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Barna Group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 교인중에 십일조를 하는 비율은 늘 대략 5%~7% 사이에 있다고 한다. 2012년에는 5%였고 2001년에 5%, 2002년에 6%, 2003년과 2004년에 5%, 2005년과 2006년에 7%, 2007년에 5%, 2009년에는 7%, 2010년과 2011년에는 4%였다. 이 조사에서는 십일조를 하는지를 직접 물어본 것이 아니라 가구수입중 교회에 헌금한 금액을 조사해서 실질적 십일조 또는 그 이상인 비율을 계산한 것이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에 의한 2015년 2월에 발표된 조사에 의하면 68%의 개신교인이 십일조를 한다고 한다. 혹시나 십일조안하면 벌 받을까봐 걱정되어서 무리해서라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 놓으시고 그냥 형편것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면, 미국 교인의 95%가 벌 받는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형편것 내는 것을 넘어 더 나아가 아예 정기적 소득의 십일조 내는 것을 반대하는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렸던 일시적인 감사의 십일조는 이것과 상관없다.)
1. 현대 교회의 십일조는 비성경적인 제도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소득의 십일조는 다른 분깃없이 제사에 종사하는 레위인과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같이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는 이스라엘 백성의 세금과 같은 개념이다. 현대 교회에서는 교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교회 지출에서 대략 5%~13% 만이 구제와 선교에 쓰이므로
만약, 어떤 목사가 십일조를 요구한다면 그는 주로 구약에서 레위인에게 쓰이는 의미로 십일조를 요구한다는 뜻일 수 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면, 목사들이 구제에 쓰여질 하나님의 십일조를 도둑질 하여 빼돌린 다는 것인가? 레위인에게 쓰이는 의미로 받는다고 한다면 과연 초대교회에서 이런 의미로 십일조가 걷혔겠는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도들은 대부분이 레위인이 아니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유대 회당과 동시에 존재했다. 유대인인 사도들 대부분이 순교하기 전까지 모세 율법을 계속 지켜갔다.
당연히, 사도들도 십일조를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훼파전까지 유대 회당 레위인을 위해서 바쳤을 것이다. (사도들이 무슨 돈으로 바쳤을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는 주제이다.) 어떻게 이러한 사도 바울과 같은 유대인 사도들이 이방교회에서만 이방 사람들을 속여서 자신들을 위한 십일조를 받아 낼 수 있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주장이다.
역사적으로도 십일조는 8세기 이후에나 공식적으로 등장한다.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받지 않던, 아니 사실 받을 수가 없었던 구약의 십일조를 왜 현대 교회가 받아야 하나? 아무런 납득할 근거가 없다.
2. 현대 교회의 십일조는 타파해야할 성직주의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다.
우리는 신앙심 깊은 회사원 김집사를 성직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면 하루종일 성경책과 기독교 서적을 볼 것 같은 이목사는 성직자다. 김집사는 세속에서 일하지만, 이목사는 성스러운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세속적인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성스러운 일”에 전념 할수 있게 하려면 이목사의 가족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우리 평신도와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기름부워 세우신 이목사의 생계는 평신도들이 십일조와 헌금을 통해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구약의 레위인들이 십일조로 먹고 살듯이 말이다. 모든게 명확한 듯 하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생각난다. 예수님이 왜 굳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지 잘 모르겠어 졌다. 그냥 구약의 제사장 제도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아! 하나님께서 제사를 더 잘 받아주시려고 예수님을 죽이셨나? 맞다! 예수님이 없는 제사장은 율법으로 완전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그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 우리 이목사님께서 하나님과 더 잘 교통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필요한거다. 이제 모든게 이해가 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 거룩해진 이목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의 양식을 나눠 주고 계신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영의 양식인 이목사를 통한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 따라서 이목사는 보다 더 거룩하게 말씀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 이목사의 말씀과 축도를 일주일이라도 거른다면 우리의 영적 상태는 곧 나빠질 것이다.
하나님! 우리 목자 이목사님을 영육간에 강건히 붙잡아 주셔서 우리 양들이 한명도 낙오없이 천국에 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미안하지만, 이것은 기독교를 오해한 신앙 고백이다.
교회 생활만이 거룩하다고 여기고 자신의 세속에서의 일상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는 성속 이원론적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인 것이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매개하는 구별된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썩어질 구습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난 모든 성도가 왕같은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선언한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직통한다. 초대교회는 이런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실천한 성도의 모임이었다. 초대교회에는 오직 신앙의 선배와 후배의 초신자만 존재했다. 초신자는 반드시 성장해서 다시 신앙의 선배가 되어야 한다.
즉, 성도 한명 한명이 반드시 왕같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지 않는 교회는 실패한 교회다.
목사(장로)는 사도들에 의해 단지 신앙의 선배로서 세워졌다. 목사는 다른 성도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직업을 가지고 자기 먹을 것을 자기 손으로 벌어서 먹어야 했다.
목사는 신앙의 선배로서 비록 이 세상에 속해서 일하면서 살아가지만 성령의 임재속에서 이 세상과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감을 몸소 실현하고 이를 교회내 초신자에게 실천적으로 가르쳐 그 목사를 닮아 살아가게 해야 하는 사람이다.
즉, 목사들과 초신자들은 모두 왕같은 제사장으로 성장해야 한다. 이교도들은 이러한 만인 제사장의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교도의 구별된 성직자의 개념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새로운 개념을 이교도 출신의 이방교회 교인들에게 실천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무소유의 순회적 사도로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던 사도바울이 친히 이것을 이방인 교회에서 본을 보여줬고, 그는 이방인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에게 담대히 그를 본받으라고 했다.
이런 초대교회의 순전한 교회는 로마의 국교화에 의해서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유급 변론가 소피스트들이 새로운 출세의 통로인 로마 황제의 기독교로 국가에 의해 채용되어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4세기 이후 카톨릭의 주교들이다. 이렇게 로마의 국교화에 의해 다시 이교도의 성직주의가 기독교를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직주의는 결국에 타락할 수 밖에 없고, 그 타락은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극에 달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 개혁도 이러한 성직주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개혁에 머무르고 만다. 즉, 이신칭의등 올바른 신학은 다소 회복했지만 그 성직주의는 단지 사제에서 목사로 이름만 바꾸고 유지하게 된다. 예를 들면, 평신도와 구별된 사제의 고유 권한인 미신적인 고백성사와 성찬예식에서 다시 평신도와 구별된 목사의 고유권한인 설교로 변형되었을 뿐이다.
현대 교회는 비신약성경적인 목사-평신도의 고착된 이원 구조의 성직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즉, 한번 평신도는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 평신도며, 많은 경우에 신앙이 성장하기는 커녕 그 첫사랑 마저 잃어버려 신앙이 식어 버리고 침륜에 빠진다. 이렇게 무능한 평신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러한 성직으로서의 왜곡된 목사 제도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 바로 십일조다.
목사들을 평신도와 거룩하게 구별시키기 위해서 목사가 세속에서의 일을 하지 않고 거룩한 말씀 연구에만 매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금전적 비용이 발생한다. 그 비용을 해결하는 것의 상당 부분이 십일조에서 나온다.
교회 헌금의 대부분이 목회자 인건비와 교회 건물 유지비로 쓰인다. (교회 건물도 목사가 집례하는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서 성직주의를 강화시키는 요소이다.)
따라서, 이 왜곡된 성직주의 목사제도를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십일조는 거부되어져야 한다.
자원하는 맘으로 드리는 주일 헌금 (펌게시자 의견: 헌금은 제물이 되므로, 각자 자원하여 정하는 '연보'가 신약성경적인 표현임) 만으로도 주변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구제 비용과 복음 전파을 위한 선교사 후원비용으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현재의 십일조는 대부분이 성직주의를 유지시키는 데 쓰이는 사악한 돈으로 쓰여질 뿐이다. 당신의 십일조가 이렇게 사악한 일에 쓰여도 괜찮겠는가?
그리고, 앞으로 당신의 헌금이 성직주의를 유지시키는데에 이용되지 않도록 용도를 분명히 밝히고 헌금하는 것도 필요하겠다. 헌금에 “구제” 나 “선교” 로 지목해서 헌금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결론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정기적 십일조는 그 명분도 없을 뿐더러 그 사용처 마저도 사악하다는 것을 알아 보았다. 만약, 당신이 기복신앙인이라면 아마도 이런 글들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깨어있는 성도인데 단지 목사들에 의해서 속아온 것이라면 그리고 이제 이 글에 동의한다면 과감하게 십일조를 거부해야 한다.
당신의 십일조가 "말세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지탱하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를 회복시켜야 한다.
펌출처: https://is.gd/YOFW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