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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교 청년과 기독교인이, 교제하는 것은 문제 없습니까?

조봉상 2013-12-25

예정론과 자유의지(1)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신학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예정'과 '자유의지'이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예정'이고, 어디까지가 '자유의지'인가 하는 것을 놓고 수 백년, 아니 수 천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둘 다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성경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지옥의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장로교 칼빈주의는 예정론을 수용하여 신학의 근간으로 삼았다.

 

 

때문에, 장로교 신학은 예정론과 하나님의 절대주권 위에 세워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반면, 알미니안주의나 웨슬레안주의를 지향하는 감리교나 성결교는 '인간의 자유의지'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알아내고, 진정 성경이 가는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증거는 선악과 나무를 두고 따먹지 말라고 하는데서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 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기 '임의'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뜻이다. 선악과는 먹지 말 것이며 먹는 날에는 죽을 것이라는 것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말이다.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지 않다면 이런 말씀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벽을 쌓아 놓든지, 아니면 아예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접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그 선악과를 따먹지 말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정론자들은 이렇게 주어진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가 들어옴으로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어떤 선을 행할 수도 없고 구원에 이를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 스스로는 어떤 선을 선택할 수도 없기 때문에 모든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 선택하는 일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어떤 의지도 없는 죽은 자와 같은 영혼을 살려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구원을 위해서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마치, 물에 빠진 자가 자기 스스로는 도무지 살 수 없는 지경에서 누군가가 들어가서 살려내 주어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해 주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입장에 구원을 받는데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요하다고 하는 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완전 타락이 되어 버렸고, 전적으로 무능해져 버렸는데 어떻게 인간 의지가 구원을 받는데,

 

 

어떤 효력을 발휘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계획을 하시고 어떤 자들은 구원을 받도록 작정하시고, 어떤 자들은 유기되어 지옥 가도록 계획을 해 놓았다는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그 주장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가?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는가? 선을 행할 의지가 완전히 소멸되고 만 것인가?


 

(창세기 4:6~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은 타락 후에 태어난 최초의 사람이다. 그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자 그는 안색이 변하고, 죄를 지으려고 하는 악한 마음이 생겼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죄의 소원을 다스리라고 하신다. 그것은 곧 가인에게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증거이다. 만약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무능력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다.

 

 

태어난 지 한 달이나 두 달쯤 된 아기에게 울고 싶어도 울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이 말이 통한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있는 자에게 '하라, 하지 말라' 할 수 있는 것이지, 자유의지가 없는 자에게 '하라, 하지 말라'라고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한 것은 가인에게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주의 예정론의 시각으로 볼 때는 이야기가 달라 진다. 아벨이 열납되는 제사를 드린 것도 가인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버림받는 것도 다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태어 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아벨은 구원받을 자로 택하고 가인은 버림받을 자로 택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아벨은 하나님께 무조건적 선택에 의해 은혜를 입었기에 구원에 이를 수 있었고, 가인은 무조건적으로 유기되었기에 그는 선을 행할 수 없는 비극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가? 이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아벨은 사랑하시고 가인은 미워하였기에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심판의 의미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심판이란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이나 의무를 감당하지 못했을 경우 그 책임을 묻는 것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놓은 상태에서 가인에겐 벌을 주고 아벨에겐 상을 준다는 것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판'의 의미는 없어지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고 프로그램화 한 것에 따라 움직인다는 결론밖에 나오질 않는다. 창세기 6장으로 넘어가 보자! 노아시대에 실상이 나온다.

 

 

(창세기 6:1~3)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말한다. '사람의 딸들'은 불신자를 지칭한다. 예정론자들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구원받도록 예정되었기 때문에 구원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좋아하는 의지'를 따라서 '사람의 딸들'을 선택한다.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그렇게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선택한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하도록 하나님의 예정한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경건하게 살다가 천국 들어오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미혹되어서 지옥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단의 미혹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결과 물심판이 왔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체가 된 것은 전혀 하나님의 계획이나 예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선택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때문에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의지'는 살아 있었던 것이고, 그 의지에 따라 천국의 길도, 지옥의 길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었기에 그래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기대를 걸었었다.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들로 세워지기를 말이다. 그렇지만 그 기대가 빗나가자 하나님은 사람 지었음을 후회하셨던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선을 행할 의지 자체가 죽었거나 상실되어 버렸다고 한다면 그런 기대 자체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칼빈주의 예정론자들은 인간에게 선을 행할 의지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는 어찌하여 당대에 의인이 될 수 있었는가? 노아 역시 선을 행할 의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 역시도 타락하여 멸망을 받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칼빈주의 예정론자들은 노아가 하나님의 예정과 택정함을 입었기에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상해져 버린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놀아나는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다. 과연 노아가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었기에 당대 의인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택하고 회개를 했기 때문에 당대 의인이 될 수 있었을까? 성경은 이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창세기 6:8~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노아가 당세에 완전한 자라 칭함을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그가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했기 때문이다.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기에 은혜를 입은 것이다.

 

 

(창세기 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보라! 하나님이 노아를 구원하신 것은 그에게서 의로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구원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노아가 의로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행했기에 때문에 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다. 칼빈주의 예정론과는 전혀 맞지가 않다. 노아 자신의 자유의지 결과였던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이 당시에도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어디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가?

 

 

120년간,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노아 가족만 구원하고 나머지는 죽이기로 작정했다면 120년간의 기회를 줄 필요가 없다. 그냥 심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 가족만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자들을 사랑하셨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구원받아 천국 오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이다.

 

 

노아 당시 홍수로 죽은 자들은 자기의 자유의지로 회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의지로 구원을 져버린 것이지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정론과 자유의지의 문제는 아브라함에게서도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창세기 17장 1-2절 말씀을 보라!

 

 

(창세기 17:1~2)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완전할 것'을 요구하신다. 칼빈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런 것을 요구하실 수 없지 않겠는가? 선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인간에게 왜 하나님은 '완전'할 것을 요구하시는가? 그것은 곧 아브라함에게 '완전'히 행할 수 있는 의지의 결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하는 말은 맞지 않다.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되는 복을 받는 것도 그렇다. 그가 하나님께 부름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를 지명하여 불렀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다 해서 무조건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열국의 아비로 만들어 주었는가? 아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고 통과되었을 때 열국의 아비가 되는 복을 주셨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 예정이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하느냐 못하느냐는 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바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한 시험이다. 아브라함이 거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유의지로 아들을 바쳤던 것이다.

 

 

그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전혀 손댈 수 없는 부분이다. 오로지 아브라함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부분이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도록 자유의지까지 간섭한다면 더이상 인간이 아닌 로봇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온전한 자유의지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 그 시험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셨다.

 

 

(창세기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을 위해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위를 보고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준행하는 것을 보고서 복을 내리신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했더라도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그 자유의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해서 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자료출처: http://me2.do/5sAAvN1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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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과 자유의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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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비아누스(calvianus) 2013. 10. 08

 

 

666이란 무엇인가?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표 666에 대하여, 이 숫자를 가지고 다양하고 주관적인 해석을 많이 하고 있어서 지나친 혼란이 올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계시록의 장르형태는 "묵시"라는 것을 감안하여, 너무 상징적이거나 문자적으로 치우치는 해석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또한 지나친 비유와 풍유적인 비유로 해석하여도 곤란하다.

 

 

요한 계시록은 요한의 경고(계 22:18-19)에서도 볼수 있듯이 "더하거나 감하지 않게"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특히 대부분의 이단들은 거의 예외없이 666을 일반 기성교회, 혹은 카톨릭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물론144,000은 자신들만의 교회 교인수라고 주장을 한다. 다음은 666에 대한 일반적인 논리를 정리한 것이다.

 

 

(1) 666은 네로황제를 의미한다.


 

네로의 헬라어는 "네론카이사르"이다. 유대인들은 알파벳에 고유한 번호를 정하여, 그 알파벳을 숫자로 표기하였던 것이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이 "네론카이사르"를 숫자로 표시하면 666이 된다고 한다. 어느 소수 사본에는 616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네로가 히브리어로 "네로카에사르"라고 하며, 그 합이 616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라테이노스" 알파벳의 합도 666이 된다고 하는데, 일차적인 의미로서는 이 견해가 가장 일반적인 견해라고 알려져 있다. 계시록 13장 17절은 "그 수는 짐승의 이름이니 그 이름의 수"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짐승의 이름"이라고 표현한 것을 "이름의 수"라고 하였음을 볼 때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일차적인 해석이 되어질 것이다.


 

아마, 사도요한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인 형제들을 학살하고 맹수에게 잡혀 먹게 하는 네로황제와 로마 제국이 일차적으로는 "짐승같은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분명히 옳으면서도, 이러한 일차적인 해석으로만 국한시키려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성경이 과거만의 기록이라면 그것은 역사책이 될 것이며, 그렇게만 해석된다면 성경은 오직 유대사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2) 성경에서 7 이란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666은 7진법의 하나 모자라는 불완전한 숫자를 상징한다. 이 의견 역시 일반적인 견해라고 알려져 있다. '예수'를 헬라어로 쓴 이 "예수스"란 단어의 숫자치를 합산해 보면 888이 된다고 한다. 모든 수가 7진법을 하나 넘고 있다. 그러나 666은 그 반대로 모든 수가 7에 미달되고 있다. 즉, 이 수는 어떤 개인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의 의에 부족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즉 불신자나 반기독교인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숫자가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보통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이 해석은 더욱 합리성을 띄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요한은 우리에게 중생치 못한 사람은 항상 악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 일 수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범사마다 짐승의 표가 붙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문화는 불가항력적으로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며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것이다.(엡 2:3)

 

 

3) 바코드나 컴퓨터를 뜻한다는 주장


 

이 666을 컴퓨터 바코드 혹은 유럽단일공동체 혹은 실제로 이마에 문신으로 받는 표시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었으며, 주로 종말론자들에게 한때 유행하던 주장이었다. 또는 전자카드나 은행카드등을 가르킨다는 견해도 있었는데 이러한 주장이 아직도 지속되어지고 있다.

 

 

흔히 벨기에의 유럽단일공동체의 주컴퓨터의 이름이 "Beast"라는 것을 예로 들어, EC의 출현을 666으로 단정하는 경우가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S교회의 유명한 목사가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아직도 은행카드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전자 주민등록 카드를 말한다고도 한다. 이러한 견해는 너무 주관적이고 부분적인 견해가 되어지며 사사로운 인위적인 해석으로 흐를 수가 있다고 본다.

 

 

실제로, 은행카드나 컴퓨터를 사단이나 적그리스도로 간주하여 기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문명의 편리한 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해석은 사도요한이 마치 20세기 말의 시대만을 국한적으로 예언하여 계시록을 기록하였다는 치우치는 논리가 되어지기 때문에 납득이 어렵다.(계시록의 시대성에 대한 설명은 뒤에 다시 다루겠습니다)

 

 

4) 특정한 개인


 

어느 사람은 김일성을 숫자로 풀이하거나 히틀러를 숫자로 풀이하면 666이 된다는 그러한 견해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가 아는 사람은 김일성을 한문으로 풀고 혹은 영어로 풀더니, 어떻게 더하고 빼고를 계속하더니, 666을 만들고 컴퓨터를 6의 배수로 만들어 합산하여 666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인위적인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시대성으로 볼때, 김일성이나 히틀러도 "짐승"이 될수 있으며 "적그리스도"가 되어질 수가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로마교황이 666이라는 개신교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고, 마틴 루터가 666이라는 카톨릭 사람들도 있다. 특히, 이단들 중에서 반카톨릭 성향을 강하게 보이는 교회들은 카톨릭을 음녀라고 단정하며 666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라면 자신의 이름을 숫자로 합하여 666에 되는 사람은 모두 짐승의 숫자나 적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할까? 그러한 주장은 사도요한이 20세기 이후에 사용하는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미리 알고 그러한 예언을 하였다는 결론이 되어진다. 즉, 가장 일반적인 견해로는, 네로황제의 숫자적인 합이며 헬라인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파벳으로 사용하는 대신,

 

 

그 당시에는 알파는 1, 베타는 2....으로 하여 숫자로 흔히 사용했다고 하는 과거적인 개념이 그 일차적인 의미가 되어진다. 또한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는 "네로"가 죽고 "도미시안"황제가 집권을 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도미시안 역시 기독교인을 박해하였고 이 "도미시안"의 숫자를 합하여도 666이 된다고 한다.

 

 

즉, 네로황제*도미시안*로마제국이라는 단어가 모두 666이 되는데, 사도요한이 이것을 비유하였다는 것이 일차적으로 분명하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과거만의 기록이 아니며,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다양한 조명을 하여준다. 즉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에게만 해당되는 서신이 아니며, 고린도전후서는 고린도교회에게만 해당되는 서신이 아니다.


 

또, 현재의 주석가들은 그 666이 의미하는 이름이 계시록 이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는데, 물론 그 견해가 전적으로 옳다거나 혹은 틀리다고 할 수도 없지만, 계시록은 어느 한 시대만을 국한시켜 해석을 하는 것보다는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1차적인 의미로 볼 때, 계 13장은 로마제국의 짐승과 같은 난폭함과 비윤리성이나 잔인함, 그 이방적인 이단성등을 상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요한의 의도가 보여지며 반그리스도적이며 반기독교적인 개념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나 반그리스도를 포함하는 개념이 되어질 것이다.

 

 

즉, 계시록은 어떤 특정한 시대의 상황에만 조명할 수는 없다. 계시록 14장 4절에 보면 성도들은 이미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갖고 있다고 되어 있다.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는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이마와 오른손에 말씀을 표하고 다니라는 성경귀절과 연관이 있는 귀절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유대인들을 마귀의 자식, 독사라고 예수님은 말하였던 적이 있었다.


 

물론, 계시록의 모든 예언이 장래의 일도 상징하며, 재림 전의 사건도 의미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 계시록을 예수재림 직전의 일만을 상징한다고 보아 왜곡되고 이상한 해석을 하게 되면 곤란하다. 계시록은 과거의 일을 말할 수도 있으며 현재의 일도 장래의 일도 의미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많은 이단들과 사이비들이 특히 계시록을 인위적으로 해석하고 비유와 상징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계시록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왜곡하고 과장하는 일에 우리 모두 주의를 경계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올린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 666이라는 숫자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문명의 이기와 첨단기술인 컴퓨터나 신용카드 혹은 바코드를 이 666과 연관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666은 반기독교적인 개념을 총칭하는 것이 분명하며, 앞에서 말한 첨단문명을 활용하는 물질자체가 반기독교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자면, 사진기가 처음 나왔을 때에, 사진이 인간의 영혼을 빼앗아간다는 비과학적이며 황당한 주장이 매우 설득력이 있었음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계시록의 시대적 상황을 말하는 것은 아래와 같은 분류를 한다.


 

1) 과거파

 

계시록이 과거적 사실만이라는 견해. 그러나 계시록은 묵시적인 예언이라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2) 역사파

 

계시록은 세계의 교회사를 가르킨다는 설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계시록은 시간표적인 의미가 되어버린다.


 

3) 온건미래파

 

처음 3장을 제외하고 거의 전부가 주의 재림직전의 어느 기간 동안에 일어날 일을 가르킨다고 본다. 그러나, 이 주장은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분이 매우 모호하게 된다.


 

4) 극단적 미래파

 

일곱 교회를 세계의 교회사로 간주하며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이 설은 지나치게 종말론으로 계시록을 해석함으로서 매우 다양하고 많은 비유와 풍유가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 그 폐단이다.


 

5) 이상주의파

 

계시록이 어느 구체적인 사실만을 예언한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세대에 해당되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포괄적인 견해는 구체적인 해석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게 된다.

 

 

모든 견해와 주장이 일방적이라면 다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Swete 라고하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과거파에게서 당시 상황의 역사를 배우며....미래파에게서는 장차 올 시대의 성취를 배우고.....이상주의에서는 기독교의 역사철학을 배우며.....역사파에서는 사건의 진행들이 어떠한 원리에서 적용되었는지를 배울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인은 666에 대한 개념이 로마황제. 로마제국. 로마군인이라는 것을 "일차적"인 개념이라고 말하였다. 즉 본인은 그 666의 개념이 "일차적"이라고 하였으며, 묵시록을 어느 장래의 한 사건에만 집착하여 해석하여도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전시대를 초월하여 그 숫자는 적그리스도이며 반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이미 말하였다.


 

만일 컴퓨터의 바코드나 전자카드를 666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현재의 시대적 상황만을 계시록의 예언으로 보는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타당성이 적다고 본인은 이미 설명하였다. 바코드란? 관리와 회계를 위한 매우 편리한 문명의 이기로 사용되어진다. 어째서 그것이 적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하며 짐승의 숫자가 되어야 하는가?

 

 

 

인류를 편리하게 하려는 것을 오히려 적그리스도로 몰며 짐승의 숫자로 간주하여 그것을 반대하고 거부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상식 밖의 일이 되어질 것이다. 666은 어느 특정한 숫자나 이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666을 뜻하는 사물을 모두 계시록의 짐승의 숫자나 적그리스도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성경책 666페이지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이름의 합이 666이 되는 사람은 다 적그리스도가 되는가? 자동차번호나 주소 번호를 666이라고 하여 거부하는 일이 많았다. 성경을 아무리 문자적으로 보아도 저는 그것이 바코드를 의미한다고는 볼 수가 없다.

 

 

"그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그 표를 가진 자 외에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예로부터 노예나 종, 그리고 육축들은 표를 받았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전쟁에서 잡은 노예와 일반인을 구별하기 위해 표시를 하였다. 또 유대인들은 그 이마와 손에 기호나 표를 붙이고 다녔다(신 6:8) 짐승도 이것을 모방하여 자신들의 표를 받게 한다는 것인데, 사도요한은 그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꺼려하여 짐승의 이름이며 그 이름의 수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인치심을 받는 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즉 기호나 표는 그 "소유권"을 의미한다. 그 숫자는 짐승의 이름의 수이며 사람의 수라는 것이다. 만일 그 666이 바코드를 의미한다고 하여 바코드가 있는 것은 물건을 사지 않겠다면, 아마 물건을 사기가 요즈음은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여도 바코드는 사람의 이마나 손에 표를 받는 것은 아닌 것은 확실하며, 그것은 이름의 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노예나 종으로서 기본적인 사업활동과 매매를 할 수 없었다. 즉 짐승의 표를 받았으니 짐승의 소유라는 것이며, 짐승의 소유자만이 기본적인 사업과 매매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성도들은 문자적으로 이마에 도장이 찍혀있지 않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히 알면서, 왜 짐승의 숫자가 받는 표는 문자적인 표로만 간주하는지? 어떤 사람은 장차 사람의 이마에 레이져 문신으로 바코드를 받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코드와 같은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길래, 무려 2천년 전의 요한이 그것을 예언하기 위하여 성경에 그것을 기록하였다고 보는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한 구분은 "믿음을 지키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곧 짐승의 유혹과 미혹에 빠져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며 그들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노예가 되며 그들에게 사로 잡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께로 "인치심"을 받음으로서 구원의 보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엡 1:13. 엡 4:30)

 

즉, 적그리스도나 사단에게 표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로부터 보증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 보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단과 적그리스도의 백성이 되는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믿음이 충만하고 장성한 분량에 도달한 사람이 전자카드나 은행카드 혹은 컴퓨터 바코드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전자카드나 컴퓨터를 사용하면 구원을 잃을 수 있도록, 그러한 것들이 구원과 멸망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회개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전자카드와 바코드를 부정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란 말인가? 혹은 믿음 외의 이상한 조건이 또 필요하다는 것인가? 그러한 주장은 성경말씀을 오히려 왜곡시키는 일이 되어질 수도 있다.


 

문자적으로 보더라도 계시록을 자세히 보면, 매매를 못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짐승이다. 그러한 주장들은 주로 극단적인 세대주의론자들과 종말론자들에 의하여 주장되었고 최근에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요즈음은 일반교회의 목회자들도 그러한 설교를 쉽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제 다시 여러 가지 견해에 대해 정리를 하여 보자

 

 

1. 계시록의 의미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에 있었던 일"이며 "지금 있는 일"이며 "장차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이다. 저는 사도요한이 20세기에 국한된 시대적인 문명만을 지적하여 그와 같이 계시록을 기록하였다고는 보지 않는다. 요한이 말한 "짐승"은 "반기독교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일차적인 의미로, 또 과거적 의미로 "로마제국" 혹은 "로마황제"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부정하며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며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던 과거의 인물이나 단체, 현재의 인물이나 단체, 미래의 인물이나 단체가 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반기독교"이며 "반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2. 성경에서의 "표"는 "인침"(印)을 의미한다.


 

그 원문적인 의미는 "보존하다, 소유하다"는 명사형이다. 오래 전부터 가축이나 노예, 특히 전쟁포로등은 그 이마에 "표"를 인침으로 소유를 표시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심"을 받는다는 것도 실제로 이마에 도장이나 낙인을 받는다는 문자적인 용어가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즉 짐승, 적그리스도나 사단에 의하여 "표"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소유나 그들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인 것이며, 나아가서는 어느 누구의 가르침과 교훈을 좇느냐는 내적인 의미를 말한다.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결 코 어떠한 "표"나 "도장"을 실제로 이마에 받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또 그 "표"를 실제적인 표나 카드등의 Ticket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가"와 "적그리스도의 말을 좇는가" 혹은 "믿음"과 "불신"의 기준이 되어지는 것이지 어떤 형태적인 표를 받는 것으로 구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 이미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한 사람에게는 666이라는 숫자가 아무런 의미도 되어지지 못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요일 4:4)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카드나 바코드 때문에 짐승의 수에 포함될 수가 있다는 것은 전혀 비성경적인 견해가 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예수를 믿는 믿음을 지키면 되는 것이며, 무슨 전자카드나 컴퓨터 때문이 되어지지는 못한다.

 

 

3. 문명의 이기(利器)는 인류를 편리하게 하며 유용하게 하는 도구이다.


 

신앙이란 과학과 상충되고 부딪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기독교란 속세를 등진 은둔의 신앙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적그리스도라는 의미는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되어진다. 그 용어는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의 요한일서 2:18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이미 일어난 존재도 될수 있으며, 장래에 임할 존재가 되어질 수도 있다.


 

물론 그 적그리스도는 지금까지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용어적 의미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대항하는 모든 활동의 집합체적인 성격"을 총괄하는 개념이다.(참고: 요일 2:22) 즉 "반그리스도적이며 악을 총괄한 총체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4. 사단이나 적그리스도, 미혹의 영에게 유혹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代案에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아담이 유혹되었듯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던" 그러한 육체적인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령의 소욕이 아닌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사단은 뿌려진 씨앗을 먹어가는 새로 비유되기도 했으며 성도들을 유혹하고 미혹하는 존재로도 언급되어 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는 존재, 즉 이단과 사이비를 말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666에 대한 이상한 주장들은 휴거를 주장하던 종말론자들의 주장이었음을 우리는 상기하여야만 한다.

 

 

5. 숫자 7이란? 하나님의 숫자이며,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고, 7일에 안식하셨다.


 

'예수'를 헬라어로 쓴 이 예수스란 단어의 숫자 가치를 합산해 보면 888이 되어진다고 한다. 모든 수가 완전 수인 7을 넘고 있다. 그러나 666은 그 반대로 모든수가 7에 미달되고 있다. 즉 이 수는 어떤 개인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의 의에 도달치 못한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본문의 숫자가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이 해석은 더욱 합리성을 띄고 있다. 요한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항상 악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6. 헹스텐베르크라는 사람은 666의 문제에 대해 에스라 2:13에 그 자손들의 수가 666으로 기록되어 있는 아도니감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666이라는 숫자를 열왕기상 10:14에서 솔로몬이 한 해에 거두어 들였던 금 달란트의 수로 말하는 주장도 있었다. 지혜자의 표징으로 간주되었던 솔로몬은 호화롭고도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하여 결국 말년에 우상을 섬기는 사악한 죄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 666이라는 수는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경계하라고 가르쳐 주시던 세속적인 탐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견해이다.

 

 

또한 어느 사람들은 지금의 물질적이며 세속적으로 타락한 교회를 가르킨다는 주장도 있다. 이 세상의 재물을 추구하는 자들이 짐승을 섬기는 자들로 서술되어 있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제안을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7. 요한복음 6:66

 

 

그 구절은 "이러므로 제자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육백 육십 육은 예수의 참 제자 외에는 다 예수를 떠나게 되는 것을 말하는 수인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육백 육십 육을 요 6:66이라고 믿고 그리스도를 떠난 자들은 다 적그리스도에 해당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의 몇장 몇절은 후기에 편의를 위하여 편집 제작되어진 것이며, 헬라어 사본에는 처음부터 그 장과 절의 수가 표시되지 않았으므로 그 주장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8. 컴퓨터가 666이라는 주장

 

 

한국컴퓨터선교회의 이영제 목사가 전국 1,020명의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요한계시록 13장 18절의 '666'은 컴퓨터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20%가 직접 관계가 있다. 23% 간접 관계가 있다. 22% 아무 관계가 없다. 35%가 잘 모르겠다고 응답해 '666'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 수가 많았고, 알수 없다는 응답도 35%에 달하여 "컴퓨터 666"의 주제를 다룬 책들이 깊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났다.

 

 

즉, 43% 기독교인들은 컴퓨터가 666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COMPUTER가 666이 된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미국의 종말론 성경학자인 살렘 키르반으로서, 그의 저서 [Satanis Mark 666]이라는 책에서 말했다. 이 계산 방법은 영문자 A=6 으로 시작하여 알파벳 순서에 따라 6씩 더해나가는 것으로서, 이것에 근거하여 COMPUTER란 단어에 해당되는 숫자를 모두 합쳐보니 666이 되기 때문에 컴퓨터가 666이라고 하였다.

 

 

A = 6 I = 54 Q = 102 Y = 150

C = 18 B = 12 J = 60 R = 108

Z = 156 O = 90
C = 18 K = 66 S = 114 M = 78
D = 24 L = 72 T = 120 P = 96
E = 30 M = 78 U = 126 U = 126
F = 36 N = 84 V = 132 T = 120
G = 42 O = 90 W = 138 E = 30
H = 48 P = 96 X = 144 R = 108


 

COMPUTER = 합이 666이 된다.

 

 

위의 주장에 대해, 왜 처음에 A를 6부터 시작하였는지와, 왜 6씩을 더해갔는지 그 설명은 전혀 없다. 즉 이것은 처음부터 어떤 결과에 접근하기 위해 우연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다. 또한 사도요한이 그 시절에 영어 알파벳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가 없으며, 사도요한이 약 2000년 후에 만들어질 컴퓨터란 기기와 그 영어 단어에 대해서 계시를 받아 미리 기록하였다는 주장은 누가 보아도 설득력이 없다.


 

또 컴퓨터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연히 기기에 지나지 않는 컴퓨터를 거부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며 사도요한이 2000년 후에 만들어질 컴퓨터를 짐승의 숫자라고 예언했을까?

 

 

9. 바코드가 666이라는 주장


 

바코드가 666이라고 주장한 메어리 S. 랠프가 말한 바 코드는 슈퍼마켓 이나 상품에 주로 사용되기 위하여 개발된 바 코드라는 것과, 지금 국내에서 컴퓨터가 666이라고 주장하는 책의 바 코드는 UPC(Universal Product Code) 바 코드라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세개 바의 왼쪽과 가운데 오른쪽 바아는 한국 공업 규격에서는 2진 기호 표시로 사용하여 양쪽 공히 '101'가운데 바아 '01010'로 표시한다.


 

이들 코드가 어떤 계산 방법으로 666이 된다는 뜻인지 컴퓨터 전문가들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한다. 컴퓨터는 2진법으로 사용되며 이것을 흰것과 검은 바로 구분하여 판독한다. 그러므로 컴퓨터 내부에서 일어나는 계산 방법이나 외부에 나타내는 바코드 사용법이나 모두 666이라는 숫자는 발견할 수 없다. 또 바 코드는 계속 발전하고 있으며 한가지가 아니라 현재도 여러 종류가 있다.


 

혹 어떤 계산 방법이나 어떤 이론에서 666이 나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연일 뿐이며, 또한 모든 나라가 어느 상품이나 똑같은 바코드를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레이건 미국 전 대통령의 사저가 공교롭게도 666번지여서 번지수를 바꾸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어느 사람은 은행 지로제 99번을 거꾸로 보면 666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느 미국의 주(州에)에서는 자동차번호가 666이 되므로 모두 취소시켰다고 한다. 그야말로 숫자 노이로제에 걸려있는 실정이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내적 조명"이다. 우리의 구원과 멸망은 자발적인 믿음으로 시작된다. 즉 우리가 자발적인 회개와 믿음을 갖는 것이며, 그것을 성령의 인도와 함께 지켜나감으로 성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구원과 멸망의 기준이 바코드나 은행카드. 전자카드를 받음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는, 그러한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이미 구원을 받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666이라는 숫자가 아무런 의미가 주어지지 못한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계 13:16-14:1)

 

 

즉 666과 144,000은 서로 상반된 숫자이며, 666은 짐승에게 인침을 받은 표시, 또 144,000명은 하나님에게 인치심을 받은 성도를 가르키는 것이며 모두 상징적인 "사람의 수"를 가르킨다. 구원받을 사람의 수, 144,000명이 실제로 이마에 하나님의 인치심이나 소유도장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짐승의 수인 666도 실제적인 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즉, 666의 문제는 성경를 전체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나치게 666 자체에 연연하여 그 숫자만을 또는 그 수가 무엇을 가리키느냐?에만 집착한다면 올바른 해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성경을 마구 해석한다면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들로 부터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근거도 없이 세상에 비교하는 세대주의적 해석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666의 뜻을 완전히 찾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찾으려고 또는 알려고 할 이유가 없으며 또한 염려할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666을 꼭 알아야만 천국에 간다든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숫자를 아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할까 염려될 뿐이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평이협)

 

 

 

출처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모임] "베리칩은 666표가 아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 들을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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