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바른 복음(이웃교회) 말씀 배달부인데, 제가 전달한 이 메시지에 한하여 바른 복음입니다!"
* 원출처: Pastor Ko Dong-yeop
* 원제목(2018): 축도의 바른 이해
* 부제목1: 세계 대부분의 교회는 십일조를 없앴고,
* 부제목2: 일반 성도에게도 축도권및 당회장권 기회를 준다!
♤25분 메시지, https://zrr.kr/wt8u
* 원출처 URL: https://zrr.kr/nIKn
[청각장애우를 위한 한글 텍스트]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 개신교 노아박 전도자입니다. 이웃교회의 참예수 복음을 찾아 한국교회를 위하여 말씀 배달부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고동엽 목사께서 증거하신 "축도의 바른 이해"라는 원제목 글 메시지를 음성으로 변환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들으시겠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내지는 교제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아멘' 여기까지 밖에 없는데, '있을찌어다'를 번역할 때 엉큼하게 살짝 집어 넣은 것입니다. '있을찌어다'가 원문에 없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헬라의 원문을 보면 '있을찌어다'와 같은 동사는 없습니다. 그리고 '교통'하심이 아니라 '교제'하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히브리어및 헬라어 원문을 참조해 보시고 영적으로 바른 판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η χαρισ του κυριου ιησου χριστου και η αγαπη του
헤 카리스 투 큐리우 예수 크리스투 카이 헤 아가페 투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그 은혜 주 예수의 그리스도 사랑과
θεου και η κοινωνια του αγιου πνευματοσ μετα
데우 카이 헤 코이노니아 투 하기우 퓨뉴마토스 메타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with
하나님의 교제가 성령의 함께
παντων υμων αμην
판톤 휘민 아멘
all of you A-men
모두에게 너희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 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아멘. 이 표현이 원문에 의한 바른 번역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가지고 있는 절대 권한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축도권입니다. 축도라는 것은 말 그대로 복을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왜 복을 빌어주는 기도가 목사만 행사할 수 있는 권리라고 주장합니까? 축도의 의미를 기독교 백과사전에서 찾아 봤는데, '목사가 예배 시간에 회중을 위하여 드리는 축복 기도로서, 보통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있는 말씀을 외운다'라고 되어 있으며, 이 축도 때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오래 전부터 내려온 관습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축도를 가장 엄숙한 순서로 인정한 나머지, 사제는 예복을 입고 이를 선언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축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르치신 기도, 도고, 감사 등의 기록은 있으나 축도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6장 28절 말씀!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은 당시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현대교회 목사들을 비롯하여 일반 성도 모두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지금과 같은 축도 개념으로 잘못 풀어 버리면, 복을 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목사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축복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목사가 주장하기를, 만일 일반 성도가 축복을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라고 말들을 하는데, 이는 성경과 전혀 다르게 어긋난 왜곡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축복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축복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일종의 계급주의적 차별 의식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서, 교회 내에 목사. 장로. 집사. 성도라는 계급을 만들어 놓고, 그 중에서 목사라는 계급의 권위를 위한 일종의 권력 상징으로서 규정한 것인데, 이를 창조주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겠습니까?
그런 권력 앞에 어떻게 감히 일반 성도가 교회 재정에 관하여 떳떳하게 요구할 수나 있겠습니까? 권리가 어떤 특정 집단에게만 허용될 때, 그 권리는 권력이 되고 맙니다. 그 권리가 목사라는 직분에게만 허용이 되어진다면 이것은 종교 권력의 도구로 변하게 됩니다. 목사가 전도사를 대할 때에도, '감히 축도권도 없는 주제에!'라고 내세울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축도라는 것을 하는 목사에게 주어졌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더구나 손을 높이 들고 하는 축도는 성도들로 하여금 목사가 손을 든 순간, 하늘로부터 복이 떨어질 것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절묘한 연상 장치로 보일 것입니다. 비슷한 모양은 비슷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믿게끔 만드는 심리적 작용을 만들어 냅니다. 그저 눈감고 하는 것보다는 손을 들고 하게 되면, 목욕탕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모양을 연상하게 됨으로서, 심리적 작용에 의해 복이 쏟아질 것 같은 믿음이 생성되도록 하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했고, 이삭이 야곱에게 했고, 야곱이 아들들에게 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숱하게 행했던 축복 기도 즉, 복을 비는 기도를,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목사를 제외한,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할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에는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백성을 축복하는 권한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셨습니다. 레위기 9장 22절 23절 말씀과 민수기 6장 22절에서 27절까지를 참고하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목사들은 이것이 오늘날 강단에서 목사들이 하는 축도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축복기도는 대제사장의 중보 기도였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였고,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히브리서 3장 1절과 4장 14절을 참고하십시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을 참고하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시며,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한 대언자이십니다. 히브리서 6장 19절 20절과 디모데전서 2장 5절 그리고 요한일서 2장 1절을 참고하십시오!
오히려 그래서 우리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성도나 모두 주 안에서 다같은 형제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2장 11절및 마태복음 23장 8절을 참고하십시오! 이와 같이, 아론의 대제사장적인 축도권에서 그 기원을 찾아 축도를 한다면 누구라도 감히 쉽게 축도를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8절 말씀에 나오는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축도의 모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시편 63편 4절의 손을 들고 기도하던 관습에 따라 말한 것 뿐이고, 다투기보다 서로 기도하기를 힘쓰라고 하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참고로,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던 경건한 풍습이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서신서 끝에 있는 '축원'을 축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절, 고린도후서 1장 2절,
갈라디아서 1장 3절, 계시록 1장 6절, 로마서 1장 7절, 사무엘하 15장 20절, 계시록 1장 5절, 룻기 2장 19절 말씀을 참고하십시오! 결국 그렇다면 목사만이 축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습니다. 이는 편지의 끝인사로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누구나 편지로나 말로나 서로를 축복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번역성경 말씀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가 현대교회 목사 축도권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는 점입니다. 또, 유다서 1장 24절 25절의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말씀은 예배시의 축도가 아니라, 서신의 일반적인 끝인사에 해당합니다. 서로를 위한 축복 기도는 모든 성도에게 해당한다고 봅니다. 세상 사람들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새해에 복많이 받으라고 빌어주는데,
성도 간에 축복하는 일이 어떤 직분에 의해서 제한받는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특별한 위치에 있는 바울이 자기가 세운 고린도 교회를 위한 축복이었고 또 오늘날 개교회에서 행해지는 축도를 목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자주 흔하게 남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목사의 축도 기원은 가톨릭 신부의 강복을 흉내내어 만든 전혀 성경과 다른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일은 부활 후 승천하실 때 단 한 번 뿐이었습니다. 목사 여러분은 이를 아십니까? 누가복음 24장 50절에서 53절까지의 말씀!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아멘. 멜기세덱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14장 19절 말씀!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멜기세덱은 인류 최초의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가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은 단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삭도 야곱을 축복하였으나, 에서는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7장 34절에서 38절까지를 참고하십시오! 에서는 동생에게 축복을 다 빼앗긴 후에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니까?'라고 하면서 아버지에게 자신이 받을 복을 애원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27장 38절을 참고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입장에서 야곱에게 또 다시 축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성도들을 위한 목회적인 특별한 위치에서 자기 교인들을 위해 축복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자주 축도를 해댈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사가 은퇴할 때나, 혹은 목사가 죽을 때나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매 주일마다 자기 몸에서 무슨 복(福)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양 손을 들고 강복 의식을 행하는 것은 자판기의 돈만 넣으면 쏟아져 나오는 커피처럼 자주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냐?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신명기 18장 22절 말씀!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만약, 축도가 복을 비는 기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회중에게 '간절히 축원하노라!'라고 한다면, 복을 비는 사람이 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것은 종교적인 지위를 이용해서 자신 스스로를 격상시키려는 '사단의 무서운 함정'인 것입니다. 결단코 비는 자는 자신의 권위를 포기해야 합니다. 기도의 첫번째 태도가 구하기 위해 높은 자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또, 만약 축도가 기도라면 그것은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빌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3절에서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을 부탁하셨는데, 목사는 왜 이런 중요한 원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복을 비옵나이다. 아멘.'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면 가장 성경적임에도 말입니다. 또, 축도가 기도라고 하면서 그 기도를 꼭 가톨릭처럼 예복을 입고 해야만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물론,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사복을 입고 축도하는 목회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사복을 입는 경우에는 주기도문을 암송시키는 것으로 갈음합니다. 도대체, 목회자 가운을 입고 하는 기도와 벗고 하는 기도의 구별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또, 축도가 기도라고 하면서 그 기도를 대예배나 공예배와 같은 정해진 시간에만 하도록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의식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에 따라 기도는 때와 장소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기도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축도가 복을 비는 기도라면 기도할 수 있는 자와 기도할 수 없는 자의 구별이 있는 까닭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위엄과 권위와 자만의 태도로 기도한 바리새인보다도,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면서 겸손히 기도하는 자가 의롭다함을 얻고 돌아간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을 참고하십시오! 일반적으로 지금껏 목사들에 의해 쇠뇌 당하고 학습당해서 의식화된 신자들은 축도를 복받는 수단으로 곡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도를 한 그 목사에 의해서 복이 좌우되는 것처럼 오판하며 맹신하고 있습니다. 현대교회 소경 목사들의 죄가 가장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도는 비복음적인 용어이고 하나의 의식행위 밖에 안됩니다. 이는 로마 가톨릭에서 신부의 교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며, 성도들에게 기복신앙을 갖도록 만들어 낸 발상에 불과합니다. 본래 축도를 베네딕숀(Benediction)이라고 하는데, 이는 신부와 평신도를 구분하기 위해 베네딕트 신부가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본 따서 만든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는 개신교가 이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장말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축도 등 온갖 교회 목사 교리를
자기네들 각자 교단 헌법에다 집어 놓고 성도들이 덫에 걸려서 맹종하도록 시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이상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교권이라는 자만심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분명히 목사는 그 신분에 있어서 교회의 회중들보다 높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앉아 있는 위치보다 조금 높게 한 강단에 있다고 해서 높지 않다는 것을 아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목사까지를 다 포함하여 죄인으로서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를 힘입어야만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예수 한 분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어떤 인간의 대리자를 세우고 또 그를 통하여 복을 받으려는 성도들의 태도는 절대로 성경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창조주 예수님께서 목회자를 더 의롭게 하셨다거나 목회자가 아니라고 해서 덜 의롭게 하는 분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주일 학생예배가 끝난 후에 한 학생이 교육 전도사에게 질문했습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은 예배 끝날 때
손들고 하는 기도를 왜 안 하세요? 어른 예배 때는 주기도문 대신에 목사님이 손들고 축복기도 하시던데요. 우리 어린이 예배도 그렇게 해주세요. 네?' 그러자 전도사가 난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건 목사님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안 된단다.'라고 답변해 주었다고 합니다. 목사와 전도사가 급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 아이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옆에 있던 한 아이가 끼어 들었습니다. '어? 아닌데요? 영국에서는 모두 다같이 하던데요..?' 그 아이는 몇 년 간 영국에서 살다가 얼마 전 한국에 돌아온 아이였습니다. 영국에서 누구나 할 수 있었던 것을 한국에서는 목사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아이에게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거기에서는 직분도 없는 어린이들까지도 다같이 했던 축도였던 것이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축복이라는 개념과 복이라는 개념이 아무 생각없이 혼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다!' 이런 말을 아무 생각없이 누구든지 오남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축복하실 수가 없습니다. 축복은 복을 비는 것인데, 말 그대로라면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복을 주라고 빌고 있다는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복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축복 즉, 복을 주라고 누군가에게 간청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기도하다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말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바른 표현은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인간은 복을 비는 것 즉 축복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아멘입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4절 말씀!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아라.' 역시 동일한 맥락의 말씀입니다. 과거 초대교회 때의 핍박이나 또 중세 때의 기독교인들의 핍박, 또 현세에도 어디 목사들만 핍박을 받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굳이 목사들에게만 한정하여한 말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핍박하는 자까지라도 축복해 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하는 기도는 누구나 다 하는 것이며, 목사들에게만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목사에게만 축도권이 한정됐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세계 대부분의 교회가 비성경적인 십일조를 없애 버린 것처럼, 세계 거의 모든 교회가 일반 모든 성도에게도 축도권 뿐만 아니라, 당회장권까지도 열어 놓고 있습니다. 특히, 한가지 특별한 사항은 이런 교회에서는 분배 원칙도 성경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가령, 교회 담임 목사의 식구 수가 3명이고 그 교회 나이 어린 전도사 식구 수가 4명이었을 때, 사례비 개념의 봉급도 식구 숫자에 따라 담임 목사보다 오희려 나이 어린 전도사가 식구 1명이 더 많기 때문에, 더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축도를 주로 예배의 폐회 순서에다 넣고 선언함으로써 끝맺음을 합니다. 그러나, 축도가 예배의 끝맺음이 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끝나는 개념이 없고 생활 속에서도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후에 만찬으로서 그 모임을 마무리하고
서로 교제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 말씀을 유추해 볼 때, 초대교회 모임은 말씀을 강론하고 떡을 떼며 교제한 후에 헤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배는 끝나는게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는 성도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같이 서로 서로에게 열심히 마음껏 축복해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하심이 당신과 함께'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끝부분에 '있을찌어다'라고 함으로써, 괜히 언어적인 위엄을 드러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역자 여러분! 복을 빌어주는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시면 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을 끌어다가 사도 바울의 편지식 설교문 끝인사를 흉내낼 필요도 없는 것이고, 가톨릭의 강복을 모방하여 가운을 입고 두 팔을 높이 쳐들고 접신 무당처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해서 창조주 예수님께서는 듣지도 응답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 목사가 입는 가운을 포함해서 현대교회 예배 끝말미의 축도 폐기하는 일에 목사의 결단이 있기를 빕니다. 내친김에, 묵도. 묵도송, 사도신경 등의 기존 예배 순서 의식을 최대한 없애고 찬양과 말씀만 나누는 것을 영과 진리의 예배로 인지하는 개혁 교회로 발돋음한다면 그 목사와 회중에 대하여 창조주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올바른 참예수 복음만을 성경대로 믿기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받아서 전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매진한다면, 비록 성도들이 많이 떠나는 아픔이 있더라도, 교단 교파를 탈퇴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감당하기만 한다면 바른 성경교사로 당신을 세워주실 것입니다. 여기에는 장로. 집사. 성도가 포함됩니다. 만약, 지금 이대로가 좋사오니!식으로 나간다면, 부활 천국 영생을 얻을 자가 별로 없습니다. 노아 가족 8명과 롯의 가족 3명을 기억하십시오!
끝까지, 청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