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장로. 집사. 목사는 설교및 전도를 맡은 사역자들이다, 회개와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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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종'에게 어딜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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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29일 ... 그날 설교는 주의 종에 대한 설교였다. 주의 , 즉 그 교회의 담임목사야말로 그리스도가 친히 부르셨고 기름 부어 세우셨다, 그러므로 누구나 ...

 

[추가자료]

 

원제목: 목사가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인가?

 

구약에서 기름부음은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왕에게 행해졌다고 한다. 만약, 목사가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건 아마도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평신도는 구약에서의 일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에,

 

 평신도와는 다르게 목사만이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 이라는 생각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미신적인 것이다.  

 

다른 세상 종교를 보라. 거기에는 늘 신적인 존재와 인간을 매개하는 성직자가 존재한다.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생각이 인간의 방법으로 신을 만나려고 하는, 진리가 아닌, 진리의 그림자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목사가 평신도와는 다르게 하나님과 더 친할 거라는 미신적인 생각이 바로  '성직주의' 이다.

 

많은 학자와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이 증거하기를 이러한 성직주의는 이교도의 영향을 받고 생겨난 것이라 한다. 성직주의는 다수 그리스도인 성도들을 무능하고 수동적인 존재, 즉 평신도로 가두어 두는 사악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 누구든 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신다 (요 17:21~26). 즉, 성직자와 구별된 평신도 또는 성직자보다 못한 평신도는 하나님의 목적에 반하는 존재이다.

 

만약, 평신도는 그냥 제사장이고 목사는 대제사장이 아니겠냐? 라는 논리를 편다면,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라고 선언하는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목사는 평신도와는 구별되는 기름부음 받은 거룩한 주의 종이라는 주장은 성경을 부정하는 주장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반 신약성경적인 용어인 평신도라는 말 대신에, '목사가 아닌 성도' 라고 구별하여 쓰겠다. 물론, 목사와 목사가 아닌 성도는 다르다. 거룩함의 정도가 다른 게 아니라, 교회에서의 기능이 다르다.

 

물론, 여기서 초신자는 논외다. 오직 거듭나고 선한 열매 맺는 성도들만 말한다. 목사, 장로, 집사는 거룩함의 정도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내에서의 기능 차이로 나뉘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특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에게 특히 더 존경을 나타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직분으로서의 목사와 다른 성도와 구별된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으로서의 목사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반대로, 만약 어떤 목사 직분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열매들을 맺지 못하고 죄를 짓는다면 그 목사 직분자를 사랑으로 권면하고 죄에서 돌이키게 할 의무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정도 두세사람의 증언이 있을 때 하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으므로 특히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맞다. 이러한 목사 성직주의를 은연 중에 심는 것이 바로 '유급 목사제도' 이다.

 

가르치는 직분자 (유대교의 랍비처럼) 로서의 유급 목사제도는 성경적인 제도가 아니다(신구약 모두에서). 그래서, 유급 목사제도를 주장하려고 갖다 붙이는 것이 가르치는 직분자로서의 목사가 아니라, 레위인 제사장으로서의 목사이다. 따라서, 유급 목사제도는 그 성경적인 근거로 구약의 레위 제사장을 들 수밖에 없고,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역행하는 구약으로의 회귀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유급 목사제도' 를 폐지하고 초대교회와 같이 자비량으로 가르치는 직분자로서의 목사를 길러야 한다.  

 

그 외의 행정 또는 치리하고 목양하는 기능들은 장로와 집사가 맡아야 한다. 목사, 장로, 집사는 교회 내에서 신앙의 선배로서 초신자들을 권면하고 양육하고 초신자들은 이들의 지도하에서 다시 목사, 장로, 집사로 성장해야만 한다. 초신자가 성장하지 못하고 계속 초신자로 머문다면 그건 이미 죽은 교회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급 목사제도에서의 교회는 거의 죽은 교회와 같다. 주변을 보라. 아기 때부터 죽을 때까지 크게 달라지지도 않고,

 

기름부음 받은 거룩한 목사만 쳐다 보는 평신도로 넘쳐나지 않는가? 이렇게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여러 세대를 거쳐 반복되면서 교회는 예수 재림 때까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야 한다. 또한, 유급 목사제도가 없어진다면 교회는 헌금의 많은 부분을 주변의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에게 쓸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신 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끝으로. 누가 이러한 변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가?

 

 아마도, 목사들이 스스로 개혁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스스로, 유급 목사직에서 물러나고 '자비량 목사' 로서 진정으로 교회를 섬기는 수 밖에  없다.  

 

지금, 소위 평신도가 이것을 억지로 이루어 내려고 한다면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 사상에 물든 순진한 신도들이 목숨 걸고 목사들을 지켜내려고 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세상에 덕이 될 수 없고, 서로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점을 이미 알고 있는 사역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성도들이 이런 미신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펌출처: https://is.gd/A32m7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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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1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신교, 초교파,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자살하면 지옥간다고 가르치지는 않으나 자살을 살인과 동일하게 본다, 우울증의 정신질한으로 인한 자살이 많기에 자살은 지옥이라고 일반화할 수없다, 기도하면서 신경정신과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읍시다!

 

이미지 출처(자살이 죄인가요?): http://www.yejja.org/?p=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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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자살과 구원

 

안녕하세요. 매주 설교 말씀으로 은혜받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기 원하는 초신자 입니다. 어렵고 힘든 주제인데, 자살한 크리스쳔들은 구원받을 수 있나요? 목사님들 마다 말씀하시는 구원 여부가 다른 것같은데요. 이 부분은 오롯이 하나님의 영역일까요?

 

 

[답변1]

:

훈련을 담당하는 목사입니다. 간략히 답변을 드릴께요.

 

자살에 대한 기본적 전제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 믿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자살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을 열어 놓은 부분은 그가 신앙생활을 충실히 해왔고, 질병으로 인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에는 구원받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2번 째의 경우에는 그의 신앙과 행동에 대해서 해석적인 판단이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았다,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자살의 문제를 떠나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펌출처: 분당우리교회, http://www.woorichurch.org/bwoori/

 

[답변2]

 

 동영상이 안보일 때(크롬 사용)

: https://youtu.be/ESO-pbt_UrI

원출처: 매일배움 by 개혁된실천사

 

[답변3]

 

 동영상이 안보일 때(크롬 사용)

: https://youtu.be/8vWBJX-eMng

원출처: 정봉기

 

끝까지,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개신교, 초교파, 개독교 또는 먹사라는 비방을 받고도 회개와 개혁을 외면한다면 이미 맛을 잃어버린 소금 덩어리이다, 우매한 장로. 집사들이 너무나 많다, 천국지옥

 이미지 출처: https://is.gd/Q9RGnm , https://is.gd/u4NAQ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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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목] 어떤 미친, 멍청한, 도적이 말하기를 ‘십일조를 먹사에게 바치라’고 말한다

 

글쓴이: esus     2010. 1. 25    

출처: https://bit.ly/2YsZKvy

십일조구약시대에, 모세율법에 의해,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위해 주어진 수이다. 십일조의 의무는 반드시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를 제외한 11지파가 낼 의무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십일조의 의무와 권리’에 아무 상관없는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고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지는 법이다. 이방인은 십일조를 바칠 수도 없고, 성전에서 받지도 않는다.

 

그런데, 구약시대도 아닌 신약의 교회시대에 이방인 한국 사람이나 기타 모든 이방인들에게 모세 율법을 인용하여 십일조를 내라고 강요하는 건, 100% 사기꾼의 짓이고,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또한 우매한 사람들이다. 십일조의 권리는 레위 지파만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십일조는 레위 지파만 받을 권리가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요, 레위지파도 아닌 한국인이나 그 외 모든 이방인의 먹사란 자들이 십일조를 거두어 레위인들에게 바치지 않고 저들이 가로 채니 이들이 곧 횡령꾼이요, 사기꾼이다.

 

그러니, 십일조 거두는 모든 먹사들이 이유 없이 다 횡령꾼이요, 사기꾼이다. 말라기 3:8에서 십일조와 헌물여호와의 이라고 기록된 것은? 레위인들은 '여호와께 돌려진'(죽어 제사된) '내 것' 이라고 공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레위인이 ‘내 것’이니 레위인들에게 돌려질 ‘십일조’도 역시 ‘내 것’이란 설명이다. 이 때문에, ‘내 것이 되는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가 '나의 것' 이라고 했을 뿐이다.

 

(말라기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했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민수기 3:41)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죽여서 제사,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마태복음 23:23~24)

예수님이 하신 말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義)인애(仁)(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십일조)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십일조)는 삼키는도다."

 

성경에 무식한 자는 예수님도 십일조를 내라고 했다며, 지금의 교인들도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지꺼린다. 어리석고, 무식하고, 악한 자여! 예수님 당시엔 구약시대이고 율법시대이니, 당연히 십일조를 내야 하고 받아야 한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냈으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로 율법을 다 폐하신 후인 신약시대에는 모세 율법에 의한 십일조는 아무도, 그 누구도 당연히 낼 의무도 없고 받을 권리도 없다.

 

만약, 일조를 내는 자가 있거나, 받는 자 있다내는 자받는 자 모두는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된다. 폐하여 진 구약의 모세 율법을 실행하는 신약의 그리스도의 율법을 거역하게 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율법 아래에 나셨고, 구약시대에 구약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분이었다. 오늘날에도 오래되고 폐하여진 유신 헌법을 지키는 자가 있다면, 분명 그는 ‘법을 행하는 자가 된다. 아니면, 미쳤던지..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의 모세 율법에 의해 십일조를 내라고 공갈 협박하는 자가 있고, 그 말에 속고 두려워 십일조 이상을 바치는 자들이 엄청 많다. 사실은, 그런 교회 현상을 보면서도 멍청한 맹꽁이들은 그게 좋습니다, 좋고 말고요! 라면서 춤까지 춘다.먹사들이 이 악한 짓을 한다고 믿는 사람이 없는가 보다. 울고 싶다. 울어 버릴까? 말까?

 

- 끝 -

 

끝까지, 1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신교, 초교파, 설교는 성경을 해설하는 보조 자료이다, 회개와 개혁, 천국지옥

 

이미지 출처: https://is.gd/fdFx4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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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에 영적으로 유익한 자료라 생각되어  

 스크랩해서 큰글자로 게시합니다! 

 

[원제목] 현대 설교의 문제 (1) 

 

< 유기적 교회의 방해 요소 (26) >         

 

** 글은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기독교 신문인 <크리스찬 저널>요청으로 2010가을부터 2013가을까지 격주로 기고한 글입니다 **

 

유기적 교회의 방해 요소

 

이제 오늘날의 개신교 예배에서 가장 신성시 하는 관습을 유기적 교회의 방해 요소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다름 아닌 ‘설교’ 입니다.

 

다른 요소들도 그렇겠지만, 특히 오늘날 설교는 교회가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교회들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보통 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

 

만일, 오늘날 교회의 예배에서 설교를 빼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에 다닌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다른 순서들은 설교의 악세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에서 설교가 사라진다면 아마 출석률이 곤두박질치고 교회당이 텅텅 비게 될지도 모릅니다.

 

프랭크 바이올라의 '이교에 물든 기독교' 중에서 일부

 

설교는 개신교 예배 의식의 대들보와 같다. 지난 500년 동안 설교는 시계가 돌아가듯 규칙적인 역할을 했다. 주일 아침마다 목사는 강단에 올라가서, 의자를 덥히며 수동적으로 앉아 있는 청중을 향해 인상적인 연설을 한다. 설교가 얼마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지,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것 때문에 교회를 다닌다. 사실, 예배 전체가 종종 설교의 질에 따라 평가된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지난 주일 교회가 어땠었는지 물어보면, 거의 틀림 없이 설교에 관해 듣게 될 것이다. 요컨대, 현대 기독교인 사고방식은 대개 설교와 주일 아침 예배를 동일시한다. 러나,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설교를 없애 버리면 당신은 수많은 신자를 위한 영적 양식의 가장 중요한 밥줄을 끊어놓게 된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설교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현대 교회에는 거의 모든 모임에 설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일 아침예배 만 아니라, 주일 저녁예배, 수요일 저녁예배, 새벽기도회, 구역 모임, 각종 헌신 예배에도 설교가 중심을 차지합니다. 또, 심방 때도 설교는 안 빠집니다.

 

심지어, 목사들의 친목 모임에도 설교는 꼭 들어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현대 교인들은 평생 수천, 수만 번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실로, ‘설교 만능주의’ 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설교 중독’ 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대 설교가 성경적인가?

 

그렇다면, 이런 현대 설교가 과연 성경적일까요? 오늘날의 교인들은 의심 없이 현대 설교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도 오늘날과 같이 예배를 했고, 또 그 예배의 중심에 설교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난 2천 년 동안 그것이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의 설교가 그 바통을 이어 받았을 것이라고 단정짓습니다.

 

이런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현대 교인들에게 현대 설교에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한다면 아마 참람하게 들릴 것입니다. 이단이라고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의 설교는 예수님이나 사도들, 또는 1세기의 사역자들이 메시지를 전했던 것과는 판이한,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설교입니다.

 

무엇보다도, 신약 성경에 나오는 1세기의 지역교회들에서는 똑같은 사람이 매주 규칙적으로 수동적인 똑같은 청중을 향해 다듬어진 연설 형식, 그리고 일방적인 선포 형식의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식의 설교는 성경과는 거리가 먼, 한참 후에 등장한 이교에 뿌리를 둔 설교입니다.

 

현대 기독교 설교의 유래

 

현대 설교의 유래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한 프랭크 바이올라로 부터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은 그의 책  이교에 물든 기독교의 145- 147 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프랭크 바이올라의 '이교에 물든 기독교' 중에서 일부

 

“설교의 진원지를 찾으려면 우리는 소피스트(Sophists: 궤변론자)라고 불렸던 주전 5세기의 떠돌이 교사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소피스트는 수사학(rhetoric: 설득력 있게 말하는 기술)을 만들어 낸 장본인들로 알려졌다. 그들은 제자들을 택했고, 또 그들이 하는 연설의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 소피스트는 전문적인 토론가였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팔기’ 위해 외모에 신경을 쓰고, 감정에 호소하고, 재치 있는 말을 구사하는데 능했다. 머지않아, 소피스트의 스타일과 형식과 연설 기술이 그들이 말하는 내용의 정확도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스타일을 위해 스타일을 개발하다’ 라는 강령을 내건 전문가 집단을 양산해냈다. 그들이 외친 진리는 그들의 삶 속에서 실천된 진리가 아닌 추상적인 것들이었다. 그들은 실제적이 아닌 형식을 모방하는 데 있어 숙련된 달인이었다. 스피스트는 그들이 입는 특별한 옷으로 자신들을 식별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고정된 장소에서 똑같은 청중에게 정기적으로 연설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갈고 닦은 연설 기량을 과시했다 (이렇게 해서 수입이 제법 짭짤했다). 때때로, 그리스 연설가는 ‘이미 마련된 강단용 가운을 입고’ 그의 강연장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연설하기 전에 강단으로 올라가서 연설가 전용 좌석에 앉았다 1세기 후에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384-322 BC)는 세 개의 개요로 연설하는 것을 수사학에 가미시켰다. 그는 ‘전체가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머지않아, 그리스 연설가들은 그들의 연설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가지 개요 원리를 접목시켰다. 그리스인들은 수사학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래서, 소피스트에 대한 대우가 좋았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했을 때, 로마 사람들 또한 수사학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와 로마 문화는 누군가에 의한 유창한 연설을 듣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욕구를 개발시켰다. 이것이 얼마나 유행했는지, 저녁식사 후에 전문 철학자에게서 ‘짧은 설교(sermonette)’를 듣는 것이 일종의 정기적인 엔터테인먼트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수사학을 가장 위대한 예술의 하나로 여겼다. 따라서, 로마 제국의 연설가들은 오늘날의 미국인들이 영화나 프로 스포츠 스타들을 떠받들 듯 아주 화려한 지위를 영위했다. 그들은 당대에 찬란하게 빛나는 스타들이었다. 연설가들은 단순히 그들의 탁월한 연설 능력만으로 청중을 열광시켰다. 당대의 첨단 과학이었던 수사학의 교사들은 모든 주요 도시의 자존심이었다. 그 도시들이 낳은 연설가들에게 명사의 지위를 줬다. 요컨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이교의 설교에 중독되어 있었다..마치,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설교에 중독되어 있듯이...

 

제가 지난 40년 가까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설교와, 목회자로서 수천 번 했던 설교를 종합해 볼 때, 현대 설교의 뿌리가 성경이 아닌 그리스 수사학에 있음을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펌출처: http://www.yejja.org/?page_id=606 )

 

- 끝 -

 

[장로. 집사. 목사 사역자가 필독해야 할 연재 메시지]

 

 현대 설교의 문제(2): http://www.yejja.org/?page_id=609 

 현대 설교의 문제(3): http://www.yejja.org/?page_id=611 

 현대 설교의 문제(4): http://www.yejja.org/?page_id=616 

 현대 설교의 문제(5): http://www.yejja.org/?page_id=619 

 현대 설교의 문제(6): http://www.yejja.org/?page_id=621 

 현대 설교의 문제(7): http://www.yejja.org/?page_id=624 

 

끝까지,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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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출처: https://is.gd/qrDWcC

 

[JOY N TALK]한국 교회 실패 원인 10가지   url을 클릭하세요!!

 

[JOY N TALK]한국 교회 실패 원인 10가지

한 해 문 닫는 교회 3000곳 (실패원인 10가지) 3000. 해마다 문을 닫는 교회의 숫자다 한국교회 목회실패의 원인 10가지를 알아보자 1. 뚜렷한 목회전략 없이 개척 많은 목회자들이 건물을 얻으면 쉽게 교

www.cts.tv

www.cts.tv/news/view_card?ncate=THMNWS18&dpid=249647 

2019. 5. 27.
해마다 문을 닫는 교회의 숫자다. 한국교회 목회실패의 원인 10가지를 알아보자. 1. 뚜렷한 ... [JOY N TALK] 어린이들의 삶을 바꾸는 성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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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Messenger

'한국교회 실패 원인 10가지'에 공감합니다. 다만, 신약교회에서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 형태(예수 십자가 대속으로 짐승제사 폐지)의 헌금은 없으나, 사람에 대하여 베푸는 각자 자발적인 연보 한가지(사례: 예루살렘 기근시, 십시일반의 밭작물 또는 화폐로 추정)는 허용하고 있음을 기록해 놓았는데, 성령의 감동을 받은 바울의 복음서를 참고하여 본다면, 헌금은 폐지되고 각자 연보를 거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개신교, 초교파, 삼위일체는 콘스탄틴 황제와 1800명의 주교 중 삼위일체 지지자 318명이 투표로 결정한 태양신 숭배의 바벨론 삼신 교리이다, 양태론은 삼위일체에게 패배하여 이단교리가 되었고 종교재판소에 의해 살육 당한 교리가 되었다, 천국지옥

 

       이미지 출처: http://blog.daum.net/wwwwp/524

 

[Messenger 歸結]

 

삼위일체송을 부르고, 삼위일체 구조로 만든 사도신경을 하고, 삼위일체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베풀고, 삼위일체 이름으로 축도하는 것은 성경의 음녀인 가톨릭을 따라 가는 일이며, 음녀의 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배에서 즉시 중단하고 회개하십시오! 삼위일체는 태양신을 숭배한 바벨론의 삼신 교리에다 성경을 짜깁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자료를 정독하시면 성령과 말씀이 영을 바르게 분별시켜 주실 것입니다.

 

[원제목] 삼위일체 교리의 오류

 

펌출처: https://is.gd/gJIeCI 

원출처: https://is.gd/9x1y9y

 

(신 6:4)  "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시니.."

 

필자는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삼위(三位)로 존재하시는데, 그 삼위는 하나이다라는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에서 받아 들여진 이유는, 사람이신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형태로 이 땅의 메시야로 오셨다는 개념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같이 식사를 하셨고, 창세기 32장에서 그 분은 야곱과 씨름을 하셨다. 무한 능력의 하나님은 자신을 어떤 형태로든지 나타내실 수 있다. 이러한 일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세분(細分)해 버리는 엉성한 교리가 꼭 필요한가? 삼위일체론자들은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셋으로 나눈다. 성경은 하나님이 셋으로 나누어진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삼위일체라는 것은 성경 용어가 아니다.

 

삼위일체는 이방종교로 부터 차용하여 인간이 만들어낸 교리에 불과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한분이라고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삼위일체 교리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1/3 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냥,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받아드리는 것이 더 쉽지 않은가?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그분은 자신을 여러 형태로 계시하실 수 있다. 사람들이 만든 교리에 맞도록 자신을 셋으로 쪼개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아버지?

 

(마 1:20) "그가 일들을 생각할 때에, 보라,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아내 마리아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녀 안에 수태된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마리아를 수태시킨 분이 성령이라면 성령이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성령과 성부 하나님 둘 다 아버지 하나님이 된다는 뜻인가?

 

성령이란?

 

성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흐(Ruach, 스트롱 색인번호: 7307)이며, , 공기, 바람등으로 정의 된다. 신약성경의 언어인 헬라어로는 프뉴마(pneuma, 스트롱 색인번호: 4151)인데 동일한 의미이다. 말 그대로, 성령은 하나님의 숨결인 것이지, 분리된 하나의 신격이 아니다. 성령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들을 살펴보자.

 

(창 1: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고후 3:17) "이제 주께서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거기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빌 1:19) "너희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 주심을 통해 이것이 나의 구원으로 바뀔 줄 내가 알므로.."

 

(고전 15:45)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윗 구절들에서, 성령을 아버지(Father)나 아들(Son)로 대체시켜도 아무런 지장이 없지 않은가? 성령은 그 자체가 독립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호흡이나 하나님의 을 나타낸다.

 

(9:6) "이는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 조언자,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화의 통치자 것이기 때문이라."

 

이 구절에 삼위일체의 개념이 있는가? 예수님은 아들이신데, 또 아버지라고 불리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음의 구절을 한번 살펴보자.

 

(10:30) "나와 아버지 하나이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만 보아도,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적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라 하신다. 삼위일체 교리 신봉자들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 나와 내 아버지는 2/3의 하나님이니라. 예수님은 또 말씀하신다.

 

(14: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자는 아버지 보았거늘 어찌하여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 보여 주소서 하느냐?"

 

예수님은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이기도 하다. 신격의 분리나 나눔은 없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오류다.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오직 하나이시다. 그분은 3위 하나님의 집합체가 아니시다. 그분은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을 나타낼 수 있지만, 그분 자체는 하나이시다.

 

(사 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부터 너를 지은 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모든 것을 만드는 니 곧 홀로 하늘들을 펼치고 친히 땅을 넓게 펼치며.."

 

윗 구절을, 예수님에 관한 구절인 골 1:15~18절과 비교해 보라.

 

(1:15~18) "그분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창조물의 처음 자이시니,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 되었노라. 또한, 그분께서는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그분께서는 교회의 머리시니라. 그분께서 시작이시요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자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에서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윗 구절에서는 예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격하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자신이시다.

 

(63:16) "틀림없이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비록, 아브라함은 우리를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의 구속자시니 주의 이름은 영원부터 있나이다.

 

윗 구절의 '주'는 아버지 뿐만 아니라, 구속자이신 예수님이기도 하다.

 

(43:11) " 나는 니라.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윗 구절들은 '주'가 아버지요, 구속자요, 구원자임을 밝히 말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자들은 굳이 하나님을 분리시켜서, 성부 하나님의 역할과 구속자로서의 성자 하나님의 역할로 나누려 한다. 교리가 점점 복잡하게 꼬이게 된다.

 

주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주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과 메시야는 한분이시고 동일한 분이시다. 단순 명쾌하지 않은가? 오직 한분 하나님만 계신다. 성육신 前의 메시야는 누구인가? 성육신하신 메시야 바로 그분이다. 그분이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이시고, 주님이시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삼위일체론자들은 그들의 교리를 지지하기 위하여 다음 구절을 자주 인용한다.

 

(1:26~27)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 A.D.325) 이전에는 let us(우리가) 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천사들과 함께 말씀하심을 의미하였다. 삼위일체론자들은 천사들은 창조 사역을 할 수 없으므로 윗 구절에서 사용된 복수 형태의 어휘(us, our)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 주장이 옳다면, 27절에서도 복수 대명사(they, their)를 사용해야 되지만, 단수 대명사(he, his)가 사용되었다.

 

창조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바라(bara)인데, 이 동사는 단수 명사와만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26절의 복수 대명사는 하나님이 천사들과 함께 말씀하심을 의미하며, 창조 사역 자체는 하나님 한 분만 행하신 것이다. 창세기의 다른 구절에서도, 우리들(us)이라는 표현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지칭함을 보여준다.

 

(3:22~24)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가운데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하시고,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에덴의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사 그를 땅에서 취하였으므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께서 남자를 쫓아 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에하드(Echad; 하나)

 

삼위일체론자들은 신명기 6:4절의 쉐마 이스라엘에 사용된 히브리어 echad가 복수 형태임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삼위를 주장한다. 하나님이 삼위가 아니라면, 단수 형태의 yachid가 사용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있는 논박이지만, echad의 용례를 모두 찾아보면, echad절대 단수(오직 하나)를 표현할 때도 사용됨을 알 수 있다.

 

(4:8) "(echad) 사람이 홀로 있고 대신할 자가 없으니 참으로 그에게는 자식도 없고 형제도 없도다. 그럼에도,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으며 또 그의 눈은 재물로도 만족하지 아니하고 또 그가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해 수고하며 내 혼에게서 좋은 것을 빼앗는가? 하지도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며 참으로 쓰라린 해산의 고통이로다."

 

(삼하 13:30) "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죽이고, 하나(echad)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하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삼하 17:12) "이처럼 우리가 그를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습격하되, 마치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그의 위에 내려 앉아 그와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echad)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삼하 17:22) "이에 다윗이 일어나서 자기와 함께 있던 온 백성과 함께 요르단을 건넜더니,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요르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하나(echad)도 없었더라."

 

엘로힘(Elohim)

 

삼위일체론자들은 또한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복수인 elohim임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삼위를 주장한다. 그러나, elohim이 복수 형태인 것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절대적 권능과 주권으로 모든 천지 만물을 포괄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elohim 이 복수이긴 하지만, 단수처럼 사용되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 '나' 곧 네 하나님, 여기서 우리 네 하나님이라고 표현되지 않았음에 주목하라!) 몇 구절만 살펴 보자.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네 하나님(Elohim)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9: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 하나님(Elohim)이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할지니라."

 

(5: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네 하나님(Elohim)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41:13) " 네 하나님(Elohim)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하리라."

 

마태복음 28:19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 아들 성령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삼위일체론자들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보여주는 구절이다. 다른 복음서나 서신서에서는 침례를 줄 때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행하는 것을 주지하라. 윗 구절에서 과연, 성령의 이름이 무엇인가? 이 구절로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은 무리한 비약인 것이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받은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며,

 

엘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엘엘리욘(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고, 창조자. 구속자,.주권자. 심판자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다. 광대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

 

(요일 5:5~8)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로 오셨느니라.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이는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하늘에 증언하는 분이 계시니 아버지 말씀과 성령이시라. 또, 분은 하나이시니라. 땅에 증언하는 셋이 있으니 영과 물과 피라. 셋이 하나로 일치하느니라."

 

마태복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론자들은 이 구절이 삼위일체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이 구절은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에 대한 증인을 여러 각도로 보여 주시는 것이다. , 하늘의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처럼, 땅에서는 물(침례), (십자가 처형)와 성령이라는 말이다. 다음 구절을 보면 더욱 명확해 진다.

 

(눅 3:21~22) "이제 백성이 침례를 받았을 때에 예수님께서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몸의 형태로 그분 위에 내려오시고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어떤 기도를 드릴지 몰랐단 말인가? 삼위가 서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이것은 명백한 다신론이다. 필자는 예수님의 기도는 그분의 人性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 그분은 인간으로서 기도를 드린 것이며, 하나님의 일부분(성자) 으로서 다른 부분의 하나님(성부)께 기도하신 것이 아니다.

 

무한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태 안에 내주하심을 묵상해 보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완벽한 사람이셨다. 그분은 시험 받으셨고, 배고프셨고, 고단했고, 우셨고, 고통을 느끼셨고, 따돌림 당하셨고, 인간의 죽음까지 경험하셨다.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께 힘을 주십사하고 기도드린다.

 

사람이신 예수님께서도 연약함을 느끼실 때, 그분 자신의 하나님됨과 권능에 의지하려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은 기도하실 필요가 없다. 따라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은 그분의 인성을 나타내신 것이다.

 

어떤 이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만(6:9의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경우 처럼), 꼭 그렇게 한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혼자서 기도하시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26:37~45)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을 데리고 가시면서 비로소 슬퍼하시며 몹시 괴로워하시더라.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이 심히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멀리 나아가사 얼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오사 그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도대체 너희가 나와 함께 시간도 깨어 있을 없었느냐?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니라. 그분께서 다시 번째 나아가사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잔이 내게서 지나갈 없거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오셔서 보시니, 그들이 다시 자더라. 이는 그들의 눈이 무거웠기 때문이더라또, 그분께서 그들을 떠나 다시 나아가사 번째 같은 말씀들로 기도하시고, 뒤에 자기 제자들에게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시각이 가까이 왔으니 사람의 아들 배반을 당해 죄인들의 손에 넘겨졌느니라."

 

왜,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는가?

 

(27:46) "아홉 시쯤에 예수님께서 소리로 외쳐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은 ,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이라."

 

삼위일체론자들은 윗구절을,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짊어 지셨을 때,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그분을 버려야만 했으며, 성자 하나님은 버림을 받으셨다라고 해석한다. 삼위 하나님을 별개의 개체로 이해하는 순간, 당신은 다신론을 인정하는 셈이다. 삼위의 개념이 조금이라도 개입되면, 일체라는 개념이 파괴되는 것이다.

 

또한, 윗 구절은 예수님이 버려 지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셨을 뿐이다. 이 말씀은 시 22:1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이다. 말씀을 인용했다는 것과, 실제적으로 버려 지셨다는 것은 같지 않다.

 

(21:1)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는 일로 부터 나의 울부짖는 말로 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나이까?"

 

예수님은 단순히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신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신 것인가?..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두가지 모두일 것이다. ,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 지시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그 고통속에서 시편을 인용하여 표현하신 것이다.

 

죄 없으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짐을 짊어 지셨을 때, 버림받았다고 느끼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고, 죄와 공존하실 수 없으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시다.그런데, 인류의 죄짐을 다 지셨으니, 메시야로서의 딜레마(dilemma)에 빠지신 것이다. 심판자로서 동시에 구원자가 되셔야 했기 때문이다.    

 

(63:4~5) "원수 갚는 날이 마음 속에 있고 내가 구속할 자들의 해가 이르렀으나, 내가 보니 도와주는 자가 없었으며, 떠받쳐 주는 자가 없었으므로 내가 이상히 여겼노라. 그러므로, 팔이 내게 구원을 가져왔으며 격노가 나를 떠받쳤느니라."

 

윗 구절을 다음 구절과 비교하라.

 

(1:68~72) "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사 구속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자신의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존재하던 자신의 거룩한 대언자들의 입을 통해 그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들과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려 하심이요. 또,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긍휼을 이루시고 자신의 거룩한 언약.."

 

하나님은 죄를 가까이 하실 수 없으시고, 인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자기 자신 조차도 구속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성과 인성, 그 둘 모두를 취하셨다. 그분의 신성은 죄 없는 완벽한 희생물이 되었고, 그분의 인성은 세상 죄를 다 짊어지신 것이다. 시편 22:1절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은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갈등을 표현 하셨으며, 또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당하시는 그분의 고통을 표현하신 것이다.

 

한분 하나님

 

(14:9) "또, 께서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되시리니, 날에는 계시며 그분의 이름도 하나만 있으리라."

 

(2:10)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더럽힘으로 사람이 자기 형제를 대적하며 배신하느냐?"

 

(막 12:29, 3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모든 명령 중에서 첫째 명령은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주이시니, 서기관이 그분께 이르되, 옳소이다.선생님이여!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 외에 다른 이가 없으므로 선생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나이다."

 

(3:30) "할례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할례자를 믿음을 통해 의롭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엡 4:6) " 하나님이 계시니,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위에 계시고 모든 것에 두루 계시며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

 

(딤전 2:5)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고전 8:6)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노라. 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2:19) "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으니,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삼위일체론자들은 왜 성경에서 한 하나님이 계시니라.라는 구절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삼위일체론은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 끝 -

 

하나님의 신관을 바르게 가지십시오!

끝까지, 긴 글을 1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신교, 초교파, 사단이 조작한 신비체험을 했거나 신비체험 대본을 만들 수있다

 

이미지 출처: https://is.gd/s9JWyu , https://is.gd/G9aS2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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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료 - 원제목] 천국과 지옥간증을 분별하려면! 

 

만약, 장로. 집사. 목사 사역자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면, 후자를 말씀하시겠습니까?

 

 왜, 성경의 천국지옥을 믿지 않았느냐?  

 왜, 천국지옥 신비체험 간증을 믿지 않았느냐? 

 

글쓴이: 그리운 소리

(다음 카페 - 광야의 소리, 2012년 10월 자료)    

 

누구를 비판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분별력이 없어 마귀에게 속은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없는 말을 지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출처야 어찌 되었든, 그 누군가로 부터 듣고 보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고 싶은 열망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열정!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떠한지는 몰라도 인간이 보기에는 영혼구원에 대한 그 열정이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많은 사람들이 OOOO교회의 '지옥의 소리'가 진짜냐? 가짜냐? 하는 진위 판단에 대한 물음이 메일을 통해서 또는 문자를 통해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을 계속해 주다 보니, 끝이 없을 것 같아 지면을 통해서 분별력을 심어 주기로 한 것입니다.

 

OOOO교회의 '지옥의 소리'에 들어가 보면 신앙에 도움에 되는 간증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의 죄악상들이나, 목회자 부인들과 자녀들이 지옥간 것이나,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지옥을 가게 된 죄들이나, 왜 지옥을 가게 되는가? 어떤 죄들이 지옥을 가게 만드는가?..등등에는 성경과 어긋난 점이 별로 없습니다. 문제는 지옥과 천국의 간증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사탄의 활동입니다.

 

본인들이 사단귀신론에 많은 지식을 갖지 못하다 보니, 자신들도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요! 지옥은 누구를 위해 만들었습니까? 그리고, 사단과 그의 추종자 귀신들이 가서 형벌을 받을 곳이 어디입니까? 마태복음 25: 41절에 보면,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로 되어 있습니다.

 

지옥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타락한 천사들 즉 사탄(루시퍼)과 그를 추종하던 귀신들(마귀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영원한 불못인 감옥입니다. 구약 히브리어로 말하면, 게헨나 입니다. 게헨나는 쓰레기를 불태우는 곳입니다. 이것을 지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탄과 귀신들 즉, 쓰레기 같은 존재들을 불태우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이란? 유황불이 타는 무서운 곳입니다. 그 지옥에 누가 들어갑니까? 사단과 마귀들이 들어가서 형벌 받을 곳입니다. 나중에는 죄짓고 회개가 없는 죄인들이 들어가서 형벌을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 간증 들을 때 그것이 진짜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인지, 마귀가 역사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간증 속에서 누가 지옥의 주인인지 살펴 보십시오! 천국과 지옥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지옥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간증 속에서 마귀와 귀신들이 지옥의 주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형벌을 주고 있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지옥은 타락한 천사들(사단과 마귀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자기들(사단과 마귀들)이 유황불 타는 못에 들어가서 형벌받을 곳입니다. 그런데, 사단과 마귀들이 지옥의 주인이 되어 인간들을 벌 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사단과 마귀들이 가짜 천국과 가짜 지옥을 홀로그램처럼 만들어 놓고 인간 영혼들을 끌어다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 가짜 천국과 지옥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사단과 마귀들)은 왜 가짜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을 믿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대혼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는데까지만 가고, 성경이 멈춘 곳에서 멈춰야 합니다. 성경에는 지옥에 대한 소개를 짧은 지면을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사람으로 소금치듯함을 받으리라..타는 유황못에 던지리니.." 등등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더이상 나가서는 안됩니다.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은 인간의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게만 소개한 것입니다. (중략) 안젤리카의 천국지옥 간증 동영상도 내게 있습니다. 인터넷 싸이트에 올라가 있는 천국지옥 간증들은 거의 다 들어보았습니다. 여러분 ! 천국과 지옥 간증에는 반드시 사탄의 역사라는 단서가 있습니다.

 

끝까지, 1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Messenger 라는 X은 누구야? 

 허구한 날, 삼위일체만 갖고 그러게! 이단 아니야? 

 

개신교, 초교파, 삼위일체송. 사도신경. 삼위일체 이름으로 침례. 삼위일체 이름으로 축도하는 것을 중단하고 예수 한분 하나님 이름으로만 해야 한다, 천국지옥

 

이미지 출처: https://is.gd/HdQbPR (가톨릭및 개신교가 공동 사용하는 삼위일체임!)

 

[필독자료] 가톨릭 자료의 원제목은? "삼위일체는 가톨릭 핵심을 이루는 교리"

 클릭하세요(개신교 자료)

: NCCK, 천주교와 손잡고 교회일치운동 

 

 클릭하세요(가톨릭 자료)

: https://blog.naver.com/bhoon/220953964261 

[Messenger 歸結]

 

삼위일체를 따르는 한국 개신교와 독립교회는 가톨릭의 삼위일체 교리를 쫒고 있는 것입니다. WCC및 NCCK 가입 9개 교단은 삼위일체를 믿고 따르는 교회들 단체라고 말합니다. 이쯤 되면, WCC및 NCCK 가입 9개 교단이나 WCC및 非NCCK 교단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종교다원주의만 반대하신다고요? 삼위일체가 가톨릭 교리임을 모른채로 성경처럼 믿는 것은 한국교회가 똑같습니다. 개신교 신학교에서 삼위일체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이 기가 막힐 일이지만, 바벨론의 바알교 삼신을 기초로  만든 삼위일체를 A.D 325년에 당시 황제와 삼위일체 지지하는 수백명 주교들에 의해 투표로 결정한 사실을 한국 개신교 장로. 집사. 목사 사역자 분들은 잘 모르시는 것같습니다. 

 

A.D 325년 이전에는 삼위일체의 '삼' 자도 없었고, 삼위일체와 경쟁했던 양태론의 '양' 자도 없었다니까요. 양태론은 삼위일체를 신봉하는 중세 가톨릭에 의하여 이단으로 몰렸고, 삼위일체 반대자들을 약 5천만~6천만 명이나 살육했으니, 사단의 살인 교리인 셈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살육까지는 안하지만, 성경을 왜곡시킨 교리를 따르게 하여 666인(사단의 인, 666은 베리칩이 절대로 아님!)을 받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와 독립교회는 정신 바짝 차려야만 합니다. 구약에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거짓 신이 안계셨고, 신약은 더더욱 삼위일체 거짓 신이 안계십니다.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 명이 있었다는 말씀의 위로가 엘리야에게 임한 기록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현대교회를 위해서도 가톨릭 삼위일체 교리에 무릎꿇지 않은 7천 명(반드시 7천 명이라기 보다는 7천 명 이하 또는 이상의 상징적인 숫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사도신경(삼위일체 구조로 만든 신조)을 믿지 않으면, 무조건 이단이라고 정죄해서 사람을 살육하라고 성경에서 요구한 적 있으면 성경구절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저는 개신교 예수복음 전도자 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귀를 막고 듣지 않는 장로. 집사. 목사 사역자 분들께 연재해서 알려 드리냐면, 예수님께로 부터 받은 소명이 있고, 성경과 다른 영. 성경과 다른 예수. 성경과 다른 복음이 사도신경을 포함한 삼위일체및 삼위일체송이고 양태론이기 때문에, 하루 속히 회개하고 돌아서서 개혁하시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함 입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제가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음녀가 주는 포도주를 받아 마시고 영적인 술취함과 방탕함에 빠져 있네요..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말같지 않는 얘기라고 무시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기억하십시오! 설교와 전도를 하는 장로. 집사. 목사 사역자 분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누구보다 잘아실테니까요. 제가 연재하여 전달해 드린 자료를 보시고 성령과 말씀이 깨닫게 하시거든, 주저하지 말고 강단이나 컴퓨터 기능을 동원해서 선포하십시오! 성경을 잘 설명하여 전하는 일인 설교가 전도이고, 전도가 설교입니다. 이 일에는 장로. 집사. 목사의 구분이 따로 없습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삼위일체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바벨론교 바알 신관 입니다.

 

끝까지, 1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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