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중부교회

  동영상 보기: https://is.gd/wNLiNp


견공도 잘 따라서...  

 

펌출처: https://is.gd/AFOBxF 

출처: aoe9.com 


추가1: https://is.gd/16Yqdm  
추가2: https://is.gd/jOOXbK  


[Messenger 小考]


가톨릭의 사도신경을 모방하여 개신교 사도신경을 만들어 사용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분은 성경대로의 믿음을 가진 매우 지혜로운 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가톨릭이 개신교의 사도신경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봐야 맞을 것입니다. 개신교 사역자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가톨릭의 식사전 기도를 개신교가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면, 사도신경의 경우와 많이 다르다고 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저는 기록된 신약성경의 요구나 사례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식사 전 기도는 매우 짧고 간결합니다. 강복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달라고 구하는 기도이지요. 또, 식사 후의 기도는 죽은 영혼들에게 안식(영생)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식사 후의 기도는 성경에 배치된다는 부담으로 개신교가 식사전 기도만 받아 들였다고 보는 사견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가톨릭이 개신교의 식사전 기도를 모방하고 식사 후 기도를 추가했다고 봐야 하는데, 설득력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음식 차려 놓고 기도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이나 명령의 말씀을 못 찾았으니 찾은 분은 댓글을 부탁드립니다. 기도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성경적인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절하시고 악하다고 말씀하실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의 구약시대는 유대교입니다. 회당에 세번씩 기도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러 가는 습관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대속 죽음을 지불하신 이후 부터는 무시로 성령 안에서 골방 기도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뜬구름 잡는 듯한 중언부언의 기도는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듣고 계신다는 믿음이 없이 기도하지 말며, 길게 큰소리로 기도해야만 듣는 줄로 착각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영육 간의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에 감사하는 내 영혼의 상태가 중요한 것이지, 종교적인 어떤 기도 행위 습관을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 중심을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의 진정한 감사도 없이, 기도 형식만 취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바른 영분별을 빕니다.


 동영상이 안 보일때: https://youtu.be/u754tFcvJAQ

[스크랩] 

펌출처: http://blog.daum.net/ab0833/1982

 
일상 기도문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사도신경
십계명 삼덕송 식사 전 기도 식사 후 기도
봉헌기도 반성기도 고백의 기도 통회기도
부활 삼종기도 삼종기도 묵주기도
일을 시작하며 바치는 기도 일을 마치고 바치는 기도
아침기도 저녁기도




 


 



[십자가에 못박힌 십일조] 저자 안용수 by CBS 광장 - Mixcloud  <-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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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senger 小考]


前. 성결교단 한성호 원로목사는 신약에도 구약의 안식일처럼 토요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신문 광고를 많이 내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 https://is.gd/ANrK2Q ) 반면에, 개신교 보수 교단 중에는 주일이 안식일이며 주일성수를 철저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신율법 주의 같은 가르침도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갈등과 혼돈을 많이 겪던 중에, 아래와 같은 소중한 신앙칼럼을 정독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반도국가(이탈리아, 스페인, 한국) 사람답게 매우 조급하며 내가 알고 믿는 것 외에는 인정하려 들지 않고, 상대방의 성경적 증빙자료를 묵살해 버리는 오류를 상당히 많이 범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끝까지 정독하여 내용을 옳고 바르게 파악하려는 자세는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입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의 여지를 항상 남겨두는 것이 성경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아닐려는지요.


이 칼럼으로 저의 고민은 해결되었습니다. 사실, 한성호 원로목사가 성결교단에서 제명되면서 까지, 신약의 안식일도 토요일로 동일하다는 주장이 옳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로는 로마 가톨릭에서 토요일을 일요일로 바꾼 역사적 자료가 있기 때문입니다. ( https://is.gd/WX2rm8 ) 가톨릭에서 이를 인정했다는 자료입니다. 개신교가 가톨릭의 일요일 예배를 따르게 되었는데, 칼럼에서는 두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두 사이에 꽉 끼여서 해답을 찾지 못하여 고민과 갈등이 심했는데, 이번에 매우 소중한 자료를 발견해서 성경적인 시원한 답변을 얻었습니다. 저는 '개신교회' 라는 용어 대신에 '초대교회' 라는 성경적 표현을 쓰고 싶지만, 현재의 개신교회는 가톨릭의 전통이나 교리가 일부 섞인 혼합주의 문제(대표적인 것이 종교다원주의임)로 인하여 가칭. '천주기독교회' 처럼 변해가고 있어 고민인 것입니다. 장로-집사-목사는 동일한 주의 종인 것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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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은 과연 신약의 안식일일까 - 기독교포털뉴스

      주일은 과연 신약의 안식일일까 - 뉴스앤조이

      기사 원문 바로보기 

 


    이민규 교수 프로필: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개신교, 초교파,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회개와 개혁, 천국지옥

 현대 교회에서 십일조 내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는 이유 


미국 Barna Group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 교인중에 십일조를 하는 비율은 늘 대략 5%~7% 사이에 있다고 한다. 2012년에는 5%였고 2001년에 5%, 2002년에 6%, 2003년과 2004년에 5%, 2005년과 2006년에 7%, 2007년에 5%, 2009년에는 7%, 2010년과 2011년에는 4%였다. 이 조사에서는 십일조를 하는지를 직접 물어본 것이 아니라 가구수입중 교회에 헌금한 금액을 조사해서 실질적 십일조 또는 그 이상인 비율을 계산한 것이다. 1, 2


반면, 한국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에 의한 2015년 2월에 발표된 조사에 의하면 68%의 개신교인이 십일조를 한다고 한다.3  혹시나 십일조안하면 벌 받을까봐 걱정되어서 무리해서라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 놓으시고 그냥 형편것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면, 미국 교인의 95%가 벌 받는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형편것 내는 것을 넘어 더 나아가 아예 정기적 소득의 십일조 내는 것을 반대하는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렸던 일시적인 감사의 십일조는 이것과 상관없다.)


1. 현대 교회의 십일조는 비성경적인 제도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소득의 십일조는 다른 분깃없이 제사에 종사하는 레위인과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같이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는 이스라엘 백성의 세금과 같은 개념이다. 현대 교회에서는 교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교회 지출에서 대략 5%~13% 만이 구제와 선교에 쓰이므로


4 만약, 어떤 목사가 십일조를 요구한다면 그는 주로 구약에서 레위인에게 쓰이는 의미로 십일조를 요구한다는 뜻일 수 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면, 목사들이 구제에 쓰여질 하나님의 십일조를 도둑질 하여 빼돌린 다는 것인가? 레위인에게 쓰이는 의미로 받는다고 한다면 과연 초대교회에서 이런 의미로 십일조가 걷혔겠는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도들은 대부분이 레위인이 아니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유대 회당과 동시에 존재했다. 유대인인 사도들 대부분이 순교하기 전까지 모세 율법을 계속 지켜갔다.


당연히, 사도들도 십일조를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훼파전까지 유대 회당 레위인을 위해서 바쳤을 것이다. (사도들이 무슨 돈으로 바쳤을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는 주제이다.) 어떻게 이러한 사도 바울과 같은 유대인 사도들이 이방교회에서만 이방 사람들을 속여서 자신들을 위한 십일조를 받아 낼 수 있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주장이다.


역사적으로도 십일조는 8세기 이후에나 공식적으로 등장한다.5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받지 않던, 아니 사실 받을 수가 없었던 구약의 십일조를 왜 현대 교회가 받아야 하나? 아무런 납득할 근거가 없다.


2. 현대 교회의 십일조는 타파해야할 성직주의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다.


우리는 신앙심 깊은 회사원 김집사를 성직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면 하루종일 성경책과 기독교 서적을 볼 것 같은 이목사는 성직자다. 김집사는 세속에서 일하지만, 이목사는 성스러운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세속적인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성스러운 일”에 전념 할수 있게 하려면 이목사의 가족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우리 평신도와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기름부워 세우신 이목사의 생계는 평신도들이 십일조와 헌금을 통해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구약의 레위인들이 십일조로 먹고 살듯이 말이다. 모든게 명확한 듯 하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생각난다. 예수님이 왜 굳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지 잘 모르겠어 졌다. 그냥 구약의 제사장 제도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아! 하나님께서 제사를 더 잘 받아주시려고 예수님을 죽이셨나? 맞다! 예수님이 없는 제사장은 율법으로 완전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그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 우리 이목사님께서 하나님과 더 잘 교통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필요한거다. 이제 모든게 이해가 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 거룩해진 이목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의 양식을 나눠 주고 계신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영의 양식인 이목사를 통한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 따라서 이목사는 보다 더 거룩하게 말씀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 이목사의 말씀과 축도를 일주일이라도 거른다면 우리의 영적 상태는 곧 나빠질 것이다.


하나님! 우리 목자 이목사님을 영육간에 강건히 붙잡아 주셔서 우리 양들이 한명도 낙오없이 천국에 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미안하지만, 이것은 기독교를 오해한 신앙 고백이다.


교회 생활만이 거룩하다고 여기고 자신의 세속에서의 일상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는 성속 이원론적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인 것이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매개하는 구별된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썩어질 구습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난 모든 성도가 왕같은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선언한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직통한다. 초대교회는 이런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실천한 성도의 모임이었다. 초대교회에는 오직 신앙의 선배와 후배의 초신자만 존재했다. 초신자는 반드시 성장해서 다시 신앙의 선배가 되어야 한다.


즉, 성도 한명 한명이 반드시 왕같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지 않는 교회는 실패한 교회다.


목사(장로)는 사도들에 의해 단지 신앙의 선배로서 세워졌다. 목사는 다른 성도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직업을 가지고 자기 먹을 것을 자기 손으로 벌어서 먹어야 했다.


목사는 신앙의 선배로서 비록 이 세상에 속해서 일하면서 살아가지만 성령의 임재속에서 이 세상과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감을 몸소 실현하고 이를 교회내 초신자에게 실천적으로 가르쳐 그 목사를 닮아 살아가게 해야 하는 사람이다.


즉, 목사들과 초신자들은 모두 왕같은 제사장으로 성장해야 한다. 이교도들은 이러한 만인 제사장의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교도의 구별된 성직자의 개념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새로운 개념을 이교도 출신의 이방교회 교인들에게 실천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무소유의 순회적 사도로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던 사도바울이 친히 이것을 이방인 교회에서 본을 보여줬고, 그는 이방인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에게 담대히 그를 본받으라고 했다.6


이런 초대교회의 순전한 교회는 로마의 국교화에 의해서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유급 변론가 소피스트들이 새로운 출세의 통로인 로마 황제의 기독교로 국가에 의해 채용되어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4세기 이후 카톨릭의 주교들이다. 이렇게 로마의 국교화에 의해 다시 이교도의 성직주의가 기독교를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직주의는 결국에 타락할 수 밖에 없고, 그 타락은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극에 달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 개혁도 이러한 성직주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개혁에 머무르고 만다. 즉, 이신칭의등 올바른 신학은 다소 회복했지만 그 성직주의는 단지 사제에서 목사로 이름만 바꾸고 유지하게 된다. 예를 들면, 평신도와 구별된 사제의 고유 권한인 미신적인 고백성사와 성찬예식에서 다시 평신도와 구별된 목사의 고유권한인 설교로 변형되었을 뿐이다.7


현대 교회는 비신약성경적인 목사-평신도의 고착된 이원 구조의 성직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즉, 한번 평신도는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 평신도며, 많은 경우에 신앙이 성장하기는 커녕 그 첫사랑 마저 잃어버려 신앙이 식어 버리고 침륜에 빠진다. 이렇게 무능한 평신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러한 성직으로서의 왜곡된 목사 제도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 바로 십일조다.


목사들을 평신도와 거룩하게 구별시키기 위해서 목사가 세속에서의 일을 하지 않고 거룩한 말씀 연구에만 매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금전적 비용이 발생한다. 그 비용을 해결하는 것의 상당 부분이 십일조에서 나온다. 


교회 헌금의 대부분이 목회자 인건비와 교회 건물 유지비로 쓰인다. (교회 건물도 목사가 집례하는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서 성직주의를 강화시키는 요소이다.8)


따라서, 이 왜곡된 성직주의 목사제도를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십일조는 거부되어져야 한다.


자원하는 맘으로 드리는 주일 헌금 (펌게시자 의견: 헌금은 제물이 되므로, 각자 자원하여 정하는 '연보'가 신약성경적인 표현임) 만으로도 주변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구제 비용과 복음 전파을 위한 선교사 후원비용으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현재의 십일조는 대부분이 성직주의를 유지시키는 데 쓰이는 사악한 돈으로 쓰여질 뿐이다. 당신의 십일조가 이렇게 사악한 일에 쓰여도 괜찮겠는가?


그리고, 앞으로 당신의 헌금이 성직주의를 유지시키는데에 이용되지 않도록 용도를 분명히 밝히고 헌금하는 것도 필요하겠다. 헌금에 “구제” 나 “선교” 로 지목해서 헌금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결론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정기적 십일조는 그 명분도 없을 뿐더러 그 사용처 마저도 사악하다는 것을 알아 보았다. 만약, 당신이 기복신앙인이라면 아마도 이런 글들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깨어있는 성도인데 단지 목사들에 의해서 속아온 것이라면 그리고 이제 이 글에 동의한다면 과감하게 십일조를 거부해야 한다.


당신의 십일조가 "말세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지탱하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를 회복시켜야 한다.


펌출처: https://is.gd/YOFWAD


 

 종교개혁을 위한 20개조 반박문  


- 율법을 지키는 율법주의나 율법을 폐지하는 율법폐기주의 모두를 거부하고, 성령의 법을 따릅니다.


 

- 각종 절기를 중시하는 형식주의를 멀리하고 성령의 법을 따릅니다.

 

- 술, 담배 금지를 규정으로 두지 않고, 자원함으로 성령님께 맡깁니다.


- 목사는 신학교 출신으로 제한하지 않고, 회중이 선출한 장로인 감독이 목사의 자격을 갖습니다.

 

- 목자로써의 감독은 별도의 신학교보다 교회에서 선출되는 것이 우선이며, 교회는 공동체와 신학교의 기능을 겸합니다.


- 축도와 설교권이 목사가 아닌 회중에서 선출한 장로와 감독에게 있습니다.

 

- 교회 장로로써의 감독은 만인 제사장직에 의하여 교인 누구나 임명 받을 자격을 갖습니다.

 

- 만인 제사장직에 의거하여 감독의 권한 아래 회중 누구나 설교하거나 말씀을 나눌 특권이 있습니다.

 

- 교회 예배는 예식적인 종교 행위가 아닌 성도 간에 마음을 나누고 말씀을 먹는 주의 만찬과 교제와 말씀나눔을 중심으로 합니다.


- 교회 예배는 안식일 개념으로의 주일성수를 거부하며 매일 자유롭게 참여합니다.

 

- 십일조와 기타헌금의 강제 규정이 없고, 성도 간에는 한 지체임으로 네 것과 내 것이 없이 자발적으로 연보합니다.

 

- 식사기도, 사도신경하거나 성경책을 지참해야 하는 등의 강제 규정이 없습니다.

 

- 성가대나 목사가 입는 성의란 주님이 죽으실 때 회장이 찟어짐으로 없어졌습니다.

 

- 새벽기도는 없고, 매일같이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 자유롭게 참석합니다.

 

- 성만찬, 침례만이 유일한 예식이고 이를 제외한 어떠한 예식 행위나 종교 행위를 거부합니다.


- 이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영적 교만을 멀리 합니다.


- 교단 교파, 신학이론, 교회 전통, 장로의 유전등을 주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보다 먼저하는 불신앙을 거부합니다.

 

- 주님의 말씀을 경외하기 보다는, 십자가나 예수님의 초상화등을 숭배하는 외형적 종교 행위를 거부합니다.


- 참 성전된 주님의 몸과 교회를 제처 두고 교회당 건물을 성전으로 여기는 종교 행위를 거부합니다.

 

- 교회 지체로써 한 몸된 영적 가족임은 등록서류가 아닌 신앙고백(구원 간증)과 만찬과 침례를 통하여 확인합니다.


- 전도는 삶으로 늘 함께 하는 것이고, 교회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교회 차원의 근신과 징계를 통하여 엄격히 다스려 주님 오실 때까지 교회를 늘 순결하고 정결하게 유지합니다.


- 교회 사역자는 교회의 필요에 따라 여러 사람을 둘 수 있으며, 교회 사역자와 직분자(장로, 집사등)는 세상의 계급이나 지위와 같은 서열이 아닌 봉사와 섬김의 자리임으로 회중에 군림할 수 없습니다.


- 교회 회중에 의해 선출된 대표 사역자는 사역 외 직업을 갖고 있다 해도, 매일 같이 교회 모임에 성도들이 올 수 있도록 교회당 문을 항상 열어 놓고 있을 의무가 있습니다.


- 교회 예배의 통신을 통한 예배 참석에 대하여 누구도 판단하여 정죄할 수 없습니다.


- 교회 내에서의 여가 활동및 나아가 우리의 24시간 전영역의 삶이 포괄적인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찬양에 포함 됨을 믿습니다.


- 한국교회에 이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 형식을 전하여 한국교회가 제2의 종교개혁을 할수 있도록 늘 기도합니다.

 

펌출처: http://boxs.kr/jua4y


[참고사항]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위한 20개조 반박문에 잘 맞는 교회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본받아 실천하려고 힘쓰고 애쓰는 성경적인 교회라고 생각하여 여러분들께 추천합니다!!


- 형제교회(노량진교회)

: http://noryangjin.or.kr/home/bbs/page.php?hid=link_local

 

- 모임뉴스: http://www.moimnews.or.kr/


개신교, 초교파, 개신교는 천주기독교가 되어 간다, 초기 기독교회로 돌아갑시다, 회개와 개혁, 천국지옥



 이춘우 목사: 미국 로고스 교회 (워싱턴주 다코마)

  동영상이 안 보일때: https://youtu.be/bQc3sBLsYtQ


 [주기] 설교자가 '십일조를 바치면 지옥간다' 라고 전한 성경적인 근거는?  


"회개하고 십일조를 중단해야 할 이유는? -> 다른복음=저주=지옥 심판"


(KJV)
But though we, or an angel from heaven, preach any other gospel unto you than that which we have preached unto you, let him be accursed.  

(NIV)
But even if we or an angel from heaven should preach a gospel other than the one we preached to you, let him be eternally condemned!

(개역한글)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 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표준새번역)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국내외 기독교회에서 제물 개념의 십일조는 성경 외의 다른복음입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모두 사망)의 발 앞에다 개인 재산을 내어 고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먹이고 입히는 것을 책임지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경제 체재 하에서는 성경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개인및 가정경제를 운영합니다. 만약, 성경대로 한다고 하면서 지금의 기독교회에다 개인-가정-기타 사람들이 재산을 모두 내어 놓고 교회가 책임진다면, 아마 교도소에 갈 사람들을 많이 양산해 낼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의 신약시대에는 사도가 없습니다. 그러니, 성경대로 할 수없는 이유가 충분합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에 각자 자원한 연보(십시일반의 기부금)를 스스로 정해서 내 놓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가르칩니다. 아멘입니까? 교회가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기준으로 하여 직분자를 투표해서 세우는 것은 성경에 없는 잣대입니다. 차라리 직분을 안받는 한이 있더라도, 십일조 설교나 십일조 내는 일은 중단하십시오! 

 십일조의 두 얼굴 / 박 양 목사(남포교회)  


2004 / 06 / 01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약에 존재하였던 주님의 모형이며 그림자들을 모두 제거하셨다고 믿었는데, 그러면 십일조는 구약의 요구입니까? 신약의 요구입니까? 신약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계시지요. 그것도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라는데 목사들은 용기를 얻고 있다!


그래서, 무지하지만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고하여 보고 과연 이 말씀이 오늘 신약시대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인가? 본인은 박식한 성경학자는 아니나 이 한 성경에서만 보아도 십일조라는 의미가 얼마나 거짓되고 가증하며 추악한 것들로 드러내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마 23:23)


대화에는 항상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 의미는 흑백의 논리처럼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마태복음 23장 전체의 내용을 보면 시종일관하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며 하시는 말씀으로 일곱 구절의 말씀은 서두에서 부터 “화 있을찐저”라고 저주를 전제로 하셨고, 또 33절에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는 그들의 결과론을 필설 하셨다.


더욱이,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 말씀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기 보다 오늘의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목회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데에 대해서 누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23장 서두인 2절에 이미 교황 같은 목사들을 일컬어 하시는 말씀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라고 하셨다. 어쩌면 이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새 오늘날 목회자들에 적중하는 말씀으로 탄복을 할 지경이다.


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함은 율법의 자리에 앉았음을 일컫는 말이요,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자리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기 위해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오늘의 목사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 위해 직분자들의 혈세인 십일조를 착취하지 않았는가? 아니라면, 어디서 도적질을 한 것인가? 연보며 감사헌금이며 십일조는 가난한자와 고아와 과부에게 사용하라고 한 물질이 아닌가?


수 천만원, 억대가 넘는 자가용들은 성도들의 피를 태우며 달리고 있지 않는가? 로마 천주교의 바티칸 궁전을 바라보고 손가락질하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십일조라는 면죄부로 궁궐 같은 가짜 성전들을 짓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너희들은 스스로 교황들이 되어 가난한 백성들의 혈세로 부를 누리고 있지 않는가? 멜기세덱은 드리는 자가 아니요 받는 자로 그 멜기세덱이신 예수는 자신을 드리시므로 속죄의 제물을 종결하셨고, 그래서 제사는 예배로, 모든 절기가 주일로, 제물은 우리 헌신으로, 십일조는 연보가 되지 않았는가?


십일조는 율법이요 강제적이라면, 연보는 은혜로 즐겨드리는 것이요, 또한 연보는 자신을 드려 이루신 십일조의 완성으로 전부를 드리는 것의 표(과부의 두렙돈)가 아닌가? 율법아래 있는 자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할 것이나, 율법의 완성 아래 있는 자는 모든 것이 주의 것으로 여기는 산 제사의 표본이 아닌가? 또 성전을 허물어 버리시고 우리를 성전을 삼으심이 아니신가?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이제는 실체로 나타나셨는데,왜 십일조는 그대로 존재해야 하는가? 말대로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나 연보는 전부의 드림이 아닌가?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다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으니 다 나누었으니 핍절한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들의 신앙은 율법적이요 계산적인 십일조가 아니라, 전부를 드렸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바울 서신들이나 제자들이 기록한 신약의 모든 성경을 훑어보아도 십일조를 하라든가 주일성수 하라는 가르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연보와 십일조를 어떻게 구분을 지어야 하는가? 아니면, 구태여 신약에 와서 본질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십일조를 다시 율법화하여 그리스도인들을 꽁꽁 묶어 놓으려는가?


신약시대에 십일조가 없었다는 사실은 바울을 통해 확실히 드러났다. 만일에 그 당시에도 십일조가 있었다면 바울이 구태여 천막을 지으며,(직업을 가지며) 또는 루디아를 비롯 많은 성도들에게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 또한 그러했으며 특히 일곱 집사들을 세운 것은 십일조의 관리를 위한 것이 아닌 성도들의 연보를 관리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더 확실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라디아서가 말하는 율법과 복음을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수차에 걸쳐서 다른 말들로 이해시키려 하지만 한국교회 직분자들은 바리새인들 같은 목사들 때문에 십일조라는 율법에 완전히 묶여 버리고 말았다. 구약의 율법은 쉽게 말해서 약속어음과 같은 것이라고 “윌리엄 헨드릭슨”의 갈라디아 저서에서 밝히면서 속어음은 현찰과 교환되고 나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 수 없는 버려진 휴지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큰 약속이라도 지키는 듯 목에 힘을 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다른 얼굴을 벗어 버리고 은혜의 얼굴 곧 그리스도의 얼굴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분 자신을 드려서 우리를 사신 것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 그분을 사야 한다. 나는 언제나 바울의 고백을 즐겨 듣고 본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리스도를 향하여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는 십일조라는 제도 자체오히려 가증스런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수양이나 물의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우리의 제는 죽은 제사가 아닌 산제사(롬 12:1)임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배의 어떤 의적인 날이나 제물이나 절기나 규례나 나타나 보이는 어떤 물질적인 것에 있는 것이 니라, 산 제사로서의 삶속에서 열매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으로 완성이 되었고, 이로 인해 모든 절기와 제사는 폐하여지고 안식 후 첫날인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로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아직까지도 성전이요 율법이요 절기며 제사와 십일조를 말하는 자들은 구약이나 율법을 이렇게 해석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율법을 완성하셨지, 율법을 폐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율법은 존재를 하여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런 말씀을 채택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17-20)


율법의 완성을 아래와 같이 답 하고 본질적인 것을 논하고자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30-31)


우선 근본적인 논리로 율법은 종이며 백성의 신분에서 지켜야 하는 법이라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하는 자들의 법으로 곧 하나님의 근본 사랑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바울서신들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서는 율법의 초등학문을 버리고 담대히 그리스도 앞에 서라고 요구하심을 보지 않았는가? 십일조는 레위지파와 과부와 고아와 객을 위해 지정된 것이다. 레위지파는 다른 어떤 분깃도 없다. 그러면 신약시대인 오늘날에도 레위인이 존재하는가? 결코 아니다.


구교 (펌게시자 주기:초기 기독교) 신교 (펌게시자 주기:기독교에서 변질되어 떨어져 나간 천주교)에 구약의 레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성도들 모두가 만인 제사장들이다. 그런데, 오늘 목사들은 자기를 레위인처럼 제장들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줄곧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성전이 어떻고 제단이 어떻고 제사가 십일조가 어떻고 절기를 찾으며, 그리스도를 완전히 욕되게 하며 성도들을 기만하고 있다. 은혜가 무엇이며 믿음이 무엇인가!


은혜 아래, 믿음 아래 있다고 하면서도 율법의 종처럼 굴어야 하겠는가? 생명의 피이신 곧 예수의 이름을 영접한 참 믿음생활을 하는 참 성도라면 그 영혼과 당신의 생활에서는 속박을 벗어난 새들처럼 자유로움과 다정함의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날 것이다. 고로 기독교란 예수 믿고 인간다워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다워 지는 것이다. 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도덕 군자의 피를 주신 것이 아니다. 당신의 피 곧 하나님의 생명을 주셨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격으로 살 수 있도록 말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명하기를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피조물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완전할 수 없었기에 인간은 율법의 명령을 어길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 보니 율법에 사로잡힌 바 되어 율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할지니, 율법의 규제를 받을 필요가 없는 완전한 권세를, 예수님 피를, 자유의 생명을, 주님 은혜로 값없이 받게 된 까닭에 인간들도 마침내 피조물만을 억압 할 수 있는 율법의 세력을 뛰어 넘어서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교회라고 하는 직분자들이며 제사장을 가장한 목사들이여! 아직도 제2의 이스라엘을 꿈꾸고 있다는 말인가? 율법의 노예들이었던 저들의 누추함이 그렇게도 좋아 보이던가 말이다. 진정으로 교회들이 십일조에 목숨을 걸 만치 중요한 사안이라면 왜 바울이나 사도들이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마 10:10)

 

또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눅 9:3)


그리고, 그 결과적인 답으로 그들에게 이렇게 묻지를 않으셨는가?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눅 22:35)


제자들이 복음 전도에 나섰을 때, 사도적인 권위나 제사장적인 위엄을 가지고 않고 님처럼 형제요 친구처럼 찾아갔던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모습은 형제요 식구요 친구처럼 모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율법적인 성전 세나 열한 지파에게 내는 십일조의 세는 더 이상 존재해야 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펌출처: http://lamp.kr/?p=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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