탄생을 축하한다고 000 목사와 000 교회 교인들이 서울 서초구 00동에 있는 00회관에서 열린 봉축행사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이번 성탄절에는 00회 회원들이 000 교회를 방문한 것입니다.



이를 한 기독교 신문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예배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000 목사님은 00 스님을 강단으로 부르시더니 즉석에서 설교를 요청했습니다. 00 스님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강단에 올라와 축사와 더불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에 대해 참석한 교인들에게 설교해 주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스님이 교회에서 들려주는 설교라...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무척 이색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많은 교인들 모두가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종교를 넘어서서 이렇게 서로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많은 감동으로 다가 왔네요. 000 목사님이 00 스님의 성탄 축하 메시지를 듣고 "자주 오시면 제 자리가 위험해질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 참석한 교인들이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일반신문에서는 이를 종교화합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기독교 언론까지 이를 교회개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보도한다면, 이는 이미 미혹의 영이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 온 것입니다. 또한 이런 교회와 목사를 교단에서 문제삼지 않는다면, 그 교단도 이미 미혹에 물든 것입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오직 유일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같이 있다가는 같이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계시록 18:4절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서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지금 00신학대학교에서는 신학교 신입생들에게 불교체험을 시킨다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절에 가서 새벽예불과 108배 등의 참선을 하고 중의 설법을 듣게 하고, 신학교 채플 시간에, 곧 예배시간에 중을 초청하여 불교에 대해서 강연을 듣게 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할 유일 신앙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거나, 다른 어떤 방법과 혼합하던지 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다 미혹의 역사입니다. 요한 이서 1:2에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여러 교단들이 WCC의 영향을 받아 점점 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적 색채를 따라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기도의 대상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 외에 어떤 대상에게 기도하는 것에 대해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은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터넷에 실린 생명의 강 살리기 종교여성 공동기도문의 내용입니다

“생각 없이 흩어져 살던 우리를 부른 것은 당신입니다. 고속의 기계덩어리에서 내려 맨발로 걸어오라, 짓궂게 부른 것도 당신입니다… 오, 하느님, 부처님! 살려 달라 매달려야 하는 건 우리 자신인데, 거꾸로 당신이 우리를 향해 애원하시다니요? 무력한 당신, 한없이 작은 당신, 아직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당신, 한 중생이라도 더 구제하기 위하여 극락 언저리를 서성대는 당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아래로 아래로 오랜 세월 흐르는 강물은 바로 당신의 눈물입니다,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모든 창조물은 당신의 선물, 천지에 어느 것 하나 당신의 모태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온 우주만물에 깊이 새겨진 하느님의 흔적, 부처님 말씀하시기를, 세계가 한 송이 꽃이라 했거늘, 분별심을 내어 저 강물의 숨통을 틀어막는 자 누구입니까? 더 잘 살려는 무조건적 욕망, 더 많이 가지려는 부질없는 바람, 종교는 달라도 진리의 뿌리는 하나, 만물이 한 배()에서 나와 한 사랑을 먹고 사는 식구(食口)요 생구(生口)인 것을 믿습니다. 생명의 강을 모시는 일은 나를 모시는 일이요, 너를 모시는 일입니다. 녹색별 지구를 살리는 일이요, 만물의 어머니를 살리는 일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성모 마리아님과 소태산 대종사님의 마음에 연하여 오늘 4대 종단의 종교여성이 일심(一心)으로 간구하오니, 부디 이 땅에서 죽임의 굿판 대신에 신명나는 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이제 4대 종단의 종교여성들이 가부장적 개발의 망령에서 벗어나 사랑과 자비, 정의와 평화가 한 데 어우러지는 후천개벽의 새 세상을 열기로 결단하오니, 모쪼록 이 믿음의 싹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우리를 지키고 돌보아 주십시오. 받들어 비옵나니,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멘.


이것은 00대학교 기독교학과 겸임교수이며, 00복음교회 교육목사라고 하는 000이라는 여자목사가 쓴 기도문입니다. 이를 기독교의 기도문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목사라고 하지만, 하나님을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길로 받아 들이는 믿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예수를 믿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선한 목사라고 따라 다니는 사람들 역시 미혹된 사람인 것입니다. 지금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해야 할 때입니다.


이것과 함께 한국교회는 이단 논쟁으로 자기들과 기존 교리와 맞지 아니하면, 교단이 서로를 정죄함으로 진짜 이단과 그렇지 않은 교회와의 구별도 더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한 교단에서는 이단으로 정죄한 교회를 또 다른 한 교단에서는 받아 주는 등, 그야말로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점점 헷갈리게 하는 미혹의 역사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의 영으로 역사하는 미혹의 영은 자신들이 믿는 교리와 전통에 빠져 성령의 역사를 부인할 뿐 아니라, 그러한 역사를 비 진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두 가지가 은사 중단론과 계시 중단론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이 미혹의 영은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즉 사람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진리에서 떠나고 불의를 행하게 함으로 미혹하고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이것들은 교회에 다니지만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한 때 성령 체험을 한 사람들과 교회 지도자들까지라도 미혹하여 간음과 지위나 직분에 대한 탐욕으로 죄짓게 하고 미혹에 빠져 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미혹의 영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미혹합니까?


1. 진리에서 떠나도록 미혹합니다.


야고보서 5:19에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는 생명인데, 이 생명에서 떠나도록 미혹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한 때 진리 안에 있던 자들까지 진리에서 떠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한 때 성령 충만했던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 가운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남자가 사업을 하다가 보면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 갈 수도 있지. 꽉 막혀 가지고 어딜 세상 살릴만한 엘리트가 되겠어? 십자가로 모든 죄 문제 해결됐다. 율법주의에 빠져 정죄하고 다른 사람 판단치 말라”


그 목사를 개인적으로 알기 때문에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전에는 얼마나 진리에 대해 강력하게 설교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잘되니까 타협하게 되고, 사람들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돈 있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그들에게 지원을 받으니 그들을 변호해 준다고 죄를 가볍게 여기고, 성도로서의 구별된 삶에 대한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불의와 타협하고 변질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과 문화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현실과 세상과의 타협이 곧 진리에서 떠나도록 미혹하는 마귀의 목적인 것을 알고 진리 안에 거하고 끝까지 진리를 붙드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도록 미혹합니다.


마귀는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어도 죽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불순종하게 미혹하였습니다. 창세기 3:13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하였을 때, 하와가 대답하기를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도록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즉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으로 성도를 미혹함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함으로 미혹에 빠지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멸망시키려고 미혹합니다.


요한복음 10:10에 마귀를 도적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도적이 오는 목적은 우리 영혼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미혹의 영에 사로잡히면. 결국 그 영혼이 마귀와 함께 지옥의 불 못에 들어가게 되기에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모든 미혹의 영을 분별하고 진리의 영인 성령 안에 거해야 합니다.


(중략)


이미 이문제로 인해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의견이 갈리고 있어 성도들은 가면 갈수록,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없도록 혼돈이 되어 갈 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미혹의 결과는 육신만 아니라 영혼까지 멸망하게 둘째 사망으로 이끄는 마귀의 계략인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이 미혹의 영은 어떤 방법으로 미혹합니까?


1.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함으로 타협케 합니다.


이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거짓 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11-12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면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함을 통해 유혹하였습니다.

2, 욕심에 이끌려 죄짓게 함으로 미혹합니다.


야고보서 1:14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 짓고 싶은 욕심을 이기지 못하여 그것에 끌려 가도록 만들어 미혹하고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욕심에 이끌리게 하는 죄의 유혹에 무디어진 마음, 즉 죄에 대한 집착이 미혹의 원인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죄에 끌리는 마음, 즉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는 미혹을 받게 되고, 미혹의 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처럼 육체의 욕심을 따라 간다는 것은 결국 주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의 욕심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붙들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감으로 가능합니다.


금식으로 굶주린 예수님을 향해 돌로 떡 만들어 먹으라며 시험하러 온 마귀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하나님 말씀을 인용함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육체의 욕심으로 미혹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을 사랑함으로 죄의 욕심과 유혹을 이겨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오직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을 때만이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때로는 마귀가 이적으로 택한 백성들까지라도 미혹합니다.


마가복음 13:22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0에도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적과 가사가 나타난다고 그것만을 좇아가서는 잘못하면 미혹의 길에 빠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거짓 이적과 기사들로 사람들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인한 이적과 표적들까지 교회가 분별하지 못하여 지금은 그러한 역사가 없다고 거부하도록 만드는 것도 미혹의 역사임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짜가 판을 친다고 진짜까지 함께 몰아 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6;17-17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점점 미혹의 역사가 교회 안에서까지 진리와 비 진리를 혼돈하게 하는 이 마지막 때에 오늘 6절의 말씀의 결론처럼,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알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의 영 안에 거함으로, 미혹의 영을 분별하고 승리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 킹덤 빌더지 미니스트리 http://cafe.daum.net/prayto7



식사기도를 멈추라    ♣ ..생명의 말씀    Admin     


 

                                  "식사기도를 멈추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6:1)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5)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믿는자, 곧 십자가의 삶을 사는 자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행동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행동에 옮기는 것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약하거나 추한 모습은 감추고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서

        칭찬과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혹, 좋은 인상을 받고 싶은 마음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비난이나 멸시나 수치를 당치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도 역시 본래적인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한,

        좀 소극적이겠지만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추하고 악하고 이기적입니다.

        좋은 모습으로 본성을 가리기 보다는 

        정직한 편이 낫습니다.

       

        사람들은 겉치레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것은 곧 예의범절, 도덕, 도리같은 것들입니다.

        물론 그것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함께 평화롭게 잘 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것들로써 자기 체면치레나

        자기 영광을 위해 더 자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식사전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음식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마땅하고 당연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진정한 감사없이

        습관적으로 드려지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행위로 여기거나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이라면

        기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식사 기도 후에,

        음식에 대해 불만을 품고 불평하거나

        원산지에 대한 불신의 감정이나

        식사 중에 나눠지는 무익한 대화는

        감사기도 자체를 무색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음식앞에서 취하는 태도가

        감사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식전의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식사기도를

        자신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혹은 기도하지 않고 식사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서

        비난할 지 모르기 때문이거나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기 위해 행하면

        그것은 기도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하지 않음이 좋습니다.

 

        자신의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일치하지 않을 때 

        식사기도는 별 의미가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불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육신의 삶이 그쳐질 때 시작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이 십자가에서 마쳐질 때에

        비로소 참다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식사기도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늘 기도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요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항상 은밀히 행해지기 때문이요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를 잃지 않습니다.

 

        식사기도 후에

        감사하지 않고 식사하는 것보다는

        식사기도는 없어도

        감사하며 식사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자는

        늘 기도하며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굳이 식사 전에

        따로 기도하는 행위를 취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가 없는 기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삶이 따르지 않는 식사 기도는

        오히려 해롭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행하는 식사 기도는

        자신을 형식과 가식에 가둘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는

        오히려 복음 증거를 저해합니다.

 

        십자가에서 육신의 삶을 마친

        참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도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굳이 식사기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식사 중에도 마친 후에도

        감사를 잃지 않습니다.

        그의 쉼없는 내면의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때로는 외적인 식사기도가 필요할 때도

        거절치 않습니다.

 

        식사기도를 행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으로 볼 수 없으며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식사기도의 유무로써 

        타인의 믿음을 판단하는 것은

        율법적 삶에 갇힌 초보에 해당합니다.

        식사기도는 잘하면서

        이기적인 삶을 포기치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것이

        좋아 보일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어차피 형식적이거나 가식적인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또한 식사기도를 통해

        복을 구하고 비는 행위는

        응답받을 수 없는 정욕적인 기도이며

        잠시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자기 만족에

        해당할 뿐입니다.

     

        기도있는 거짓 기도가 있으며

        기도없는 참 기도가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기도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늘 참된 기도를 내면으로 드리는 자입니다.

        외적인 기도만을 기도의 행위로 여기는 자들은

        진정한 믿음이나

        기도를 맛본적이 없는 자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면의 기도이며

        그리스도와의 끊임없는 내면적인 교제입니다.

        그의 기도는

        시작 시간도 마치는 시간도 없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교제의 삶에 들어간 자입니다.

        그는 보이기 위하거나

        듣기에 좋은 유창한 기도보다

        어눌하나 은밀하고,

        정직하며 진실한 기도를 좋아합니다.

 

        당신의 식사기도로

        당신의 믿음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식사기도의 유무로

        믿음을 가늠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니 어정쩡하고 정욕적이고

        이기적인 기도를 멈추십시오.

        식사기도는 참 믿음도 없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믿게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식사기도를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십자가를 통한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매순간 기도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니, 기도하지 않고 사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성경엔 그리스도께서 식사기도하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어정쩡한 믿음을 가지고 식사기도 정도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알며 살아가는

        거짓을 버리십시오.

 

        식사기도 하지 않으면서도

        식사 외의 모든 일까지 함께 늘 감사하며,

        식사때만 그리스도인인 것같은 가식을 버리고

        식사기도 하지 않고도

        묵묵히 삶으로써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진정한 믿음을 가져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09.08.22


       원출처: http://boxs.kr/EOCUV

  십일조 헌금은  과연  성경적인가?   

글 쓴 이 : 장로 고태영

 

* 본 내용은 핸드폰으로 보기에는 장문(長文)이므로 요약을 먼저 실었습니다.

 

모든 내용을 보실 분은 요약을 보고 이어서 보시기 바니다.

 

 00- 요약 --00


1.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이 최초


아브라함이 BC 2115년 경 북방왕국과의 단 전투에서 (Lot)과 재물들을 구출하여 오는 중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를 맞이하며 아브라함을 축복하는데 이때 아브라함은 노획한 재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드렸다. 이것이 십일조의 최초 기록이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십일조를 명하심


아브라함과 야곱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십일조를 드린 반면, 이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로 하여금 세상의 어떠한 일들도 하지 말고 오직 성막에서 제사장 직무만을 감당하게 하셨는데 그들의 생계를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소산의 십의 일에 속한 것들을 레위지파에게 드리게 하였다.

 

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일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믿음을 질책하시면서 십일조를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3: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a tenth)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의 십일조도 행하고 또한 율법의 목적인 "공의와 자비와 믿음"도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을 책망하시며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어 제사가 없어지고 은혜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소득의 십일조계속 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인용하거나 확대해석 해서는 안된다. 예로,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는 그 시대의 율법에 따라 행하게 하는 말씀이 나온다.

 

마태복음 8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offer the sacrifice that Moses ordered)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기도로 치유받은 자가 제사장에게 보이고 예물 드림이 지금 시대에는 불필요 하듯이 예수님께서 그 시대사람들을 질책하며 하신 말씀을 이 시대에도 모두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4. 예수님 부활 승천 후의 십일조는?


신약 시대는 레위 직분이 폐지되고 제물이 필요 없는 시대로 바뀌었다! 예수님께서 단 한번에 자신을 드림으로서 십자가 보혈을 믿는 모든 사람의 죄는 깨끗하게 되는 것이므로 예전처럼 짐승을 제물로 잡아 레위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이다.(베드로전서 2:9)

 

그런 이유로, 신약 성경에서 바리새인 꾸짖을 때 예수님 말씀 이외에는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율법시대에 있었던 십일조는 더 이상 존속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태어난 지 8일 만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셨지만, 은혜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할례가 필요 없는 것처럼~! 

 

십일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단어가 성경에 나오는데, 연보(모금, collection, contribution)라는 단어이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연보는 이미 정해진 량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정한 대로 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고후 9:7)고 했다.

 

오늘의 헌금은 연보의 개념으로 '성도 각자의 마음에 정한 대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복음시대에 어울리는 은혜로운 헌금제도이다!

 

5, 천주교에서도 십일조 제도를 폐지했는데 왜 개신교 일부에서는 존재

하는가!


1079 신부에게 자식의 세습을 근원적으로 막기 위해 독신 제도를 도입하고, 그후 개신교의 종교개혁시대에 이르러 십일조 제도를 아예 폐지한다. 과거 종교 개혁의 대상이던 천주교에서 이렇게 성경으로 돌아가, 올바른 헌금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기독교계(개신교)에서는 오직 성경(Only Bible)만을 강조하면서도 왜 십일조 제도는 그대로 시행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자녀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안타깝다. 왜?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가르쳐 준 헌금 방법을 따르지 않는가!

 

6. 사도 바울이 권하는 헌금(연보)의 자세


1)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2) 자원(自願)하여

3) 자신을 먼저 주께 드리는 마음으로.

 

* 계속 정독하세요: http://cafe.daum.net/abj3927/OdTQ/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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