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의 하나님은  예수 유일신 으로서, '자유인' 께서 명확한 댓글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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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h Bak 시작말]

 

개신교 예수복음 전도자 입니다. 하나님은 유일신이신데, 사단은 3신으로 교활하게 속입니다. 세상종교의 신은 3신입니다. 삼위일체는 본래 3신인데 유일신이라고 사기치는 것이고, 양태론은 3신을 나누어서 유일신처럼 속이는 것이며, 삼신론은 3신인데 개별신이라는등.. 다양한 거짓말로 미혹했습니다. 개신교가 가톨릭에게 교리의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중세 가톨릭 이후부터 가톨릭이 개신교와 세상 종교쪽에 영향을 줍니다. 예수 유일신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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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자료는 예수 유일신이 아닌, 다양한 사단의 3신 형태의 거짓 신관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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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론

 

성부-성자-성령에 각 위격이 있어, '세분은 한분이시면서도 세분이시다' 라는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없는 이론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낳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누구랄 것도 없고, 하나님에게 인간의 시간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셋은 동등하다. 태초부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했다. (요한복음 2:1~2) 그러나, 세분은 한분이시다.

 

** 양태론

 

성부-성자-성령 세분이 한 위격이며, 한분이라는 이론이다. 양태론이 이단이 되는 이유는? 삼위일체중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격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한 위격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창조와 구약의 시대에는 성부로서만 일하시고, 신약 때 예수님이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성자로서만 일하시고, 오늘날에는 성령으로서만 일하시는 것으로 간주한다.

 

** 삼신론

 

처음부터, 성부-성자-성령이 제각각의 신이라는 이론이다. 삼신론에서는 하나님이 갖고 계신 성부-성자-성령 이라는 세 위격이 각자의 신으로 바뀌어졌다.

 

** 에큐메니칼 운동

 

이것은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읽다가 나온 것이므로, 위 내용과는 상관이 없습니다만, 이날 같이 찾아 본 것이라서 소개합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화합을 추구하는 운동' 입니다. 500년 전에, 마틴 루터가 '오직 성경으로! 오직 말씀으로!' 라는 구호를 외쳤던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라 할 수있다.

 

[글쓴이의 변]

 

제가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며, 혹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궁금한 점을 책이나 인터넷에서 찾아 본다거나, 주변의 조언을 얻어 제 나름대로 정리해서 올리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신학생도 아니요. 신학에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기에, 위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너그럽게 받아 들여 주시고 댓글로 그런 부분을 바로 잡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펌출처:  https://bit.ly/36SorXR

 

 

 

 

 

  말세에는 자칭 선지자(거짓 선지자)와 자칭 사도(거짓 목자)가 넘쳐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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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목: 목사는 사도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자신을 마치 초대교회의 사도라도 된 듯, 무게잡고 행세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조금 지나친 인사들은 심지어 사이비종교 교주라도 된 듯, 권위를 앞세우고 위세가 대단하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의하면 목사는 사도가 아니라, 오히려 교사나 가르치는 장로에 가깝다. 또한 목사만 주의 종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주의 종이라 불릴 수 있다. 목사는 교회 내에서 특별 대접을 받는 직위가 절대 아니다.

 

신약교회 내에서 모든 신자는 '왕같은 제사장' 이므로 서로 평등하며, 어떤 계급적 상하관계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서로 섬기며 봉사할 뿐이다. 교회 내의 직책은 관리(다스림)와 사역(가르침)을 위한 것이지, 지배하기 위한 직위가 아니다. 이를 오해하여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계급으로 여긴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일이 될 것이다. 근래에 들어, 한국교회가 어려워지는 데에는 이런 인식이 부족함에도 기인한다.

 

목사는 순종을 강요하고, 교인은 이를 비판없이 받아 들여 각종 부패와 부조리가 교회에 만연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준 셈이다. 교회 직분에 대한  바른 성경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교회 사유화. 세습. 공금횡령. 교권 싸움. 교역자 차별 등이 교회 내에서 가능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교회는 서로 섬기는 곳이지, 군림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 안의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 않다.

 

다만,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은 일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함께 동역할 뿐이다. 어떤 경우에 담임목사가 지도력을 발휘하여 교회에 바람직한 유익을 줄 수는 있으나, 이 때에도 당회나 제직회 등을 통하여 서로 상의하고 합심하여 동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목사나 장로들이 부교역자와 전도사를 부하 직원처럼 대하는 자세도 크게 바꿔야 한다. 동역자에게 그게 무슨 엄청난 실례인가! 

 

그들은 교회가 선택하여 책임을 맡긴 동역자들이지, 목사 개인이 고용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은 단순하다. 목사는 예수님이 특별하게 세우신 사도는 물론 아니고, 우리의 목자도 아니다. 구태여 말한다면, 양들의 유일하신 참 목자되신 예수님의 종인 보조 목동 역활을 하는 정도라 할 것이다. 교회 내에서 모든 신자는 동등하다. 따라서, 동역하는 자세로 서로 존중하고 섬기는 것이 옳다.

 

무엇보다도 목사는 가르치는 장로의 직분이지, 다스리는 장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가능한 교회의 운영과 관리는 시무장로와 제직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잘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해야 할 것이다. 목사가 마치 로마 교황이라도 된 듯이, 전권을 가지고 교회 운영에 월권을 한다면, 이는 후진국 독재자들마저도 비웃을 일이다. 담임목사도 다른 직분자들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함께 섬기는 일꾼의 한사람이지, 교회의 큰 웃어른이나 상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샬롬!        

 

(이하생략)                       

 

펌출처: https://bit.ly/32z3EoE

 

 

  이미지 출처: https://bit.ly/2PlRWek 

[Noah Bak 시작말]

 

한국 개신교와 독립교회 개혁 차원의 방대한 자료를 최대한 압축한 자료입니다. 십일조와 각종 헌금은 다른복음(갈라디아서 1:8)및 성경가감죄(요한계시록 22:18~19)임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전체자료를 정독하기 원하는 분들은 맨 하단의 원출처를 클릭하시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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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스크랩]

 

십일조를 내야하는가?에 대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고민하고 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하건대, 십일조는 내지 않아도 된다. 일단, 십일조는 원래 구약의 제도이고, 타락한 중세 교회가 부활시켰던 것이고, 그것을 폐지한지 오래이며, 현재는 구약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요구하는 여/호/와/의/증/인/ 마저도 없애 버렸다. 남아있는 곳은 미국의 소수 개신교 교단(주로, 오순절)과 대한민국의 다수 개신교 교단(장로회, 오순절 등) 뿐이다.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1) 낼 곳도, 받을 사람도 없다.

 

십일조는 원래 세금으로 국가에 바치는 것이었으며, 그것의 사용처는 레위 지파였다. 13번째 레위 지파는 성직자 그룹으로, 다른 12지파와 달리 땅도 받지 못하고 일도 하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든 성직 업무를 담당하는 대신에, 12지파에서 1/10을 떼어 그들에게 생활비를 댔던 것이다(1차 십일조). 또 바치는 사람을 위해 따로 떼어 놓아 바치는 사람을 즐기게 해주는 것이었으며(2차 십일조), 또 그것은 과부와 고아 같은 소외된 계층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했던 제도이다(3차 십일조). 이는 구약의 율법이었다.

 

따라서,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인에 의해 무너져 이스라엘 유다 국가 자체가 지구상에서 없어진 후에 유다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 약 1,900년 후에 전쟁으로 땅을 빼앗아 현대 이스라엘을 건국했지만, 그들에겐 성전이 없고 레위지파가 없다. 현대 유다교는 1세기 중반의 성전 유다교가 아니라, 1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랍비 유다교다. 따라서 내야될 장소도, 내야될 의무도, 받을 사람도 없게 된 것이다.

 

현재, 십일조를 개신교에서 걷고 있는데, 내는 곳은 교회(예배당)이다. 하지만 내야될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며, 교회(예배당)도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다. 더구나 세금은 국가에 내는 것이지, 교회에 내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십일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신정국가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신정국가도 아니고, 교회는 국가가 아니다. 개신교 일부 사람들은 목사를 성직자라 부르며, 교회 건물을 종종 성전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잘못된 표현이다.

 

첫째, 종교개혁자들은 만인제사장설(특별한 성직 계급은 없고, 그리스도인 모두가 제사장이며, 유일한 최고의 대제사장은 예수님 뿐이다)을 받아 들였고, 그에 따라 설립된 것이므로 목사는 레위지파 처럼 특별한 성직자가 아니다. 아울러, 장로회의 경우 목사의 직위는 성도인 장로 중에서 '가르치는 장로' 이므로 성도이다. 

 

둘째, 성전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제사가 있거나 성전에서만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지만,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예배당 자체도 비성경적인 것으로 초대교회는 집에서 모였다. 더구나, 개신교의 예배 및 기도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굳이 예배당이라는게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성전이 아니다. 성전이라는 표현 역시 잘못된 것인데,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를 경우 예수의 구속사역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므로 이단보다 훨씬 심한 표현이며, 신약 자체를 폐기하겠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셋째, 세금은 국가에 내는 것이며 교회는 국가가 아니다. 십일조를 거두었던 고대 이스라엘 유다는 신정국가 였다. 그러기에, 율법이 곧 법이어서 국가에서 십일조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 십일조를 거두었던 서양 그리스도교들은 전부 폐지한지 오래되었다.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이라는 말을 한국 개신교에서는 입에 달고 살지만, 원조인 서양은 비성경적이라며 폐지한 것에 주목하라! 십일조는 아니나, 교회세를 걷는 외국의 경우 1~2% 정도 세금을 부과하여 교회에 주는 것이지, 교회가 직접 걷는 것이 아니다.

 

2) 내야 한다는 근거가 너무나 빈약하거나 사기를 치는 구절들이다.

 

A) 예수께서 십일조를 언급했다고 주장한다.

 

복음서에 나오는 십일조는 총 3회 등장한다(누가복음 18:12, 누가복음 11:42 = 마태복음 23:23). 하지만, 뒤의 두개는 말한 배경은 다르나, 내용이 같은 병행구절이므로 언급은 2개이다. 2개 중에 1개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리새인이 '자신이 율법을 이렇게 지키는 사람' 이라는 것을 기도 중에 드러내기 위해서 한 말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십일조의 근거가 될 수 없고, 예수님의 언급인 눅 11:42(= 마 23:23)을 살펴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예수님께서 "율법은 철저히 지키면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쏙 빼 먹는다! 십일조를 하면서 정의. 자비. 신의 같은 의미를 되새기랬지, 언제 그것만 지키라고 했느냐?" 라고 마태복음 23:1~36 까지 바리새인을 비난하는 것 중의 일부이다.

 

이것을 무작정 십일조 하라는 구절로 받아 들여서는 곤란하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당시에는 '구약시대'이며, 예루살렘 성전도 있었고, 레위지파도 있었으므로, 낼 장소와 받을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신약시대'가 시작된지 40년 후 성전이 무너졌으며, 나라 자체가 없어져 버렸으므로, 예수님 당시에는 내는 게 맞았고, 지금은 낼 곳이 영원히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죽어야 신약이 시작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22:20에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B) 마치 없는 상황에서도, 헌금 전부를 내야 하는 정도의 것으로 생각한다.

 

(누가복음 21:1~4 = 마가복음12:41~44)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거기에 렙돈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이 구절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예수님이 '액수나 비율이 중요한게 아닌, 헌금을 내는 마음가짐이 올바른 과부'를 보고 칭찬한 것 처럼 보인다. 이는 상당수 성경 주석이 그렇게 적고 있는 것에도 한 몫을 한다. 그러니, 신자들은 자연스레 "000 목사님이 주석 단 거니까" 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유명한 외국의 성경 주석들도 그렇게 적고 있다. 
 
이 구절의 최대 실수는 '문맥을 무시하고 읽었을 때'에 발생한다.

 

C) 십일조하면 복 받는다고 했다고 주장한다.

 

※ 필수로 알아야 할 사항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의 '하나님의 것을' '나의 것을'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문에 없다. 히브리어 원문은 '하나님을' '나를' 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의 것을'은 자의적인 해석이다. 표준새번역(1993)과 그의 개정판인 새번역(2001)도 위와 같이 번역하고 있는데, 헛소리 번역인 것이다. 오역일 뿐만 아니라, 내 생각에는 일부러 이용해 먹으려고 이렇게 번역한 듯 싶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개신교 성경 전부 ('000000 개역한글, 개역개정,(표준) 새번역, '000 000' 현대인의 성경, '000' 우리말 성경, '000' 쉬운 성경) 일부러 오역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공동번역성서(1977)은 가톨릭의 눈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나를' 이라고 옳게 번역했으나, 8절에서 '소출에서 열의 하나(십일조)' 만 언급하고 '예물(헌물)'을 빼먹는 실수를 했다. 공동번역 개정판에서도 개정되지 않았다.

 

현재, 이 단락의 제일 옳은 한글번역은 가톨릭 성경(2005)이다. (※ 참고로, 대표적인 영미권 성경 NIV, KJV, NASB, NJB, RSV 모두 옳은 번역을 했다.) 따라서, 이 부분 만큼은 가톨릭 성경을 사용할 것이다.

 

(가톨릭 성경 말라키 3장)

 

6 나 주님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7 너희는 조상 때부터 나의 규정에서 벗어나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하면 저희가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고 말한다.

 

8 사람이 하느님을 약탈할 수 있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약탈하면서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 십일조와 예물이 아니냐! 9 너희 온 백성이 나를 약탈하고 있으니 저주를 받으리라. 10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 떼를 꾸짖으리라. 그래서 그것들이 너희 땅의 소출을 망치지 않고 너희 밭의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12 그러면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행복하다고 하리니 바로 너희가 기쁨의 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말라기 3장의 해석은 너무나 중요한데, 왜냐하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안 내는 사람은 도둑질하는 사람" 이라고 가르치면서, 신자들의 마음에 죄를 심어줌에 있다.십일조 이야기만 나오면 거품 물고 들이대는 구절이 이 구절이기 때문에 가장 잘 이해해야 한다. ~의 것 이라고 해석하는 목사나 신학자가 있다면 당당하게 배틀을 신청하라. 가톨릭의 성경을 보는 개신교 목회자는 거의 없을테니, 영미권 개신교 성경 NIV나 KJV만 들이대어도 할말이 없다. 문장도 간단하기 때문에, 누구나 해석이 가능하다.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된 NIV 성경(개신교)으로 해당 구절을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다. "Will a man rob God? Yet you rob me. "But you ask, 'How do we rob you?' "In tithes and offerings. You are under a curse--the whole nation of you--because you are robbing me.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신을 강도질 할 수 있느냐? 그러나, 너는 나를 강도질 했다. "하지만 너는 '우리가 당신을 강도질 할 수 있나요?' 하고 묻는다" "십일조와 바치는 예물이다. 너는 저주 아래 있을 것이다. 너희 나라 모두.. 왜냐하면, 너는 나를 강도질 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 3장의 이 단락을 쉽게 말함과 동시에 당시의 이 말이 나온 시대 배경과 말라기 전체의 내용을 괄호속에 집어 넣어 함께 설명하겠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4장 밖에 안되는 말라기를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말라기 3장 요약(야훼께서 바라시는 말씀)은?  "내 백성아 제발 내게 다시 돌아와라"

 

개신교의 관점에서는 '돈'의 십일조를 하면 뻥튀기 시켜 자신의 재산이 몇배로 늘어날 것이라면서 미국 석유왕 록펠러 이야기를 든다. 심지어,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 라는 책도 있는데, 자신이 처음엔 회계 장부를 쓰면서 십일조를 하다가 재산이 많아지자 40명의 회계팀을 구성해 십일조를 냈다고 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는 전혀 본문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말라기 3:10에서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라는 구절이 나온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왔으니 터전도 도구도 제대로 없고, 농사도 제대로 안되고 하여 먹고 살 길은 막막하니까 하나님께 바칠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고 남은 것들로 근근히 살아갔던 것이다.

 

그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대하여 여호와께 실망스러움을 보이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진짜 농사가 잘 되게 해주는지 "나를 시험해 보아라" 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절인 11절에 대해서 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 아예, 본문을 10절 까지만 읽고 십일조 설교를 하는 설교가 대부분이고, 한 단락인 12절까지 읽기는 하나 11절과 12절에 대해선 침묵하는 설교가 소수이다. 그 이유는 현금 십일조에 대해 독이 되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말라기 3: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 떼를 꾸짖으리라. 그래서 그것들이 너희 땅의 소출을 망치지 않고 너희 밭의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리라." 라고 한 것이다. 개신교의 논리라면, '돈'을 뻥튀기하는데 왜 뜬금없이 메뚜기 떼로 인해 농사가 망쳐졌으니, 메뚜기를 통제하여 농사가 잘 되게 해준다는 것인가? 왜냐하면, 개신교의 논리로는 이 구절은 빠져 나갈 구멍이 전혀 없다.

 

메뚜기, 땅, 포도나무, 열매 같은 명사들은 전혀 다른 것에 비유한 것이 아니다. 십일조의 대상은 '농산물' 이기 때문에 농사가 망쳐졌으니 농사가 되게 해주는지 안해주는지 십일조 제대로 하고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제대로 안해서 생계가 곤란했던 레위지파 사람들이 성직 업무를 때려치우고 일을 했기 때문이다(느헤미야 13장).

 

※ 번외로 이 구절의 오역에 대한 자세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말라기 3:8~10 (사용한 성경은 개역개정판. 개역한글에서 '도적 -> 도둑' 으로 개정했을 뿐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구절을 아무 생각없이 읽다 보면 십일조와 봉헌물은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이 도둑질 한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이 구절을 대한민국 개신교 성경들('000000' 개역한글,개역개정,(표준)새번역, '000 000' 현대인의 성경, '000' 우리말 성경, '000' 쉬운 성경)이 단체로 변개한 구절이다! 특히, 8절과 9절에서 굵은 글씨로 표시해 둔 '~의 것'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원문은 물론이거니와, 기타 다른 나라말 성경 모두 그런 표현은 없다.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신을 속일 수 있느냐?" 그러나, 너는 나를 속이려 했다! 너는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속이나요?" 하고 묻는다. 십일조와 예물이다. 너에게 저주가 내릴 것이다, 이 온 나라에게! 왜냐하면, 나를 속이려 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번역자의 몫은 개인적 의견(또는 교단, 교파의 의견)을 번역할 때 다는 것이 아닌, 원문 그대로의 느낌과 의미를 얻을 수 있도록 언어에 맞게 번역하도록 노력함에 있다. 이를 지키지 못했으면 번역자의 자질이 좋지 못함은 분명하다. 

 

아울러, 대한민국 목사들이 심심하면 강단에 서서 히브리어 원문이 어쩌고 원어가 어쩌고 언급하는데, 이런 것이야 말로 "히브리어 원어는 이런데, 원어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고 이야기 해야 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명사를 히브리어로 말하면서 자신이 잘 아는 척 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 중에 목사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봐라! 대부분 히브리어, 그리스어 사용은 쓸데없는 명사에다 대고 하지, 중요한 동사에 하지 않는다.

 

D) 십일조는 율법 이전부터 존재한 것이라 주장한다.

E) 십일조를 낸다고 하더라도 사용처가 잘못 되었다.

F) 십일조를 낸다고 하더라도 매달 걷는 것은 잘못 되었다.

G) 십일조를 낸다고 하더라도 돈을 걷는 것은 잘못 되었다.

H) 신약의 돈개념은 십일조가 아니라, 공동재산이다.

I) 사도 바울은 마음에 정한대로 각자 연보를 하라고 했다.

 

※ 십일조의 진실

 

 1차 십일조  -> 레위인과 레위인 중에서도 제사장 계통을 먹여 살리기 위한 신정국가의 세금. (이것이 한국 개신교가 흔히 알고 있는 십일조의 개념이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전체의 십일조를 받을 권리가 있던 대신에, 조상으로 부터 재산을 상속받지는 못하였다. 십일조를 받은 것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2차 십일조  -> 십일조 바치는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준 십일조. 1차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이 또 2차 십일조를 행해야 했는데, 그것으로 아무거나 먹고 싶은 것을 사서(독주 마저도) 레위인과,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종과 함께 하나님을 생각하며 먹고 즐기는 것이었다. 이 십일조 규례는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어디에다 내는 것이 아니다.

 

 3차 십일조  -> 별로 받지 못한 레위인과 소외 계층(떠돌이, 고아, 과부)을 위해 3년마다 1/10을 베푸는(어디에 '내는' 것이 아님) 십일조. 평균적으로 매년 약 3.3% 정도.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주어 먹게 하는 것이다. 

 

(신명기 14장) 28 당신들은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모아서 성 안에 저장하여 두었다가, 29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이 경영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위와 같은 1. 2. 3차 십일조가 철저하게 있었지만, 실상은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었다.

 

(이하생략)


원출처: https://militantatheism.tistory.c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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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교회는 세대주의 전천년. 7년대환난. 재림 2회를 평균 약 95% 이상 믿습니다!

무천년 도표입니다.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신약교회가 영적 천년왕국 시대입니다!

 

이미지 출처: http://blog.daum.net/danielreader/1117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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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역사적 전천년을 믿는 자료)

 

[Noah Bak 끝맺음]

 

예수님의 재림이 1회냐? 아니면, 2회냐?.. 천년왕국이 문자적이냐? 영적이냐? 차이로 종말론 학설이 나뉩니다. 재림 1회와 영적인 천년왕국을 성경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끝까지,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일조 설교 시리즈 청취하기: James Kim 

        이미지 출처: https://youtu.be/Cz1hdo0sNJ8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복음 5:37, 새번역)

 

[스크랩] 

 

 OOOO (OOO) OOO 목사의 <엉터리 십일조> 강의 - 2019년 O월 OO일 OOOO. OOO 목사의 <말라기 3장 강의>에 대하여..  by  Sea of Knowing

 

[원제목] 엉터리 십일조 강의

 

 왜, 목사들은 십일조 앞에서 비겁해지는가? 

나는 O목사가 십일조를 잘 알면서도, 교회에 미칠 영향 때문에 십일조 존재의 지속성에 대해서는 비겁하게 비켜갔다고 본다. 김 목사는 강의 내내, 십일조의 정당성, 목적과 역사 유래 등등..주변만 장황하게 건드릴 뿐. 신약시대 이후 부터 소멸된 십일조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역시, 교회는 교회일 뿐! 신자는 영원히 바보일 뿐!

 

 OOOO 출연진의 침묵 

학생으로 출연한 4명! 그들은 10년 가까이 학생 노릇을 했다. 십일조가 신약시대부터는 유효하지 않다는 타 목사들의 강의를 들었음에도, 침묵하였다.

 

 십일조는 모세 율법 이전, 멜기세덱 때부터 존재하는가? (창세기 14장 14~20)     

많은 목사들이 멜기세덱의 예를 들어서, 십일조는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부족국가 시대의 고대 중동 지방의 관습을 성경적 명령으로 끌어오는 능력이 놀랍다. 아무거나 갖다 붙이면 진실인가? 만약. 멜기세덱의 십일조가 맞는 거라면. 그것은 정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젝트(전쟁)가 끝난 후에 하는 일회성 십일조가 된다.

 

교회가 멜기세덱을 주장한다면, 매월 정기적 십일조는 폐지되고, 가끔 가다가 내는 일회성 십일조가 되어야 한다. 성경 어디에도 아브라함이 연말이나 월말에 십일조를 따로 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모방하면서도 당시의 할례는 이행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헌금에 관련된 멜기세덱의 십일조 만큼은 놓지 않으려는 기독교의 모순적 행위이다.

 

 말라기 3장의 십일조 (온전한 십일조로 나를 시험하라) 

말라기 3장의 이 말씀을 잘못 믿음으로써, 기복주의의 십일조가 되어 버렸다. 바벨론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심한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너희의 신앙이 죽었다." 야곱과 이삭에 약속하신 <언약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의 신실하신 언약의 이행하심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나를 시험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물질적 복을 주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라는 것이 아니다. 야곱과 이삭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시험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완성을 믿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약으로 와서는 예수 믿음 이후의 부활과 구원을 의미하게 되었다. 만약, 십일조를 바치면 백배 천배의 물질로 보응을 받는다면 신앙생활 열심히 해도 계속 가난한 사람은 무엇인가? 그런 사람은 신앙에 혼란이 오게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저주하신 건가? 아니면, 잊으신 건가?

 

만약, 백배 천배로 돌려받는 것이 확실하면. 부자들은 더 부자 되고 가난한 자들은 적게 보상받는 것인가? 부자에게 1억은 부담 없이 낼 수 있고, 그 1억이 백억, 천억으로 축복받게 되니.. 가난한 자는 십만 원 정도의 헌금으로 그것의 백배는 겨우 천만 원 정도이니.. 하나님도 부자들만 사랑하는가? 야바위꾼의 돈 놓고 돈 먹기 도박인가?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이 도둑질인가? 

십일조 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이라면. 신도들의 십일조를 횡령하는 것은 강도질이 아닌가? 목사들이 헌금을 남용하고, 오용하고, 자식에게 물려주고, 개인 돈처럼 함부로 쓰는 것이 강도질이 아니고 무엇인가? 부패 목사들은 모두 강도들인가?

 

 십일조는 예수 십자가 희생을 부정한다. 

예수 십자가 고난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께 드리던 속죄제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 양을 잡아 희생제를 드리던 제사는 영원히 사라졌다. 신자들 모두가 만인 제사장이 되었다. 레위족의 역할도 사라졌다. 레위족이 사라지고,성전이 없어졌는데, 왜 십일조가 계속 존재하는가? 목사라고 불리우는 그들은 레위 제사장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제사장이라면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부정하는 것이다.

 

 목사는 무엇인가? 

목사는 단지 교사이고, 코치일 뿐이다. 목사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아니다. 우리와 똑같은 만인제사장 중의 하나일 뿐이다. 기독교에는 성직자가 없다. 아무도, 성직자가 아니다. 다 같은 신자들이다. 제발, 우리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떠받들지 말아야 한다. 괜히, 목사들에게 교만한 마음만 집어 넣게 되기 때문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는다? 

누가 누구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웃긴다. 그리고, 목사만 되면 성직자 되는 것도 편리주의이다. 여차하면, 폐기된 구약의 관습으로 돌아가고. 여차하면 신약을 인용하며, 신학대학은 돈만 내면 들어간다. 하나님의 허락받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신학대학 졸업했다고 기름 부은 제사장이 되어 버리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예수 희생으로 없어진 제사 제도를 왜 자꾸 고집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의 목사 Calling (목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음)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 목소리를 왜 그리 쉽게 잘들 듣는지, 신기하다. 자기의 환각 상태의 환청을 신의 목소리라고 거짓말하면 정말 하나님한테 크게 혼날 수 있다. 신자들은 이런 허술한 거짓에 속지 말아야 할 일이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마태복음의 이 구절을 목사들은 매우 사랑한다. 이 구절을 내세워서 십일조의 존속 유효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하신 말씀이니, 당연히 율법이 유효하던 구약 시간대이다. 예수께서 대속 제물로서 드려지기 전까지만 적용되는 한시적인 예수 공생애 구약시대의 말씀일 뿐이다.

 

 십일조보다 더 무서운 것을 요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십일조보다 더 무거운  모든 것을 원하신다. 부자 청년이 제자되기를 갈망하자, 가진 것 모두를 가난한 자에게 준 후에 다시 오라고 하신다.(마 19:21) 내가 목사라면, 십일조보다 차라리 신자들이 가진 것 다 바치라는 이 말씀으로 신자들을 유혹할 것이다.

 

 십일조 앞에, 용감한 목사들은 없는가? 

역시, 교회도 돈이 지배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맘몬(돈) 신을 모시는 것인가? 강남의 <OOO 교회>의 한심한 작태이다. 얼마 전의 뉴스에서, 강남의 <OOO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교회의 교적 신도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교회 규칙을 정했다.

 

십일조를 주장하는 것은 예수 십자가 부활을 전면 부정하는 짓인데도 말이다. 교회 스스로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섬기는 신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맘몬(돈) 신이다.

 

펌출처: https://bit.ly/2M6LGFh 

 

끝까지, 1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교회는 세대주의 전천년. 7년대환난. 재림 2회를 평균 약 95% 이상 믿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youtu.be/jAQGhj1xq6E 

 

[Noah Bak 시작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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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일부 스크랩]

 

세대주의에 대한 95개조 반박문

The Ninety-Five Theses Against Dispensationalism

 

by 로버트 L. 레이먼드 박사(번역 : 김안식)

 

머리말

 

우리는 사람들이 이 세대주의 반박문을 보고 NiceneCouncil.com이나 역사적으로 성경을믿는 교회들이 모든 세대주의자들을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해 버린 이들이라 말하고 있다는 식의 해석을 하지 않기 바란다.

 

상당수의 세대주의자들이 기독교의 기본적인 정통 교리를 인정하고 받들고 있다. 16세기의 칭의교리 논쟁과 달리, 이것은 기독교 내부적 논의이며, 복음주의 기독교인들 사이의 논쟁인 것이다. 우리는 세대주의의 교리적 틀 안에 있는 모든 거듭난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로 인정하고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동료인 사도 베드로를 연장자로서 누구보다 더 깊이 사랑하고 존경했음에도, 교회의 건강과 순결을 위해 중요한 신학적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와 진리에 대한 사랑 가운데 베드로를 앞에 두고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다(갈 2:11).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세대주의가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야 하는 교회의 의무를 약화시켰다고 믿는 고로, 진리에 대한 사랑과 진리의 빛을 드러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레이트 그레이트 플래닛 교회 산하 NiceneCouncil.com에서 제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이어지는 주장들에 대해 토론을 진행시킬 것이다.

 

강철은 강철로 더 날카로워진다는 말을 상기하며,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공동체, 교단 등이 이 문제를 두고 논의와 논쟁을 진행시키길 원한다. 주권자이신 우리 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보며 이 논쟁에 참여하자. 약 2000년 전 베뢰아인들 처럼, 우리도 “과연 그러한가?” 살피기 위해, 성경을 매일 탐구해 보자.

 

[95 THESES AGAINST DISPENSATIONALISM]

 

세대주의 반박 95개조

 

1. 우리는 세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이 성경을 “평이하게 해석한” 결과(찰스 라이리)에 기인한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한다. 세대주의 신학 교회사에 있어 상대적으로 새롭고 획기적인 신학체계로서 1830년대에 등장했으며, 기독교 1800년 역사 동안 신학자들은 이 신학체계를 전혀 알지 못했다.

 

(중략) 

 

7. 세대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교회의 보편적 신조들은 전천년주의의 근본 교리와 반대되는 종말적 사건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즉,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1) 그리스도는 오직 한번 재림하신다. 세대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두번 재림하시지 않으며, 7년을 사이에 두고 “휴거”와 “두번째 재림”이 일어나지 않는다.

         

(2)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 모두 죽음에서 단 한번에 전체적으로 부활된다.

 

(3) 모든 사람들의 심판은 전체적이다. 1000년을 사이에 두고 서로 구별된 심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중략) 

 

15.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바른 이해를 위해 필요하다며 유명한 7개의 뚜렷한 세대 구분을 말하지만, 세대주의 내 학자들은 “4개, 5개, 7개 혹은 8개의 세대로 구분하는 사람도 존재하며 그런 사람도 일관성 있는 세대주의자(찰스 라이리)”라 말한다. 따라서 세대를 적절히 구조화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는것이다.

 

(중략)

 

31. 세대주의자들이 성경의 “평이한 해석”(라이리)를 강하게 신봉하고 다니엘의 칠십 이레를 “중요한 전천년주의의 상징”(왈부어드)으로 생각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신학체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칠십 이레” 속에 또 다른 연대기적 진행 기간을 삽입할 수 밖에 없다. 그 기간은 이미 전체 칠십 이레(490년)의 4배나 된다.

 

32. 세대주의자들은 모순없는 성경의 완전성을 신봉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문자주의의 복잡한 형태와 각 세대들의 분리성과 명징(明徵)성으로 인해 고린도전서 15:51-53에 나오는(교회 시대의 끝에 있을 휴거의 신호라고 믿고 있는) “마지막 나팔”과 마태복음 24:31에 나오는 (재림 시에 있을 대환란에서 선택된 유대인들을 모으는) 나팔 사이에 변증적 긴장이 형성된다. ‘문자주의자’들로 평가받는 세대주의자들은 이 후자의 나팔을 “마지막” 나팔이 울리고 7년 후에 울릴 나팔로 보고있다.

 

33. 세대주의자들이 역사-문법적 해석을 발전시키려는 바람을 갖고 있지만, 그들이 그 방법을 “평이한 해석”(라이리)이라 말함으로써, 이는 보통의 독자들이 고대 성경 본문을 그 원래 내용으로 보지 않고, 현대적이고 서구적 내용 및 사람들이 가르친 관점으로 보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평이한”이란 말의 뜻이다.

 

(중략)

 

36. 세대주의자들이 모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O.T. 앨리스 박사가 바르게 관찰하여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세대주의자들은 극단적인 문자주의자들이면서도, 일관성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예언의 해석에서 있어서는 문자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역사를 해석할 경우는 가장 열렬한 비유의 해석자들조차 적용한적 없는 전형적 해석 원리를 극단적으로 적용한다.”..

 

(중략)

  

41.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 12지파의 후손들이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모든 약속의 땅에 거주한 적이 없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므로 유대인들이 장차 그 약속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한다.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수 21:43, 45)”.

 

(중략)

 

45. 우리는 유대인들이 민족 중심적 구원(은혜를 통한 구원이 아닌 민족을 통한 구원)을 받을 거라는 세대주의 주장에 반대한다. 그리스도와 신약 기자들은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족보나 민족이 구원을 보증하리라는 생각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요 1:12b-13; 3:3)”이기 때문이다.

 

46. 우리는 “교회는 구약에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다”(J. D. 펜테코스트)라는 세대주의적 주장에 반대한다. 신약 기자들은 구약을 구속사에 있어 그 신적 목적과 역할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 비밀은 신약의 모든 이들에게 드러난 것과 “같은” 정도로 “사람의 아들들에게” 드러나지 않았다(엡 3:4-6)고 선언하고 있다. 심지어 그 기자들은 그것을 교회의 새 언약 시대의 시작을 포함하여(욜 2:28-32 / 행 2:16-19)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까지 말한다(호 1:10 / 롬 9:22-26).

 

(중략)

   

51.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연기하셨으며, 주님이 재림하신 후에야 이를 주실 것이다(J. D. 펜테코스트)”라는 세대주의 신념을 반대한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하셨고, 이어,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8:11-12).

 

(중략)

   

54.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1세기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항상 ‘임박’해 왔으며,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J. D. 펜테코스트)는 세대주의 교리를 반대한다. 신약성경은 주님의 재림은 ‘더디’고(마 25:5) ‘오랜’ 시간이 지난 후(마 24:48; 25:19; 벧후 3:1-15)에 일어날 것이라 말씀한다.

 

55. 우리는 1980년대 세대주의 서적들의 제목들(‘아마게돈의 시한과 지구 2000’, ‘인류는 살아남을 것인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휴거의 시기를 정하고 말초적인 예언을 행하는 세대주의자들의 경향성을 반대한다. 성경은 “생각지도 못한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너희가 모르는 그때(마 24:50)” 등의 말씀을 하고 있다.

 

56. 세대주의자들이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시대적 표징들에 대해 자주 경고하지만(린지), 그들의 급박한 재림 교리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표징들의 실현성이란 있을 수 없다(존 왈부어드)는 것이다. 다음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휴거가 일어나기 전, 그 어떤 일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에 일어날 이유가 없었듯이 우리 시대도 그러하다(팀 라헤이).”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그 날과 그 시를 알 자가 아무도 없다(마 24:36a)”고 경고하셨다.

 

(* 53, 54, 55, 56은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세대주의자들은 지나치게 특정하려 한다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했다. 즉, 그 재림의 시점을 ‘알 수 없음’의 범위에 두지 않고, ‘지금 당장’으로만 편향적으로 두려한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흡사 ‘시한부종말론’과 유사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은 언제일지 알 수 없으므로 오늘 당장일수도 있지만 100년 후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성경적인 재림의 관점이다. - 학자의 혀 )

 

57. 세대주의자들은 “초림과 재림 사이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어떤 가르침도 있지 않기(존 왈부어드)”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오실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세대주의 지도자들은 계시록 2장과 3장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들이 “교회의 계획표에 관하여 현재를 약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즉, 거기에는 “종교개혁”과 우리가 사는 현시대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J. D. 펜테코스트).

 

58. 상당수의 세대주의자들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부터 오직 “말세”라고 믿지만, 신약성경은 분명하고도 반복적으로 “말세”는 1세기에 시작되었고 교회 역사 자체가 그렇다고 가르친다(행 2:16-17, 고전 10:11, 히 1:1-2; 9:26).

 

59. 세대주의자들은 갑작스러운 휴거론과 여타 종말론적 교리들이 경건한 삶을 위해 중요한 수단임을 주장하지만, 세대주의 교리를 정립한 이들은 종종 서로 싸우고 다른 계열의 신자들에 대해 분열을 조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플리머스 형제단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사소한 몇가지 점들로 인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분열을 거듭하였으며 결코 하나의 기독교 구성체를 이룰 수 없다.(존 거츠너)”

 

“그들은 다비의 가르침을 받아 생성된 최초의 분열조직일 뿐이다.(복음주의 인명사전)”

 

60. 우리는 세대주의가 창조한 독특한 그리스도의 이중 재림 교리(재림과는 별도로 이루어지는 휴거)를 반대한다. 재림과 휴거는 너무나 차이점이 많아서 “이 두 가지 사건 사이에 어떤 조화도 이룰 수 없다(왈부어드)”다고 설명한다. 성경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재림(강림하심, 계시)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으며(마 24:3; 고전 15:23; 살전 3:13; 4:15; 5:23; 살후 2:1, 8; 약 5:7; 벧후 3:4; 1 유 2:28), 주님은 “두 번째 나타나실 것(히 9:28)이며, “반복하여” 나타나시거나 세 번째 나타나시지 않으실 것이라 증언한다.

 

61. 세대주의는 “예수께서 교회의 휴거를 위해 은밀히 공중 재림 하실 것(팀 라헤이)”으로 가르치지만, 세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비밀스런” 재림 교리에 대한 증거 성구로 말하는 데살로니가전서 4:16 말씀은 주의 재림이 굉장히 공개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건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주님은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강림하실 것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62. 우리는 세대주의의 두 가지 부활 교리를 반대한다. 그 교리는 휴거 때 신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휴거 후 1007년이 지난 천년왕국 말엽에 불신자들이 부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마지막 날이 있기 전 수세기 동안 일어날 부활이 아닌, “마지막 날”에 일어날 신자들의 부활을 말씀하고 있다(요 6:39-40, 44, 54; 11:24).

 

63. 우리는 세대주의의 두 가지 부활 교리를 반대한다. 그 교리는 휴거 때 신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휴거 후 1007년이 지난 천년왕국 말엽에 불신자들이 부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종말에 천사들이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게 될(마 13:30b)” 때 신자들의 부활이 있기 전 불신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임(물론, 동시다발적인 사건의 일부이지만)을 말씀하고 있다.

 

64. 세대주의가 지지하는 교회의 은밀한 휴거 교리, 즉 세대주의자들이 세상에 크리스천들은 사라지고 오직 믿지 않는 자들만이 남게 된다는 주장을 하지만, 예수께서 곡식과 가라지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을 것임을 가르치셨고(마 13장),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까지도 드리셨다(마 17:15).

 

65. 세대주의자들이 성경의 “평이한 해석”(찰스 라이리)과 마태복음 24장의 대환란을 강조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23:37-24:2)” 선언하실 때, 그것이 1세기 성전의 돌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또한 일관성 없게도 제자들이 “언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느냐?(마 24:3)”고 여쭤보자, 주님께서 그 사건 이후에 수천년이 지나 발생할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라고 말씀하셨다는 마태의 기록도 인정한다(성경지식주석).

 

66. 세대주의자들이 이른바 예언의 문자주의를 지지하고 마태복음 24장의 대환란 구절들을 강조하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4)” 말씀하셨을 때, 주님께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세대”(예를 들어, 마 11:16; 12:41,42)라는 용어를 그때 그때 다른 의미로 사용하셨으며, 심지어 직접적인 문맥(마 23:36)에서도 그러하기 때문에 “이 세대”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던 때를 언급하시는 것이 아닌(왈부어드)” 수 천년 후의 미래를 가르키는 것일 수도 있다는 교묘한 주장을 내세운다.

 

(중략) 

 

68. 대부분의 세대주의자들은 짐승의 수를 3개의 숫자 6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이것을 세 개의 숫자 6(6-6-6)이 아니라, “육백 육십 육(계13:18b)”이라는 전체적인 숫자 가치를 지닌 단일수(666)으로 나타난다.

 

69. 많은 세대주의자들은 짐승의 표가 “주입식 마이크로칩(티모시 데미)”라고 예상하지만, 계시록 13장은 그것이 물체의 종류가 아닌 어떤 표식이라고 말씀한다.

 

70. 우리는 아마게돈 전쟁이라는 대재앙으로 도래할 확고부동한 미래의 지정학적 왕국에 대한 세대주의자들의 믿음에 반대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왕국은 어떤 표적과 함께 오지 않는 영적 왕국이라 가르친다. 또한 그 왕국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오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이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보아라,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눅 17:20-21)" 라고 말씀하셨듯이, 1세기에 이미 임한 것이다.

 

(중략) 

 

75. 세대주의적 천년왕국설을 뒷받침하는 방법론이 “평이하고 단순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돌아와 부활한 성도들과 부활하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살게 될 것이란 기묘한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부활하지 않은 사람들이란 “신자들의 새 세대”로써 대환란에서 벗어나 천년왕국으로 들어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재림 시에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대로 살아남은 불신자들이라는 주장이다(왈부어드).

 

76. 세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관점이 합리적이라 주장하지만, 그들은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부활의 성도들이 평온하게 1000년을 지낸 후 “바다의 모래 같이” 거대한 수의 부활하지 않은 죄인들이 영광의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에 대항하여 일어난다는 기묘한 가르침을 부여잡고 있다.

 

77. 세대주의자들이 갖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근본적인 원리가 있지만, 그들은 두 번째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지상으로 오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직접 1000년 동안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오직 종말을 향한 주님의 직접적이고 은혜로운 통치에 대항하는 “바다의 모래 같이” 수많은 반역자 무리들만이 존재하는 시대라는 것이다(계 20:7-9).

 

78.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라는 현실적인 가능성에 열광하여” (랜덜 프라이스) 연구를 하고 이에 관련하여 자금을 대는 수많은 세대주의 지지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성전제도가 갖는 총체적인 관점이 “점점 낡아지고” 1세기에 “사라져버릴”(히 8:13) 옛 언약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79. 우리는 장차 천년왕국이 도래하여 물리적 성전이 세워지고, 그곳에서 문자 그대로 짐승 피를 바치는 제사를 드리게 되리라는 세대주의자들의 기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유월절과 구약의 제사제도를 충족시키셨으므로, 그의 희생은 최종적이며 "단번에(히 10:10b)" 이루어진 사건임과 새 언약은 그 희생으로 옛 언약을 “폐기시킨” 것임을 가르친다(히 8:13).

 

80. 우리는 물리적인 성전이 재건 되리라는 세대주의 가르침을 반대한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성전이 세워진다는 말로 표현한다. 즉,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 주님 안에서 함께 성전이 되어 간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성전이야말로 참되고 영원한 성전인데, 지상의 임시적인 성전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이를 “그림자”요 “모형”(히 8:5; 9:24) 이라 말씀하고 있다.

 

(중략)

 

89. 세대주의자들은 세대주의 이외의 신학체계들이 “자유주의에 적합하게 약간씩 수정 되었다(존 월보어드)"는 비판을 하지만, 20세기 초엽 모더니즘을 받아 들인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세대주의 신학이다.

 

(중략)

 

92. 초기 세대주의자 및 현대의 다양한 세대주의주의자들이 “신약은 분명코 구원받지 못한 이들의 회개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L. S. 채퍼, 제인 핫지)”고 가르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다(행 20:21).”

 

(중략)

 

95.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인을 영적 그리스도인과(찰스 라이리의 말에 따르자면 “엄청난 수의 육신적 그리스도인”을 결과하는) 육적 그리스도인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그러한 계층적 구분을 말씀하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는 것이다.

   

“세대주의가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바야흐로 언약 신학자들이 이 도전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대응 할 때이다.”

“Dispensationalism has thrown down the gauntlet: and it is high time that Covenant theologians take up the challenge and respond Biblically.”

 

- 로버트 L. 레이먼드 박사(‘기독교신앙의 새로운 조직신학’의 저자),

 

- Dr. Robert L. Reymond, author,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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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카톨릭 영역에서 십일조 징수가 보편적이었습니다.

「아메리카나 백과 사전」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것은·· 6세기경에 보편화 되었다. A.D 567년의 투르 공의회와 A.D 585년의 제2차 마콘 공의회는 십일조 징수를 옹호하였다..특히, 십일조를 징수하는 권한이 종종 신도에게 주어지거나 팔렸을 때는 직권 남용이 보편화되었다. 교황 그레고리 7세 때부터 이러한 행위는 불법적인 것으로 공표되었다. 그러자 많은 신도들은 그들의 십일조 징수 권한을 수도원 수사회와 주교좌 성당 참사회에 넘겼다. 종교 개혁은 십일조 징수를 폐지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관행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나라들에서 지속되었다.”

그러나, 십일조는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에 점차 그것을 지키는 교회가 감소되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는 십일조 징수가 폐지되었거나 점차 대치되어, 현재 십일조를 징수하는 종교는 드뭅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성행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목사들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교회 운영이 어려울 것이라는 믿음의 결핍과 이기심이 큰 원인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뜯어 보더라도 십일조를 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된 사항이 아닙니다. 알렉산더 크루덴은 그의 성서 용어 색인에서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주나 그분의 사도들은 이러한 십일조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명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를 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모세의 율법을 그 일부인 십일조에 관한 마련과 함께,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6:14, 골로새서 2:13~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비용을 부담하기 위하여 특정한 액수를 내도록 요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진적인 연보를 합니다. 의무가 아니라, 자진적인 기부금입니다.그러나, 십일조는 의무입니다. 유대인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예수께서 십입조을 말씀하신 것은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도 바리새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유대인에게만 부과된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의 법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새로운 법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 모음]

 

정태식     2005. 02. 25                                       

에스라님의 추가 설명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십일조는 목회자들의 "돈에 대한 집착" 이 문제라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눅 16:14 ) 저는 우리나라의 (십일조를 걷는) 목회자들 상당수가 현대판 바리새인이라고 생각합니다.

                               
esra     2005. 02. 25                                       
한국 실정은 세계적 추세를 거스리는 것입니다.

 
                                                                      

 

  주일예배에서, 삼위일체송과 사도신경을 뺀 주보입니다. 순교보다 쉽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bit.ly/2lZlIck 

 

한국교회가 중세 가톨릭 교리를 수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시려면, 예배 순서지에서 삼위일체송과 사도신경을 개교회별로 즉시 빼기 바랍니다. 예배 순서지에서 삼위일체송과 사도신경을 개교회별로 빼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을 찬송하고 고백하는 순간, 당신은 가톨릭 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분이신데, 한분처럼 연합해서 일하시는 유일신이 신구약에서 계시한 한분 하나님이 아닙니다.

(에레미야 10:2~3, 새번역 )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이방 사람의 풍습을 배우지 말아라.

이방 사람이 하늘의 온갖 징조를 보고 두려워하더라도,

너희는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방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풍속은 허황된 것이다.."

 

양태론은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저항했다가 패배한 사단의 또 다른 거짓말 교리입니다. 국내외 한국교회 사역자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구원자가 되시겠습니까?

(디모데전서 4:7, 새번역)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몸을 훈련하십시오."

원출처: 다음 지식iN

 

중세 가톨릭 시대에, 삼위일체 안믿는다고 약 5~6천만 명을 살육했습니다. 양태론을 믿기 때문에 죽인 것은 가톨릭 종교재판소에서 허울좋은 명분을 앞세워 그리한 것이고, 구약 성경의 말씀이신 여호와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한분 하나님을 믿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가톨릭의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고 약 6백만명을 죽였습니다. 삼위일체. 사도신경은 살인 교리인데, 신학교에서 배운 삼위일체와 사도신경을 맹신하다가, 예수 그리스도 한분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겠습니까?

 

끝까지, 1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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