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 & 평신도는
가톨릭 교계제도 용어이므로,
개신교가 사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십일조와 성직자 사례비
예수님 당시는 아직도 레위인이 율법에 따른 제사를 드리고 있었기에 십일조를 인정 하셨지만(마23:23-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완성하신 후에는 성소 휘장이 찢어졌으므로(마27:51) 더 이상 성전도, 율법에 따른 제사도, 제물도, 제사장도, 레위인도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의한 십일조는 마감되었고 이제는 감사의 헌금을 교회의 활동을 위해 헌금하는 것입니다(고전16장).
놀랍게도 오늘날의 교회의 사상과 관습은 신약성경에 근거하기보다는 1세기 이후의 역사적 사건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옳다. 하지만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무지하다.
그것에만 무지할 뿐 아니라, 그 역사적 사건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인간적 전통들을 만들어 내고, 그 전통에 "크리스천"이라는 표딱지가 붙어져서 기독교 전통으로 고정되어 버렸다는 사실 또한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지금의 교회 전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것을 오히려 이상한 단체로 단정하고 있으니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이 책은 오늘날의 교회생활이 성경의 원칙을 위배하고 있는 특정한 부분들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패러다임의 안전지대 밖으로 여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내린 결론에 당신이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당신은 그가 제시한 근거 자료에는 아무런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폭발적인 결론을 끌어 내는 학문적 연구의 집대성이다.
- 랄프 네이버
추천의 말 : 이 책은 300년 전에 나왔어야 했다
이 책은 300년 전에 이미 나왔어야 했다. 그랬다면 기독교 역사는 완전히 다른 행로를 택하였을 것이다. 만일 오늘날 세상의 모든 목사가 이 책을 읽는다면, 그들은 당장 목회를 그만두든지 아니면 평생 자기를 속이며 외식하며 살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대부분의 관습들은 신약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것들을 계속 답습하고 있는데, 실은 대부분 우연히 생겨난 것들이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그 관습들은 실지로는 콘스탄틴 황제(A.D. 324) 이후 50년 또는 종교개혁 시작(A.D. 1517) 이후 50년 안에 등장했다.
바이올라 형제가 우리를 위해 그러한 개신교의 관습들의 기원을 추적해서 밝혀 내는 수고를 해 주었다. 단 하나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이 책이 금년 한 해 동안 출판될, 적어도 십만 권은 되는 기독교 서적 가운데 하나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300년 전에, 아니 200년 전에만 출판되었더라도, 이 책은 수백 권 정도의 책들 중 하나로서 많은 크리스천들에 의해 읽혀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은 당신이 친구들에게 이 책을 소개함으로써 더 많이 읽혀졌으면 하는 바램이 내게는 있다.
그런데 잠깐, 이 책을 읽고 나서 당신 역시 양심의 가책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들이 성경에서 유래하지 않은 이교 관습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시는 "우리는 성경 중심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신약성경에 근거해서 행하고 있다"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우리가 실로 신약성경과 아무런 관계 없는 것들을 행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더 슬픈 현실이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뒤틀리게 비비꼰 후에 신약성경으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들을 승인해 주도록 요구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평신도(가톨릭 용어)나 목회자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보편적인 현상인데, 이런 사고방식이 우리의 신앙을 파괴해 왔고 또 지금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모든 관습들을 접어놓고 밑바닥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고 1세기 때의 초기 교회의 이야기를 바로 알아서 우리의 신앙에 접목시켜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은 후에 다른 크리스천들에게 소개하여 그들에게 읽히기를 권고드린다. 그리고 나서 당신의 양심에 따라 행하라. 그렇게 한다면 초기 교회에서 행하여졌던 단순한 신앙생활이 머지않아 재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 진 에드워즈
십일조와 성직자 사례비
프랭크 바이올라(Frank Viola)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재리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 사도 바울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너희 온 백성이 나의 것을 훔치니, 너희 모두가 저주를 받는다.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각주 - 말라기 3:8-10).
말라기 3장의 이 구절은 많은 목사들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것 같다. 특별히 교회에서 헌금이 잘 들어오지 않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당신이 현대 교회에 좀 다닌 사람이라면, 이 말씀이 강단으로부터 종종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필자도 그것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 수를 세기에도 지쳐 버렸던 적이 있다. 이 구절을 사용해서 그럴 듯하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보라.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충성스럽게 바치라고 여러분에게 명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도적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를 저주받게 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십일조 신경'을 외워봅시다. '십일조는 주님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진리로 받아 들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쁘게 드립니다. 십일조를!'"
"하나님의 일이 계속되려면 여러분의 십일조와 헌금이 꼭 필요합니다"(물론 "하나님의 일"이란 교역자 생활비와 교회 건물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전기 사용료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런 류 위협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죄책감을 갖고 매주 소득의 십분지 일을 바치게 된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물질적으로 그들에게 복 주시기를 기대한다. 바치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께 불순종했다고 생각하고 물질적 저주가 그들에게 임할 것에 대해 두려워한다. 그러나, 몇 발자국 뒤로 가서 예리하게 질문해 보자.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십일조를 바치라고 가르치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목사와 다른 교역자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되는 영적인 의무가 있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충격적이다(당신이 목사라면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아마 지금 심장약을 예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십일조가 성경적인가
십일조는 성경에 분명히 등장한다. 그래서 대답은 십일조가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크리스천적인 것은 아니다. 십일조는 고대 이스라엘에 속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그들의 세금이었다. 당신은 신약성경에서 1세기 크리스천들이 십일조 했다는 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성경이 십일조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해 개념이 아예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십일조"라는 말은 단순히 십분의 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세금 제도로서 세 종류의 십일조를 제정하셨다.
● 가나안 땅을 상속받지 못한 레위사람들을 위해
땅의 소산 중에서 바치는 십일조.(각주 - 레위기 27:30-33; 민수기 18:21-31).
●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절기 행사를 위해
땅의 소산 중에서 바치는 십일조.(각주 - 신명기 14:22-27).
● 마을의 레위인, 고아, 나그네, 그리고 과부를 위해
땅의 소산 중에서 모아 두었다가 3년에 한 번씩 바치는 십일조.(각주 - 신명기 14:28-29; 26:12-13).
이것이 성경적인 십일조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매년 소득의 23.3%를 바치라고 했음을 주목하라.(각주 - 매년 20% + 3년마다 10% = 매년 23.3%. 하나님께서 이 세 종류의 십일조를 다 명하셨다(느 12:44; 말 3:8-12; 히 7:5). 10%가 아니다. 이 십일조들은 땅의 소산 중에서 드렸다. 즉, 땅에서 나온 씨, 땅에서 나온 열매, 그리고 가축을 드렸다. 그것은 땅의 돈이 아니라 땅의 소산이었다.
이스라엘의 십일조 제도와 오늘날의 미국 세금제도를 비교하면 아주 유사한 점이 많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매년 바치는 그들의 십일조로 그들의 국가 관리들(제사장들), 그들의 공휴일(절기),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나그네, 과부, 고아)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대부분의 현대 세금제도도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유대인들에게 속했던 모든 절기법과 사회법과 종교법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장사되었다(결코 도로 살아 나와서 우리를 심판하지 못하도록). 이런 이유에 의해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크리스천 십일조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죄를 위해 염소와 황소를 제사로 드리지 않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 여러분은 범죄와 육신의 무할례로 죽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 가운데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셔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심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각주 - 골로새서 2:13-17; 또 히브리서 6-10장을 참조할 것).
십일조는 율법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청지기로서, 우리는 1세기 성도들이 그들의 능력에 따라 기꺼이 드린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명령에 의한 의무로서가 아니고).(각주 - 고린도후서 8:3-12; 9:5-13). 초기 교회의 성도들은 자원해서 드렸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병자, 옥에 갇힌 자, 나그네였다.
금방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가? 그는 율법 시대 전에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 바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각주 - 창세기 14:17-20). 이것은 십일조가 모세 율법의 일부라는 당신의 주장을 뒤집고 있지 않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첫째,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철저하게 자발적이었다. 강요된 적이 없다.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명령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일이 없었다.
둘째, 아브라함은 그가 한 번 전쟁을 한 후에 거기서 얻은 노획물 중에서 십일조를 했다. 그는 그의 정기적인 소득이나 재산에서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당신이 복권에 당청되었다든지, 잭팟을 떠뜨렸다든지, 아니면 일에서 보너스를 받아서 십일조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은 아브라함이 지상에서 175년을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린 십일조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또다시 십일조를 드렸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당신이 만약 아브라함을 사용해서 "성경을 마음대로 갖다 붙여" 크리스천이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한 번만 십일조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각주 -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창세기 28:20-22에 의하면,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맹세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마찬가지로 야곱의 십일조도 완전히 자발적이었다. 그리고 만약 야곱이 그 후에 십일조를 드렸다면, 20년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종종 인용되는 말라기 3장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무엇인가? 우선 이 구절은 모세의 율법 아래 있던 고대 이스라엘을 향해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의 십일조와 헌물 드리기를 거부했다. 미국 국민들 상당수가 세금 내기를 거부한다고 상상해 보라. 미국법은 이것을 도적질로 간주할 것이다. 죄가 밝혀진 사람들은 정부로부터 도적질한 죄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이 바쳐야 할 세금(십일조)을 거부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적질을 한 것이다(십일조 제도를 제정하신 바로 그분으로부터).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가져와 창고에 채우라고 명령하셨다. 창고는 성전에 속한 방들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은 레위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 과부들을 위한 십일조(돈이 아닌 땅의 소산)를 저장해 두기 위해 따로 정해 놓은 곳이었다.(각주 - 느헤미야 12:44; 13:12-13; 신명기 14:28-29; 26:12).
말라기 3장 8-10절의 문맥을 잘 살펴보라. 5절에서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 점 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와,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와,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기꺼이 나서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가 십일조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십일조를 움켜쥐고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압제하고 억울하게 한 죄를 범했던 것이다. 여기 말라기 3장 8-10절에 하나님의 마음이 쏠려 있다(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는 것).
설교자들이 말라기 3장을 가지고 열변을 토할 때, 당신은 몇 번이나 그들이 이것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는 것을 들어 보았는가? 필자는 수도 없이 들은 십일조에 관한 설교들 중에, 이 구절이 실지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즉, 십일조는 과부, 고아, 나그네, 레위인들(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목적으로 존재했다. 바로 이것이 말라기 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점이다.
십일조의 기원과 성직자 사례비
씨프리안(200-258)은 성직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관습에 관해 최초로 언급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레위인들이 십일조에 의해 지원받았던 것처럼 크리스천 성직자도 십일조에 의해 생활비를 지원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오늘날에 레위인 제사제도는 철폐되었고, 우리가 모두 다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십일조를 요구한다면, 모든 크리스천들이 서로에게 십일조를 해야 한다!
씨프리안의 주장은 그 당시에 아주 보기 드문 주장이었다. 한참 후에 가서야 그것이 크리스천 다수에 의해 도입되었다. 씨프리안 이외에 콘스탄틴 이전의 다른 누구도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십일조를 주장하는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 300년이 지난 4세기에 가서, 몇몇 크리스천 지도자들이 성직자를 위한 크리스천의 관습으로 십일조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8세기까지는 크리스천들 중 널리 퍼지지 않았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처음 700년 동안엔 십일조가 거의 언급된 적이 없다."(각주 - Edwin Hatch, The Growth of Church Institutions(Hodder and Stoughton, 1895), p.102),
크리스천의 십일조 역사를 추적하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십일조는 국가로부터 시작해서 교회 안으로 옮겨갔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서유럽에서 땅을 빌려준 대가로 임대료를 징수하는 관습이었다. 유럽 전체에 교회들이 점점 더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자, 10%의 임대료를 교회들에 바쳤으며 10% 임대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을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와 동일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도화된 크리스천 십일조는 구약의 관습과 이교의 제도의 혼합물에 기초한 것이다.
8세기 무렵에 십일조는 서유럽의 여러 곳에서 법으로 제정되었다. 10세기 말에는 임대료로서의 십일조와 구약의 도덕적 요구 사항으로서의 십일조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십일조는 이제 유럽에서 의무가 되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8세기 전에는 십일조가 자발적인 헌금으로 실행되었었다. 그러나 10세기 말에는 국가 교회를 지원하기 위한 법적 의무로 귀속되었다(성직자에 의해 요구되었고 세속 관리들이 그것을 집행했다).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현대 교회들은 십일조를 법적 의무와는 떼어 놓았다. 그러나 십일조의 관습은 법적으로 묶어 놓았을 때 못지 않게 오늘날도 팔팔하게 살아 있다. 물론 당신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 해서 겉으로 심판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대부분의 현대 교회들에서 십일조 교인이 아니라면, 당신은 수많은 사역의 기회들에서 원천 봉쇄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강단으로부터 영구히 죄인으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다!
성직자(가톨릭 용어) 사례비에 관해서는, 사역자들이 처음 3세기 동안은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콘스탄틴이 등장해서 교회와 지방 금고와 국고에서 성직자에게 고정적인 봉급을 지급하는 제도를 제정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해로운 관습인 성직자의 봉급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일만 악의 뿌리
믿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결정 또는 확신에 의해 십일조를 드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십일조가 모든 믿는 자들을 묶어 버리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나타난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의무적인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가난한 크리스천들이 더 심한 가난으로 곤두박질쳐졌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가르쳐질 때, 힘겹게 간신히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죄책감 때문에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십일조는 "가난한 자들을 향한 좋은 소식"으로부터 복음을 철수시켜 버렸다.(각주 - 마태복음 11:5; 누가복음 4:18; 7:22; 고린도전서 1:26-29; 야고보서 2:5-6). 좋은 소식이 아니라 그것은 무거운 부담이 되었다. 자유가 아니라 압박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제정하신 원래의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거꾸로 말하면, 현대의 십일조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다. 수입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10%가 얼마 안 되는 분량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부자들의 양심을 마비시킨다(그들의 생활방식에 별로 큰 충격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상당수의 부유한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수입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10%를 헌금 바구니에 넣고서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헌금에 대해 아주 다른 견해를 갖고 계신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를 상기해 보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은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각주 - 누가복음 12:1-4).
애석하게도 십일조는 종종 제자도의 리트머스 테스트로 간주된다. "당신이 좋은 크리스천이라면, 당신은 십일조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엉터리로 적용한 것이다. 십일조는 크리스천의 헌신도를 말해 주는 증거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1세기 크리스천들은 헌신되지 않은 사람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 십일조를 하라고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며 서성거리고 있는 배후에는 성직자 사례비라는 뿌리가 있다. 적지 않은 목사들이, 그들에게 생활비와 목회 활동비를 지원할 의무가 회중에게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십일조가 계속 굴러 들어오게 하려고 물질 축복의 약속이나 물질적 저주에 대한 두려움을 사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대의 십일조는 크리스천 복권에 버금간다 할 수 있겠다.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돈으로 갚아 주실 것이요, 십일조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런 생각은 좋은 소식으로서의 복음 심장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
성직자의 사례비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도 신약성경의 근거가 희박하다. 사실 성직자 사례비는 새 언약 전체의 기본 성질과 전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각주 - 사도행전 20:17-38.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부탁한 마지막 말들을 주목하라. 그래서 더 중요하다; 데살로니가전서 2:9; 베드로전서 5:1-2). 1세기의 장로들(목자들)은 결코 봉급을 받은 적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양떼들로부터 취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에게 주면서 살았다.(각주 - 사도행전 20:33-35).
목회자들에게 봉급을 주는 것은 그들을 전문 직업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비즈니스로 둔갑시키는 성직자 계급을 만들어 놓는다. 목사와 다른 교역자들이 "봉급"을 받고 사역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문 직업인들이다. 교회의 나머지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의지하는 상태로 빠져 버린다.
만일 크리스천 모두가 주님의 집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확실히 안다면(그리고 그들이 그 부르심에 따라 실지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즉시 질문 하나가 떠오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목사에게 봉급을 줘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그러나 수동적인 제사장 제도가 존재하므로 그런 질문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교회가 제대로 기능이 발휘된다면, 전문직 성직자는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곧, "이것은 목사가 해야 하는 일이다"라는 생각은 이단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간단히 표현해서 전문직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구별된(그리고 위험한) 문서라서 오직 자격증 가진 전문가만 다룰 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도록 조장한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목사에게 봉급을 주는 것은 그로 하여금 사람을 기쁘게 하도록 강요한다. 목사를 사람의 종이 되게 한다. 그의 식권이 얼마나 회중이 그를 좋아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튼튼한 십일조 교인들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는 자유롭게 말할 자유가 없다. 여기에 목사제도의 두통거리가 놓여 있는 것이다.
유급 목사제도의 또 하나의 위험은, 그것이 아무런 기술(자비량 할 수 있는)도 없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 이교 문화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웬만큼 용감한 사람이 아니고는 전문직 목회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사람들 대부분은 목사제도의 압도적인 권위 앞에 너무 순진하다. 그것은 순진한 사람들을 씹어서 뱉는 것에 지칠 줄 모르는 정체 불명의 제도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전문적 목회자의 존재를 의도하신 적이 없다. 그런 직책에 대한 성경적인 의무나 정당성은 없다. 사실 성경을 가지고 그것을 변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개의 경우 교회 예배 중에 헌금을 수거하는 일은 봉사위원(usher)들이 맡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회중에게 "헌금접시"를 돌려서 수거한다. 헌금접시를 돌리는 관습도 사도 시대 이후에 고안된 것이다. 그것은 1662년에 시작되었다. 물론 그 전에는 교회당 안에 구제헌금을 위한 접시나 함이 비치되어 있었다.
봉사위원 제도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가 영국 국교회의 의식을 재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봉사위원들의 임무는 사람들이 어디에 앉았는가를 파악해서 헌금을 수거하고, 누가 성찬에 참여했는지를 알아 내어서 기록하는 것이었다. 봉사위원의 전신은 교회 "관리인(porter)"이었다.
관리인은 3세기부터 교회에 생기기 시작한 하급 사역자(일종의 낮은 계급 성직자)였다. 관리인들은 교회당의 문들을 잠그고 여는 것, 건물의 제반 관리, 그리고 집사들의 일반적인 지시 사항을 주관했다. 관리인은 종교개혁 시대를 전후로 영국에서 "교회 관리장(churchwarden)"으로 대체되었고, 나중에 봉사위원으로 대체되었다.
결론
결론적으로 십일조가 성경적이기는 하지만 크리스천적인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강조하지 않으셨다. 1세기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실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 300년 동안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을 행하지 않았다. 십일조는 8세기까지 크리스천들 사이에 널리 시행되지 않았다!
신약성경에서의 헌금은 성도의 능력에 따라 드리는 것이었다. 크리스천들은 사도들이 교회들을 세우러 다니며 여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이외에 성도들을 돕기 위해 헌금했다.(각주 - 다른 성도들을 돕는 것: 사도행전 6:1-7; 11:27-30; 24:17; 로마서 15:25-28; 고린도전서 16:1-4; 고린도후서 8:1-15; 9:1-12; 디모데전서 5:3-16, 교회 세우는 사람들을 지원한 것: 사도행전 15:3; 로마서 15:23-24; 고린도전서 9:1-14; 16:5-11; 고린도후서 1:16; 빌립보서 4:14-18; 디도서 3:13-14; 요한삼서 5-8. 지갑과 마음과의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공관복음의 여섯 절 중 한 절이 물질에 관한 것이다. 신약성경의 38개의 비유 중 12개가 물질에 관한 것이다.).
초기 교회의 가장 대단한 간증들 중의 하나는 크리스천들이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힘써 도와준 사실이다. 이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철학자 갈렌Galen 같은 사람을 포함해서)로 하여금 초기 교회의 놀랍고도 매력 있는 힘을 목격하게 했다("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를 보라").
십일조는 신약성경에 4번밖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들 중 크리스천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십일조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특별한 제사장들을 지원하기 위해 세금제도가 필요했던 구약 시대에 속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율법의 변화"가 생겼다. 옛 것은 폐지되었고 새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다 제사장이다(하나님의 집에서 자유롭게 제 기능을 발휘하는). 율법, 옛날 제사장 제도, 그리고 십일조는 모두 십자가에서 못박혔다. 이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전의 휘장, 성전 세금, 그리고 특별한 제사장 제도가 없다. 친애하는 크리스천이여, 당신은 십일조의 굴레와 비성경적인 성직제도를 지원할 의무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 목차
추천의 말 : 이 책은 300년 전에 나왔어야 했다
역자의 말 : 50년 전에라도 나왔어야 했다
감사의 말 : 나온 적이 없는 책
머리말 : 어처구니없는 듯한 제안
서론 : 우리는 과연 성경대로 해 왔는가
1. 예배 순서: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주일 아침
2. 설교: 건드렸다간 큰일나는 개신교의 신성한 소
3. 교회 건물: 대를 물려온 집 콤플렉스
4. 목사: 지체들의 역할을 훔쳐가는 도적
5. 주일 아침 의상: 문제를 덮는 가리개
6. 음악 사역자들: 조연급 성직자들
7. 십일조와 성직자 사례비: 상처뿐인 지갑
8. 세례와 주의 만찬: 물 탄 주스같이 된 의식
9. 기독교 교육: 잔뜩 부어 오른 두개골
10. 다시 봐야 될 구세주: 혁명을 일으키시는 예수님
11. 신약성경에의 재접근: 성경은 그림맞추기가 아니다
<"교회가 없다 - 현대 교회의 인간적 전통의 유래를 찾아서"(원제: Pagan Christianity) 中 십일조와 성직자 사례비 : 상처뿐인 지갑>
- 프랭크 바이올라(Frank Viola) 지음 이영목 옮김 -
펌출처: http://www.godswill.com.br/xe/Oferta/469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죽이라는 계명처럼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일이었던 유대인들에게 그 안식일에도 나락을 따 먹어도 되고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도 된다고 하셨거든요.
즉, 더 중요한 건 사람인데 교리로 사랑을 꺾어 버리니 남자 친구분의 신앙은 말씀을 근거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종교공동체 관습의 바탕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사람을 버리는 것이 신앙이라고 한 그 목사는 도대체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 무언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도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성전조차도 허물라고 하셨는데 예배당 짓는 일에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실까요.
5천만원이면 사회의 하부구조에 속해 정말 마지 못해서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들 여러명을 살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돈(재물)을 버는 것이나 쓰는 것에 올바른 신앙윤리를 가져야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들은 교회 건물과 목사들 인건비로 너무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기는 커녕, 집단이기주의에 빠진 사람들로 비춰지죠.
남자친구하고 장래를 약속까지 하셨으면 좋은 사람이라 그리 결정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교리의 다름으로 그 분을 버리지 마시구요. 다만, 시간을 더 갖고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 많은 대화 나눠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작은자교회는 가나안성도들과 심정적 가나안성도들의 공동체이거든요. 지금 하신 고민들을 한번씩은 다 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과 교제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주실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십일조에 대해 너무 지독하고 악랄한 교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적인 교리에서 벗어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사랑과 인내로 남자친구를 대하시면서 참 신자의 삶으로 인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신 말씀이 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