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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기도의 자세 100가지

(성경에 기록된 기도의 바른 자세와 방법) 1.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시기를

오히려 원하고 계십니다.(요15:7,16) 2. 성급한 태도를 버리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자신보다 우리를 더욱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때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때로는 느린 것 같고 때로는 응답이

없으므로 불안 초조 가운데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3. 회개부터 하십시오.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우리에게

죄악이 있을 때에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며 기도 하십시오. ♣기도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욕망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야 합니다. 5. 하나님이 듣고 계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그분의 성품의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6. 성령 안에서 기도 하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분이요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시는 기도의 영이십니다. 7. 기도한 것을 받은 줄로 믿으십시오.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친히 약속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기도의 생명입니다 (막11:24) 8. 상한 심령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잠3:34).그리고 상하고 통회하는 자를 멸시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시51:17). 9. 감사함으로 기도 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것을 강조했습니다.(빌4:6) 10. 용서한 후에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음에 분을 품고 기도하는 것을 경멸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해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11. 힘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전심으로 기도하는 열정에 사로잡힐 때만 하나님의 능력이 깃들게 되어 있습니다. (렘29:13) 12.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입술의 사람이 아니라 무릎의 사람들에게 능력과 감화력을 더해 주십니다. 그리고 무릎 꿇는 자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13. 끈질긴 기도를 하십시오. ♣열심히 없는 기도는 죽은 개로 벼룩을 사냥하는 것과 같고 눈먼 매로 빈대를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눈18:7) 14.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근심, 초조, 불안, 낙심 가운데 기도하고, 기도한 후에도 계속해서 근심, 초조, 불안, 낙심 가운데 살면 영원히 기도 응답의 기쁨은 없습니다.(갈6:9) 15.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끝까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깃들게 되어있고, 능력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창32:36) 16.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생활화, 생활의 기도화가 되면 당신의 짧은 기도에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삼상12:23) 17. 순간 순간마다 기도하십시오. ♣매 순간 매 순간 마다 깨어서 기도하는 자에게는 사탄이 유혹하거나 시험할 겨를이 없습니다.(창24:63) 18.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육신의 부모님께 구체적으로 나의 필요를 요청하듯이하나님 아버지께도 구체적으로 기도해야만 합니다.(눅 11:5) 19.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믿음의 기도만이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약 1:6-8) 20. 진실하고 솔직하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중언 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진실되고 정직한 기도를 원하십니다.(마6:7) 2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기쁘시게 한 자녀에게 모든 것을 채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마6:33) 22.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작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게 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막14:36) 23. 새벽에 기도하십시오. ♣성경의 기사와 이적은 거의 다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늦게 하는 기도는 버린 기도입니다.(막1:35) 24. 금식하며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 기도 하셨고,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금식 기도 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체험했습니다. 25.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에게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26. 면벽 기도를 하십시오. ♣구약성경의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잘못을 뉘우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벽을 마주한 면벽 기도였습니다.(역대하32:24-26) 27. 찬송하면서 기도하십시오. ♣바울과 실라는 찬송으로 옥문이 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감옥이 그를 가둔 것이 아니라, 바울과 실라가 감옥 을 가두었습니다. 28. 깊은 기도를 하십시오. ♣하늘의 해와 달을 멈출 수 있었던 여호수아의 능력은 깊은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출33:11,수10:12) 29. 반복하여 기도하십시오. ♣반복의 기도는 물이 바위를 뚫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0. 씨름의 기도를 하십시오. ♣구약성경의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천사와 씨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31. 하나님으로 쉬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쉬지 못하게 하는 기도야 말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기도입니다.(사62:6,7) 32. 물러서지 않는 기도를 하십시오. ♣두로 물러가는 만큼 하나님의 능력과도 거리가 멀어집니다(히10:38) . 33. 약한 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약한 것을 통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34. 기도와 무기를 동시에 만드십시오. ♣구약성경의 느헤미야는 무기를 잡은 채 기도하고 싸우면서 성벽을 쌓았습니다.(느4:23) 기도에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35.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신약성경의 소경 바디메오는 눈을 뜨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부르짖었기에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마 9:27-31) 36. 믿음의 밑그림을 먼저 그리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밑그림이 없는 기도는 무정란과 같습니다. 37. 모호한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모호한 기도는 모호하게 응답 받게 되어있고 구체적인 기도는 구체적으로 응답받게 되어 있습니다. 38.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 주님을 높이고,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는 기도는 기도 중의 최고 기도입니다. 39. 기도의 동역자를 만드십시오. ♣모세는 산꼭대기에 아론과 홀을 데리고 갔습니다. 기도의 동역자가 있으면 넘어지더라도 힘이 됩니다. 40. 점잔을 떨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끝 장보는 신앙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41. 교회 일을 앞장서서 하며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일하는 만큼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42. 취할 정도로 기도하십시오. ♣구약성경의 한나는 취할 정도로 기도했기에 사무엘을 얻는 하나님의 응답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43. 시간을 정하여 규칙적으로 기도 하십시오. ♣예수님도 규칙적인 기도생활에 힘쓰셨고 제자들도 시간을 정하여 놓고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하였습니다.(눅22:39,행3:1) 44. 마음의 우상을 버리십시오. ♣우상이란 하나님 외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능력 있는 기도를 하려면 "주님께서 절대적으로 내게 첫째인가?"하는 것입니다. 45. 인색한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우물물은 퍼서 써야만 새로운 물로 채워지게 됩니다. 기도의 새로운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려면 퍼 주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마7:2) 46. 의심하는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의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야고보서1:6,7) 47. 분노심을 없애 버리고 기도하십시오. ♣타인에게 분노심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의 귀를 막아 자기의 간구를 못 듣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저주의 마음은 기도의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막11:25) 48. 열정적으로 기도하십시오. ♣냉랭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불꽃에 물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49. 겸비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겸비하게 자신을 낮춘 자의 기도를 잘 들으십니다.(눅18:9-14) 50. 뜻을 세운 기도를 사십시오. ♣구약성경의 다니엘은 단지 기도만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뜻을 세운 기도였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단6) 51. 환경을 초월하여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환경이 조성 되었기에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 생활은 환경을 초월한 기도 생활이셨습니다.(막 1:35) 52. 기도하기 싫으면 예수님도 만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본다는 것은 그분에게 고문이지 즐거움이 아닙니다. 53. 절망하지 마십시오. ♣절망은 기도의 불꽃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도 같습니다. 54.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을 주셔야만 기도응답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롬8:28) 55. 기도의 바른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내용이 바르면 열렬한 기도가 가능해지고 힘있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56.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를 사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마6:38) 57. 삶이 묻어 나는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무성한 말보다 삶을 먼저 보십니다. 58. 영혼이 잘되기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영혼이 건강해야 범사가 잘 되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요삼1:2) 59. 깨달음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깨달을 때에 기도의 향로에 불이 당겨지고 그 향연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게 할 수있습니다. 60. 말씀의 깨달음이 먼저 있게 해 달라고 기도 하십시오. ♣말씀의 깨달음이 있어야 마음을 쏟고 영혼을 쏟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61. 끈기 있는 기도를 하십시오. ♣어떤 것은 한 번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지만 어떤 것은 일평생 기도해야만 이루어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62. 목숨을 건 기도를 하십시오. ♣성경의 한나는 고상한 기도제목은 아니었지만 타는 목마름으로 기도했기에 하나님의 응답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63. 항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로 간구 하는가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하여 간구 하는가 보다 중요합니다. 64. 기도의 응답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얻어내려는 것에만 집착하면 마음을 쏟는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안 들어주실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우리와 바른 관계를 즐거워 하십니다. 65.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구약 성경의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의지했기 때문입니다.(삼상 17:34,35) 66. 비 인격적인 기도를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대한 모독입니다. 67.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에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세상에서 할 일 없고 기력이 쇠한 사람이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68. 주의 날을 잘 지키십시오. ♣하나님은 그분의 시간을 도적질 하는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69.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기에 힘쓰십시오. ♣하나님은 목소리 큰 사람의 기도에 주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70. 달변의 기도보다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는 마음이 담겨 있는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은 청산유수로 말하는 달변의 기도보다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참회하며 겸비해진 마음이 가득한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71. 기도의 회상자가 되기 보다는 기도의 실행자가 되십시오. ♣현재의 기도생활이 없으면 과거의 기도 생활은 꺼진 향불과 같은 것입니다. 72. 기도로 매일 매일 하나님과 사랑의 터치를 하십시오. ♣이것이 기도의 은혜로 사는 비결입니다. 73. 언제나 기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으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찾아 과실을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시1편) 74. 기도는 숙달되지 않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폭포수와 같은 열렬하게 쏟아지는 기도의 세계를 지녔다 하더라도 오늘 그 세계가 저절로 유지되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을 잘못 관리하면 오늘은 완전히 절벽 앞에 선 느낌을 받으며 거의 기도하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75.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의 특징은 눈물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76. 기도는 심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심어야 많은 열매를 거둘 수있습니다. 77. 하나님은 홀로 일하지 아니하시고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기를 기뻐하십니다. 78. 승리를 확신하여 기도하십시오. ♣구약성경의 갈렙은 열세인데도 불구하고 승리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79.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추적하는 과정이고 하나님의 뜻을 든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충만해져야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고 방황하지 않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80. 기도는 물대는(watering)작업입니다. ♣물댄 곳에서 왕성한 생명의 현상이 나타나듯 기도하는 자가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81. 영적인 침체에 놓여 있습니까? ♣기도의 물을 주면 영혼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82. 기도를 비상 낙하산 식으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기도는 낙하산이 아니라 공격용 무기입니다. 기도에 매달려야만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기도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83. 썩어지는 기도를 하십시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야만 많은 열매를 더 거둘 수 있듯이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온전히 죽여야만 기도의 많은 열매를 얻 습니다. 84. 영적인 건강을 위하여 기도 하십시오. ♣아무리 좋은 나무도 병이 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영적으로 병들어 있으면 기도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85. 기도는 말을 많이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많이 쏟아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쏟는 기도를 하십시오. 그것이 응답 받는 기도의 원칙입니다. 86. 하나님의 성전된 자신의 영혼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함께 하시지만, 특별히 골방기도를 통하여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87.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 거래가 아닙니다.주님이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가 주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자체를 좋아하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도할 수 있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깃들게 되어 있습니다. 88. 자신을 쏟아 붓는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기도에 헌신을 투자하는 사람에게 응답의 아름다움을 주십니다. 89.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좋은 환경이나 여건이 우리의 신앙을 붙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90. 말씀에 대한 순종의 생활을 하십시오. ♣순종의 생활이 뒷받침 되면 기도에는 저절로 힘이 붙게 되어 있습니다. 91.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기도 하십시오. ♣구약성경의 다니엘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기도 했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92. 부흥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우리 심령의 부흥이 하나님의 능력이 깃들게 하는데 가장 필요한 기도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93. 말씀과 기도를 늘 균형있게 하십시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려는 사람은 씨앗을 심고 물을 주지 않는 것과 같고, 단지 기도하려고 애를 쓸 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은혜 없이 살아가려는 사람은 마치 씨앗 대신 구슬을 심고 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94. 경건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 힘쓰십시오. ♣하나님은 경건한 성도의 기도를 잘 들어주십니다. 95.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십시오. ♣건강한 가정 없이 경건한 기도의 영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96. 남편이나 아내에게 인정 받지 못하는 삶은 하나님에게도 인정 받지 못하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기도를 하나님이 인정하시게 만드시려면 먼저 남편이나 아내에게 인정 받으십시오. 97. 매력 있는 기도가 되게 하십시오. ♣우리도 매력 있는 사람에게 눈길이 가고 호감이 가듯, 하나님도 흐트러진 기도 보다는 매력 있는 기도에 관심을 보이십니다. 98. 기도의 제목을 분명히 하십시오. ♣어수선한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잡동사니 취급을 받습니다. 99. 우리는 우리의 간절한 필요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인격과 성품을 닮기에 마음을 쏟는다면 당신의 기도는 이미 응답이 주어진 기도 입니다. 100. 기도의 탱크로리를 만드십시오. ♣가끔씩 기도하는 사람은 경차 용량 밖에 되지 않지만 늘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쏟아 부으며 사는 삶은 탱크로리의 용량을 가진 기도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은 한 번에 하나님의 능력이 깃들게 하는 기도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꾸준한 기도의 생활이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었고 기도의 거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기도의 용사가 되어보시기 바랍니다.

 

[ 기도의 용사가 되는 단순한 비결 ] 만일 우리가 피아노, 농구, 헬스 등의 분야에서 진보를 원한다면 규칙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정기적으로 행할 때 습관이 형성되기 때문에 규칙적인 기도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기 원한다면 규칙적인 기도시간에, 하루 한 번, 매일, 빠짐없이 세상에 대해 닫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 빌 하이벨스 -

 

원출처 :cjsrnr 원문보기글쓴이 : cjsrnr

 온전한 십일조인가, 모든 십일조인가? (말 3:10)   

 

글 김문수 /  09-09-03


(말 3:10,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0, 킹흠정)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0, KJV) Bring ye all the tithes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meat in mine house, and prove me now herewith, saith the LORD of hosts, if I will not open you the windows of heaven, and pour you out a blessing, that there shall not be room enough to receive it.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성경 말씀은 아마도 말라기 3장 말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라기 3장은 얼핏 읽기에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안 내는 백성들을 저주하고, 십일조를 바치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말라기 3장은 십일조를 하면 복받고, 십일조를 안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교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말라기 전체 말씀들을 자세히 잘 읽어보면 이 말씀들이 "거듭난 성도들이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대언자 말라기를 통해 하신 말씀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말라기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안 내면 저주를 내리고, 십일조를 잘 내면 복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가로채는 타락한 제사장들을 저주하셨고, 이제는 그런 제사장들과 율법 대신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실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1. 온전한 십일조인가, 모든 십일조인가?
 
(말 3:10,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0, 킹흠정)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0, KJV) Bring ye all the tithes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meat in mine house, and prove me now herewith, saith the LORD of hosts, if I will not open you the windows of heaven,  and pour you out a blessing, that there shall not be room enough to receive it.
 
개역 성경에는 "온전한 십일조"라고 되어 있고, 킹제임스흠정역에는 "모든 십일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단 어느 번역이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원어 분석을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두 번역을 비교할 목적으로 한 번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개역 성경의 "온전한"과 킹제임스흠정역의 "모든"은, 히브리어로는 "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에 등장합니다.
 
(창 1:30, 킹흠정)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과 속에 생명이 있어 땅에서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채소를 먹을 것으로 주었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30의 "모든"이 바로 히브리어 "콜"이며, 개역성경도 여기에서는 "모든"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위의 구절을 "온전한 짐승", "온전한 날짐승", "기는 온전한 것", "온전한 푸른 채소"라고 하면 말이 됩니까? "콜"이 들어가는 구절을 말라기 안에서만 찾아도 제법 많은 구절들이 나옵니다.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말 2:9)

우리 (모두)에게 한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냐? (말 2:10)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기 때문이라. (말 3:9)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복 받은 자라 하리라. (말 3:12)

교만한 자와 악하게 행하는 자가 (다) 지푸라기가 되리라. (말 4:1)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모세의 율법을... (말 4:4)
 
이런 성경 말씀들에 나타난 용례를 살펴볼 때, 말라기 3:10의 "콜"은 "온전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킹제임스성경은 이것을 "all"로 번역했고, 킹제임스흠정역도 "모든"으로 정확하게 번역을 했습니다. 개역 성경이 번역을 잘못하여 "온전한 십일조"라고 하는 바람에, 여기서 수많은 거짓 교리들이 나왔습니다.

어떤 이는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정확히 10분의 1을 떼어야 온전한 십일조라고 가르치고, 어떤 이는 소득뿐만 아니라, 장학금-은행이자-주식 상승분- 용돈-길에서 주운 돈-아파트값 상승분 등도 모조리 10분의 1을 떼어서 바쳐야 온전한 십일조라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주택 마련을 위해 은행에서 4천만원을 대출받았는데, 그것도 어쨌든 통장에 돈이 들어왔으니 400만원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의 논지는 "온전한"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계산을 철저히 해서 십일조를 정확히 바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실수로 정규 소득 외의 부수입 등을 십일조에서 누락시킬 수 있으므로 아예 넉넉하게 10분의 2, 10분의 3을 드려야만 우리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지 않게 되며, 안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올바른 교리는 올바른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 것인데(딤후 3:16), 성경 번역이 저렇게 되어 있으니 하나님 말씀과는 전혀 무관한 엉뚱한 교리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계산한 십일조를 원하신다면, 근채(나물) 하나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고 정확히 계산해서 십일조를 드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마 23:23a, 킹흠정)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말라기 3:10 말씀은 "온전한 십일조"가 아니라, "모든 십일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제사장들에게 엄중히 말씀하십니다. "이 나쁜 제사장들아, 너희는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와 헌물을 감추고 빼돌리고 착복하지 말고,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가지고 와서 성전 창고를 채워라. 그래서 내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을 레위인과 과부, 아버지 없는 자, 나그네들에게 나눠줘라" 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이 말씀을 가르치면서, 부패한 제사장들의 비리에 대해서는 모른 척 눈감아주고, 성도들을 향하여는 "모든 수입들에서 십일조를 정확하게 떼어서 바쳐야 온전한 십일조가 되니까 철저히 십일조 생활을 해라, 안 그러면 저주를 받는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잘 알고 있면서도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말씀을 왜곡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은 잘못된 성경 번역 때문입니다. 목사-장로-집사들이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온전한 십일조"라는 엉터리 번역에서 나온 거짓 교리들에 다들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2. 복을 주나 안 주나, 하나님을 시험해봐도 되는가?
 
(말 3:10, 킹흠정)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되 그것을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0, KJV) Bring ye all the tithes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meat in mine house, and prove me now herewith, saith the LORD of hosts, if I will not open you the windows of heaven, and pour you out a blessing, that there shall not be room enough to receive it.
 
"십일조를 내면 복 받는다"고 가르치는 분들은, 말라기 3:10에 와서는 더욱 더 열띤 목소리로 말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부어 주십니다. 이것을 못 믿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꼭 한 구절 바로 말 3:10에서 십일조와 연관해서는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십일조 내면 복 받는지 못 받는지 먼저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로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주장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해도 될까요? 성경 말씀은 안 된다고 하십니다. 약 1:13에는 하나님은 악으로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시험은 tempt가 사용되었습니다.
 
(약 1:13, 킹흠정) 아무도 자기가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악으로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약 1:13, KJV) Let no man say when he is tempted, I am tempted of God: for God cannot be tempted with evil, neither tempteth he any man: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시험하지(tempt)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 4:7, 킹흠정)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또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마 4:7, KJV) Jesus said unto him, It is written again, Thou shalt not tempt the Lord thy God.
  
예수님께서 마 4:7에서 인용하신 말씀은 신명기 6:16 말씀입니다.
  
(신 6:16, 킹흠정) 너희가 맛사에서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한 것 같이 그분을 시험하지 말라.

(신 6:16, KJV) Ye shall not tempt the LORD your God, as ye tempted him in Massah.
 
마 4:7과 신 6:16의 시험하다는 tempt, 신약에서는 헬라어 "페이라조",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나싸"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말 3:10의 시험하다는 KJV에서 영어로 prove, 히브리어 "바한"이 사용되었습니다. 두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다음 구절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두 단어가 같은 구절 내에서 동시에 사용되었고, 신구약 성경에 모두 등장하는 구절을 골랐습니다.
 
(시 95:9, 킹흠정) 그때에 너희 조상들이 나를 시험하여 입증하고 내가 행한 일을 보았느니라.

(시 95:9, KJV) When your fathers tempted me, proved me, and saw my work.
 
(히 3:9, 킹흠정) 그때에 너희 조상들이 나를 시험하여 입증하고 사십 년 동안 내가 행한 일들을 보았느니라.

(히 3:9, KJV) When your fathers tempted me, proved me, and saw my works forty years.
 
우리는 위 두 말씀들을 통하여 시험하다(tempt)와 입증하다(prove)가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empt = 헬라어 페이라조 = 히브리어 나싸 = 시험하다
prove = 헬라어 도키마조 = 히브리어 바한 = 입증하다, 확증하다
 
고린도후서 13:5의 "입증하라"에서 사용된 prove가 말라기 3:10의 시험하다(prove)와 같은 의미입니다.
 
(고후 13:5, 킹흠정)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고후 13:5, KJV) Examine yourselves, whether ye be in the faith; prove your own selves. Know ye not your own selves, how that Jesus Christ is in you, except ye be reprobates?
 
말라기 3:10의 시험하다(히, 바한)라는 말은 "하나님을 시험하라(tempt)"는 뜻이 아니라,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아래 시편의 말씀에 나오는 "시험하다"는 마음의 상태를 입증하는 것을 말하며, 창 42:15은 요셉의 형제들이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려와서 그들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 17:3a, 킹흠정)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셨나이다.

(시 17:3a, KJV) Thou hast proved mine heart;
 
(창 42:15, 킹흠정)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말을 입증할지니라. 파라오의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동생이 여기에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에서 나가지 못하리라.

(창 42:15, KJV) Hereby ye shall be proved: By the life of Pharaoh ye shall not go forth hence, except your youngest brother come hither.
 
에베소서 5:10의 "입증하라"(헬, 도키마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해 보라는 겁니다. 11, 12절에 나오는 열매없는 어둠의 일인지, 9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인지 입증해 보라는 겁니다.
 
(엡 5:10, 킹흠정) 주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무엇인지 입증하라.

(엡 5:10, KJV) Proving what is acceptable unto the Lord.
 
킹제임스흠정역에서는 말 3:10에 나오는 KJV의 prove를 "시험하다"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유혹하다(tempt)의 의미로 읽으면 안 되고, 눅 14:19의 "시험하다"와 같은 의미, 즉 "그 본성, 상태, 능력 등을 드러내다"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눅 14:19, 킹흠정) 다른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사서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니 원하건대 나를 용서하라, 하며

(눅 14:19, KJV) And another said, I have bought five yoke of oxen, and I go to prove them:I pray thee have me excused.
 
말라기 3:10 말씀은 "내가 이렇게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복을 쏟아부어 주는지 안 주는지 시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이 복을 주나 안 주나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말라기 3:7에서 하나님은 부패한 제사장들에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당연히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고 마음을 낮추고 죄에서 돌이키겠다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 보이고 마음의 상태를 입증해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십일조와 헌물을 주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주님되심을 확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부패한 제사장들아, 너희는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와 헌물을 강도질하지 않았느냐?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그러려면 너희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빼돌리지 말고, 백성들이 바친 모든 십일조륻 다 가지고 와서 성전 창고에 들여놓아서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여 그것으로 레위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십일조를 나누어 줌으로써 너희가 죄에서 돌이키고 회개하는 마음을 입증해 보여라" 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그렇게 모든 십일조를 주께로 가져옴으로써 주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입증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 3:10은 prove me 라고 되어 있으므로 후자 쪽의 해석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그들이 십일조를 써야 할 곳에 제대로 집행함으로써 주께서 신명기 14:28,29에서 약속하신 복을 부어 주시는 분임을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율법에서 정한 의무에 따라 레위인들에게 십분의 일을 드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복도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는 분명히 십일조와 연관하여 아무런 복도 약속하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구약시대가 다 끝나가는 말라기에서 느닷없이 복 타령입니까? 설마 하나님께서 십일조가 잘 안 들어오니까 구약시대 막판에 복을 경품으로 내걸고 "십일조 잘 내기" 이벤트라도 하시는 겁니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말 3:10의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를 바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복이 약속되어 있지 않지만, 세번째 십일조, 즉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는 십일조에 대해서는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신 14:28,29, 킹흠정) 너는 삼 년이 끝날 때에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 / (너와 함께 나누는 몫이나 상속 재산이 없는) 레위 사람과 네 성문 안에 거하는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할지니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라.
 
부패한 제사장들은 그 동안 이 세번째 십일조를 떼어먹고, 이를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과부와 아버지 없는 자를 학대하며 타국인을 쫓아내어 그의 권리를 빼앗았습니다(말 3:5). 그래서 주께로부터 오는 복을 누리지 못한 겁니다.

부패한 제사장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강도질하지 말고, 모두 다 가지고 와서 성전 창고에 채우고, 주께서 명하신대로 제대로 나누어주면 신명기 14:29에서 약속하신대로 복을 부어주실 겁니다.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신명기 14:28,29에 약속된 복은 십일조를 드려서 받는 복이 아니라, 주께 드린 십일조를 주의 뜻대로 잘 분배하고 마땅히 써야 할 곳에 쓸 때 받게 되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3:10 말씀을 가지고 "십일조 내면 복 받는다"고 가르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주장이 되는 겁니다.

3. 이제부터라도 십일조를 잘 드리면 저주를 벗게 되는가?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분들은, 대개 "십일조를 안 드리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한 죄로 저주를 받게 된다"고 하면서 "이제부터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해서 저주를 벗고 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교회 예배에 빠졌다고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며, 십일조 안 낸다고 저주를 내려서 집안이 망하거나 가족들이 죽을 병에 걸리게 하는 분이 아니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말라기에서 하나님은 "너희들이 십일조를 안 내고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지 않고, "너희가 이미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 2:2, 킹흠정)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만일 너희가 들으려 하지 아니하며 그것을 마음에 두려워 하지 아니하여 내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심지어 저주를 보내어 너희의 복들을 저주하리라. 참으로 내가 이미 그것들을 저주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말 3:9, 킹흠정)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으니 이는 너희 곧 이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기 때문이라.
 
제사장들은 주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하였고(말 1장),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주의 사자로서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말 2:7,8).

그들은 주의 것을 강도질하여 저주를 받았습니다(말 3:9).

이제 이런 연약한 제사장들과 불완전한 율법 대신에 이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주께서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실 겁니다(말 3:1).

그 분께서는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다시 회복시키실 겁니다(말 3:3,4).

그리고, 그 분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실 겁니다(말 3:5).
 
이는 실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주의 말씀의 엄중한 부담입니다(말 1:1).
물론, 말라기를 읽고 이것을 "십일조 내면 복 받는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분들에게는 엄중한 부담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말라기는 참으로 부담되는 말씀입니다. "십일조 내면 복 받는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너희가 저주를 받았다" 라는 심각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저주를 받았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이제부터 열심히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겁니까? 이제부터 주의 단에 깨끗하고 좋은 것만 드리면 된다는 겁니까? 이제부터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와 헌물을 가로채지 않으면 된다는 겁니까? 지금까지 강도질한 십일조와 헌물 도로 갖다놓고, 네 배를 물어내면 된다는 겁니까?
 
말라기 말씀 어디에서도 "십일조를 열심히 내서 하나님의 저주를 피하라"거나 "최상급 희생예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기분을 풀어드려라",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죄에 대해 용서를 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게 되면,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희생예물을 드릴 일이 없으니 제사장과 레위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위한 십일조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주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심으로써 그것을 폐하십니다.
 
그런데도 십일조를 드리고 율법을 지킴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저주를 피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가르치시겠습니까? 그런 것으로는 절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저주를 피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 4:5,6, 킹흠정) 보라,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대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 그가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며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여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치지 아니하게 하리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가 어떻게 하면 주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하나님의 진노 대신에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요 3:36, 킹흠정)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갈 3:13, 킹흠정)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
 
이제는 십일조, 희생예물 등과 같은 율법을 통해서는 우리의 죄와 악을 속할 수가 없고, 오직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말라기는 바로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요 5:39, 킹흠정) [39]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
       
이래도 말라기의 내용이 "십일조를 드려라", "십일조를 안 내면 하나님 것을 강도질하는 것이다", "십일조를 잘 드리면 하늘에서 복이 쏟아진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왜 말라기를 기록하셨는지, 주께서 말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라기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지,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말라기를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말라기의 주제는 "십일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십일조를 비롯한 구약의 제사와 율법이 폐지되므로, 이제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소개한다-박창진, 십일조는 다른 복음이다.

 

 이 책을 소개한다: 십일조는 다른 복음이다(박창진, 진리와 생명사, 2014)  

 

이 책의 저자는 십일조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십일조에 대한 성경의 원칙에 입각해서 소속 교회를 건강하고 성경적으로 세워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 그간의 십일조의 전통과 유전의 고리를 끊고 성도 개개인이 교회개혁을 추구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언약에 대한 깊은 이해로서, 십일조를 바르게 평가하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 언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한다. 2장은 피상적인 율법 이해 벗어나기로서, 1장의 연속선상에서 율법을 다루되 십일조가 율법의 하나였던 탓에 율법의 본질에 대한 참된 인식을 하는 것을 필수적인 수순이라고 본다.

 

3장은 완전하게 된 율법으로서, 예수에 의해 완성된 율법 즉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 달리 표현하면 성령의 ()법을 기초적으로 다룬다. 전반부 세 장은 성도들에게 퍼져 있는 율법에 대한 산발적인 이해를 지양하고 통합적이고 일관성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되어 있다. 4장과 5장은 각각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평가와 십일조 개혁을 통한 교회 개혁으로서, 십일조가 오늘날에 와서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규명한다.

 

이 책의 주된 의도는 4장과 5장에 있으므로 여기를 중심으로 중핵이 되는 논지를 소개하고(인용 표시는 곳에 따라서 생략한다) 간략한 소감을 부기한다. 우리는 말라기에서 강조하는 십일조 준수를 거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 시대에는 당연한 의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은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시대이므로 십일조는 오늘날의 교회에는 유효하지 않다.

 

예수 당시에만도 예수님은 십일조를 언급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했으며 예수님도 공생애 이전에는 십일조를 하신 것으로 보여진다. 십일조는 아주 특별한 율법이 아니라 다른 모든 율법 조항과 같은 조항일 뿐이다. 율법이 폐해질 때 십일조도 폐해졌으므로 십일조의 율법은 예외라고 규정할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는 십일조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

 

율법의 십일조가 신약의 교회에게 이어진다면 당연히 언급되어 있어야 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가르쳐야만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단 한번의 언급도 없다는 사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지원하기 위한 요청에서도 십일조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방식이 십일조이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를 걷게 하고 바울 사도가 그것을 가져가면 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그런 요청은 없다.”(98)

 

그렇다면 십일조의 정신을 따르는 것은 어떤가? 모든 소득과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정신을 지키자는 취지에서 교회에서 십일조를 위시한 많은 종류의 헌금을 하면 안 되는가? 그 정신은 이어받자는 뜻은 갸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라면 십일조 헌금뿐만 아니라 주일헌금, 감사헌금, 선교헌금 등의 모든 헌금이 다 그러한 정신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 헌금만 유별난 것으로 대우되어서는 안 된다. 요점은 십일조의 정신이 십일조 준수의 논리적 이유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재정적 이유에서 보면 현실적으로 교회의 재정 확보에서 십일조는 매우 유용하다. 따라서 십일조의 유용성이 십일조 준수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십일조의 유용성을 앞세우는 것은 율법의 유용성을 앞세워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율법 준수를 그런 이유로 요구할 수 없듯이 십일조를 그런 방식으로 요구할 수 없다. 이 점을 잘 이해할 때 십일조 요구 자체가 범법 행위일 수 있다는 깨달음이 올 것이다. 한국 교회의 좋은 전통이라고 간주된 것이 논리적으로 재정적으로 아무런 성경적 원리에도 입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치명적 사실이다.

 

십일조의 정신은 원래가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를 돕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목적을 위해서 교회는 어떻게 헌금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십일조의 정신을 계승하고 완성하는 헌금 행위이다.

 

한국 교회는 십일조가 교회 재정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이웃 구제나 선교를 위해서 사용하는 액수는 조족지혈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말라기에 나오는 십일조 도둑질이 현대의 지금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십일조 헌금 전액을 그 정신을 회복한다는 결의를 가지고 이웃과 사회의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위한 구제 헌금으로 돌리는 십일조 완성 혁명이 필요하다.

 

과연, 십일조를 개혁하려는 교회가 나올 것인가? 한국 교회는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을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씨로서 헌금하고 사용할 것인가? 한국 교회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과 전통의 유전인 십일조를 폐지 선언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 저자는 한국 성도들이 부활의 신학적 의의를 분명히 깨닫고 거기서 삶의 교훈을 얻으며 속죄 제사를 완성하신 예수를 본받아 우주적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행자로서 부활 신앙으로 그 직무를 철저히 육화하고 수행하는 기본 도리에 충실히 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들 한 명 한 명이 십일조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움직일 것을 권면하고 있다. 말씀 사역자들은 진실을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않으며 이 한계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깨뜨려질 수 있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끝으로 저자는 한국 교회가 십일조에 붙들려서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십일조를 받아서 재정 확보가 가능하다는 일종의 맘몬 숭배 의식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십일조의 개혁은 한국 교회의 사회적 진보를 위해 꼭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비록, 책의 내용 전부를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읽어가면서 교회의 현실과 성도의 교회내 실생활에서 부딪치는 의문과 고민들을 평이하고도 진솔하게 언급했다는 인상을 받았고 갈등하는 성도들의 내면적 질서를 정리해 줄 수 있는 성경의 원칙과 지침들을 제공하고 있기에 십일조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신라대 철학과 교수, 성서부산 대표)


 

케이투    2014.10.10

 다른 복음에 해당되는 십일조 폐지 

 

개혁과진보   

십일조 찬성론자들 중의 일부는 반대론자들에게 서슴지 않고 마귀라고 정죄한다. 문맥과 정황을 무시하고서는 성경에 십일조 하라고 되어 있고 예수님이 십일조 하라고 하셨는데 반대하기에 마귀라는 것이다.

 

교회의 선한 사업을 위해 교회 재정을 확보하려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을 가로막기에 마귀라는 것이다. 잘못된 관점에 기초한 잘못된 열성이 빚어내는 참극이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참극이다.

 

십일조에는 모든 소득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담겨있다. 십일조의 정신이라고 이야기된다. 그 정신 자체는 귀하고 아름답다. 그렇다고 십일조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실 율법의 십일조에도 그 정신이 담겨있다.

 

그러한 정신이 담긴 십일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셨다.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셔서 교회에게 주셨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인 씨다.

 

율법의 십일조와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신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인 씨. 율법의 십일조는 아무리 좋은 설명을 갖다 붙인다고 하더라도 다른 복음이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약화시키거나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옮기시고 새 언약만으로 살아가도록 하신 그분의 뜻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에 대해 천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말한다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다(갈 1:9). 십일조 요구는 다른 복음인데, 십일조를 강조함에 대해 하나님께서 저주하실 지에 대해서는 뭐라 말을 못하겠다. 나의 영역 밖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성경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다른 복음의 의미에 십일조가 해당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말할 뿐이다. 그 이후의 선택은 각자 자신들의 몫이다.

 

율법에는 안식년과 희년 규례가 있다. 안식년에는 땅을 경작하지 않고 그 이전의 소출로 한 해를 살아야 한다. 희년에는 땅을 경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안식년과 이어지는 희년, 두 해를 경작하지 않고 안식년 이전의 소출로 살아가야 한다.

 

많은 소출을 얻은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양식을 나누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성경학자들은 이스라엘에서 희년 규례가 지켜지지 않았다고 본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부자라면 부자라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 것이고 가난한 자는 가난해서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호주머니를 열어서 그 안의 재물을 내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만큼 호주머니 안의 재물을 받아내기가 어렵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복음 전파에 힘을 쏟는다. 이 사회에서 복음을 드러내며 복음의 정신을 실천하여야 한다. 저절로 되지 않는 일이다. 많은 재정을 필요로 한다. 신자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하여야 하고 그 안의 물질을 내놓게 만들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십일조는 최상이다. 교회 재정 확보에 너무나도 유익하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재정을 확보해서 나쁜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여러 방면의 신앙적인 일에 사용하려는 것이다. 더욱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에서 벗어난 잘못이다.

 

하나님 신뢰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을 따르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각각의 시대에 교회에게 원하시는 방식을 파악하고 따르는 것이 그분을 신뢰하는 모습이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재정 확보의 방식이 십일조가 아니다. 먹을 것 이상의 물질인 씨다. 성도들이 그 원리를 깊이 숙지하고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기꺼이 씨(연보)를 심도록 하는 방식이다.

 

십일조에 비하여 훨씬 복잡하고 너무나 어렵다. 이스라엘이 십일조는 그래도 했지만 안식년이나 희년 규례는 전혀 지키지 않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강제성이 아닌 자발성에 의존하는 것은 언제나 큰 위험 부담을 가진다.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제성을 통하여 필요한 것을 확보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 유혹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다. 현실이다. 얼마든지 공감이 된다.

 

그러나, 유혹은 어디까지나 유혹이다. 악한 자가 하나님의 자녀를 넘어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술수이다.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비록 그 과정이 쉽지 않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씨에 해당하는 부분을 잘 분별하고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심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포로 회복 언약인 새 언약,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완성된 새 언약. 사람의 일생으로 생각하면 탄생기, 유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연결시킬 수 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완성된 새 언약의 시대이다. 사람의 생애와 연관시키면 자신의 생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장년이다.

 

물질 사용에 있어서 강제성을 완전히 없애시고 자발성을 부여하심은 장년에게 주신 복이다. 십일조는 편리성을 앞세워 그 복을 발로 걷어차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을 겸손하게 받아야 한다. 철저하게 자발성에 의존하는 씨(연보)를 통한 재정 확보라는 복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십일조는 하루 속히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율법 준수 요구를 종의 멍에를 메는 것으로 규정하였다(갈 5:1). 그렇게 가르친 유대인 교사들에 대해 갈라디아 교회를 이간 붙여 저희에 대해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갈 4:17)고 경계하였다. 십일조도 종의 멍에이다. 또한 그것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열심 내게 하려는 것이다. 십일조를 하면 물질적인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이들에게 온갖 좋은 것을 바치는 모습에서 확인된다. 목사를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교회 재정 확보에 있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역사하시기에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된다. 오히려 교회 재정이 더욱 풍성해질 수도 있다. 성도들이 성경적인 재정 사용에 대해 공감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고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재정을 성경적인 원리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다.

 

십일조를 폐지한다고 교회가 허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온전히 의지한다면 교회는 아름답게 세워질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성경적인 모습으로 아름답게 세워질 것이다.

 

펌출처: http://m.blog.daum.net/tithestory952014/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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