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십일조를 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 다른 나라들 십일조 폐지

 

 십일조, 아직도 하십니까?  

 진정한 교회개혁은 바로 이 십일조 폐지운동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newsdaybox_top.gif 입력 : 2007년 09월 29일 (토) 03:38:10 [조회수 : 113] 윤전 btn_sendmail.gif yjun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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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청난 제목으로, 어떻게 쉽게 독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습니다. 본 제목을 소화해 내기 위해서는 (1) 성서적, (2) 역사적, (3) 신학적인 측면에서 광범위하게 다루어야 하겠지만, 위의 요소들을 일체 생략하고, 저의 개인적인 신앙성장 (Personal Testimony) 배경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는 소위, 모태 신앙으로, 기독교 가정에서 엄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십일조와 주일 성수는 물론, 돼지고기와 피가 묻어있는 고기까지 먹는 것을 금했습니다. 심지어 주일날은 굴뚝에서 연기 나면 안된다 하여 금식을 하면서 성장했는데, 율법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굳어진 기존의 신앙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 입니다. (참고로 저는 그리스도의 교회, 개혁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오순절 교회, 성공회 등에 장기간 출석하고 공부했거나 가르친 경험이 있습니다.)

 

십일조와 헌금바구니 없는 영국교회

 

유학을 떠날 때가 1985년 7월이었고, 한 영국 침례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중 헌금바구니를 돌리지 않더군요. 처음엔 “특별한 날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헌금시간과 축복기도도 없는 겁니다.

 

몇 주 후에야 안 일이지만, 헌금바구니 대신 조그마한 편지통 모양의 상자 [헌금함] 가 교회 뒤편 코너에 놓여 있어, 원하는 사람은 아무 때나 자유롭게 헌금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신앙의 척도로 간주되는 십일조, 작정 헌금, 건축헌금 등 각종 헌금도 없었습니다.

 

 [게시자 '들을귀' 사견입니다!!] 헌금함은 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돈을 바친다는 제물 형태의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복채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약교회인 개신교회들에게 연보함이라는 용어 사용하는 것을 권장해도 무리가 아니며, 이는 매우 바람직 합니다.

 

주일 성수 없는 영국교회

 

[게시자 '들을귀' 사견입니다!!]  주일성수는 주일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는 비성경적 율법주의 이지만, 주의날 예배로 모이는 열심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예배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울수록 권면하여 더욱 예배로 모입시다" 라고 사도 바울은 권면했습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형식적 예배가 되면서 예배를 취미 중 하나로 즐길 것입니다.

 

그 다음해 봄이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부터는 300 여명이 모이던 교인들이 점점 줄어드는 겁니다. 어느 화창한 봄의 주일날은 20여 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목사가 웃으면서 예배시간 전에 한 멘트입니다:  “아주 좋은 날씨입니다, 우리 가족들이 봄 나들이 나갔군요, 모두 즐거운 시간 갖기를 기도합니다.”

 

가족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공원을 찾는 것에 대하여, 그는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습니다. 오히려 예배에 참석한 내가 민망할 정도였으니까요.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영국교회가 망했다더니 정말이구나.”

 

다른 교회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의문이 일기 시작했고, 그래서 한 달에 한 번만 본 교회에 출석하고, 다른 교회를 순회/방문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교회를 찾기도 했습니다.

 

십일조 없는 유럽 교회

 

영국을 벗어나 유럽 다른 나라들의 예배형식이 궁금해졌습니다. 그 해 여름방학은 프랑스에서, 겨울방학은 독일에서, 이듬해 여름방학은 독일의 학생들과 합류하여 유럽 16개국을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주일 예배형식, 헌금방식, 십일조 제도에 관해서 리서치를 수행했습니다.

 

오순절 교회, 희랍 정교회, 어떤 영국교회나 감리교회서는 헌금바구니를 돌리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교회가 헌금바구니 대신 헌금함을 배치했고, 십일조나 각종 헌금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학문의 세계로

 

일단 유럽교회들은 십일조 제도가 없고 헌금함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여기에 대한 성서적 근거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석사과정에서는 조직신학이었지만, 박사과정은 구약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관련학과목인 고대 근동학, 고대문헌학, 고고학, 문서비평학, 성서언어학, 문화인류학, 고대역사학, 사회학 등에 거침없이 도전했습니다.

 

세계 구약학회 회장이기도 했던 원로 지도교수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연구분야가 요구됨으로 학위논문의 방향을 바꿀 것을 여러 차례 제시했지만, 6년 동안 하루 평균 3, 4시간의 수면으로 버티어 내는 열심에 감탄을 하더군요.

 

중간에 경제적, 학문적인 어려움으로 포기할 위기를 몇 차례 넘기며 외롭고 긴 유학 여정이 끝나면서, 암흑 속에 가리어졌던 기독교의 실상 (죄악상) 이 눈에 드러나기 시작했고, 십일조 제도나 각종 헌금갹출은 종교적 범죄행위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박사학위 심사가 끝나던 날 지도교수는 나를 끌어 않으며, “이 분야에서는 자네가 세계적 권위자라네”하며, 이젠 학자로서의 동등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몇 가지 팁

 

* 이미 58호에서 언급했듯이, 아하스 왕을 포함한 역대 이스라엘 왕들이 자녀를 잡아 신께 바치는 가증한 짓을 한 것처럼(상하 16:2-3),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십일조를 바침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 16세기 천주교의 속죄권 판매를 거부한 종교개혁의 산물이 오늘날의 신교입니다. 그런데 정작 타락했던 천주교는 발전적으로 개혁이 되고 (물론 교리상 차이는 있음), 개혁의 결과로 태어난 신교는 타락하여,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고 말았습니다.

 

* 종교개혁 이후 유럽교회에서 십일조 제도가 사라지자 유럽의 교회들은 교회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교회는 운영난 때문에 한때 십일조 제도를 눈감아 주기도 했습니다.

 

* 오늘날은 미국산 오순절 교회가 영국을 포함한 유럽으로 파고들고 있는데, 이들은 방언, 능력, 축복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십일조나 헌금을 강요하는 추잡한 냄새를 풍기는 집단들입니다. 어떤 오순절 교회에서는 예배중에 헌금바구니를 3번 돌리는 곳도 있더군요.

 

목사 공화국 대한민국

 

[게시자 '들을귀' 사견입니다!!] 국내외에 개신교회와 신학교가 많고, 설교자인 목사와 교사가 많으며, 전도자인 장로와 집사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은 매우 복되며 좋은 일입니다. 다만, 우후죽순으로 난립하는 신학교 일부에서 엄격한 검증을 통해 선발된 사람들을 사역자로 세우지 않는 점이나, 일부 신학교의 경우에 복음의 핵심 보다 설교의 기교에만 실력을 쌓게 하여  죽 수준의 영의 양식을 본인이 즐겨 먹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나누어 먹이는 일이 많다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직분의 높고 낮음이 없으나, 종교인들이 계급화와 서열화로 만든 목사에 매력을 느껴 직업적인 목사로 뛰어든 경우도 많을 것으로 봅니다. 종교다원주의, 신복음주의, 칼빈주의등에 빠져 버린 목사가 늘어나고 있는 개신교회 현실을 볼 때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있는 대목입니다. 개신교회 회개와 개혁을 해야 할 이유로 삼아야 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개신교회를 떠나면 사단이 만들어 놓은 세상종교나 이단 사이비 종교 교리에 신속하게 빠져 유황불 지옥에 들어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학위를 받고 바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유럽문화에 오랫동안 길든 탓인지 한국에서의 생활은 질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부패한 정부, 무질서한 사회, 타락한 종교지도자들, 동서남북 어느 곳을 돌아봐도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목사를 섬기고, 목사는 교회를 장사하는 회사로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런 실상들을 느끼거나 보지 못하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세뇌되고 맹종 당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때 충격이었습니다.

 

종교적 부는 반드시 타락과 부패를 부릅니다.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돈이 지나치게 많은데 있다고 판단하고, 잘못된 십일조 폐지운동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여러 대학에 교수임용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또 놀란 것은, 교수를 이미 내정해 놓고 광고만 내든가, 그렇지 않을 경우 1,2억을 요구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더군요.

 

십일조 제도 폐지운동

 

3년간 세 곳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동안 한국교회의 타락상과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 두 대학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경험을 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학과마다 이사장이 심어둔 요원(?)들이 있더군요.

 

십일조 제도 폐지운동의 많은 효과를 얻기 위해, 신학 대학교수들을 상대로 몇 차례 십일조 제도에 관한 공개토론을 제의했지만, 아무도 나서주는 상대가 없었습니다. 원고를 작성하여 각 기독교 신문사와 잡지사에 발송했으나 단 한 곳도 원고를 실어 주지 않았습니다.

 

방향을 바꾸어 조선일보를 포함한 일반신문사와 인터넷을 통하여 십일조 폐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때가 1996-1998년이었는데, 그 당시 쓴 원고들이 책 2권의 분량이 됩니다.
십일조 제도 폐지라니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층에서 서서히 반응이 일기 시작했고, 많은 격려와 문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들로 부터는 수 없는 협박이 끊이지 않으면서 신상에 위험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에 있는 한 선교사는 죽인다는 이메일을 거의 매일 보내왔으니까요.
3년 가까이 한국에 있는 동안 그야말로 생사를 건 투쟁이었습니다. 철벽같은 한국교회에 십일조의 파문을 불러 일으켰고, 지금은 소신있는 젊은 후배들이 나타나 그 바톤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가족을 잃고

 

다시 영국으로 귀국(?)하게 된 동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타락상을 접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동안 영국에 남겨두었던 가족을 잃게 되었습니다.

 

홀로되었으나 찢긴 상처들이 많이 회복되었으며, 지금은 교회, 선교, 교육사업 등과 관련하여 뛰고 있습니다. 재혼할 상대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오랫동안 준비한 학문은 결국 3년의 십일조 폐지운동에 불을 붙임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학문적 자만을 꺾기 위하여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주셨고, 나의 삶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간섭해 주심에 감사들이며 겸손히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400년 전의 유럽교회

 

지금의 한국교회 모습은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교회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한국교회는 유럽교회에 비해 400년이 뒤떨어졌다는 뜻이 됩니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복사판입니다. 교회가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게 되면 망하게 될 징조입니다. 미국교회는 완전히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고, 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이 한국교회보다 10년을 앞서가고 있습니다.

 

한국에 교인 수가 많은 이유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유럽교회가 망했다는 설교를 즐겨 하더군요. 이것은 무식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교인 수가 많이 감소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신앙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제가 볼 때 한국교회는 5% 정도만 거듭났으나, 유럽의 교회는 98%가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한국에 교인 수가 많은 또 다른 이유는, 아직 한국인들의 삶의 질이 낮고 가난하며 사회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이 잘사는 시대에 무슨 말씀이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인간이 종교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시설이 어디나 잘 되어 있고, 사회복지제도가 완벽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갖는 그런 불안의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한국에서는 교회에서 감당하고 있는 요소들을, 유럽에서는 사회복지제도가 모두 해결해 주기 때문에 반드시 교회를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유럽교회들은 십일조 제도가 없을까?

 

이 글을 통하여 어떤 위대한 신학이나 고상한 학설이나 지식으로 십일조 폐지의 정당성을 주장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신앙적 배경을 자랑삼아 늘어 놓은 이유는, 단 한마디의 질문을 드리기 위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왜 유럽교회들은 십일조 제도를 단죄하여 교회로부터 추방한 것일까요? 유럽교회들이 폐지하고 있는 십일조 제도를, 왜 한국교회들은 그토록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관하여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남기고 싶은 한마디

 

십일조 제도는 한국의 돌팔이 교수, 삯꾼 신학자들이 빵 한 조각을 얻어내기 위하여 침묵으로 일관하고, 3대 근성 (명예-권위-탐욕) 에 눈이 먼 목사 집단들이 만들어 낸 종교적 범죄행위입니다. 신앙이나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속지 마십시오.

[ 이글은 영국에 계시는 김폴 목사님의 글입니다.] 
 http://me2.do/F4cZ8A4X 

출처:네이버

 

한국교회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 역사적 맥락이 결여된 십일조 논란  한국교회에서 십일조 논쟁이 여러 차례 있어 왔다. 그러나 결정적인 논박을 필자는 어디서도 보지 못했는데 이는 십일조가 한국교회의 매우 독특하면서도 권위적인 측면을 구성하면서 동시에 한국교회의 탁월성의 한 기초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사회가 서구에 보조를 맞춰 물질적으로 풍부해짐에 따라 - 10만원 가운데 만 원과 1000만원 가운데 100만원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 십일조는 한국교회에 두 양가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로 부정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 분명한 부정과 부패는 우리 몸에서 잘라내야 하겠지만 과연 이 책이 묘사하는 것처럼 십일조가 그토록 비성경적이고, 율법적이고, 유독 한국교회만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잘못된 신앙의 구습인 것인지를 살펴보자는 것이 본 서평의 목적이다.

 

 

십일조 문제는 아직도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뜨거운 감자같은 논란거리인 것 같습니다. 사 실 이 문제는 서구 기독교계에서는( 카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에서도) 이미 신학적, 신앙적 정리가 끝나서 지금은 어느 국가의 교회에서도 시행하지않는 종교행위인데, 유독 한국-특히 개신교계에서만 아직도 살아 남아서 여러가지 신앙적 혼란과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선 이 십일조 논쟁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논란이 있어왔던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만 간략히 그 논란의 요점을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십일조 헌금은 결코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십일조 헌금은 성경에 따른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므로 신자라면 마땅히 지켜야하는 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입니다. 한 번 살펴봅시다.


1).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참고구절 : 신명기 14장 / 26장)

-- > 하나님의 명령도 한시적인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습니다. 만일 그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시대를 초월하여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제사도 드려야하고, 오징어도 돼지고기도 먹으면 안되고, 할례도 다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장은 말이 안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 이유는 그런 율법들은 모두 다 한시적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후, 신약시대 이후는 그런 것은 다 지나간 구시대의 법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일조 법도 성전과 제사제도가 존재했던 구약시대에만 필요했던 하나님의 명령이요 율법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는 레위 지파라는 특수 지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임무를 위해서 따로 구별된 지파입니다. 그들에게는 먹고 살 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11지파가 분배받은 땅에서 난 소출중에서 10분의 1을 거둬서 그들에게 준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 법의 기본 근거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AD 70년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모든 백성들이 다 풍지박산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이란 국가자체도 없어지고 성전도 제사도 없어진 마당에 당연히 레위인도 십일조도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다시말하면 십일조는 그것을 거두어 나눠줄 대상이 있을 때 필요했던 한시적 율법이란 말입니다. (물론 십일조 정신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나눔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다시 설명하지요)

어떤 사람은 지금의 성직자가 레위인들 아니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전혀 아닙니다. 지금의 개신교회에는 신분상 제사장이란 직분은 없습니다. 목사란 똑같은 신자로서 다만 직무에 따른 구분일 뿐이지요, (오히려 교리적으로 신분상 성직자를 인정하는 카톨릭조차도 십일조란 명목의 헌금은 걷지 않습니다.)


2).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바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말라기 3장 8절에 대한 해석):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라기 3장 8절)

--> 이것도 역시 그 문맥과 의미를 세심히 살펴봐야 합니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 당시 제사장들의 부패한 행태를 질책하고 경고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선, '도적질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일반 백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백성이 아니라 십일조를 관리하고 분배하는 책임을 맡은 제사장들입니다. 그 당시 그들은 그런 헌물을 그 본래의 뜻대로 잘 나눠주고 잘 쓰지않고 제멋대로 자기들 뱃속에 착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도적놈들이지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그러면, '하나님의 것'이 뭐라구요?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헌물'이란 의무적으로 바쳐야하는 것이 아니지요? 즉 헌물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저 스스로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일단 바쳐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소위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실까요? 그 뜻은 '하나님의 것'이란-- "곤궁한 자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서 가난한 백성들과 레위인들에게 마땅히 분배되어야 할 헌물들"-- 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소유권"이 아니라 그것이 마땅히 쓰여져야할 데 쓰여져야만 한다는 데, 즉 "올바른 사용"을 강조하려고 "하나님의 것" 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쉽게 풀어보면, "그것들은 도적놈들 너희가 마음대로 먹어치워도 좋은 '너희들 것'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바로 '내 것'이니라!" 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이 구절을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것'이란 십일조 그 자체가 아니지요.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하나님 자신의 것이라고 하셨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라고 명하셨다는 주장에 대하여: (누가 11장 42절에 대한 해석):

 


"화 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눅 11장 42절/ 마태 23장 23절)

여기서 논란이 되는 것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우리 역시 십일조를 드려야 하다는 주장이지요. 과연 그런 뜻입니까?

-->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도 그 당시 시대적인 조건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책망하기 위해 여러가지 왜곡된 신앙 행위들 중에서 특별히 십일조를 한 예로 드신 것 뿐입니다. 결코 십일조를 잘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 당시에는 아직까지 제단과 성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레위인도 있었지요. 또한 다른 문맥을 보면 예수님도 제단과 성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은 십일조가 필요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즉 이것 역시 그 시대에 국한된 말씀이란 뜻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무조건 시대를 초월하여 지켜야 한다면, 예수님이 할례를 받았으니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셨으니 성전이 없는 지금도 성전세를 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우리도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게시자 '들을귀' 사견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또, 십계명을 다 지켜야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신약시대에 토요일이 안식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십계명 폐지가 안되었고, 구약의 안식일인 토요일이 일요일로 안바뀌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습니다. 안식일을 포함한 십계명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면,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는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되므로 비성경적이 됩니다. 안식교나 안상홍교에서 주장하는 십계명과 안식일에 대한 주장은 이단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포교 작전 교리가 따로 있기 때문에 매우 주의하고 경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할 점은 로마 천주교에서 안식일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꾸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찾아 자세하게 파악하고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르면 약도 없고, 무식하면 덮어놓고 용감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옷을 오래 입다 보니, 어느새 내옷 처럼 익숙해진 일요일을 토요일로 바꾸기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시행령이면서 시행세칙과도 같은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나오는 말씀들은 새계명의 실천사항들 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예수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고 부탁하신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종교다원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영혼들은 십계명을 무시하며 살려는 표면적인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러면, 전도하러 가는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지금도 전도하는 사람은 돈주머니도 두벌 옷도 두벌 신발도 없이 달랑 샌들 하나 신고 단벌 옷에 돈도없이 다녀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산상수훈의 명령들은 어떻게 지키지요? 과연 그대로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는 하지 않으면서 왜 십일조만은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드려야 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주장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런 성경구절을 들어서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를 주장하는것은 너무나 웃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신약시대 이후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이유는 십일조는 성전체제와 제사 제도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이며 그런 제사 제도와 성전이 필요 없게 된 이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4). 십일조가 율법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십일조는 이미 율법 이전부터 정해진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 아브라함과 야곱의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 먼저, 아브라함은 가나안과의 전쟁 후 전리품 중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는데, 이는 아브라함을 멜기세덱이 축복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준 것이지 이를 율법의 십일조로 생각할 근거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그렇게 전승자가 다른 사람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준 것은 다른 역사적 사건들에도 종종 있어왔던 것이라고 합니다. 즉 십분의 일을 준 것은 그저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른 것이지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개입된 것으로 봐야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지않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율법의 십일조의 효시라면 이 사건 이후에도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렸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전혀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행위는 단순히 감사한 마음에서 고대의 관습을 따라 십분의 일을 주었던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창 28:20-22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십분 일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는데 이것은 소위 '조건부 십일조'라 할 수 있는 바, 이것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니지요. 이것이 어떻게 율법의 십일조 정신에 부합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주고 받기" 식의 거래일 뿐이지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야곱역시 그런 약속을 한 이후에 가나안으로 돌아와서도 한번도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그것을 도대체 누구에게 바친단 말입니까?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들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와같은 행위를 가지고 십일조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으니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야곱의 행위에서 십일조의 기원을 찾는 것은 억지일 뿐이며 절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2.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일체의 의무적 율법은 폐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일 중에 중요한 것이 바로 율법을 폐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갈 5장). 그러므로 이제는 신약시대의 신자에겐 율법적 의무란 없습니다. 다만 자발적 순종만이 있을 뿐이지요.

사도행전 15장에서 초대교회 최초의 공의회가 열리는데 거기서 결정된 것은 할례를 포함한 일체의 율법적 의무를 폐지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에게 율법적 의무였던 십일조도 폐지된 것이지요.

십자가사건 이후 모든 율법을 폐지하는 것은 당연히 십자가의 뜻을 안다면 마땅한 결론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율법적 규정을 존속시키려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사건이후에 모든 율법은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시켰다"는 말씀은 과거의 것을 폐지하고 더 좋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셨다는 말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로 폐지하시고 더 좋은 자유로운 사랑의 구제헌금인 "연보"로 대체하신 것입니다. 이 연보란 개념속에는 결코 율법이나 의무개념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의 자발적 헌금이지요.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안식일은 주일로, 할례는 세례로, 유월절 만찬은 성찬식으로 등등, 다른 율법들은 다 바꾸면서도 유독 십일조만은 아직도 존속시키려고 하는지 그 속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셋째, 십일조 제도의 폐해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십일조 할 사람은 하고 자유롭게 놔두면 되지 않냐고..아니지요. 잘못된 것은 고쳐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잘못된 것들을 그냥 방치하는 것은 자칫 더 나쁜 결과를 유발시킬 가능성이 다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나쁜 종양은 빨리 도려내는 것이 좋듯이.

 


십일조가 일으키는 문제점들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십일조를 그냥 두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다시 포기하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그것은 마치 지금도 그냥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괜찮치 않느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역사를 부정하는 것이지요.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다시 율법적 신앙으로 회귀시키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8) 고 갈파하는 것입니다.


2). 교회가 재물에 대한 잘못된 욕심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십일조를 잘못 걷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을 제대로 쓰지않고 쌓아두거나 엉뚱하게 건물짓는데 쓴다는 둥, 하게 되면 교회가 부를 인하여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돈의 유혹을 과소평가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돈과 하나님은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이지요. 사실로 현재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돌아보면 자명하지 않습니까?

오늘의 한국 개신교는 점점 중세의 카톨릭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 원인 중에는 교회에 돈과 권력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는 데 십일조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쌓이면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잘 모르고 십일조 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이러한 부패를 조장시켜주는 일에 동참하는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업은 무슨 돈으로 하냐구요? 교회는 사업을 위한 조직이 아닙니다. 다만 신자들 하나 하나가 빛과 소금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밖의 일들은 부차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구분할수 있어야 합니다. 돈 없어도 교회는 존재합니다.

 

성장할 수 있습니다. 부흥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돈이 없을 때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듯이 교회도 재산이 많아지면 본질을 잃어버리고 타락할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이미 중세의 기독교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3).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주의적인 신앙심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10)

흔히들 이 구절을 들어 십일조 잘하면 복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에게 십일조를 떼어 먹지 말고 제대로 잘 나눠주라는 말씀이지 백성들에게 십일조 잘하면 복 받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십일조 잘해야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다고밖에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마치 순전히 그리스도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그럴듯한 말로 속이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속이고 모르고도 속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무 약효도 없는 가짜약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속여 파는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사기치는 것입니다.

또한, 장로-집사-목사들의 경우에도 십일조를 함으로 더 많은 물질 축복을 얻어내고자 하는 잘못된 욕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거래하자는 것이지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실상은 많은 신자들이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그게 지금의 교회 현실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십일조를 하는 행위자체가 아니라 그 십일조를 거둬서 가난한 자들과 곤궁한 이웃을 위해서 전액 제대로 쓰여질 때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신명기 26장). 그러므로 진정 복을 받고 싶다면 그렇게 제대로 쓰는 일에 더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4). 잘못된 죄책감만 조장시키고 형식적, 외식적 신앙행태를 조장합니다.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도 않은 신자들에게 자꾸만 십일조를 강요하다시피 강조하는 것은 자칫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만들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아니면 그것을 제대로 못한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합니다. 결국 쓸데없는 죄의식때문에 즐거워야할 신앙생활이 잔뜩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도대체 지금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기껏 벗겨놓으신 짐을 또다시 걸머지고 가려는 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4. 마지막으로, 올바른 십일조 정신을 구현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구약의 십일조 법에는 과부와 고아등 그 지역안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3년마다 십일조를 거둬서 나눠주도록 되어있는데, 이 정신은 참으로 본받아야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명기 26장)

지금도 사회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헌금의 명목은 구제금이나 사랑의 헌금 등의 명목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신약에 의하면 그런 것을 일컬어 "연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연보의 의미는 "자기 것을 버려서 남의 부족한 것을 메꾼다"는 뜻입니다. 또 그렇게 거뒀다면 당연히 그 전액을 다 그 목적으로만 사용해야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도 이와같은 십일조의 정신을 살리자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 헌금이어야 하는 것이지 '십일조 법' 같은 어떤 종교적 의무로 규정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의무가 되어버리면 그 순수한 정신이 훼손되고 왜곡되어 외식적이고 형식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처럼.


이제 요약하면,

 

1) 이미 말했듯이 십일조라는 규정보다는 사랑의 헌금인 "연보"를 강조하고 그 정신을 더욱 고취하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연보(사랑의 연보)는 그 정신에 따라 전액을 구제와 구난을 위해 사용해야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십일조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길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십일조를 여전히 지키겠다는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그것은 십일조를 폐지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도 하고, 모든 율법을 폐지하시고 새로운 사랑의 법으로 대치해 놓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결과적으로 교회와 신자들을 기복신앙과 물질숭배로 치닫게하는데 일조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개혁은 바로 이 십일조 폐지 운동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 http://me2.do/59c3yqso

 

[펌] 십일조는 이미 폐지된것임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인간사회의 모순을 정화해야할 사회적 책임을 가진 교회가 자기들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현실에 놀랐읍니다. 헌금에 대하여 성서의 바른 진리를 알고싶어 깊이있게 공부하고 얻은 결과입니다. 그 동안 잘못 인식되어 온 십일조가 모든 그리스도인들(독자들)에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도록 시원하게 넣어드립니다 !!!

 

제목: 십일조는 이미 폐지된것임

 

1,현황파악:

가, 구약 성경당시 사회상황

BC 1400년경, 율법서가 씌어질 당시 고대 이스라엘국가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고 종교를 건국이념으로 하여 종교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였음. 십일조는 당시 나라의 세금제도 형태로서 소득의 1/10을 세금으로 내게 한 것이며 요즘 교회에서 말하는 헌금이 아니었음(십일조에서 “조”자는 세금조자임)

나,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는 유럽의 십일조 사례

 

현재 유럽과 같이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도 십일조를 시행하지 않고 소득세액의 8%를 종교세로 징수 할 뿐이고, 희망자에 한하여 별도의 헌금을 낼 수 있도록 하고 있음*프랑스에서는 1789~90년 프랑스대혁명과정에서 십일조폐지 되었고, 영국에서는 1648~88년에, 독일에서는 1807년에 각각 십일조폐지 되었음(자료출처:동아세계대백과사전)

 

2,문제점:

가, 현재 개신교회는 돈 없으면 교회도 못다는 분위기임.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성직을 자기직업으로, 자기사업으로 매우 상업적으로 생각함. 그러면 성직 그만두고 세탁소를 하던지 재벌회장이 되어, 돈 많이 벌어 호화생활 하면 될 것인데, 굳이 예수님 빙자하여 성스런 교회 내에서 상업적 영업활동은 왜 하는가?

 

나, 일부 사이비 목사들은 구약시대 제사장 들먹거리면서 성전에서 일하면 성전에서 나오는 것 먹고 산다고 자기들 행위를 합리화 하면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쳐야 복 받고 천국 간다고 일반 신도들을 부추기고 유혹함(혹세무민 죄에 해당).

 

다, 일단 그리스도인들로 부터 십일조가 들어오면, 목사 호화 생활비, 대형 호화교회 건물 신축비, 은행융자 원리금 변제 등에 다 쓰고, 정작 성서의 연보 용도에 대한 예수님 가르침인 극빈자 구제비용은 우리나라 개신교 총예산 중에서 평균 1%도 안됨(기독교 방송)

 

3,성서적 고찰

가, 구약성서에서 당시 하나님이 십일조를 명하신 진실 된 뜻은 당시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11지파에게는 분깃이 있었지만, 예배와 제사를 담당하던 레위지파에게는 아무런 분깃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레위지파가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레위지파를 도우라는 뜻으로 말씀 하신 것이며, 또한 가난하여 삶을 영위 할 수 없는 과부나 고아 등 어려운 극빈자 이웃을 도우라는 것이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대형 호화교회 건물 신축 등 교회를 위하여 십일조를 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결코 아님.

나, 하나님과 유대인간의 율법계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신 후 광야에서 그들과 맺은 계약이었고 (출애굽 19:3-8) 이스라엘 백성이 반복적으로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므로 폐해질 것이 구약 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임 (예레미야 31:31-3

 

 

3)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로 새 계약을 중보 하셨고 (누가 22:20) 바울은 예수께서 고통의 기둥에 죽으심으로 유대인들을 정죄하던 율법 계약을 도말하셨다고 누차 강조하였으며 (로마 10:4; 갈라디아 3:24, 25; 에베소 2:14-16; 골로새 2:14-17) 예언의 성취대로 새 언약이 율법 언약을 대치했음을 알려 주고 있음. (히브리 8:8-13). 십일조는 폐하여진 율법 언약의 일부이며,

 

 

모세의 율법 중에서 자기들(개신교목사들)에게 필요한 것만 뽑아서 유효하다고 하는 것은 비이치적이며 비성서적인 입장이다. 바울은 할례를 받는 자는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갈라디아 5:1-4) 마찬가지로 십일조를 지키려면 죄 지을 때마다 양이나 염소를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이고 간음하는 교인은 돌로 쳐 죽여야 할 것이다.

 

 

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예수님 말씀(마태22:37~40)의 뜻은 631가지 구약율법을 농축하여 예수님의 계명인 “사랑” 하나로 완성하신다는 의미임(마태22:37~40). 신약시대에서는 결국, 예수님 계명인 “사랑”만이 <율법의 완성품>으로 존재하며, 631가지 구약율법은 예수계명 "사랑"의 농축물속 ingredient에 불과함. 그래서 당시 율법학자였던 사도바울은 법률적 표현을 빌려 율법폐지로 표현한 것임(에베소2:14~16)

 

4,결론

가, 십일조는 폐지되어야 함. 교회 내에서는 그냥 연보하면 됨. 연보는 삶에 부담이 없는 범위 내에서 각자 마음이 정한대로 하면 됨(사업해서 돈 많이 번 사람은 50%도 낼 수 있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1~2%도 낼 수 있어야 함)

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예수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진리중심으로 세상사는 것이며 삶이 기독교적 이어야 함. 그리고 신앙생활은 죽을 때 까지 자기수행을 계속하는 것이며, 사후구원은 자기 믿음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임.

다, 복을 미끼로 구원을 미끼로 십일조를 강요하는 집단은 기독교는 아니며 무당, 사이비 집단임

 

라, 그리스도인들은 사이비교회 교회, 목사들로부터 착취당하지 말고 그 돈으로 노부모 용돈 넉넉히 드리고, 건강보험 재해보험 복지보험 등에 가입하여 여러 국민과 함께 노후보장을 위해 사전 대비하는 것이 더욱 성경적임을 알아야 할 것임.끝  http://me2.do/xbhm1uaP    출처: 네이버

 

들을귀
국내외 개신교회 대부분 & 미국의 남침례교회와 오순절교회 일부만 십일조 헌금을 성경적이라고 하면서 지키고 있습니다. 저 역시, 30년 넘도록 철저하게 준행하려고 한 <십일조주의자>였습니다. 이제부터는 각자 형편대로 자발적인 연보(기부금)를 권장합니다. 주의날 예배연보나 월정연보 낼 형편이 되면 자원하여 하시고, 형편이 안되면 떳떳하고 당당하게 안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영육간 다양하게 많으니, 이를 잘 활용하여 하나님 아버지 영광 드러내시면 될 것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배십자가 거치’ 정확한 지침 필요 

<- 위 한글제목을 클릭하세요!!

 

hermit
                new
개신교회 목사-장로 일부가 천주교 닮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고서는, 십자가 위에다 색갈 담긴 M자 천을 걸어두지 않을 것입니다.


케이투     2014.09.08 20:02

 

교회의 악(惡) 십일조

 

 

십일조 바른이해

 

십일조는 분명히 성경적이 아니다.  개혁가들은 말한다. "성경이 앞으로 나간 만큼나가고 성경이 발걸음을 멈추면 같이 멈추라" 고 말이다.

 

[말라기 3장 10절]"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본문에 히브리어 및 헬라어 원문이 안보이고 네모로만 나타나면 여기를 클릭 해서 폰트를 설치하셔야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הביאו את־כל־המעשר אל־בית

뻬이트 엘 함마셀 콜 에트 하비우

 

house-of into the-tithe whole-of *** bring

나의집 십일조 온전한 들여

 

האוצר ויהי טרף בביתי ובחנוני

우베하누니 베비티 쎄레프 웨이히 하오찰

 

indeed-test-me in-house-of-me food that-he-may-be the storage

나를 시험하여 나의집에 양식 있게할지니 창고에

 

נא בזאת אמר יהוה צבאות אם־לא

로 임 치바오트 야웨 오말 바오트 나

 

not if Hosts Yahweh he-says in-this now -

만일 그렇지 아니한--만군의-여호와가 -말한다-그것으로


אפתח לכם את ארבות השמים

하사마임 오레보트 에트 라켐 에페타

 

heavens floodgates ** for-you I-throw-open

하늘들 문 너희를 위해 붓다.

 

והריקתי לכם ברכה עד־בלי־די׃

디 베리 아드 보라카 라켐 와하리코티

 

room-enough not until blessing upon-you and-I-pour-out

풍족히 아니하나 까지 복을 너희위에 내가 부은다

 

성경에서 시험 이란 용어 "test"는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peirasmoV , (페이라조)peirazo) 인데, 여기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1. 시련을 통한 연단이라는 의미의 trial 은 히브리어로 (차라프 צרפ ,헬라어로 (귐나시아gumnasia 히 5:14, 12:1 ) 이고,

 

2.시험하여 미혹에 빠뜨린다는 의미의 temptation 은(히브리어로 나싸 נסה, 헬라어로는 (아파테스)apathV, 아파타오, (엡 4:22, 히 3:13) 이며,

 

3.분변하다, 증명하다라는 의미의 prove 은 히브리어 (빠한) בחנ ,

헬라어로는 (도키마조)dokimazw , (눅 12:56, 고후 8:8, 13:5 ) 이다.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시험은 בחנ'빠한'- "증명하다"이다. 십일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공동체 자체를 유지시켜주는 그들의 신앙행위 표현이다.

 

이 십일조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의 많은 나라 즉 로마,그리이스, 시리아, 카르타고 등에서 행해졌다. 십일조는 종교적 뿐만 아니라 세속적 통치자가 십일조를 받기도 했다.


아마도 본래 신에게 드렸던 십일조를 신격화된 통치자에게 드리게 됨으로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삼상 8:15-17)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궁정관리와 신하들에게줄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의 일을 가져 갈 것이며 너희는 그 종이 될 것이라"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 "왕을 세우면 너희들이 왕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될 것이다."라고 하므로서 십일조가 하나님께가 아니고 왕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됨을 지적하고 있다.

 

(창 14:18-20) 십일조가 성경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으로서, 살렘왕 멜기세댁이 빵과 포도주를가지고 나와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람을 맞아 그에게 축복하니 이에 대해 아브람은전리품중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드리는 장면이다.

 

특히 멜기세덱이 지니고 있는 제사장 직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형으로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에 십일조가 맞춰져 있다.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교적인 의무가 아니라 당대의문화 또는 풍습에 따라 드린 행위이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율법의 명시된 십일조는 땅의 소출과 가축에 한정 되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십일조가 될 수 없다.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후에 십분의 일을 반복해서 드렸다는 언급이 없다.

 

(창 28:20-22) 은 야곱이 하란으로 피난도중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주시고 지켜 주시고 양식과 옷을주시고 나중에 아버지집에 돌아오게하시면 제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그후 야곱이 전에 맹세한 대로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 야곱의 십일조를 바치기를 요구하였다는 것도 전혀 찾을 수 없다.


그 후, 400년이 지나서야 십일조 제도가 모세 율법에 등장하고, 많은 지파들이 땅의 소산을 얻을 수 없는 레위 지파의 생활을 보호하기위해 다른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함께 주어지기 시작하였던것이다.

 

(레위기 27:30-33) 여기엔 곡식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따로 떼어 놓았는데 바치는 사람이 자기 임의대로 선발하지 못하도록 막대기 밑을 통과하는 가축의 열 번째를 바치게 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금으로 20%까지 바치도록 하였다.-땅의 소산과 가축이다.

 

(민수기 18:21-32) 이스라엘 백성이 낸 십일조의 십일조이다.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도 다시 돌려드린다는 표로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아론 제사장에게 돌려 드려야 했다.-농산물에만 한정한다(18:27, 30).

 

(신명기 12:4-19) 백성들은 자신의 이름을 두고 거처를 삼으려고 택하신 그곳으로 찾아가서 거기서 십일조 음식을 먹어야 했다.-본문에서도 십일조는 농산물과 가축에 한정하고,사회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어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신명기 14:22-29, 26:12-15) 십일조를 택하신 그곳에 가서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했다. 3년 차 십일조는 사회보장 복지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로서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들이 해당되었다. 이런 십일조는 성소로 가져가지 않고 자기 마을에서 소비하였다(14:28).-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모든일에 복을 주신다고 했다.

 

레위기에서는 십일조가 곡식과 가축이었다면 민수기와 신명기에서는 밭에서 생산되는 것에 국한했다.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사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의 대체적인 십일조는 레위인만이 찾지하는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성전아닌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각 성읍에 십일조를직접 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였던 것이다.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레위의 제사장들이 독점하는 십일조로 변해갔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배역 행위를 열거하면서 그들이 벧엘에서 제사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기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아모스 4:4)"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그러면서 아모스는 십일조와 관련된 그들의 잘못된 생각과 기복신앙을 꼬집는다.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려보라" 너희가 율법 의식법인 십일조를 통해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 "매 3년마다 드렸던 십일조를 3일에 한 번씩으로 앞당겨 시행 해보라 그러면 더 많은 복을 쌓을곳이 없이 돈 뭉치를 내려 줄 것 아니냐?", 하면서 사람들의 기복적인 신앙을 비웃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제사의식에 참예하는 사람들들은 각자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각자가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본래 구약에서는 말하는 십일조는, 성전 제사를 맡은 레위인, 과부들,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눠먹는 것이었으므로 반듯이 밭의 소출과 가축에서만 드려야 하는 것이었다(레27:30, 신12:17, 14:23, 느13:5, 12). 성전이 너무 먼 경우에는 일단 돈으로 바꾸어 가지고 성전에 와서 그것을 다시 음식물로 바꾸어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다

(신14:24-26).

 

따라서 십일조는 당연히 "먹는것"을 생산해 내는 농민과 목축업자만 낼수있고, 그 외의 다른 직업인들은 십일조를 아예 낼 의무가 없었다.


당연히 목수였던 예수님도, 어부였던 제자들도, 세리마태도 십일조를 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성전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그때는 그 당시 통용하는 돈으로서 "성전세"를 냈다. 이 성전세는 십일조와는 달리 모든 백성이 납부 의무가 있었다(출30:12-15).

 

그래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이 성전세 많큼은 납부하셨던 것이다(마17:27).다시 말하자면 십일조는 구약시대에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족 제사장의 먹거리로서 일종의 음식물에 의한 사회보장제도 의 성격이었기 때문에 따라서 초대교회도 역시 십일조를 전혀 시행하지 않다가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야 교회가 구체적으로 조직화 되면서부터 십일조는 다시 시행하게 됐다.

 

주목할 점은 어둠의 중세 교회조차도 4세기가 돼서야 십일조 제도를 도입했고, 그 후 거의 1000년동안 토지 소출과 가축 에서만 십일조를 거둬들였다.십일조는 분명히 먹거리로만 한정했기 때문에 돈까지 포함시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13세기에 이르러 교회의 극심한 타락과 함께 비로소 십일조 대상이 "먹는것" 을 포함해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 되면서부터 십일조가 엄청난 변질을 가져 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변질된 십일조는 결국 교회의 깊은 수렁의 타락으로 이어졌고(현재 한국교회 타락의 주범과도 같이) 교회 부패의 한계상황으로 이어지면서 세계의 모든 기독교 국가의 교회는 결국에 이 십일조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기에 이르렀다.오로지 십일조 왕국인 한국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래서 세계 교회가 점차 십일조 배척하는 운동이 일어나더니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1789), 세계 교회가 공식적으로 이 십일조제도를 철폐하고 잠시 머뭇거렸던 나머지 교회들도 1848년 이후에는 모두 철폐했다. 더 이상 그 십일조를 가지고 교회가 교인들에 대해 사기 칠수 없다는 것이다.

 

*홀랜드 ............십일조 및 각종 헌금을 일절 철폐하고 교인들의 생활수준의 각자 각출로서 교회를 운영해 갔고.

 

*스웨덴 ............세금형태(교회세)였으나 2000년에 공식적으로 폐지 하였고

 

*스코틀랜드.......2000년 폐지.

 

*스페인 .............1841년 폐지.

 

*이탈리아 ..........세금형태로 0.8% 받아 그것을 교회크기의 비율대로 나누고

 

*핀란드 .............시에 따라 다르지만. 세금형태(교회세)로 1%~2.25% 내고

 

*스위스 .............공식적으로 십일조를 걷는 곳은 없고, 일부 주에서 2.3%까지 세금 형태로 거두고

 

*아일랜드 ..........1869년 폐지.

 

*오스트리아 .......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교회세)로 자기 수입의 1%만 내고

 

*덴마크 .............시에 따라 차이가 조금 있지만, 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교회세)로 1%만 내고

 

*프랑스..............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서 1789∼1790년 폐지되었고, 

 

*영국.................1648년과 1688년에 폐지,

 

*미국 ................종교와 정치의 분리원칙하에 결코 교회세와 강제적인 십일조를 걷지 않고.

 

*독일.................1807년에 폐지 하였고.

 

*멕시코.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들 모두 폐지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는 "이 십일조에 대해" 이들 나라들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분명 십일조가 성경적인 기반위에 있지 않다는 교리적인 합의까지 이뤄냈던 것이다.


이들 나라들의 교단과 신학들이 한국교단과 신학보다 그리고 교리와 학문에서 뒤떨어져서 이렇게 합의에 도달 했겠느냐는 것이다. 세계 기독교 인구 20억명 가운데 한국 기독교인은 불과 860만명으로서 233분의1 뿐이 되질 않는다(정부통계청 발표).

 

특히 한국의 신학자 및 신학교 교수들이나 또는 적지않은 목사들은 대부분 서구나 미국 등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 그 나라들의 교회예배 참석을 통해서 ‘십일조 제도’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  


‘성경 진리보다는 밥 줄이 걸려 있있기 때문에 출회(요12장42절-aposunagwgoV <아포순나가고스>) 당할까봐’ 해당 교단의 하수인 노릇 하며 지내고 있다는 것이 매우 한심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 많큼은 "십일조 왕국" 이라 불릴정도로 십일조 제도가 초교파적으로 정착 되어 있다는게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이 아닐수 없다. 교단과 교단, 교파와 교파 사이에는 교리적으로 조금만 차이가 있어도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싸워대도 어찌 된일인지 이 십일조 많큼은 모두가 한 목소리가 되어 있어 누이좋고 매부좋고 아무런 차이를 보이질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성경말씀이 바로 구약의 말라기 3장8절-10절 말씀이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은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과, 그 말씀 전후의 유기적인 문맥관계를 고려해서 해석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특정 귀절들만을 떼어서 자신의 신앙을 애써 합리화 하는것은 참으로 가소롭다.

 

이곳의 말3:8-10 절의 해석은 느혜미아서 13장 에 자세히 설명해 놨는데 말라기와 느혜미아는 동시대 인물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십일조 도둑은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도둑으로 몰린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빼돌렸기 때문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느헤미야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명령했다.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가져오면 제사장들은 그것들을 받아서 성전옆에 있는 성전 창고에 거둬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 라는 사람이 서로 공모해서 그 성전 창고 바로 옆에, 자기 개인 창고를 만들어 놓고 십일조 및 백성들이 바친 각종 식량과 예물들을 자기가 만들어 놓은 개인 창고로 빼 돌림으로서 결국 그 성전에는 식량이 바닥이 났다.
  
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 할 수 없게 되자 성전 일을 버리고 자기들의 생계를 찾아 도망가는 일이발생하였다. 최초로 제사장에 의한 십일조 도둑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이 내용이 바로 십일조 도둑 사건이다. 내어야 할 십일조를 떼어 먹어서 도둑이 아니라 제사장 엘리야십과 도비야가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훔쳐서 도둑사건이 된 것이다.


말 3:8, 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이같이 성경을 바로 해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많은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십일조를 하지 않은 교인들에게 도둑으로 몰아가고 있으니 목회자들의 무지소치의 성경지식 한계점이다.

 

따라서 이제 교회는 목회자 사례비를 비롯한 교회 일절 재정지출문제를 이렇게 비성경적인 십일조를 강조 함으로서 해결 할게 아니라, 구체적인 재정필요 사항들을 교인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동참 할 수 있도록 "연보" 개념을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된다고 본다.

 

바로 바울 사도가 말한 (고후 9장5절)"연보"로서-"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복)을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 하여야 참 연보(복)답고 억지(탐심)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0장8절) "제사와 예물과 전제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십일조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교파들을 보다면 "미국 남부의 오순절", "여호와 증인", "몰몬교", "안식일교", "북미의 worldwide church of god(WCG)" 등이 십일조 매우 열성적인 교파로 속하고 있는데 한번 유심히 살펴 보면 뭔가 공통점(흔히들 보통교회에서 이들을 비정통성 교파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십일조 폐지한 나라들의 교회들도 재정적 어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십일조가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폐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대신 이런 나라들에서는 대부분 기부문화, parachurch운 동이 크게 발달 되어 있어 현실적인 어려움을 대부분 해결한다.

 

다시 말하지만 십일조 교회의 재정적, 현실적인 문제이기전에 성경적 근거 문제인 것이다.성경적으로도 근거가 없고(가장 중요한 이유) 세계 기독교 추세와도 역행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아니 확실한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처음부터 이런 폐지론이 나올 수도 없었고 전 세계 국가들 역시 아직도 십일조를 시행하고 있을었것이다.

 

말라기 3:7-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본문은 십일조 지지자들에 의해 특히 한국교회를 주름잡는 부흥사들에 인용되며 백배,천배,만배 복의 근거까지 제시 한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이 구절이 얼마나 최상의 투자처가 아닌가? 그 누가 골치 아픈 사업을 하겠는가? 자기 재산 십분의 일만 교회에 갖다 바치면 얼마있으면 돈 주체 못할정도로 돈 방석에 앉을텐데. 바보 멍텅구리가 아닌이상 이같은 매력에 그 누가 눈을 감고 만 있겠는가? 돈 벌기 가장 쉬운곳이 교회인데...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얼마나 허풍이었는가를 성경을 좀더 자세히 연구하면 금방 알수가 있다.

 

처음에도 "주"를 달았다시피'시험' 단어를 잘못 이해에서 비롯된다. "시험하다" 원어에는 다음과 같이 몇가지가 있는데, 히브리어 (차라프)צרפ, (나싸)נסה 와  (빠한)בחנ 이다. (차라프)צרפ는 시련을 통한 연단이고 (나싸)נסה는 헬라어 peirazo(페이라조)로서 이는 글자 그대로 '시험하다(test, tempt)' 뜻이고 (빠한)בחנ 은 '마음의 상태를 증명하다'라는 뜻으로 헬라어로는 dokimazo'도키마조'(prove)이다.

 

성경의 다른 모든 여러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할 때 '시험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נסה(나싸)이지만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시험은 בחנ'(빠한)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증명해 보라"는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헬라어 성경은 모두 이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며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말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라고만 번역함으로써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신양성경에서 이 같은 예로 사용된 경우는 고후 13:5인데,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이 말씀에서 '페이라조'와 '도미카조'가 모두 사용되고 있으며 뒤에 나오는 '확증하라' 가 바로 '도미카조', 즉 마음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시험할 수 있으되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다.말라기 3:10의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의 십일조는 많이 바치라는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더러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면 절대로 안된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10절에서도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도 물론 확증하라는 뜻의 '도미카조'가 사용되었으며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나타나는 빛의 열매이다.

 

결국 성경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은 모두가 마음과 삶으로 입증하고 확증하라는 뜻의 말씀이지 하나님을 향하여 흥정하고 시험하라고 부추김으로 사용된 경우는 한번도 없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특히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한다면 복은 고사하고 화를 자초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말라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던 백성이 이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관계회복과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흠이 있고 의롭지 못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왔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받지 않으셨지만,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 의로운 제물을 드리실 것이기때문이다(3:3).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열국의 제물도 받으시게 될 것이다.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가 바로 곧 바른 헌물과 제물을 드리는 온전한 제사가 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 본문이 몇구절 있다.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18:12 그리고 히브리서 7:1-10이 유일한 본문들이다.

 

(마 23:23; 눅 11:42; 18:12) "너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러나 이것들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말씀하셨다(23:23).

 

이 말씀은 십일조 지지자들에 의해서 신약 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구약에서와 같이 십일조 실행을 정확하게 말씀심은 찾을수 없다. 마태복음 23장에 언급된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십일조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어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도 중요한 십일조를 했다거나 가르침이 없을까?

 

헬라어 원전을 살펴보면----

 

ouai umin, grammateiV kai farisaioi upokritai, oti

우아이 휘민 그람마테이스 카이 파리사이오이 휘포크리타 호티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because

화 있을찐저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여!외식하는 너희가 십일조를 드리기 때문이다

 

apodekatoute to hduosmon kai to anhqon kai to

아포데카투테 토 헤두스몬 카이 토 아네돈 카이 토

 

ye tithe the mint and the dill and the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kuminon, kai afh kate ta barutera tou nomou thn krisin kai ton

쿠미논 카이 아페 카테 타 바루테라 투 노몬 텐 크리신 카이 톤

 

cummin and ye{haev}left the heavier things of the law,-- j udgment and --

버렸도다 더 중요한바것들인 율법의 의와

 
eleon kai thn pistin tauta de edei poihsai kakeina mh afienai

에레오온 카이 텐 피스틴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아페이나이.

 

-- mercy and --faith but these things it behoved to do and those not to leave

긍휼과 신뢰는 그러나 이것들도 행해야 했으며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했다.

 

poihsai(포이에사이):행하다 . aorist(계속.완료.반복의 뜻을 갗지 않고 단순히 과거 동작을 나타내는시제) 능동부정시제 동사로서 원형 poiew (포이에오)에서 유래했다.

 

afienai(에피에나이): 버리다-현재능동 부정과거 시제로서 원형은 afihmi(에피에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것들 tauta (타우타) -(의와 긍휼과 신뢰)도 행했어야 했고, 저것들 kakeina (카케이나)-(박화와 회향과 근채) 도 행했어야 하는 즉 십일조를 포함하여 율법의 기본정신뿐만 아니라 세부지침에도 충실했어야 했었다는 당위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사가 Koine Greek 부정과거 시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14:22-23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까지 십일조"를 드리라는 장로들의 미쉬나를 정확히 지키기 위해 채소와 박하와 향료의 작은 식물까지 십일조를 엄격하게 지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가장 작은 식물에까지 십일조를 하기를 원한다면 기특한 일이지만 율법의 가장 중요한 즉 사랑, 자비, 정의, 신의 등은 언제나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십일조를 하지 않은 사람들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십일조 준수를 지나칠 정도로 철저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책망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물질에만 집중하고 의와 긍휼과 신뢰는 그들의 관심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의 한국교회에서의 인간의 생명과영혼은 보이지 않고 집회 참석인원 머리수에 비추어 돈만 보이는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운영에 대한 돈은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도 반대로 목적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 현재교회의 실정이다.그 수단을 정당화 해서 가르치는 목회자들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는 이유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먼저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시대가 어느 시점인가를 가장 중요하게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부활 할 때에 율법이 완성 되고 은혜 시대가 열린다고 보면,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때는 구약의 율법 시대 연속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은 아주 당연한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마23:23)본문은 구약시대 에서 말씀 하셨다. 예수님의 구속사역도 아직 완성 되지 않았고 그리고 또한 십일조는 율법의 의식법에 속하고, 성전 예배도 진행 중이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백성들의 십일조를 필요로 했다.

 

구약과 신약의 실제적인 전환점은 그분의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죽으심과,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 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에는 자신을 율법의 규정에 복종하셨으며(갈 4:4), 그분의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은 구약 시대의 문맥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부탁을 하신 것도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십일조 같은 의식법과 관련된 언급들은 신약에서는 확실히 적용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바른 것이다.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모든율법을 심지어 의식법인 십일조까지 다 이루셨기 때문에 바울도 자비량으로만 복음 전했고, 또한 그는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려고 돈을 모으기 위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특히 고린도)에 알리면서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도울 것을 호소하였지만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따를 것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롬 15:25-27).

 

단지 고린도 교회에게는 연보의 정신을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나,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고만 했다.

 

사도행전 당시나 교회발생 초기에는 십일조는 고사하고 아예 헌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연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후8;20). 이 같은 사실에 따라 한국교회도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연보라고만 했지 헌금이라는 용어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연보라는 말이 사라지고 한국교회에 헌금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교회안에 맘몬이라는 돈 우상이 자리를 잡게되고 교회의 본래적 사명은 사라지면서 한국 교회 모든 부패의 원인과 교회의 빈부격차 모든 성도들을 기복신앙으로 몰아가고야 말았다.

 

사람 머릿수가 많아야 십일조등 막대한 자금이 들어오니 대형버스를 이용해 이동네 저동네 골목까지 헤집고 다니면서 작은교회 성도들까지 착취해오고 있고 또 대형교회들은 지방곳곳에 지성전을 만들어 놓고 목사개인 목회성공의 자랑거리로 열을 올리고 있으니 순수한 윤리와 신앙적인 구령사업은 고사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죄의 극치를 달리고 있으니 참으로 재앙을 끌어 들이는 꼴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돈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고 바울도 돈은 "일만악의 뿌리'라고 말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깨끗해지려면 돈줄부터 끊어야 한다. 그래서 천주교는 지금도 연보라고 하고 있다.

 

연보는 자기 재물을 내어 남을 도와주는 돈으로 일종의 구제금에 더 가깝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연보를 거둬서 바울에게 내 놓았다.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교회 운영비나 교회일을 하는자들을 위해 내 놓는 것이 연보이다.

 

이것을 바울은 “연보” 즉 넉넉히 주는 선물(복) 이라고 규정하였다. 바울은 "사람이 드리는 연보를 하나님께서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 하시리라”고 말함으로써 현대 교회가 일괄적으로 “십분의 일”을 부과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연보 방법을 실시하였다(고후8;12).

 

고후8:13-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케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하려 함이라.

 

약성경에는 우리가 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구절이 한 구절도없다.그러나 한국교회는 수많은 헌금의 종류를 설정해 놓고 돈을 거둬 들이는데 혈안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한국교회의 다음과 같은 헌금의 85가지 종류를 봐도 알수가 있다.

 

성경전체의 해석방법은 오직 구속사적으로만이 바르다.하나님이 요구하는 율법의 더 중한 '의와 긍휼과 신뢰'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행할수 없다.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예수님만이 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완성하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인간들이 이것들을 이행할수 있다면 "너희는 계속 십일조 내고 복을 쌓을곳이 없도록 받아봐라" 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아모스4장4절).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진정 의와 인과 신을 하나님께 드려 십일조까지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새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모든율법 의식법인 십일조 포함해서 완성하셨다. 은혜 받은 자는 그 은혜를 나누는 차원에서의 사랑의 연보만 있을 뿐이다.그런데도 십일조를 강요하여 백배 천배 만백 복받자 한다거나 또 십일조 영웅 록펠러 거짓 이야기를 들려주며 십일조 했더니 복 받아 늘 돈방석에 앉아 누루고 눌러서 후대 자자손손 복받고 아주 잘산다고 하는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감이다. 록펠러 그 이면에 숨겨진 거짓악행에 대한 글 참조

(http://blog.naver.com/guesswhoim/70015568638)

 

십일조를 안하면 저주를 받는다며 겁을 주는 자들이나, 또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내의 봉사직인 직분을 제한하고 제외시키며 믿음없는자들이라고 낙인찍는 자들은 많은 성도들을 실족케 하는자들이다. 예수께서는 마11장29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했는데 교회의 목사들은 그걸 뒤 엎어서 오희려 십일조와 부담스런 헌금으로 무거운 멍에로 짐을 씌우고 있으니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배치하고 있다.

 

마치 교회의 은사적 직분인 "성직자와 평신도"를 사탄이 구분해서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교회에서 목사를 성직자 라 하고 일반성도를 평신도라 부르면 사탄 마귀가 제일 좋아한다는것이다--교문사 기독교 대백과사전 제6권 p275 제일 위에서 두 번째줄).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는 구원의 길로서 의식법인 십일조의 기능은 종결되었다. 왜냐하면 구약의 피제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제사에 비하면 그림자요, 예표였고 그리스도의 제사는 실체요,그 원형이기 때문이다(요19장30절-'다 이루었다').

 

또"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기 때문에 히브리에서는 모세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보면서 율법의 기능의 종결에 대하여 바울보다 더 과격하게 말했다(히7장19절).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이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완성했기 때문에(히7장27절), 또 옛 계명이 무익하므로 율법을 폐하셨다(히7장18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고(롬10장4절) 완성인데도 옛언약의 백성들은 제사제도를 (의식법인 십일조등을)계속할 것이 틀림 없으므로 이 제도를 하나님은 성전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고 자신의 심장을 내보이셔서 물리적 방법으로 폐지하셨다.

 

그래도 성전이 있는 한 레위제사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을 들어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시켜셨다. 그후 성전재건은 이뤄지지 못했고 또 시온주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2차대전후 팔레스틴에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세웠어도 아직도 성전을 세울수 없다.

 

성전만 아니라 제사장 가문을 완전히 허물어버리심으로 지금까지도 사독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후예를 확인해낼 길이 없다. 그들의 성씨가 כהן(코헨)이란 사람을 찾아 제사장으로 세울수도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כהן(코헨)은 제사장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כהן(코헨)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도 찾을길이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율법의 십일조등을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 하셨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중 유독 십일조만을 다시 끄집어 내어 지킨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다시 허물어 버리는 아주 무서운 저주 행위이다. 그래서 이 사실들을 깨달은 서구 모든 교회들은 십일조를 완전히 그리고 깨끗이 폐지하였다.


우리 한국교회도 이제라도 이 비성경적인 십일조를 하루속히 빨리 폐지한고, 교회 내의 맘몬 우상을 배격한다면, 그후 교회는 가장 바람직한 교회, 예수가 살아 역사하는 교회, 미래 지향적 하늘나라로 계속 이뤄 나갈것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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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대한 더 자세한 이해를 하려면 율법과 복음의 확실한 정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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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강요로 무너지는 한국교회 케이투 |2014.09.08 20:09

 

변질된 십일조에 관하여 케이투 |2014.09.08 20:05

 

십일조 헌금제도의 실체 케이투 |2014.09.08 19:57

[질문]  율법의 완성은 곧 십계명의 폐지이다 라는 말씀인가요?   

          
십계명이 없으면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정죄할 수가 없다. 십계명 율법을 완성을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해서 다시 계명이나 율법이나 안식일을 다시 지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헛되게 함이라 하였습니다.


나의 죄를 위함인가 십계명 폐지를 위함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어떤 분의 답변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곧 십계명의 폐지이다 라는 말씀인가요? 그럼, 이 세상에 멸망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겠습니다. 그래서 구원얻을 자와 멸망받을 자를 정하여 놓은 칼빈의 예정설이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으셨고 어떻게 이해를 하시나요?

                            

[답변]

아프리칸바이올렛      2014.07.23

                  

어떻게 똑 같은 성경을 보면서 저렇게 생각을 할수 있는지 아이러니 합니다.


1. 십자가에서 십계명이 폐지되었다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은 더 이상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된다. 빨간 불이 켜졌을 때 지나가는 차는 불법이다 라는 교통법규가 폐지되면, 빨간 불이 켜졌을 때에도 운전자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조심 없이 주행을 계속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명이 폐지되면 사람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부도덕한 삶을 살게 되며, 그러한 삶 속에서도 여전히 구원은 보장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러한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호소하는 음성을 들려주시기 어렵게 된다. 양심은 죄에 대하여 점점 더 무감각하게 된다.


2. 비록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았을지라도,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은 십계명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


사도 요한은 죄의 정의를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그런데,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도무지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비록 계명을 폐하지는 않을지라도, 계명의 존재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만다.


이런 교리는 죄를 도무지 승리할 수 없는 골리앗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명을 범하는 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각종 교통법규들을 준수할 수 없다고 믿는 운전자는 교통법규들을 범하는 운전을 하면서도 자신이 저지르는 불법에 대해 언제나 타당한 이유를 갖게 된다.


원하는 마음은 있지만 육신이 약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핑계가 항상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심각한 양심의 가책 없이 불법한 삶을 살게 된다. 자유주의적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계명을 범하는 죗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죄에 대한 신학적 핑계를 갖게 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나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며, 또한 죄를 범하면서도 여전히 구원에 대한 헛된 안전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물론,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계명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오직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바울 역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다.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계명을 매우 지키기 어렵고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의 육이 항상 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 문제를 분명하게 조명해 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3~4)


죄를 회개하고 버리는 대신에 양심의 가책과 성령의 음성을 잠재우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교리 중 어느 하나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바울의 경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처절하게 싸워보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인간의 행함과 노력으로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얼마나 깊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가 율법의 정죄를 받고 깊은 고통과 고뇌 속에서 진지하게 살아보지 않았다면, 과연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율법의 정죄로 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얼마나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자유주의적 복음을 믿고 살았다면, 과연 그가 로마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실패와 승리의 경험을 그토록 완전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바울처럼 고뇌하지 않았던 사람은 바울의 글을 오해하게 된다. 신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코 죄의 깊이와 사람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바울이 말하는 깊이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바울의 글을 핑계삼아 죄를 더욱 더 담대하게 범하도록 유도하는 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호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작게나 크게 바울의 경험과 같은 경로를 거치게 된다. 행함을 통하여 율법의 의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패배감.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원칙과 규칙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얻게 되는 좌절감. 이런 실패 때문에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계명과 원칙을 포기하는 쪽으로 신앙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를 피하는 길을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타협과 포기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진리 안에 존재하는 자유와 참된 평안과 행복의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에는 다른 복음을 찾아 먼 길을 떠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나는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는 모습을 보아 왔다. 또한 신신학과 자유주의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와 사랑을 말하면서 불법과 부도덕 속에서 원칙과 양심을 타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 왔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야 하고, 또한 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 시대 성도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2:14)


개신교 신앙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이 하나로 묶여져 있지 않는가?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알면 우리의 생애는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무섭고 엄격하며 냉정한 분으로 아는 사람은 그런 믿음을 갖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값싼 사랑의 소유자로 믿는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믿는 대로 우리의 성품과 생애가 결정지워질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알면, 죄를 범할 때마다 깊은 가책을 느끼게 될 것이다. 철이든 자식이 늙은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가족과 이웃과 교우에게 저지른 모든 악들을 기억할 때마다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면서 그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모든 높아지고자 하는 정신과 교만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는 돌아온 탕자처럼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육신적 성향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교정되지 않으면 그 속에 도덕적 죽음의 씨앗을 간직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면 우리는 방종과 자아 본위의 마음과 죄의 유혹과 같은 세력들을 저항할 수 없다.


계명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되,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 속에서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열매가 맺히게 된다. 그렇다면, 생명적인 관계란 어떤 것인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던 것이 바로 생명적인 관계였다. 바울은 이 생명적인 관계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느니라." (롬 8:14~15)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불신하면 사랑이라는 생명적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불신이나 의심이 있으면 아들은 아버지를 완전하게 신뢰할 수 없다. 이런 아들은 아버지를 가까이 하지 않은 채 아버지한테 혼나지 않기 위하여 아버지의 말을 듣는 척하며 살아가게 될 것인데 이런 관계는 생명적 관계가 아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생명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이다. 성경은 오직 한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바라 는 것" 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바라보면 생명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울의 경우 이 경험은 그의 생애에 놀라운 부흥과 개혁을 가져다 주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집 나간 탕자이고, 부모의 사랑을 저버린 불효 자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관계는 맺어질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른 채 구원을 위하여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노력하면서 보다 많은 공로와 선을 쌓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성패는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데에 달려 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도 전도를 잘하고, 설교를 잘 할 수 있지만, 내 가족과 이웃과 교우들, 그리고 하나님의 심금을 울릴 수는 없다. 바울이 걸었던 길을 걸으면, 바울이 만났던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Yacob130     2016.04.06.
 

 

헌법을 모법으로 하여, 나라의 여러 법을 만듭니다. 모든 분야의 법에 <헌법정신>이 다 들어있는 것과 같은 원리이지요.

그런데, 헌법을 기초로 하여 법을 만들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헌법재판소>의 합헌 또는 위헌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십계명을 모법으로 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의 복음적인 생활을 복음서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만약, 십계명이 폐지되었다면..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부탁 말씀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만 믿고 자유분망해도 되니까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 짐승제사에 해당하는 율법과 율례만 폐지됐는데도 십계명까지 폐지됐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http://me2.do/GdEpe6Al <- 클릭하세요!!


 

hermit  


교회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부정하려는 의도로 이 글을 적는 것이 아님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구약시대가 아닌 지금의 신약시대에서 과연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십일조가 맞느냐? 연보가 맞느냐?에 대한 재조명을 하려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십일조나 헌금이라는 용어는 신약교회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먼저, 신약교회는 <십일조 헌금>이 아니라, <연보>만 있습니다. 저 역시, 30년이 넘도록 철저하게 실천하려고 했던 <십일조주의자>로 살았습니다.

 

급여 십일조, 상여금 십일조, 교육비 십일조, 출장비 십일조, 숙직비 십일조, 명절 위로금 십일조, 퇴직금 십일조, 연금 십일조, 논 십일조, 쌀 십일조(1/10의 쌀 ), 주택 십일조(시세차액), 상품권 십일조(상품권 선물), 각종이자 십일조, 적립포인트 십일조, 근무복 십일조, 식사 십일조(타인에게 대접받은 식사), 보험배당금 십일조, 행사선물 십일조(선물가 가격 환산), 결혼축의금 십일조, 장례부의금 십일조, 용돈 십일조(과거의 부모, 지금의 자녀), 분납 십일조(돈이 없을때, 십일조를 수십개월로 나누어 냄)..

딱 한가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대출 십일조 입니다. 돈을 빌렸을 때 수입으로 간주하여 내는 십일조 입니다. 모교회의 십일조 논리에 의한 것인데요.

 

돈을 빌린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고, 역수입이라는 논리로 십일조 내는 것이 맞다고 하나,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 빌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30년 이상 넘도록 배우고 가르친 개신교회의 십일조 신앙관은 이것입니다. 

 

1. 십일조를 떼 먹으면, 십일조 금액이나 그 이상의 사건 또는 손해를 반드시 당하게 된다.

2. 십일조로 구별할 때는 새지폐로 하거나, 헌지폐라도 다리미로 다리는 정성을 보인다.

3. 내가 쓰고 남은 잔돈으로는 십일조 하지 말고, 소득있으면 반드시 가장 먼저 구분한다.

4. 소득이든, 물품이든 내게 수익이라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돈으로 십일조를 구분한다.

5.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소득의 전부를 대표하는 것이 십일조이므로, 천국에 쌓인다.

 

6. 십일조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큰 죄에 해당되어 보응이 따른다.

 

7. 십일조를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으로 하거나, 속여서 하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8. 십일조 만큼은 내가 속한 교회로 반드시 드려야 하고, 이웃교회에 드리면 무효가 된다.

 

9. 십일조 가지고 어려운 사람 구제하면 안되며, 십일조외의 다른 돈으로 구제해야 한다.

10. 십일조는 비성경적이고 연보가 성경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단에게 속는 것이다. 

 

11. 십일조도 복되지만, 십의 이조나 십의 삼조 드리는 사람은 신앙좋은 그리스도인이다.

 

12. 월정헌금 낸 영혼들은 십일조가 아까운 것이고, 믿음이 반토막 난 그리스도인들이다.

 

13.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는 영혼은 천국문 입성에 매우 중대한 장애물이 될 수있다.

 

그런데, 가정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십일조를 안한지 불과 몇년 만에 제3자에 의하여 퇴직금으로 투자한 사업이 쫄딱 망하고, 억지로 떠 안은 부채와 이자..저와 상관없는 많은 채권자들의 아우성도 생겨났습니다. 이런 일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드셨을까요? 아니면, 사단이 뒤집어 엎었을까요?

 

잘못 생각하면, 전자처럼 착각할 수도 있지만 후자가 성경적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사업장이 쫄딱 망하게 된 일이 십일조를 안 낸 것과 관련이 있는가? 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말씀하고 싶으십니까?  십일조를 안하니 망한 것이다! 아주 딱 들어맞은 이야기 같습니다.

 

사단이 개신교회나 저같은 그리스도인을 농락하기 좋은 사건을 만든 다음에 "너는 내말을 들어라! 내가 뭐라고 하더냐? 십일조 안하면 망한다고 하지 않더냐? 그러니, 회개하여라." 국내외 개신교회 사역자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를 투자회사 총회장으로 만들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번에 십일조 중단과 사업장 폐업에 관련하여 기도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십일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전화위복을 통해서 반드시 증명해 주실 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는 십일조와 연보에 대한 성령님의 응답을 받은 기도의 결과를 가졌고, 개신교 여러 자료들을 앞으로 카페나 블로그에 게시하면서 증거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저희 부부가 십일조를 계속 했어도, 사업장은 틀림없이 망했다 입니다. 결정적 사유는 제3자가 13년간 무책임한 독단 부실경영을 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다른 문제 때문으로 봐야 합니다. 카페나 블로그에서 이단-사이비 자료가 아닌, 개신교회의 <십일조와 연보>에 대한 자료들을 보시면, 손사래를 치지 마시고 기도하면서 자세히 정독하실 것을 권유합니다. 모르면 약도 없고, 무식하면 용감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구분하는 정성은 대단한 것이고 교회 공동체 앞에 내어 놓는 행위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소득의 10%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헌금 명목으로는 하지 마시고, 각자 형편과 감사로 본인이 정한 월정 연보 또는 주의날 연보만 하면 교회공동체의 최소한 운영에는 무난할 것입니다. 가정경제 형편이 어려운 경우에는 떳떳하게 안하면 되고..반대로, 부자는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자료]

 

1. 십일조와 바리새인과 현대교회: http://me2.do/5zAyx6ps

 

2. 십일조와 성경에도 없는 뜻모를 헌금: http://me2.do/5GeR601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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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누가 소개

조누가 (본명 조성기)
1951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장로회 신학대학원 졸업.
1971년 단편소설 <만화경>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1985년 <라하트하헤렙>(민음사)으로 제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1986년 장편 <야훼의 밤>(전4권, 고려원)으로 기독교 문화상 수상.
1987년 장편 <가시둥지>(민음사), 장편 <슬픈 듯이 조금 빠르게>(문학사상사) 출간.
1988년 장편 <베데스다>(고려원) 출간.
1991년 중편 <우리시대의 소설가>로 제15회 이상문학상 수상.
장편 <우리 시대의 사랑>(세계사) 출간
1992년 창작집 <통도사 가는 길>(민음사) 출간.
그동안 출간된 종교적인 장편들을 연작 형태로 모아 <에덴의 불칼>(전7권, 민음사) 출간.
1993년 장편 <욕망의 오감도>(전5권, 세계사) 출간.
1995년 창작집 <우리는 완전히 만나지 않았다>(세계사)출간.
1998년 창작집 <실직자 욥의 묵시록>
소설시 <내 영혼의 백야>(민음사) 출간.
1999년 현재, 산울교회 담임

 

출처: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조 누가   2012.11.21 14:35

서성필  조회 수:3716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모든' 소득의 십일조로 인한 웃지 못할 사례들

 

성경 어디에도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은 없다.

 

민수기 31:25-47을 보면 어떤 소득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500분의 1을 요구하시고 어떤 소득에 대해서는 50분의 1을 요구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곱이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렇게 서원을 한 것이다. 그런 조건부 십일조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는 본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 근거로 삼을 만한 구절이 히스기야 왕의 종교 개혁을 언급한 역대하 31장에 나오고 있으나, 문맥을 살펴보면 그 구절의 '모든 것' '모든 소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려고,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에게 명령을 내려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몫을 가져 오게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리니, 유다에 와서 사는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각종 농산물의 첫 수확을 넉넉히 가져 왔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 왔다. (역대하 31:4,5)

 

여기서 뒤에 나오는 '모든 것'은 앞에 열거되어 있는 여러 품목들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특히 십일조의 대상이 되는 모든 품목들이라는 의미이다. 십일조의 대상 품목들은 토지 소산과 관련해서는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주로 곡식과 포도주, 기름 들이다.

 

그리고,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히브리 문장 구조를 살펴보면 31:5 하반절에서 '처음 것'에 해당하는 '레아시트'라는 단어가 맨 앞에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곡식, 포도주, 기름, , 밭의 모든 소산들이 다 '처음 것'에 걸린다는 말이다. 즉 곡식의 처음 것, 포도주의 처음 것, 기름의 처음 것, 무엇무엇의 처음 것 등으로 풀어서 쓸 수 있는 문장인 셈이다.

 

이스라엘은 토지 소산의 처음 것, 혹은 첫 열매를 먼저 제사장의 몫으로 하나님께 바치고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의 10 1을 십일조로 바쳤다. 이런 '처음 것'들은 토지 소산의 60분의 1 정도였다. 십일조는 정확하게 말해 60분의 59 곱하기 10분의 1, 그러니까 토지 소산의 600분의 59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하지만 원래 십일조라는 것이 소산물의 특성상 정확하게 분량을 잴 수는 없고 10분의 1 안팎으로 계산하면 되었다.

 

첫 열매를 먼저 떼고 그 다음 십일조를 계산하는 이스라엘의 풍습은, 다른 어떤 것보다 십일조부터 떼어 놓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한국 교회의 권면과 비교가 된다.

 

또한 '모든 것'의 십일조가 돈(화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더미'로 쌓아두었다는 역대하 31:6 이하의 말씀을 볼 때 더욱 확실해진다. 그 모든 것은 '양식(음식)'이었기 때문에 더미로 쌓는 데 몇 달이 걸렸던 것이다(역대하 31:7).

 

재미있는 것은 이 본문을 해설해놓은 《컬러 큰 성경》(성서간행사) 699쪽에 보면 '십일조에 관한 말씀들' 항목에 십일조의 원칙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 여섯 번째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쳐야 함'이라는 원칙이 나와 있다. 그 원칙에 대한 참조 성경 구절로 레위기 27:30-33을 들고 있다. 이 성경 구절은 세 번째 원칙인 '소산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임'의 참조 구절로도 소개되고 있다.

 

레위기 27:30-33은 토지 소산과 가축의 10 1을 십일조로 바치라고 하였지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한 구절이 아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가축의 십일조는 언급되지 않고 토지 소산의 십일조만 언급되고 있다.

 

농경 목축 사회에서 토지 소산과 가축이 '모든' 소득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이미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고 다른 일거리나 매매 행위 등을 통해 여러 형태의 소득들이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왕정시대로 넘어갈수록 다른 종류의 소득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성전세나 헌금, 다른 세금들은 돈으로 냈으나 십일조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돈으로 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양식의 형태로 성전 곳간에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가나안 땅에서 토지 분배가 있은 연후의 토지 소산과 가축의 개념은 소득이나 부의 축적 수단이라기보다 양식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레위인, 또는 가난한 자들과 양식을 나눠 먹는 구제의 정신 가운데서 행해졌다. 한 가족이 1년 동안 먹는 양식의 10 1을 내어놓아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양식의 10 1은 될지언정, '모든' 소득의 10 1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말라기와 느헤미야 시대까지는 십일조가 토지 소산의 10 1로 양식에 국한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러다가,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더 많은 성전 수입을 위해 제사장들과 함께 십일조의 대상을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토지 소산 이외에 박하, 회향 같은 특수 작물들도 십일조의 대상이 되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십일조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화폐 소득을 십일조에 포함시키고부터였다. 화폐 소득을 포함시키자 자연히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으로 확장되었다.

 

화폐와 박하와 및 향료의 십일조는 탈무드의 랍비들이 주문하는 내용이었으나 이는 성경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성서 대백과》 제4, p.752, 기독지혜사)

 

중세 교회에서도 4세기 무렵 십일조를 채택하고 나서 근 1000년 가까이 지난 13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거의 독점 체제에 가까웠던 중세 교회가 왜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장시키는 데 1000년이나 걸렸을까. 그것은 중세 교회에서도 전통적인 십일조의 대상은 '모든' 소득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화폐 소득을 중심한 '모든' 소득이 십일조의 대상이 됨으로써 십일조가 변질되고, 그것이 전통적인 십일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십일조가 나눔의 양식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의 치부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윌리엄 버클리 박사가 쓴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참조해 보면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이 얼마나 치부하였는가를 잘 알 수 있다.

 

팔레스틴의 일반 노동자가 한 주일에 한 번이라도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라지도 않던 행운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 제사장들은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데서 오는 직업병 때문에 고생을 했다. ……

 

제사장의 특권과 급료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제사장들은 일곱 가지 종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 23:19). 그것은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꿀이었다. 이 제물은 본래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바쳤던 것을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다.

 

제사장들은 개인적으로 돕는 사람들이 농산물의 가장 좋은 것을 성전에 바치는 제물로 가져왔다( 18:12). 수확의 50분의 1이 제사장에게 분배된 평균량이었다. 여기에 십일조가 더 첨가되었다( 18:20-22). 음식으로 쓰이는 모든 것의 10분의 1이었다.

 

이것은 레위 지파의 생계를 위해서 정해진 것인데 제사장들은 자기들이 받을 분량을 받았다. 거기다가 할라(challah)라는 과자, 또는 빵 반죽의 제물이 있었다. 어떤 빵을 굽든지 제사장들은 그 빵의 24분의 1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제사장들은 비교적 빈곤한 편에 속하는 나라에서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희생으로 전례 없는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같은 책, p.230-231)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주장하였고, 13세기 무렵에 중세 교회가 채택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현재 한국 교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엄밀히 말해 전통적인 십일조는 우리가 먹는 양식의 10 1 정도만 내면 되는 것으로, 굳이 돈으로 계산한다면 1년 식비의 10 1 정도 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고 한 그 말 속에 십일조 정신이 녹아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 교회 교인들은 십일조와 관련하여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1년 식비의 10 1 정도가 아니라 그 수십 배를 각종 명목의 헌금으로 내는 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십일조의 몇 배, 아니 수십 배를 이미 하고 있으니 십일조를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따위의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 걱정을 하기 보다, 정말 내가 도와야 할 이웃을 외면하고 방관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과 회개를 먼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식비는커녕 생활비의 10 1을 십일조로 내겠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듯이 야단이다. 무조건 돈으로 들어오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전혀 성경의 뒷받침을 받을 수 없는 억지인 셈이다.

 

다시 말하건대, 십일조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나눔의 양식이다. 양식이라는 차원을 벗어나면 그 순간 십일조 정신이 흐려지고 만다.

 

한국 교회에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계산하느라고 얼마나 웃지 못할 사례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월급을 받으면 세금을 공제하기 전 명목상의 임금으로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세금을 공제하고 난 후에 실제 수입으로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은 십일조와 관련하여 가장 기초적인 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금 이외에 다른 것들도 공제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빚 문제까지 겹친다면 혼돈은 더욱 심해진다.

 

목회자 모임에서 빚을 먼저 갚아야 하는가, 십일조를 먼저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갑론을박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목회자들은 빚을 먼저 갚는 것이 이웃을 위하는 일이므로 십일조 내는 것보다 빚을 먼저 갚는 것이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얼마 후에 교단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목회자들은 자기들이 의논하고 토의하여 내렸던 결론을 철회해야만 하였다. 빚을 갚고 나면 소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십일조를 하라는 것인지, 빚을 끝까지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지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월급을 타서 십일조를 하고 나머지 돈을 쪼개어 정기적금에 들었는데 적금 만료가 되어 목돈을 가지게 되었다. 이럴 때 이미 십일조를 뗀 돈으로 적금을 들었는데도 새로 목돈이 생겼다고 거기에 대한 십일조를 또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나오자, 옆의 교우가 원금에서는 십일조를 안 해도 되고 이자에 한해서만 십일조를 하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왜냐하면 이자는 새로 생긴 소득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각종 소득을 일일이 점검해보아야 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어쩌면 수학 계산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십일조를 제대로 하기가 힘들 것이다.

 

켄덜 목사는 '주의 깊은' 사람이면 충분히 십일조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런 이자 액수에까지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이미 십일조를 떼고 국민연금을 내고 나서 노후에 연금을 타게 될 때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어떤 교수가 특강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먼 지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가는 동안에 밥도 사 먹고 커피도 마시고 간식도 사 먹었다. 구두 밑창이 떨어져 구둣방에 가서 수리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강의를 하러 가기 위해 치러진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강의를 마치고 강의료 50만원을 받았다. , 이제 강의료에 대한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단 비행기 삯을 강의료에서 빼는 것은 기본일 것이다.

 

그 다음 들어간 경비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어쩌면 그 모든 비용들이 50만원을 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 50만원에 대한 십일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가 이미 십일조를 뗀 돈에서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었다. 아이들도 그 용돈에서 십일조를 떼어야 하는가? 물론 떼어야 한다는 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돈이 돌아다니는 곳이면 십일조를 계속 떼어야 하는 길고 긴 순환 고리가 이어질 것이다.

 

가령, 111만 원을 벌게 된 아버지가 십일조 11만 원을 떼고 나머지 100만 원을 아들 10명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자. 아들 10명은 각각 십일조 만 원씩을 떼게 되어 도합 10만 원의 십일조를 떼는 셈이 된다.

 

그리고, 아들 10명이 각각 나머지 9만 원을 또 자기 아들 9명에게 만 원씩 나누어주었다고 하자. 아들의 아들들은 각각 십일조 1,000원을 떼게 되어 한 가정당 9,000원씩 도합 9만 원의 십일조를 떼게 된다.

 

손자대 까지 내려오는 동안 원래 111만 원이었던 수입에 대한 십일조가 벌써 30만 원이 되는 셈이다. 그런 일이 용돈이 오가는 추석 명절 같은 날 방안에서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돈이 돌다 보면 십일조로만 나가는 금액이 50만 원, 60만 원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만 원짜리 한 장이 물건을 산다든지 하여 소비되거나 축이 나지 않고 용돈처럼 1,000명의 사람들을 거쳤다고 하자. 만 원짜리 한 장이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십일조로 거둔 돈이 자그마치 100만 원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만 명이 모인 자리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가지고 이런 수법을 쓴다면(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만약에 말이다) 순식간에 1,000만 원의 십일조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만 원에 대한 십일조는 그 만 원에서가 아니라 다른 돈으로 낸다는 조건하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런 노동도 없는 가운데 만 원짜리 한 장이 돌아다니기만 해도 이렇게 엄청난 십일조가 거두어지니 이보다 더 기이한 산술(算術)이 어디 있는가!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먹어 치울 수 있는 양식의 십일조를 요구하셨는지도 모른다.

 

어느 미션 계통의 대학에서 교수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미리 십일조를 떼고 지급했다. 교수들이 항의를 하자 학교 당국에서 대답하기를, 교수들은 교내에 있는 대학 교회 소속으로 볼 수 있으므로 대학 교회에 내야 하는 십일조를 미리 떼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물론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학교 재정난 때문에 그런 편법을 썼음에 틀림없다. 이런 편법이 가능한 것이 바로 '모든' 소득에 대한 십일조의 허점이기도 하다.

 

자유 직업가로서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어느 성도가 오랜만에 1,000만 원의 수입이 생겨 100만 원의 십일조를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달부터 수입이 일체 없는 기간이 반년이나 이어졌다.

 

그 성도는 십일조 헌금자 명단이 적힌 주보를 볼 적마다 교회의 목사나 다른 신자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염려가 되었다. 한 달에 100만 원의 십일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십일조 액수가 많으니까 떼어먹고 있지 않나 하고 오해를 할 것 같아서였다.

 

전통적인 십일조는 1년에 한 번 하면 되는 것인데 '모든' 소득의 십일조는 대개 달마다 하는 것으로 관례화되어 있다. 달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참여할 수 없는 특수직 종사자들은 소외감을 느낄 만도 하다.

 

남편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데 전업 주부인 아내가 남편의 월급에서 십일조를 떼어 자기 이름으로 헌금을 하면서 남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화가 나서 교회를 찾아가 자기 월급에서 바쳐진 십일조를 돌려달라고 하였다.

 

아내의 소득에서 십일조가 나간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아내는 남의 소득을 가지고 자기 소득인 것처럼 꾸며 거짓으로 십일조를 했다는 말이었다. 구약 시대로 따지면 남의 밭 소산을 가지고 십일조를 바친 꼴이었다. 전업 주부로서의 노동의 대가를 감안하더라도 남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때 교회에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고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되겠는가? 한번 바쳐진 것은 절대 돌려줄 수 없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일종의 행정 착오와 같으므로 일정 분량은 돌려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중고 컴퓨터를 팔아 돈을 보태어 최신식 컴퓨터를 구입하려고 하는데 중고 컴퓨터를 팔아서 생긴 돈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중고 컴퓨터를 파는 목적은 그 돈으로 소득을 삼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최신식 컴퓨터 구입 자금으로 투입하려고 그러는 것인데 잠시 머물렀다 가는 그 돈에까지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돈이 머물러 있는 기간이 길면 십일조를 해야 하고, 머물러 있는 기간이 짧으면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작은 집을 팔아 큰 집으로 옮기려고 할 때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물론 국가에서는 거래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양도 소득세도 물리고 취득세도 물린다.

 

2억 정도의 돈을 굴려 집을 옮기는 과정에서 나라에 바친 세금만 3,000만 원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십일조도 나라의 세금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모든' 소득의 십일조가 봉착하고 있는 딜레마이다.

 

나라 세법에 정통한 세무 공무원이 있는 것처럼 교회마다 십일조 내는 법에 정통한 신자들이 있다. 십일조와 관련된 갖가지 경우를 쾌도난마식으로 척척 잘 해결한다. 하지만 그러한 해결책은 믿음의 차원과는 상관없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런 신자들이나 교회가 제시하는 해결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율법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점들은 전통적인 십일조와는 달리 '모든' 소득에 대하여 십일조를 부과하려는 지나친 종교적인 열심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모세 오경에서 규정하고 있는 십일조보다 한국 교회의 십일조가 더 율법적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가치 있는 고귀한 일들을 만나게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 신장을 하나 떼어내어 생면부지의 환자에게 이식하도록 했다고 하자. 그 신장 값을 얼마나 매겨야 할 것인가?

 

이때에도 십일조의 원칙을 적용하려고 할 것인가. 좋다. 정 그렇다면 여기에 십일조의 원칙을 한번 적용해보자.우선 신장 값을 2억 원 정도로 잡기로 하자. 신장을 값없이 기증한 사람은 2억 원을 그냥 내어준 셈이 된다.

 

그 사람이 신자라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는 마태복음 25:40에 입각하여 그 2억 원을 예수님에게 바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20억 원에 대한 십일조라 할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을 바친 것이다.이 사람이 일생 동안 벌어도 20억 원을 벌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평생 벌 수 있는 돈의 십일조를 이미 넘치게 바친 셈이 된다.

 

이런 사람에게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강요할 수 있겠는가?기증을 받은 사람의 입장은 어떠한가? 2억 원에 해당하는 신장을 기증받았으니 그 십일조인 2,000만 원을 교회에 바쳐야 할 것인가? 아무리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라 하더라도 이런 사람에게까지 십일조를 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고귀한 가치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소득의 십일조라는 것은 이런 가치들 앞에서는 빛을 바래게 된다. 다시 말해 십일조로 따질 수 없는, 십일조를 훨씬 초월한 차원이 있다는 말이다.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원래 소제목을 '십일조 시대는 지났다'로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는 십일조 시대가 지났다느니 아직 계속되고 있다느니 하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와 같이 유대인이 아닌 소위 이방인들에게는 할례 시대가 지났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듯이 십일조도 그러하다.

 

초대 교회에서도 할례나 십일조가 문제되었던 사람들은 유대인으로 있다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이스라엘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할례를 받고 십일조를 내야만 하였다. 그것은 이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기보다 국민으로서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할례는 일종의 출생 신고와 같은 것이었으며 십일조는 종교세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죄를 속하는 성전 제사 행위는 할 필요가 없었고 또 하지 않았다. 성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무효화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거부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은 스데반과 야고보를 비롯하여 순교당하는 자들이 속출하였고 유대 당국의 핍박을 받아 흩어져야만 하였다.

 

A.D. 70년에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지 않았다면 성전 제사를 거부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가 되어 각지에서 예수를 전하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아직 유대교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하면서도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대인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발상인지도 모른다.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바울 서신 곳곳에 그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 율법과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정립하는 회의가 예루살렘에서 열렸을 때, 특히 바리새인으로 있다가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이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이방인)들도 할례를 받도록 하고 모세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도행전 15:5)

 

그 회의에서 많은 변론과 논쟁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 많은 변론과 논쟁 중에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들도 분명히 오고갔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누구인가. 철저한 십일조주의자들이 아닌가. 그런 바리새인으로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십일조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까지 권유하고 있는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겠는가.

 

많은 논란이 있은 연후에 드디어 베드로가 일어나 입을 열었다.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의 목에 두려느냐. (사도행전 15:10)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들'의 목록 중에 십일조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모든 논의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으로서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사도행전 15:20)

 

이 예루살렘 회의와 관련하여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탈무드 시대의 유대인은 비유대 민족과도 곧잘 어울려서 함께 일을 하고 생활을 같이했다. 유대인에게는 천사가 지키라고 일러준 613가지 계율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는 비유대인을 굳이 유대화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선교사를 보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상호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비유대인에게 그 중에서 꼭 지켜야 할 다음과 같은 계율 일곱 가지만을 주었다.

       

산짐승을 잡아 그 자리에서 날고기로 먹지 말라

② 남을 욕하지 말라

③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④ 법을 어기지 말라

⑤ 살인하지 말라

⑥ 근친상간하지 말라

⑦ 불륜을 저지르지 말라

(《탈무드》, p. 113, 마빈 토케이어, 우상호 옮김, 두풍)

 

탈무드에서 비유대 민족에게 준 일곱 가지 계율과,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한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을 위한 네 가지 권면 사항이 비슷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렇게 탈무드에서조차 비유대 민족을 율법과 계율에 묶어두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초대 교회 예루살렘 회의에서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할례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십일조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지 몰라도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원래부터 할례니 십일조니 하는 모세 율법의 규정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을 지키다가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아니다. 모세 율법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다시 모세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유대교인으로 만들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 회의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던 것이다.

 

우리가 저희(비유대계 그리스도인)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사도행전 15:11)

 

지금, 한국 교회들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십일조(그것도 전통적인 십일조가 아닌 변질된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의 할례 강요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에 넘어가고 있는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외친 적이 있다. 이 바울의 외침은 십일조와 관련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라디아서 5:1-6)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는 말씀은 '십일조나 무십일조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는 구절로 고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쯤되면, 십일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십일조와 할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지키는 십일조는 유대인들이 율법적으로 지키던 그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율적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할례에 대하여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물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한 자들도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몸의 일부를 조금 자르라는 것인데, 그것도 못하겠다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배은망덕이 아니냐.'

 

하지만, 바울의 입장은 단호하다. 율법과 유대교의 잔재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조금도 끼여들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런 잔재들이 결국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흐리게 하고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 교회 형편도 그러하다. 십일조 문제로 인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고민들을 하고 있고, 십자가 복음의 은혜로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고 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다. 이제 예수를 믿은 우리는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친자의 관계로 들어선 것이다.

 

여기에 관한 말씀으로는 갈라디아서 4:1-7보다 더 나은 말씀이 없을 것이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4:1-7)

 

십일조를 내면 축복을 해주는 그런 계약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 나의 것이요 나의 것이 아버지의 것인 놀라운 친자 관계로 들어섰다는 말이다.

 

계약 관계에 있을 때는 계약 상대방의 수입이 얼마고 그 수입의 십일조를 나에게 바치나 안 바치나 따지고 그러겠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로 말미암아 친자 관계로 들어선 마당에는 그런 차원을 뛰어넘게 된다.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얼마나 벌어오나 일일이 따지고 그 수입의 10 1이 얼마나 되는지 전자 계산기를 들고 꼼꼼이 계산하고 있겠는가.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전자 계산기를 들고 우리의 십일조를 계산하시면서 십일조를 바치나 안 바치나 눈을 부릅뜨고 계시겠는가?

 

절대 그럴 리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마태복음 17:26)

 

또한, 로마서 8:21에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놀라운 자유인지 '영광의 자유'라고 표현하였다. 한국 교회가 그 동안 십일조의 멍에를 신자들에게 씌움으로써 얼마나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훼손해왔는가.

 

처음에는 좋은 의미로 출발했던 십일조라 하더라도 이제 그것이 교회 운영을 위한 편리한 헌금의 방편 정도로 전락하고 율법화되고 있다면 유대교의 잔재를 없애는 의미에서도 십일조라는 용어를 교회에서 사라지게 해야 할 것이다. 얼마든지 다른 이름으로 대체할 수도 있는 십일조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십일조가 어떻게 쓰여져야 한다는 규정들은 시효가 지난 옛 언약으로 여기고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규정들만 아직도 시효가 지나지 않은 것처럼 내세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십일조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십일조가 십일조 정신에 따라 쓰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유대교의 십일조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우리하고는 원래부터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히 궤도 수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도 아니요 유대교도 아닌 이상한 방향으로 흐러가면서, '에클레시아(교회 또는 회당)'가 아니라 사이비 '히에론(성전)'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지금도 유대교인들은 모세 율법에 따라 철저히 십일조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십일조를 바칠 성전이 무너졌기 때문에 십일조를 아예 공동체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한다. 유대교인들은 십일조를 바칠 곳이 없게 되는 바람에 오히려 십일조를 십일조 정신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셈이다.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회당 정도에 불과한 각 지역의 개교회(個敎會)들이 도리어 성전 노릇을 하며 십일조를 모아 십일조 정신과는 상관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고 유대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말라기 3:8 말씀을 상기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십일조가 폐지된 또 다른 신약의 증거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십일조를 비롯한 율법의 멍에들을 지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도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신약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살펴보기로 한다.

 

요한복음 2:19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을 가리키면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따지고 들었다.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사도 요한은 이 사건에 대해 해설을 달아놓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 “(요한복음 2:21-22)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에는 성전 제사가 폐하여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단 한번 완전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더 이상 성전 제사가 필요 없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복음 4장에서도 그림심산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인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인지 의문이 많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요한복음 4:21-23)

 

이 말씀도 얼마 있지 아니하여 성전 제사가 폐하여지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새로운 예배가 이루어질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바로 이러한 진리를 밝히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성전 제사 폐지에 관한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한 표현은 히브리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브리서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편지로서 전체 주제가 성전 제사 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장막 제의를 따라서 예물과 제사를 드리지만, 그것이 의식 집례자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이런 것은 다만,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예식과 관련된 것이고, 개혁의 때까지 육체를 위하여 부과된 규칙들입니다.” (히브리서 9:9-10)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율법을 따라 바칩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8-9)

 

예물과 제사가 '개혁할 때까지'만 시행되어 오다가 이제 폐하여졌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제사만 폐하여졌다고 하지 않고 '제사와 예물'이 함께 폐하여졌다고 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전에서 짐승을 잡아 피흘려 드리는 제사가 폐하여진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예물까지 폐하여진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 주목을 하지 않는 편이다. 예물은 다시 말해 성전 제사와 관련하여 드리는 갖가지 헌물들이다. 각 경우에 따라 드려야 하는 예물의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우선 죄를 속하는 제사와 관련된 갖가지 예물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소와 양을 비롯한 짐승들이 있다. 이런 짐승들을 가져올 만한 경제력이 없으면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들을 가지고 와도 좋다고 하였다.

 

또한 소제의 예물이라 하여 죄를 속하는 제사와 직접 관계가 없는 예물들도 있었다. 고운 기름과 고운 가루, 유황 들이 그것이었다. 단 위에 불살라서 향기로운 냄새가 피어나도록 하였다.

 

성전에서는 짐승을 잡으므로 피 냄새와 오장육부의 비린내가 진동하게 마련이다. 이런 역겨운 냄새를 중화시키기 위해서도 소제의 예물과 같은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예물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제의 예물도 죄를 속하는 제사와 직접 연관은 없다 하더라도 그 제사를 간접적으로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외 다른 예물들도 직간접적으로 죄를 속하는 제사와 관련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물의 종류와 죄를 속하는 제사와 관련이 있는 것과 관련이 없는 것 등으로 구분하여, 히브리서의 예물은 죄를 속하는 제사와 관련이 있는 것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인 셈이다.

 

그럼 십일조가 성전 예물에 포함되는 것인가? 십일조가 성전 예물에 포함되는 것이라면 십일조가 이제는 제사와 함께 폐하여진 것이 분명하다.

 

예물을 드리는 방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요제물과 거제물이 그것이다. 요제물은 흔들어서 드리는 것이요, 거제물은 두 손으로 들어올려 드리는 것이다. 어떤 것을 요제물로 드리고 어떤 것을 거제물로 드려야 하는지 율법에 세세하게 규정해놓고 있다.십일조는 거제물에 속하는 예물이었음을 다음 말씀들을 통하여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나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 곧 열의 하나를 그들의 유산으로 준다”(민수기 18:24)

 

너희는 열의 하나 받은 것에서 열째 몫을, 주께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로 드려라..” (민수기 18:26)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떼어, 주께 들어 올려 바치는 제물로 드리고, 주께 드린 그 제물은 제사장 아론의 몫으로 돌려라.” (민수기 18:28)

 

그리고 십일조는 항상 여러 예물들과 함께 열거되는 경우가 많다. 죄를 속하는 제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예물들과도 나란히 열거되어 있다.

 

너희는, 번제물과 화목제물과 십일조와 높이 들어 바치는 곡식제물과 서원제물과 자원제물과 소나 양의 처음 난 것을, 그 곳으로 가져다가 바쳐야 한다. “(신명기 12:6)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 곧 번제물과 화목제물과 십일조와 높이 들어 바치는 곡식제물과 주께 바치기로 서원한 모든 서원제물을, 주 너희의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고 선택하신 그 곳으로 가지고 가서 바쳐야 한다.” (신명기 12:11)

 

너희가 십일조로 바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과 서원하고 드린 갖가지 서원제물과 자원제물과 높이 들어 바치는 곡식제물은, 성 안에서는 먹을 수 없다 “(신명기 12:17)

 

이 모든 것은 십일조가 분명히 성전 예물들 중 하나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십일조는 죄를 속하는 제사와도 분명히 관련이 있는 예물이었다.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돕는 십일조 예물이 어찌하여 죄를 속하는 제사와 관련이 없다는 것인가.

 

죄를 속하는 제사가 폐하여졌으면 그 제사를 돕는 예물들도 폐하여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제사와 예물이 폐지된 지금 십일조만이 살아 남아 있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다만 십일조 정신을 따라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목회에 힘쓰는 분들을 지원하기 위해 힘을 모아 연보를 하면 되는 것이다.

 

구태여, 성경에서 폐지되었다고 하는 십일조를 끌어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국 교회가 십일조를 고집하는 지경으로 떨어졌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런 규정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감이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신자들의 자율성을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사고 방식이 확산되어 건축 헌금 같은 것을 할 때도 신자들의 자율적인 믿음에 맡기기보다 반강제로 정기적금에 들게 하거나 미리 은행 대출을 받아 달마다 갚아 나가라는 식으로 몰아붙인다.

 

또한, 권사나 장로로 세움을 받을 때도 수백만 원씩 수천만 원씩 액수를 정하여 헌금을 하도록 한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로까지 불리는 신자들에게 그런 강요는 치욕적인 것이다. 신자들이 얼마나 자율적인 존재이어야 하는지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러분으로 말하면, 그가 기름부어 주신 것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으니, 여러분은 아무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기름부어 주신 것이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참이요, 거짓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요한12:27)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신자들이 이만큼 자율적인 믿음의 소유자로 성숙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같다. 언제까지나 말 잘 듣는 초등학생 정도로 머물러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이상한 형태의 헌금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이 십일조 발상에서 비롯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발상의 싹을 애초부터 자르기 위해서도 십일조라는 이름을 교회에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

 

또한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성경에 십일조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야말로 십일조라는 말이 신약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십일조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10 1을 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설명하기 위해 잠시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 많은 바울 서신에서도 십일조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믿음장으로 유명한 히브리서 11장에서도 그 많은 믿음들 중에 십일조를 드린 믿음은 언급되지 않는다. 일곱 교회를 격려하고 꾸짖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도 십일조를 내지 않았다고 꾸지람을 받은 교회가 없고 십일조 생활을 잘 했다고 칭찬받은 교회가 없다.

 

요즈음, 한국 교회 설교 분위기로는 그 일곱 교회 책망 부분에서 십일조를 도적질했다는 책망이 나올 법도 한데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는 십일조라는 말이 지상에서 깨끗이 사라져버린 이 현상이 이상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신약에 언급될 필요조차 없었다고 억지를 부린다. 그러면서 성경에 십일조를 내지 말라고 씌어 있는 구절이 있으면 대보라고 큰소리를 친다.

 

십일조를 내는 것이 그렇게 엄청난 축복을 받는 비결이라면 신앙 생활의 지침에 대하여 구석구석까지 세세하게 밝히고 있는 바울이 왜 십일조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가?

 

십일조를 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신약에 언급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십일조가 폐지된 것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신약에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고 보는 편이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성전이 아직 건재하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을 섬기고 있는 그 시대에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 수단인 십일조를 초대 교회가 빼앗아왔을 리가 있겠는가. 그것이 신약에 십일조라는 말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십일조 논의를 할 때는 모든 신약이 성전이 파괴되기 전, A.D. 70년 이전에 씌어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바울이 스스로 천막을 치며 생활비를 벌어가면서 복음을 전한 것을 볼 때 바울이 개척한 그 수많은 초대 교회들은 십일조를 거두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내가 받을 삯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9:18)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9)

 

우리는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은 일이 없고, 도리어 여러분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8)

 

그리고 흉년이 들어 형편이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을 돕기 위해 여러 교회로부터 연보를 거둘 때도 바울이 십일조 개념을 끌어들였으면 그렇게 간곡한 말로 연보에 대하여 길고 긴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더욱 효과적으로 헌금을 모았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8:19:15 참조)

 

십일조 정신에도 합치되고 얼마든지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거둘 수도 있는 그 구제 연보를 바울은 십일조 제도에 의지하지 않고 신자들의 자율적인 믿음에 의지하여 모은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신 성도들의 목에 종의 멍에를 메우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이다. (갈라디아서 5:1)

 

그런데 《십일조》의 저자 켄덜 목사는 초대 교회 때도 성도들이 십일조를 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성경 말씀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다.

 

고린도전서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헌금)를 하지 않게 하라' 중에서 '이를 얻은 대로'라는 구절로써 바울이 의미하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 그의 독자들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역시 추측된다. '이를 얻은 대로'라는 구절은 실제로 십일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어도 십일조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같은 책, p.36)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두어'(고전 16:2)야 한다고 한 것은 십일조가 새 언약에 의하여 폐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 p.77)

 

과연 그러한가? '이를 얻은 대로'가 십일조를 내라는 말이었겠는가?

 

켄덜 목사는 바울 서신을 받는 독자들이 '이를 얻는 대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 바울 서신을 받는 독자들이 누군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고린도의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몰라도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암호'를 십일조라고 풀었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앞서도 말했지만, 성전이 건재하고 있는 그 당시에 바울이 십일조 운운하며 레위인들의 십일조 양식을 빼앗아올 리가 없고, 특히 고린도의 이방인 신도들에게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ㅇ르 따라 십일조의 멍에를 지워서는 안되기 때문에 십일조를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리고 바울은 비록 바리새인이긴 하였지만 전통적인 십일조가 돈과는 관련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돈으로 연보를 거두어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고자 하는 마당에 토지 소산을 의미하는 십일조를 들먹거렸을 리 없다.

 

또한 '모든' 소득을 대상으로 하는 변질된 십일조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했을 가능성은 더더구나 없다. 그러면 '이를 얻는 대로'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고린도후서 8:11-12에 나오는 '있는 대로'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이다.

 

십일조를 말한 것이라면 바울이 고린도후서 8:7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연보라는 말이 헬라어로 다양하게 쓰인 사실을 근거로 내세우며 연보에 십일조가 포함되어 있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연보와 관련된 헬라어들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미국의 어느 목사는 십일조를 강조하는 책에서 히브리서 7장을 해석하면서 참으로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였다.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10분의 1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으니라. (히브리서 7:8)

 

그는 '여기'라는 말을 헬라어까지 동원하여 해석하면서 히브리서를 쓴 저자가 다니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였다. '여기' 교회에서 죽을 자들이 10분의 1을 받는다고 했으니 초대 교회 때도 십일조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7장은 레위인의 제사장직과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비교하고 있는 부분으로 초등학생 정도의 언어 능력만 있다 해도 '여기'는 레위인을, '저기'는 멜기세덱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지각이 있는 목사가 이런 식으로까지 성경을 해석하면서 십일조를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십일조 광신자라는 혐의를 두지 않을 수 없다. 광신자가 아닌 다음에야 너무도 분명한 성경 구절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십일조주의자들이 바울 서신이나 히브리서에서 아무리 십일조에 관한 근거를 찾으려고 해도 실패하고 말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왜냐하면 십일조 시대는 이미 지났고 그리스도인은 십일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연보의 원칙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헌금'이라는 단어는 단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도 구약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신약 누가복음에서만 나오고 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누가복음 21:1)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4)

 

이 두 구절에서만 헌금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헌금'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다니!

 

구약에서는 왜 헌금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있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돈으로 드리는 헌물에는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으신 것을 알 수 있다. 십일조도 그렇고 다른 예물들도 돈으로가 아니라 물품으로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가령, 죄를 속하는 희생 제물을 돈으로 대신해서 드릴 수 있다고 한다면 제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을 돈으로가 아니라 소와 양으로 드리도록 한 데는 '죄는 피로써만 씻을 수 있다'는 구속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 외 다른 뜻들도 있을 것이다.

 

십일조도 돈으로 내지 않고 토지 소산의 물품으로 내도록 한 데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본 그런 이유들 이외에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돈으로 헌금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저희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나아가 전에 하나님의 전에 연보한 돈을 저에게 붙이니 이 돈은 문을 지키는 레위 사람이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온 유다와 베냐민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서 거둔 것이라. (역대하 34:9)

 

헌금이라는 단어 대신에 연보라고 되어 있다. 그 돈을 대제사장은 여호와의 전 역사를 감독하는 자에게 주고, 그 사람은 그 돈을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성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게 하였다.

 

이 돈은 십일조와 전혀 관계가 없는 그야말로 헌금에 해당하는데, 어떤 목회자들은 이 구절을 들어 십일조가 성전 수리비로도 쓰였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십일조는 양식이기 때문에 성전 수리비 같은 것으로 쓰일 수가 없다.

 

사실, 성전의 주수입원은 역사적으로 볼 때 십일조가 아니라 성전세였다. 십일조는 창고에 얼마간 쌓아두었다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양식으로 나눠주고 나면 없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성전세는 20세 이상 된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로부터 각각 은전(銀錢) 반 세겔을 받았기 때문에 그 돈이 전국에서 모아지면 엄청난 액수가 되었다. 그 돈으로 성전 건물이 관리되고 유지되었다. 다른 헌금들보다 십일조가 한국 교회의 주수입원이 되고 있는 사실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역대하 34:14)

 

힐기야 제사장이 연보궤를 기울여 그 안에 있는 돈들을 쏟을 때에 율법책도 함께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요시야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율법책을 읽고 회개하였다.

 

이렇게 헌금과 관련된 구절이 구약에서는 역대하 34장에서 두 번 나올 뿐이다. 그 동안 헌금이 계속 들어와 성전 금고에 쌓였지만 성경이 그런 것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스라엘에서 헌금을 하는 것은 세금을 내는 것과도 같아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그리 강조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헌금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모양이다.

 

앞에서 보듯이, 역대하 34장에 헌금이라는 말 대신에 연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연보라는 단어가 열두 번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구약의 두 번하고 합하여 성경 전체에서 연보라는 말이 열네 번 나오는 셈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 성경 번역자들이 그렇게 번역을 해 놓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개역 개정판에서는 연보궤를 헌금함이라고 바꾸어놓긴 했지만 연보라는 말을 헌금으로 바꾸어놓지는 않았다.

 

여기서 '연보(捐補)'라는 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연보의 연()은 원래는 '버린다'의 뜻으로 쓰인 말인데 '주다, 바치다, 내놓다, 기부하다'라는 뜻으로 발전하였다. 하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줄 수도 있고 바칠 수도 있는 법이다. 연보의 보()는 원래는 '깁다'라는 뜻을 지닌 말인데 '고치다, 보태다, 돕다'라는 뜻으로 발전하였다.

 

연보를 원래의 단어 뜻대로 해석하면 자기 것을 버려서 해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 된다. 돈과 관련해서는 돈을 기부하여 돕는다는 뜻이 된다. 이런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성경 번역자들이 이 단어를 자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보라고 번역을 해놓은 헬라어 원어들은 각 경우에 따라 다른 단어가 쓰이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로기아'로 쓰는 경우

 

성도들을 도우려고 모으는 헌금을 두고 말합니다. 내가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지시한 것과 같이, 여러분도 그대로 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6:1)

 

매주 첫날에, 여러분은 저마다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따로 저축해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갈 때에, 그제야 헌금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6:2)

 

위 두 구절에서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는 '로기아'이다. '로기아'는 영어로 컬렉션(collection), 즉 모금이라는 뜻이다. 사실 고린도전후서의 연보는 성전이나 교회에 바치는 헌금이라기보다 흉년을 만나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라 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들이 바울이 권면을 따라 힘을 다하여 모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린도전서 16:2에 의지하여 현재 거의 모든 교회들이 매주일 첫날(주일날) 헌금 시간을 가지고 헌금을 하고 있다. 켄덜 목사 같은 십일조주의자는 '이를 얻은 대로'라는 말이 바로 십일조를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매주일 첫날에 '이를 얻은 대로'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 연보를 준비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십일조주의자들의 습관을 말씀에 투사(投射)해 넣은 억지 해석에 불과하다.

 

공동번역은 '자기 형편을 따라 얼마씩을 미리 저축해두십시오'라고 풀어서 번역해놓음으로써 십일조가 끼여들 여지를 미리 차단하고 있다.

 

그런데 개역성경이든 공동번역이든 중요한 구절을 빼놓고 번역을 하고 있다. 그것은 '파르 헤아우토'라는 헬라어 문구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자기 곁에'라는 뜻이 된다. 《뉴 킹 제임스 버전》영어성경에서는 'by himself'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영어로는 '자기 스스로, 혼자서'라는 뜻이 된다.

 

각각 자기 곁에 저축을 해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공적인 헌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준비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매주일 공적인 헌금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각 사람은 자기가 번 것 중에서 얼마를 주를 위해 사적으로 저축을 해두었다. (《주석서》제3, p.334, Eerdmans)

 

매주일 첫날 각 가정에서 가정 헌금 형식으로 연보를 모아 두었다가 바울이 올 때에 그 동안 모아진 것을 가지고 연보를 하라는 말이었다. 요즘 같으면 바울 같은 지도자가 왔을 때 큰 부흥회를 개최하여 넘치게 헌금을 거두었을 텐데, 바울은 성도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오히려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16:2이 이런 뜻일진대 매주일 교회에서 헌금 시간을 가지는 근거를 이 말씀에서 찾는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여기서 '로기아', 즉 모금은 즉흥적으로 하는 것보다 각각 준비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각각, 혹은 각 가정에서 매주일 첫날에 연보를 모아두었다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연보일을 정하여 그 동안 모아진 것을 가지고 연보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2) '하플로테스'로 쓰는 경우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2)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서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11)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또 그들과 모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도움을 보낸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9:13)

 

이상 세 구절에서 나오는 연보가 '하플로테스'이다. '하플로테스'는 영어로 '리버럴리티(liberality)'로 번역될 수 있는 말로 관용, 관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연보'를 꾸미는 말들이 '풍성한', '너그럽게', '후한' 등으로 관용과 마음을 나타내는 문구들로 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후한 연보'인 경우는 헬라어 원문에는 '후한'이라는 형용사가 없다. '하플로테스'를 성경 번역자가 '후한 연보'라고 풀어서 번역을 해놓은 것이다.

 

사실 너그러운 마음 없이 인색한 마음으로는 연보를 하기가 쉽지 않다. 이 너그러운 마음만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이웃을 위해 물질을 내어놓을 수 있는 법이다.

 

3) '하드로테스'로 쓰는 경우

 

우리가 맡아서 봉사하고 있는 이 많은 헌금을 두고,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조심합니다. (고린도후서 8:20)

 

여기서 연보는 '하드로테스'이다. '하드로테스' '풍성, 성숙'이라는 뜻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거액의'라는 형용구가 없고, '하드로테스' '거액의 연보'라고 풀어서 번역을 해놓은 것이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얼마나 풍성하게 연보를 했던지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오해를 받지 않도록 바울이 극히 조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너그러운 마음('하플로테스')으로 모금('로기아')을 하면 거액의 연보('하드로테스')가 되어 큰일에 보람되게 쓰일 수 있는 법이다.

 

4) '유로기아'로 쓰는 경우

 

그러므로 나는 그 형제들에게 권면하여, 나보다 먼저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이 전에 약속한 선물을 준비해 놓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이 선물을,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선물로 마련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5)

 

이 구절에 두 번 나오는 연보가 '유로기아'이다. 헬라어에서 ''라는 접두어는 '좋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핵심 단어인 복음, 즉 좋은 소식도 ''라는 접두어를 지니고 있다. ''에다가 소식이라는 '앙겔리온'이라는 말이 붙어 좋은 소식, 복음이라는 뜻이 된 것이다.

 

''는 영어로 넘어가서도 여전히 '좋은'이라는 뜻의 접두어로 쓰이고 있다. '유포니(euphony)'라고 하면 '듣기 좋은 소리'라는 뜻이 되고, '유제닉(eugenic)'이라고 하면 '우생학적인, 즉 우수한 성질을 이어받은'이라는 뜻이 된다. 유럽(Europe) '좋은 단결, 좋은 연합'이라는 뜻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유로기아'는 좋은 모금이라는 뜻이 된다. 본문에서는 '참 연보'라고 번역을 해놓았다.

 

바울은 믿음의 형제를 보내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전에 약속한 연보를 준비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준비를 해야 '유로기아', 즉 좋은 모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좋은 모금이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좋다고 인정하실 만한 모금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금의 액수나 모금을 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시지 않고 모금을 준비하는 그 마음 중심을 보신다. 아무리 거액의 연보가 모였다 하더라도 '유로기아'가 아니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이상에서 고린도전후서에 나오는 연보라는 단어들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다양한 의미들이 합해진 것이 연보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헌금이라는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누가복음 21:1-4에 나오는 헌금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도론'이라고 하는데, 그 말 뜻은 원래 '선물, 예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서의 돈이기 때문에 헌금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도론'을 드렸다는 말이 일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제사와 예물이 폐지된 사실을 선포하는 히브리서에서 '도론'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히브리서 9:9에서는 '도론'을 예물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히브리서 10:5, 8 등에서는 헬라어 '프로스포라'를 예물이라고 번역을 해놓았다.

 

헌금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도론'이 제사와 함께 폐지되었다고 히브리서는 증거하고 있다. 물론 히브리서의 '도론'이 헌금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헌금을 포함한 모든 예물이라는 의미인 것만은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는 십일조 예물만 폐지된 것이 아니라 헌금 예물도 폐지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값을 십자가 상에서 대신 치러주실 때 우리가 일생 동안 바쳐야 할 십일조와 헌금까지도 다 바치심으로써 십일조 예물과 헌금 예물을 폐지하셨다. 그냥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심으로 폐지하셨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돈을 일체 바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가? 구약에서도 그렇지만 신약에서는 더더구나 하나님께 돈(화폐)을 바친다는 관념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돈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예수님의 줄기찬 메시지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알고 있는가?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변화되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이웃과 나누는 공동 생활로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사도행전 2:44-45)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사도행전 4:32-35)

 

신자들이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내어놓았지만 그 어디에도 헌금이라는 개념은 찾아볼 수가 없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할 때의 '두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티데미'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단순히 '놓다, 두다, 차려놓다, 저축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헌금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기부 행위는 헌금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연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가운데 생활이 어려워 굶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하기 위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풍성하게 내어놓아 좋은 모금('유로기아')이 되게 한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으로 주시는 물질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만이 남게 되었다. 인색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바로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위로부터 성령을 부어주신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야만이 그 일이 가능한 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다. 우리가 돈을 들고 와서 바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더군다나 돈을 바치면서 그 대가로 복을 기대하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신다.

 

그런 하나님을 자꾸만 신자들에게 소개하는 자들은 기독교 무당들에 불과하고, 거룩한 하나님을 복채를 챙기는 우상신으로 전락시키는 발람의 후예들이다. 하나님께 돈을 바친다는 샤머니즘적인 관념부터 우리 머리 속에서 뽑아내야 한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태복음 25:45)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하나님 자신에게 한 것으로 여기신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 돈을 바친다는 샤머니즘적인 관념을 버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즈음 컴퓨터 통신에서 기독 청년들이 한국 교회는 이단인가 아닌가 하는 토론들을 벌이고 있다. 하나님을 물신(物神)으로 섬기고 있는 한국 교회는 매머니즘(mammonism), 즉 배금주의 혹은 물신숭배주의에 빠져 있으므로 정통 기독교가 아니라 이단이라는 것이다.

 

어쩌다가 한국 교회가, 기독 청년들이 이런 토론을 벌이는 지경까지 되었는가? 헌금 예물이 폐지되었으면 십일조 예물이 폐지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헌금과 십일조는 '연보'라는 개념으로 변역(變易) 내지는 개혁되어야 마땅하다. 아니, 이미 사도행전 2장에서 개혁되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도론')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9:9)

 

헌금 예물이 폐지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로서는 너무도 충격적이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사안이기 때문에 나중에 좀더 논의하기로 하고, 다시 십일조 문제로 돌아와보자.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 십일조 시대가 지났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은 원래부터 십일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한다면 중세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출교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많은 신학자들도 성경 연구를 통하여 십일조 시대가 지났음을 확신하면서도 교단의 눈치를 보며 양심적으로 학설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레니우스와 오리겐, 에피파니우스 같은 초대 교부들에 의해 십일조가 폐지된 것으로 결론난 지도 이미 1800여 년이나 지났는데 지금까지도 한국 교회는 그런 논의조차 기피하고 있는 형편이다.

 

보수적인 기독교 백과사전을 들쳐보아도 십일조는 폐지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들을 내리고 있는데 언제까지 한국 교회는 신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을 것인가?

 

화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누가복음 11:52)

 

목회자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헌금과 십일조에 관한 진리들을 풀어 허심탄회하게 신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연보의 패러다임(paradigm)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 교회가 헌금과 십일조라는 장애물 때문에 전도의 문이 닫혀 수많은 영혼들을 잃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연보의 패러다임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제시한 연보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일을 완성하십시오. 여러분이, 자원하여 시작할 때에 보인 그 열성에 어울리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지어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고린도후서 8:11-12)

 

그러므로 나는 그 형제들에게 권면하여, 나보다 먼저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이 전에 약속한 선물을 준비해 놓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이 선물을, 억지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선물로 마련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5)

 

각자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고린도후서 9:7)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는,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8:14-15)

 

앞의 말씀들을 기초로 연보 원칙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있는 대로 하라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라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

즐거운 뜻으로 하라

평균하게 나누는 뜻으로 하라

 

이 다섯 가지 원칙 이외에 다른 원칙이 있겠는가. 이것은 철저히 신자들의 자율적인 믿음을 존중하는 연보 원칙인 셈이다.

 

특히 '평균하게 나누는 뜻으로 하라'는 원칙은 깊이 새겨야 할 사항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많은 물질을 맡기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맡기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서로 평균하게 나누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많은 물질을 맡은 자는 그 물질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말고 나누는 일에 기꺼이 내어놓아야 한다.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하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또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디모데전서 6:17-19)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웃을 돌아보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면서 잘못 이해한 말라기 3:10 같은 말씀들을 기초로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하는 것은 이기적인 신앙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십일조 간증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이런 이기적인 동기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주실 적에는 나누어야 하는 책임도 동시에 안겨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되어 자기 중심적인 십일조 간증 같은 것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연보 원칙은 요즈음의 십일조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 십일조 이외의 헌금을 할 때는 이 자율적인 원칙을 적용시키고 십일조를 할 때는 율법적인 원칙을 적용시키는 것은 상호모순이며, 신자들을 계속해서 혼란스럽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런 바울의 원칙대로 하면 신자들이 방자해져서 제대로 연보를 하지 않을 것이므로 십일조가 폐지되었건 어찌 되었건 반드시 십일조라는 명목의 헌금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신자들을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갈라디아서 4:2) 있는 어린아이들로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의 관점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헌금을 거두어온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며,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이때껏 헌금을 내어온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목회자들은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 십일조 시대가 2000년 전에 골고다를 기점으로 이미 지났으며 그리스도인은 십일조와 아무 상관이 없음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성전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도록, 할례나 십일조의 멍에를 메지 않아도 되도록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음을 선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속죄의 제사를 다 드리셨으며, 우리 대신 예물까지도 이미 다 바치신 사실을 선포해야 한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의 사업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더욱 기꺼이 연보를 하게 될 것이다. 새삼 초대 교회 이레니우스 교부의 권면이 생각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자들로서 이제 주님을 위하여 (십일조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유를 구별하여 떼어놓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분량을 기쁜 마음으로 자유롭게 연보로 드립니다.

 

예수의 피로 사신 바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일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소식은 십일조 노이로제에 걸린 이 땅의 수많은 신자들을 자유케 하고 멍에를 꺾는 그야말로 '복음'이 될 것이다. 그러면 신자들은 수십 년 동안 무의식 속에 쌓였던 십일조에 대한 죄의식(도둑 의식)을 떨쳐버리고 생기에 넘쳐 헌신에 헌신을 더할 것이다.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으면 두려움의 영에 눌려 지낼 것이라고 한 켄덜 목사 같은 십일조주의자들의 말이 얼마나 거짓말인가 하는 것을 산 체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선포는 예수를 믿고는 싶으나 교회 나가면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소식이 될 것이다.

 

한국 교회는 더 넘치는 영적 물질적 축복 속에서 활짝 열린 전도의 문을 통하여 수많은 젊은이와 불신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임금님께서 거룩한 산에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시는 날에, 임금님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고, 아침 동이 틀 때에 새벽 이슬이 맺히듯이, 젊은이들이 임금님께로 모여들 것입니다.. (시편 110:3)

 

하지만, 목회자들은 수많은 이해 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굳어진 사고 방식을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십일조가 이미 폐지되었음을 확신하게 된 신자가 십일조를 고집하는 목회자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그 교회에서 자신의 확신한 바를 다른 신자들과 나누어야 하는가? 그러면 그 교회의 영적 질서를 깨뜨리게 되어 덕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교회에 있는 동안에는 목회자의 방향을 따라주어야 하나 정말 견딜 수 없을 때는 그 교회를 떠나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수밖에 없다. 참으로 많은 기도와 영적 투쟁이 기다리고 있는 험한 도전이다.

 

목회자들의 고집으로 인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진리 아닌 것으로 쓸데없이 계속 갈등하게 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한국 개신교에서도 십일조 시대가 이미 지났음을 선포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일어서고 있다.

 

왜 이런 시점에 그런 교회와 목회자들이 하나 둘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은 상태가 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 (이사야 1:11-15)

 

바울이 제시한 연보의 원칙으로 돌아가 새로운 연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교회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는 누가복음 6:38 상반절 말씀이 한국 교회에서 널리 선포되어, 신자들이 실생활 속에서 이웃에게 주는 희생과 기쁨과 축복을 체험하는 가운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자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1-2)

 

목차


1. 십일조의 유래와 거기에 관련된 문제점들

2. 토지 소산과 가축의 10분의 1을 십일조로 바치도록 한 이유

3. 십일조가 음식에 국한된 이유

4. 십일조에 관한 말라기 선지자의 책망

5. 말라기 3:10에 대한 해석과 누가복음 6:38 상반절과의 관계

6. 십일조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지나친 열심

7. 바리새인의 십일조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8. 변질된 십일조의 역사

9. '모든' 소득의 십일조로 인한 웃지 못할 사례들

10. 십일조는 그리스도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11. 십일조가 폐지된 또 다른 신약의 증거들

12. 연보의 원칙

 

<십일조를 넘어서 - 기독교인가, 매머니즘인가>(베틀·)


- 조누가 지음 -

 

 

 

 

신약성경을 보면, 두종류의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드리는 기도와 세리가 드리는 기도가 있지요. 하나님 아버지 면전에서 올리는 기도가 바르면 천사가 기도 담는 향로에 담아서 하나님 보좌로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잘못된 기도의 경우에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거절 당하는 경우가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향해 독사(사단)의 자식들이라고 한 것을 보면, 뭔가 크게 잘못한 것임을 금방 알아채야 합니다. 자기 의를 내세워 기도하는 것은 안됩니다. 또, 사람을 높여서 기도하면 안됩니다. 시편 1~150편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모범적인 기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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